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록초록한 표지가 싱그럽다. (그것과는 별개로 요즘 책 표지 디자인은 뭔가 새로운 느낌이 별로 없다. 한동안 초록색 표지가 넘쳐나더니...좀 아쉬운 마음이 든다). 


5월 들어 확실히 짙은 초록이 많아졌다. 5월은 푸르구나... 아이들도 청소년도 딱 그 시기의 풋풋함과 푸르름을 안고 있는 듯하다. 난 꽤 열려있는 어른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 또한 나의 오만이었음을 요즘 자주 느낀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고(오히려 앞서가려고) 열심히 쫓아다녔지만 확실히 낄 수 없는 세대의 차이는 있었다. 청소년 소설을 읽다 보면 요즘 아이들의 생각을 읽거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들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어린이용 도서를 제법 많이 읽었지만, 아이가 청소년이 되면서는 많이 읽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에게 책을 권하기 전에 먼저 읽어보는 편이다. 그래야 아이의 생각을 물어볼 수도 있고 같이 주제를 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어쩌면 내 마음은 동경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고백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정후가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만약 내가 공주님이 되길 꿈꾸는 일곱 살짜리 어린애였다면 일말의 기대 정도는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열일곱의 나는 그렇지 않다. 정후는 내가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정후는 '모두의 한정후'이고 나는 그냥 1학년 9반 25번이니까. 이건 괜한 자기비하도 아니고 자존감 부족도 아니다. 나는 내가 조금 시시하고 재미없긴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더는 공주님이 되길 꿈꾸지 않는, 아주 보통의 고등학생일 뿐이다. p.20


보통의 고등학생. "조금 시시하고 재미없긴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이수현이라는 아이가 주인공이다. 수현이는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닌 아이는 아니었다. 자기 스스로는 앞서서 행동하지 못하고 용기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친구의 아픔을 모른체 하지 않는 따뜻한 아이였다. 


혼자있고 싶으면 적당히 거리를 두면될텐데, 굳이 반감을 사는 행동까지 하는 것이 신기했다. 어떻게 보면 그건 고요 같은 아이들이 가진 특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외국 드라마에 나오는 시니컬한 여자 주인공처럼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어도 초라함이나 쓸쓸함이 느껴지지 않는 아이들, 외로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혼자인 모습이 더 특별하고 멋지게 보이는 아이들. p.22


고요가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 아닌 따돌림을 받고 있다. 아이들은 어쩌면 미워서가 아니라 나와 다르다는 느낌, 뭔가 특별한 것 같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을 수도 있다. 거부당한 자존심과 마음의 상처가 암묵적인 동의를 이끌어낸다. 정후나 우연이, 그리고 수현이가 고요의 책상을 미리 치우거나 신경을 쓰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그러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공론화하지는 않는다. 그저 고요가 혼자 있거나 더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도록 배려할 뿐이다. 


오늘 일을 장난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이건 명백한 괴롭힘이었다. 아이들은 고요가 먼저 미움받을 행동을 했다고 말한다. 미움받을 행동을 하면 괴롭혀도 괜찮을 걸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면 괴롭힐 권리가 주어지는 걸까. p.59


MARE TRANQUILLITATIS : 고요의 바다를 뜻하는 라틴어


수현이는 우연이가 보던 인터넷 아이디를 떠올리며 영어 단어를 쳐보다가 자동완성단어에서 고요의 바다를 찾는다. 고요의 바다는 달의 수많은 바다들 가운데 하나로 1969년 7월 20일, 달에 도착한 닐 암스트롱이 인류의 첫발을 내디딘 곳었다. 고요의 바다는 누구의 계정일까? 미술 시간에 달의 뒷면을 그렸던 이우연이 고요의 바다일까? 달이 그려진 이어폰 케이스를 선물한 고요가 고요의 바다일까? 


나는 고요의 바다에 팔로우 요청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이수현이라는 게 드러나지 않는 공간에서라면 두려울 것도 겁이 날 것도 없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손을 뻗을 수 있다. 설령 거절을 당할 지라도 전혀 상처 받지 않는다. p.70


마치 달의 뒷면과도 같은 인터넷 공간. 보장된 익명성은 그 누군가로부터 거절당할 위험도 마음의 상처를 입을 일도 없을 것 같다. 아이들은 현실에서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으로 인터넷 공간에서 새로운 자신을 창조한다. 


그렇게 수현이는 the_eagle_has_landed. 달 착륙선 이글이 무사히 착륙했을 때 닐 암스트롱이 인류에게 전했던 말, 저 문장을 계정 아이디로 만들고 고요의 기지에 무사히 안착한다. 


그곳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계정 moon_of_michael_collins, 아폴로라는 이름의 검은 고양이 사진이 있는 계정이다. 아폴로 뒤로 보이는 익숙한 공원 풍경은 수현이의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달빛공원. 수현이는 마이클 콜린스가 아폴로 11호의 조종사였다는 것을 알아낸다. 


아폴로 11호의 탑승자는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그리고 마이클 콜린스까지 모두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마이클 콜린스는 달에 착륙하지 못했다. 사령선의 조종사였던 마이클 콜린스는 암스트롱과 올드린이 달에 발자국을 남기는 동안 우주선에 홀로 남아 달의 궤도를 비행했다. 그는 48분 동안 지구와도 교신이 끊긴 채, 오롯이 혼자서 달의 뒷면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달을 눈앞에 두고도 발을 내디딜 수 없었던 마이클 콜린스. p.78


어쩌면 이 소설 속 아이들은 모두 달에 도착하지 못한 채 달의 뒷면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모두 달을 향해 날아가고 있지만, 대부분은 달에 발자국을 남길 수 없다. 아이들은 현실 속의 자신을 숨긴 채 익명의 공간에서 우정을 쌓는다. 현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대면대면하게 바라보는 관계지만, 익명의 공간에서는 그들 사이에 벽이란 없다. 진짜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의 속마음을 드러내보여도 상처입지 않을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친해지고 좋은 친구라 생각해도 만나지는 말자고 한다. 


우연이가 사라진 날 우연이의 흔적을 근거로 해서 수현이가 해운대 바닷가로 찾아간다.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점점 진짜 자신을 드러내놓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로 침잠해들어가는 것 같다. 몸으로 부딪히며 서로를 알아가던 때와 다르다. 아이들은 드러내보이고 싶지 않은 것도 많고 더이상 자신의 삶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라며 밀어낸다. 하지만 그들도 어느 순간 "나는 네가 궁금해졌어"라고 마음을 전하게 된다. 


수현이는 친구의 마음을 살피기도 하고, 부당한 것에 용기내어 나서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한다. 수현이 친구 지아는 수현이와 찰떡이다. 둘 사이의 우정은 마치 어렸을 때 내 친구들을 보는 느낌이다. 수현이와 지아 사이의 우정처럼 고요와 우연이 그리고 반 친구들 모두 그런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책을 덮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배가 꾸르르
이와타 노부코 지음, 하타 코우시로우 그림, 문영은 옮김 / 사슴똥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가 어렸을 때는 이런 류의 그림책을 제법 많이 읽어줬었다. 아무래도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궁금해하는 나이였고 엄마의 지식으로는 설명이 불분명하기도 했기에 어린이용 지식그림책은 활용하기 꽤 좋았다. 같거나 비슷한 주제의 책들이 계속 출간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아이들에게는 이런 주제가 관심을 끄는 주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 도서관에 도착한 이 그림책도 그런 주제를 품고 있다. 


​노랑나비 유치원에 다니는 동이는 선생님과 수수께끼 놀이를 하던 중에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한다. 꾸르꾸르 꾸르르르~~ 배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나고 똥을 누구 싶어졌지만, 친구들 앞에서 화장실에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다. 더이상 참을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렀을 때 나나가 손을 번쩍 들고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말한다. 동이는 구사일생으로 나나와 함께 화장실에 가게 된다. 


화장실에서 나온 아이들 앞에 장장할아버지가 나타나고, 아이들은 장장 할아버지와 함께 '장의 세계'로 들어간다. 배에서 꾸르르 소리가 난 이유도 알아보고 똥이 마렵게 된 이유도 알아보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장장할아버지와 함께 음식물이 지나가는 식도>음식물을 주무르고 녹이는 위>털이 있는 꼬불꼬불 소장>똥을 만드는 대장을 거쳐 뿌우우웅 방귀와 함께 몸밖으로 나온다. 


몸 속 여행을 마친 아이들은 장에 대해 조금 더 배우게 되는데 광장에 모여 있는 동물들 중에 장이 가장 긴 동물도 찾아본다. 동물들의 장의 길이가 왜 다른지 장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 본 다음 나쁜 균을 줄일 수 있는 장튼튼 체조도 배워본다. 


배에서 나는 소리가 왜 나는지, 몸 속의 장은 어떤 일을 하는지 자연스레 알게 되는 그림책이다. 간단한 설명과 그림이 지식을 알려주는 형태로 유치원생들이 관심있게 볼만한 내용이다. 지식 정보와 함께, 아이들과 책을 읽으며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로는 자기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할까?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요구를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보면 좋겠다. 


덧붙임: 배가 꾸르르.....  원제가 무엇일까 생각하며 정보를 보다가, 이 그림책의 작가 이름이 잘못된 것 같다는.... AWATA Nobuko이니까 '이와타 노부코'가 아니라 '아와타 노부코'인 것이다. 상당히 실례가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럴 땐, 이렇게! - 어린이 고민 상담소
이태윤 지음, 김석주 그림 / 청림Life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 우연히 오은영 박사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일부러 찾아보는 편은 아니지만 채널을 돌리다보면 가끔 보게 된다. 프로그램의 장단점이나 오은영박사의 처방이나 진단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어쨌든 거기 등장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바가 많다.

아이들이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보면, 그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나 우려를 머쓱하게 만들 때가 많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러한 자기 고민을 털어놓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누구에게 이야기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을 알아주고 들어주고 이해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이상행동들을 계속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것 역시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며 정답이 아닌 것을 안다.)

나는 그럴 때,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나 라고 생각해본다. 내 고민이나 문제에 대해 즉각적인 대답이나 피드백이나 코칭은 돌아죄 않겠지만, 자기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흥분이나 화, 초조함과 불안 등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사람마다 아이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표현하는데 많이 서투르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고민 일기장'을 써보는 것은 작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코로나 이후 2~3년 가까이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스크를 벗고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현실 세계로의 전환은 아이들에게 큰 스트레스가 될 지도 모른다. 이럴 때 상대를 이해하고, 내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 그리고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의 고민 일기장 사용법

1. 아이에게 질문과 같은 일을 겪었는지 물어보세요. 없다면 이런 친구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세요. 그럼 말하기 힘든 자신의 고민을 친구의 일에 빗대어 솔직하게 적을 수 있습니다.

2. 글쓰기를 힘들어한다면 대화를 나누고 그것을 토대로 첫 문장을 대신 적어 주세요. 아이들은 부모님이 글 쓰는 과정을 보면서 글쓰기에 흥미를 붙이기도 합니다.

3. "또 다른 방법은 없을까?"하고 물어보세요. 행동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생각하면 고민 상황에서 창의적으로 해결하는 힘이 생깁니다.

4. 아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른다고 하면 “만약 친구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떤 말을 해 주고 싶니?” “어떻게 도와주고 싶니?" 하고 물어보세요. 아이와 가까운 친구를 예로 들면 아이가 상황에 몰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p.7)


이 책의 서두에는 [나의 고민 일기장 사용법]이 나오는데, 이것은 독자 대상이 양육자 또는 교사이다. 책 전체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쓰여졌는데, 딱 이 부분만 다르다. 이 사용법을 어린이들에게 알려주는 식으로 썼다면 어색하지 않았을텐데 아쉬운 부분이다.

이 책은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업시간, 학교생활, 내 마음, 친구 관계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예전같으면 당연한 것들조차 지금의 아이들이 힘들어하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펜데믹을 겪으며 대학생들도 학교 행사나 OT, MT 같은 공식 행사를 경험한 적이 없고 선배들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하는 실정인데 어린이들은 더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알려주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없을 수 있다는 가정을 당분간은 해야 할 것 같다.

책에서 예로 든 내용들은 저학년보다는 3학년 이상이 읽고 활용하면 좋겠다. 초등 저학년이라면 글로 쓰기보다 양육자나 교사가 대화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나의 고민 일기장에 내용을 작성한다.

예를 들어 "발표할 때 틀린 담을 말하거나, 친구들이 놀릴까 봐 걱정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1) 그런 적이 있다면 그때를 떠올리며 나의 마음을 써 본다. 2) 없다면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할지 써본다. 실제로 그런 경험을 했었다면 다시 확인해 보고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해야 할 지 연습할 수 있다. 없다면 그런 상황을 상상해보고 어떻게 할 지 생각해본다. 사실 두 번째 방법은 어린이들이 또래들이 주인공인 동화나 이야기 등을 많이 읽고 간접 경험을 할 때도 자연스럽게 익혀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책을 가까이하라는 것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고민을 어떻게 들어주어야 할지 고민하는 양육자와 아이가 이런 주제로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스스로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해봄으로써 생각도 정리하고 고민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나는 고고학자라고."

"누나가 슬픈 이유가 그것 때문이야?"

"슬프진 않아."

"내가 스스로를 우주비행사라고 생각하는데 한 번도 지구를 떠난 적이 없다면 우울한 기분이 들 거야. 평생 자기 동네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한 우주비행사가 어디 있겠어?" 올리버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실패한 우주비행사겠지." 아그네스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누나 말하는 게 꼭 우리 아동심리상담 선생님 같아."

"그 선생님도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이라 느낄 거야."

"나는 고고학자야" 또는 '나는 우주비행사야'라는 말로 스스로를 한정짓지 않으면 돼. 누나에겐 여러 모습이 있잖아. 우선 인간이고, 또 리빙스턴 씨의 직원이고, 미인이고………”

"고맙다."

"피터 팬을 멋지게 낭독할 줄 알고, 또 친절하고, 똑똑하고・・・・・・ 이게 다 누나 재능인걸? 그러니까 슬퍼하지 마." (p. 77)

하지만 달빛서점에서는 처음으로 정반대 현상을 경험했다. 런던에 있는 한 서점의 문턱을 넘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행위가 뭔가 특별한 일의 시발점이 되어준 것이다. 아그네스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리빙스턴씨의 책들을 통해 세상을 특별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그때까지 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하는 데 오 분도 투자하지 않았다는 것과 목성과 혜성p67의 독특한 궤도에 한 번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탐사선 로제타와 탐사 로봇 필레가 어쩌다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다는 게 놀라웠다. 이전에는 왜 한 번도 역사의 거울이나 마찬가지인 그림책의 매력과 에드워드의 서점뿐 아니라 아직도 도시의 특이한 구석구석을 물들이는 19세기 초의 낭만주의적인 향수에 주목하지 않았는지 스스로가 의아했다.

『템페스트』의 새로운 판본, 드레스덴 부인의 걱정과 고민, 올리버 트위스트의 논리적인 설명, 에드워드 리빙스턴의 영국인다운 냉철함을 접하며 그녀는 새로운 눈을 가지게 되었다. 전에는 세상이 회색빛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가진 뒤에야 비로소 반짝이는 색깔을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자그마한 싹에서 행복이 솟아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떻게 작은 서점 안에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이 다 모여 있을 수 있을까. (p.120)


아,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나의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렸다. 아그네스가 우연히 리빙스턴 씨의 달빛 서점에 들어선 것처럼, 어느 날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작은도서관에서 근무를 하게 된 그 시절이 떠오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여자 아이였던 나에게 서점은 여러 의미를 갖는 곳이기도 했다.

아그네스가 달빛서점에 가게 된 것은 우연이었을까? 우연이 맺어준 인연들이 마치 필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그런 필연 같은 우연을 만날 수 있을까? 올리버는 어린 아이지만 어린 아이답지 않은 성숙한 생각을 전달한다. 아그네스와 올리버가 나눈 대화는 그가 어린 아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서점을 찾아 온 손님들에게 책을 권하는 리빙스턴 씨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오래된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 당시에도 아주 조그만 단서 하나를 갖고 책을 찾던 사람들이 많았고 그 책을 찾아주는 일도 했었기 때문이다. 제목도 작가도 모르면서 이러이러한 내용이라는데 그런 책이 있냐고 묻는 일도 잦았다. 늘 책을 살펴보면서 훑었기 때문에 그런 작은 단서에도 불구하고 책을 찾아주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야 다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미래의 소망인 '작은 서점'을 어떻게 운영해볼까 하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돈 안되는 서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리빙스턴 씨의 달빛 서점처럼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어줄만한 그런 서점 말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읽는 내내 즐거울 수 있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꿈꾸는 다락방 타자기
피터 애커먼 지음, 맥스 달튼 그림, 박지예 옮김 / 더블북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맥스 달튼을 검색하다보니 막스 달튼으로도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세계적인 일러스트이며,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재해석한 작품이 주목을 받으면서 한국에서도 세 번의 전시가 열렸다고 한다. 아, 역시, 영화를 보지 않는 나는(영화와 관련된 정보에도 둔감한 편) 그래서 관심을 갖지 않았을 수 있겠다. 분명 부산에서도 전시를 했던 것 같은데... 


타자기를 본 적이 없는 친구들도 많을 것 같은데, 이 그림책은 오래전 사용했던 타자기를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내가 대학생이던 시절 타자기와 워드프로세서와 컴퓨터가 공존을 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워드프로세서도 제법 많이 사용했었는데... 어쨌든 지금은 보기 힘든 타자기이다. 


이 그림책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펄이라는 여성이 최신형 타자기를 구입했고, 그 타자기로 마틴 루터 킹 박사를 위한 글을 썼다고 시작한다. 20년이 흐른 후 펄의 딸 페넬로페도 이 타자기를 아주 애용했고, 타자기는 그때 무척 행복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당연하게도(^^) 페넬로페는 컴퓨터를 사게 되었고 오래된 타자기가 더이상 필요 없게되어 다락방 깊숙한 곳에 넣어두게 된다. 이렇게 창고에 들어간 물건들은 이사를 하거나 창고를 특별 정리하지 않는 이상 세상으로 다시 나올 일이 거의 없다. 이 타자기 역시 그런 세월을 보내게 된다. 


아마도 집안을 둘러보면 이런 물건들을 몇몇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쓰던 물건을 엄마가 물려받고 엄마가 쓰던 물건을 아이가 물려받는 경우 말이다. 요즘은 사실 타자기에서 컴퓨터로 획기적인 변화발전하는 경우 물려받기 어려운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최근 레트로감성이라고 해서 오래된 카메라나 오래된 그릇 등을 찾는 경우도 있으니, 거 물건들에 얽힌 사연들을 알고 보면 더욱 애착이 생기지 않을까? 


이 집 아이는 펭귄에 대한 글쓰기 숙제를 하기 위해 아빠의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고장이 나고 내일 당장 제출해야하는 숙제때문에 고심할 때 엄마가 오래된 타자기를 기억해낸다. 과연 이 아이는 엄마의 오래된 타자기를 잘 사용할 수 있을까? 


삼대에 걸친 다인종 가족의 하모니라는 책 표지 글은 이 그림책을 읽을 때 그다지 도움되는 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인종이라고 하였지만 굳이 다인종이라고 얘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림이다. 가족의 공간을 둘러보면 여기저기 붙인 사진 등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떠올려보게 되기도 한다. 그림을 보면서 여러 정보나 내용을 찾아내는 것은 아이들이 훨씬 잘한다. 벽에 걸려있는 사진 하나도 잘 살펴보면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