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 문학 작품에 숨겨진 25가지 발명품
앵거스 플레처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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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책읽기, 글쓰기, 그림책...이런 이야기를 다룬 책이라면 일단 사고 보는 게 '나'이다. 한때는 국내 작가들의 소설에 푹 빠진 적도 있고, 한때는 일본문학을 내도록 읽기도 했다. 전공 도서인 국어학과 국문학을 다룬 책, 실용 국어와 한국문화를 뒤지고 다닌 적도 있다. 최근에는 독서와 그림책 등을 다룬 책을 주로 읽는다.


어지간해선 벽돌책도 마다하지 않는데 특히 그 내용에 푹 빠져 읽을 때는 7~800 페이지의 분량도 많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책이 그랬다. 앞서 읽었던 제인 오스틴의 맨스필드파크에 이어 또 벽돌책이었다.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하자 묘한 재미가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게 하였다.


이 책은 문학에 숨겨져 있는 25가지의 발명품을 하나하나 소개한다. 문학의 존재 이유를 이렇게 쉽게 알려줄 수 있을까? 문학의 원작자라고 칭할 수 있는 최초의 발명가인 엔헤두안나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테크놀로지를 끌어온다. 테크놀로지란 문제 해결을 위해 인간이 고안해낸 모든 것을 뜻한다. 수많은 발명품들이 우리의 물리적 환경을 개선해왔다. 그렇다면 문학은 어떤 점에서 테크놀로지란 말인가? 저자는 인간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문학이 풀어나간다고 본다. 인간의 뇌가 제기하는 온갖 문제와 감정을 다룬다.


"창조물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외부로 눈을 돌렸지만, 문학은 우리 자신으로서 살아남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내부로 눈을 돌린다."(p.24)


무슨 주제를 다루더라도 이 사람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껴가진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직접 작성하지는 않은 걸로 보이지만 여기에서 발굴한 첫 번째 발명품이 있다. 바로 플롯 반전이다. 플롯 반전의 밑바닥에는 '확장'이 있다.


'확장은 플롯이나 캐릭터, 이야기 세계, 서술 스타일 또는 스토리의 다른 핵심 요소에서 일반적 패턴을 취한 다음 그 패턴을 확대하는 것 '(p.36)을 말한다.


확장은 모든 문학의 근저에서 놀라움, 황홀감, 경외감을 일으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비극에서 카타르시스라고 부르는 치유 과정을 강조한다. 카타르시스는 건강에 좋지않은 것을 정화한다는 뜻으로 두려움을 정화한다. 그리스 비극의 치유 효과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자기 효능감', 즉 외상 후 두려움을 잘 처리해서 극복할 수 있다는 내적 확신이 있을 때 더욱 효과적이다.


제1장부터 저자는 문학 속에 숨겨진 발명품을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호머의 《일리야드》에서는 용기를 불러온다.


'용기는 우리가 요즘 서술자라고 부르는 문학 테크놀로지와 함께 시작되었다. 서술자는 스토리 뒤에 숨겨진 마음을 가리킨다."(p.58)


스토리텔링은 구술되었기 때문에 어조와 취향이 드러난다. 일인칭 화자인 나의 목소리로 전하는 시에서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문학은 어떤 스토리든 튀해서 사랑 이야기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p.96)


공감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는 기분이다. 우리의 공감력을 개선할 도구로는 '사과'가 있다.


'사과는 잘못을 인정하고 유감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우리 뇌가 사과를 받아들이면, 분노와 피해의식 같은 부정적 감정은 줄어드는 반면 신뢰와 사랑 같은 긍정적 감정은 늘어난다.'(p.113)


풍자가의 발명품은 세 가지가 있다. 패러디, 암시, 아이러니가 그것이다. 풍자는 원래 남을 비웃으려고 고안되었지만 우리 자신을 풍자하면 기분이 고양되고 통증도 억제할 수 있다. 남들을 풍자하면 우리 자신을 끌어내려 불안감과 심장마비로 몰아간다.


'흥미진진한 논픽션은 또다른 수수께끼이다. 논픽션 자체는 스릴러와 반대된다.교과서나 교육 매뉴얼, 또는 궁금해서 펼쳤다가 지루해서 금세 덮어버리는 책들의 영역이다. 그런데 미래에서 들려준 이야기와 결합하면'(p.163) 우리의 심장을 고동치게 할 수 있다.


스트라파롤라는 반전의 감정적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상정했다. 하나는 반전이 부여하는 행운을 확대하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았다'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로 줄폭시킨다. 또 하나는 왕실 신부를 불완전하고 무능하게 그릴 수 있다. '그녀를 공주로 만든 것은 미덕이 아니라 우연이었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순전한 우연이었어.'(p.203~204)


샤를 페로는 동화의 반전을 걱정하였다. 나쁜 스토리텔링으로 무책임한 행동을 유발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비논리적 스토리텔링에 크게 신경쓰지 않으며, 운에 대한 믿음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햄릿》은 슬픔과 이룬 타협의산물이요, 슬픔을 이겨낸 치유의 산물이었다.(p.220)


세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음모 없는 플롯을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애도뿐만 아니라 상실의 아픔에서 비롯된 눈물도 동시에 처리한다. 복합적 슬픔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정신적 장애를 유발한다. 세익스피어의 극에서 복합적 슬픔의 원인은 죄책감이다. 햄릿은 우연한 깨달음읠 결과로 죄책감을 없애게 된다. 햄릿의 치유 역시 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역설은 산문 장르의 하나로 교묘한 주장으로 논리를 뒤덮는다. 역설은 본래의 진실을 철회하게 할만큼 강력하거나 설득력이 있지는 않았다. 대신 역설은 반대되는 진실에도 우리 마음을 열게 할 만큼의 설득력이 있었다. 문학적 역설을 뒤집는 대신에 진실을 두 가지로 확대한다.


이 책에서 나는 그동안 읽은 여러 책을 다시 만났다. 그때는 잘 몰랐던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것도 많다. 물론 저자의 주장이 모두 타당한 것은 아니지만, 문학의 목적, 존재 이유를 하나하나 따라가다보면 묘하게 이끌리는 점이 많다.


제인 오스틴이 구사하는 자유 간접 화법이 무엇인지, 메리-셀리가 아드레날린으로 맥박을 고동치게 하고 코티솔로 눈을 이글거리게 하여 우리의 스트레스를 나쁜 괴물에서 착한 괴물로 전환시키는 것을 본다. 조지 앨리엇은 실패를 치유할 시도로 감사 테크놀로지를 개선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 루이스 케럴의 '좋아, 그래서' 스토리, 소설의 독백, 재발견까지 다양한 문학적 발명품은 우리의 뇌가 하는 질문과 호기심을 풀어나간다.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은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만,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책에서 다룬 문학적 발명품들이 거의 다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책의 각 장의 마지막에는 문학발명품을 즐길 수 있는 여러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동안 읽은 책이 좀 늘어서 이 목록 중에도 제법 있었다.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을 선정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제목은 익히 알지만 읽어보지 못했던 책을 계속해서 읽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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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7-19 1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원서를 읽고나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소개하는 책을 다 읽지는 못하니까, 이 책에서 소개하는 내용을 읽고 다시 원서를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잘읽었습니다.
하양물감님, 더운 하루 시원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하양물감 2022-07-20 0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읽은 책일 때 더 이해가 잘되었어요. 앞으로 읽을 책도 그럴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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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인간 - 진짜 인간으로 나아가는 인문학적 승진 보고서
장재용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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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았습니다*

책을 덮은 후 나의 첫 감상은 글쎄, 저자 말대로 살기가 어디 쉬운가? 그렇게 살면 나도 내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행복하다고 할까? 아니, '남'은 둘째치고 '나'는 행복할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저자가 자신의 꿈을 쫓아 살고자 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저자가 꿈을 쫓는 동안 누군가는 자신의 꿈도, 시간도, 자유도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저자의 의견에 공감하거나 동의할 수 없었다.

저자는 "나는 회사 업무와 자기 성장을 연결 짓는 세상의 말들을 이젠 믿지 않는다."(p.49)라고 말한다. '반복되는 업무는 지겹고, 누군가 시켜 하는 일은 굴욕적인 것이어서 매일 아침 일터로 향하는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하루를 패배하며 시작하는 월급쟁이에게 노동은 양가적이다.'(p.57)라고 말한다.

모든 월급쟁이들이 매일 가기 싫은 회사에 억지로 끌려가듯 생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다. 나는 월급쟁이지만 회사에 가서 만나는 사람이 반갑고, 하는 일이 즐겁고,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뿐만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고자 애쓰는 시간을 즐긴다. 내가 좋아하는 취미를 활용해서 회사 직원들과 함께 나누기도 한다. 월급쟁이의 애환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저자는 회사에 휴직계를 내고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랐다. 휴직계를 내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던 모습은 일반적인 우리 모습과 다르지 않다. 사직까지 할 마음으로 휴직계를 냈지만 다행히도 휴직이 받아들여졌고, 오히려 회사홍보팀에서는 그것을 회사홍보용으로 활용한다.

그래서 아마도 저자는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회사인간으로 살지 마라. 자기 꿈을 쫓아 한번 움직여봐라. 마치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했지만 아무 문제 없지 않나? 라고. 정말 그럴까? 회사에서는 아마도 '당신'이 비운 두 달을 위해 업무 분장을 하고 대안 마련을 하느라 분주했을 것이고, 그런 손해를 감수하면서 휴직을 허용했으니 '우리 회사 일하기 좋은 회사'라고 홍보라도 해야겠기에 당신을 이용했을 것이다. 결국은 당신도 '회사인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닐까? 그리고 집에서는 어떤가? 가족과 상의는 했을지, 휴직이 아니라 사직이 되었을 경우도 충분히 고려한 것인지 모르겠다. 가족과 함께 세계여행을 다녀 온 사람들이 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을 응원한다. 휴직은 아니었을테고, 가족이 모두 동의하고 움직였을테니..

저자는 회사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자들의 답을 들려준다. 철학자들의 사유를 통해 회사인간은 '자유를 잃은 노예'이며 '삶의 모든 결정에서 차선을 택한 자들'이라 말한다. '최선'을 선택할 수 없는 일은 무수히 많다. 그런 과정에서 차선을 선택한 것이 잘못일까? 저자는 쾌쾌묵고 오래된 철학자들의 사유를 인용하면서, 죽은 자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 탐탁치 않다고 말한다. 책의 내용 절반이 철학적 해석에 할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회사인간'에서 '독립'하고픈 마음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나는 '노예'근성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월급쟁이들이 '아이히만'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다른 회사는 어떤지 모르겠다. 시간당 생산성을 향상시켜 근무시간을 줄이고, 국가에 해주지 못하는 것은 회사 복지 제도를 통해 보완하는 등 '회사'도 많은 변화를 했다. 그런 흐름에 발목을 잡는 '제도'가 있다면 개선해나가는데 작지만 힘을 보탤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사회에서 일하지 않는 자가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흔치 않다. 나의 노동을 폄화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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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가 슬금슬금 북극곰 이야기샘 시리즈 6
이가을 지음, 허구 그림 / 북극곰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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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미나다. 도깨비의 형체를 특별히 정해 놓지 않아서 그림으로 남은 것도 찾기 힘들다고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도깨비의 모습은 일본의 오니라고 하니 그것도 알아두면 좋겠다.


도깨비들은 사람들이 사는 곳 가까이에 살았다고 한다. 사람들과 아주 많이 친해지고 싶어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까? 도깨비들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것을 보고 하느김 같다고 여겼을 수 있다. 그들은 그냉 생겨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모습을 드러내고 다닐 수 있는데 도깨비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 안되었다. 그냥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데 도깨비는 무엇을 할 수는 있지만 무엇을 가질 수는 없다. 이런 저런 특징을 가진 우리 도깨비들도 사람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게 뭐냐면 [사람을 도와주되 골려주면서 도와줘야 하고 골려 주되 다치게 해서는 안 되고 골려 주면서 도와줘서 어떤 사람이 깜짝 놀라 "이게 뭔 도깨비 조화 속이랴?"라고 하는 말을 천 번을 들어야 한다.](p.13)


하나밖에 모르는 도깨비 하나는 하나만 아는 도깨비다. 돌쇠도 하나밖에 모르는 아이다. 하나밖에 모르는 도깨비 하나는 돌쇠네 헛간에 자리를 잡는다. 하나밖에 모르는 도깨비는 돌쇠가 이쁜 돌멩이를 가지고 와서 헛간에 두는 것을 보고 돌쇠가 가져오는 것들을 한가득 가져와서 헛간을 채운다. 하나밖에 모르는 도깨비는 계속해서 돌쇠나 헛간을 채워놓는데... 아, 어쩌면 저렇게 물건을 모아다 놓는 것이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랑 겹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집에도 도깨비 하나 있으면 좋겠네. 대장간 도깨비 뚝딱이도 비슷한 이야기이다.


씨름꾼 도깨비 얘기는 도깨비 얘기 중에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아닐까. 씨름을 좋아하는 도깨비와 밤새 씨름을 하다 골탕을 먹는 이야기이다. 때로는 빗자루와 싸우기도 하고 이 이야기처럼 암소를 빼앗기기도 한다. 밤에 어슥한 곳을 걸어갈 때 말 거는 도깨비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자고~~


사람이 되고 싶은 물도깨비는 이런저런 물건을 모은다. 혹시 잃어버린 물건이 있다면 언젠가는 물도깨비가 두 배로 돌려주러 올지도 모른다. 도깨비 이야기를 읽다보면 엣날에는 밤 새는 줄 모르고 즐겁게 들었을 것 같다. 지금이야 도깨비 하면 '공유'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장난을 치는 도깨비 하나.... 내 곁에 있으면 참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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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필드 파크 시공 제인 오스틴 전집
제인 오스틴 지음, 류경희 옮김 / 시공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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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의 제인오스틴 전집을 사놓고 겨우 오만과 편견 하나 읽었다. 그 외 다른 책은 줄거리 정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냥 책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독서동아리에서 읽을 책을 정할 때 일부러 이 책을 추천했다. 언젠가 읽으려고 사 놓은 책을 읽기 위해서. ^^


쉽지 않았다. 우선 778페이지나 되는 책인데다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 읽기가 좀 더딘 편이다. 감정 이입도 잘 하지 않는 편이라서 더 그런 것 같다. 당연히 주인공인 패니와 에드먼드에게 집중을 하겠지만, 나는 오히려 크로포드 남매에게 더 눈길이 갔다.


"결혼 문제에 관해서라면 늘 그런 게 아니란다. 사랑하는 메리."


“결혼 문제에서 특히 그래요. 지금 말하고 있는 그 두 사람의 결혼 운에 대해서는 적절한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요, 친애하는 그랜트 부인, 결혼할 때 기만당하지 않는 사람은 여자건 남자건 백 명 중 한 명도 안 된답니다. 앞으로 제가 처하게 될 입장에서 보면, 정말 언제나 그렇게 보여요. 결혼이라는 것이 모든 거래 중에서 상대에게 가장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가장 정직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거래라는 점을

고려해보면요."


“저런! 너 런던의 힐 거리에 살면서 결혼에 대해 정말 잘못 배웠나 보다."


"돌아가신 가엾은 숙모의 결혼 생활은 분명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직접 관찰한 것들만 근거해서 말한다고해도, 결혼이란 책략을 쓰는 작전 같은 일이에요. 결혼하면서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인척 관계에서 뭐라도 한 가지 득이 있겠지, 혹은 상대방이 교양과 훌륭한 성품을 갖고 있겠지 하고 철석같이 믿었다가, 자신이 완전히 기만당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래서 그 정반대의 상황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을 제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게 사기가 아니고 뭐겠어요?"


"얘, 그 생각에는 틀림없이 상상이 어느 정도 가미된 것 같구나. 미안한데 네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어. 내가 장담하는데 너는 절반밖에 못 보고 있어. 안 좋은 면은 보지만 위안이 되는 면은 못 보고 있다고. 어디든 사소한 마찰이나 실망은 있는 법이야. 그리고 우리는 모두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경향이 있고. 하지만 그렇더라도 한 가지 행복의 계획이 실패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계획 쪽으로 눈을 돌리기 마련이지. 첫 번째 계산이 잘못되면 두 번째 계산은 더 잘하게 되는 법이야. 어디에서든 위안을 찾아. 사랑하는 메리, 심사가 비뚤어져서 사소한 문제를 중요한 일로 치부하는 제삼자들이 사실은 당사자들보다 더 많이 기만당하고 속아넘어간단다."


"참 훌륭한 말씀이네요, 언니! 언니네 기혼 부인 집단의 단결심에 존경을 표하겠어요. 저도 기혼 부인이 되면 딱 그만큼 심지를 굳게 가질게요. 제 친구들 모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요. 그럼 가슴 아픈 여러 일들을 피하게 되겠죠." (p.77~78)


책을 읽는 동안 잊어버렸었는데, 메리의 결혼관을 이렇게 서두에 말해두었다. 메리는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을 하지 않으려는 비혼주의자는 아니다. 결혼이란 서로가 서로를 기만하는 거래라고 생각하기에 그녀는 그 거래를 훌륭히 해내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나는 그랜트 부인의 대화를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행복하게 살기에 그렇게 결혼을 못 시켜 안달인 사람이 많을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결혼이 행복하다고만 말할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을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비슷하다.


나는 영악하지만 메리의 행동에 오히려 공감하는 바였다. 내가 닳고 닳아서 그런거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가난한 성직자, 아니면 재산은 있어도 그 재산을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 도전이나 모험을 할 필요가 없는 에드먼드에게 '성직자'가 아니면 안되냐고 하는 그녀를 나는 이해한다. 도시에서 온 메리와 헨리 남매의 눈에 에드먼드와 패니의 삶이 좋게 보일 리는 없는 것이다.


시골의 삶을 동경하여 귀농을 했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오거나 실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많이본다. 쉽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시골의 삶이다. '돈'이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다른 여자들이 무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만큼, 너는 주목받고 칭찬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던가."(p.315)


메리는 패니를 정확하게보았다. 물론 패니가 처한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수 있다. 그러나 원래 그녀의 성격도 한몫 했을 것이다. 패니는 비록 노리스 이모의 잔소리와 미움, 구박을 받고 있을지언정 자신의 집에서 나와 이모 집에서 살게 된 것이 엄청난 행운이었다. 환경이라는 것이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지, 나는 자주 느껴왔다. 패니가 이모집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그 많은 동생들을 돌보며 자랐다면 그녀의 사려깊은 생각과 처신들은 그다지 형성되지 않았을 수 있다. (물론 안 그럴수도 있지만)


패니는 이모집에서 눈에 띄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던 것 같다. 노리스이모가 사랑해마지 않는 언니들을 제쳐두고 자신의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눈칫밥을 먹으며 자란 인물이 그 정도 눈치가 없을 리가 없다.


패니의 행동은 자신감 없고, 마음은 자존감 낮고, 거기에 몸마저 허약했다. 그런 패니를 잘 챙겨주었던 에드먼드도 그녀를 여자로서 느끼지는 못했던 이유가 바로 그런 점이 아닐까. 나라도 메리 같은 여자에게 반할 것 같다. 물론 메리의 사고방식에 깜짝 놀란 에드먼드가 패니와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은 좀 의외였다.


노리스이모는 지금 말로 하자면 '가스라이팅'을 저지른 사람이 아닐까?


"분수도 안 지키고 제 본분을 벗어나 터무니없는 일을 하면서 어리석게 구는 사람들 얘기를 하다 보니 네게 조언을 하나 해주는 게 옳겠다는 생각이 든다, 패니. 네가 우리 누구와도 함께 가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제발 부탁이고 간곡히 바라는데, 너무 나서서는 절대로 안 된다. 네가 네 사촌 언니들이라도 되는 양 함부로 말하면서 네 생각을 밝히면 안 돼. 우리 러시워스부인이나 줄리아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런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내말 명심해. 어느 곳을 가든 네가 제일 미미하고, 네 순서가 제일 마지막이라는 걸 잊지 마. 물론 크로퍼드 양은 목사관이 제집인 양 편안한 태도를 보이겠지. 하지만 네가 그녀의 자리를 차지해선 안 돼. 그리고 밤에 돌아올 때 말인데, 에드먼드가 바라는 시간만큼만 그 댁에 머물러야 한다. 결정을 그 애에게 맡겨"


“네, 이모, 딴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게요."


"그리고 혹시 비가 온다면 말이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여, 내 평생 오늘처럼 비가 금방이라도 퍼부을 것 같은 험한 날씨는 본 적이 없구나, 어쨌든 혹시 비가 온다면 너 스스로 알아서 최대한 잘 해결해야 한다. 너를 위해 마차를 보내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말고. 나는 오늘 밤 분명히 집에 안 돌아갈거야. 나 때문에 마차가 나갈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비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준비를 철저히 해 가거라."


조카딸은 이모의 말이 지극히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노리스 이모가 생각하는 만큼이나 안락하게 지낼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p.350~351)


다행스럽게도 패니는 완전히 넘어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로서는 패니의 행동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성격이든 태도든 그렇지 않고 그녀의 생각이든간에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주인공이라면 역경을 이겨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내면의 변화라도 보일텐데 패니에게서는 그런 점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갔을 때 자기 식구들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나의 기대와는 달랐다.


3부에 넘어가면 책의 내용은 급한 마무리가 된 듯하다. 에드먼드가 메리에게서 패니에게로 마음이 옮겨가는 과정을 오롯이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그들의 결혼으로 귀결된다. 헨리와 마리아가 사랑의 도피를 한 후 파경을 맞는 과정도 그렇다. 줄리아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이츠 씨와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도 그렇다. 이야기를 마구 풀어놓았다가 급하게 거둬들이느라 앞에 비해 지나치게 생략된게 많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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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에트와 그림자들 - 2022 볼로냐 라가치상 오페라프리마 수상작
마리옹 카디 지음, 정혜경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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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읽고 나면 제목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표지가 보이게 전시된 그림책은 정말 행운이다. 그렇지 않고 책등만 보게 되면 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는 그림책이 많다. 그런 점에서 온라인 서점은 표지 그림을 보면서 책을 선택하게 되니 나름 그것도 장점이긴 하다. (오프라인에서야 당연히 내용도 볼 수 있겠지만)


이렇게 구구절절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책의 제목이 사실 그닥 눈길을 끄는 제목은 아니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그림책의 핵심 내용을 제목에다 써버리면 그 또한 책을 읽는 맛이 사라져버리니 제목을 잘 짓는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그림책의 표지를 보고 나는 이 책을 골랐다. 아리에트는 누군지 모르겠는데 물에 비친 소년의 얼굴과는 다른 모습에 눈길이 갔다. 머리모양은 좀 비슷한 것 같기고 하다.


이 그림책의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한다.


옛날옛날에 사자가 살았어요. 

사자는 사냥을 많이 하고, 많이 먹고, 많이 자다가

어느날 죽었어요. 그리고 그림자만 홀로 남겨졌답니다. 


늙은 사자의 평온한 죽음과는 대비적으로 물 속에 비친 사자는 젊고, 강단이 있어보이고, 동물의 왕 같은 면모를 보인다. 죽음 뒤에 그림자만 남아 돌아다닌다는 것이 참 기발한 상상인 것 같다. 사자의 그림자는 다른 주인을 찾아다니다 아리에트의 생활을 지켜본 다음 아리에트의 그림자가 되기로 한다. 아, 아리에트는 저 소년이었구나. 그렇다면 그림자....가 아니고 그림자들...인 이유는??


학교에 가는 아리에트를 뒤따라간 사자의 그림자는 아리에트의 그림자를 쫓아내고 자신이 아리에트의 그림자가 되어 함께 하교로 간다. 그날따라 아리에트는 자기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거칠어진 느낌을 받는다. 아침에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얼굴로 준비를 하던 아리에트였기에 그가 그날 하루 학교에서 벌인 일들은 확실히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리에트는 사자의 기운을 받아 활기차고 신나는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 다음날 사자는 더욱 신이 나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리에트는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하면서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모습이 더 확대되고 더 거침없어지자 '피곤함'을 느낀다. 


아리에트와 같은 느낌을 받았던 때가 있다. 나의 평소 성격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커피와 재미있는 책 한권이면 충분히 시간을 만끽할 수 있다. 하루종일 입 한번 떼지 않고 있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때도 많다. 하루 세끼 굳이 챙겨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을 때도 많다. '나' 혼자 일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행동들인데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그런 내 모습을 유지한다는 것이 어렵다.


그러다보니 평소의 나보다 오버해서 행동을 하거나, 말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원해서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지만, 상황상 그렇게 해야만 할 때도 있다.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내 속의 나'가 하고 싶어하는 행동과는 반대되는 행동이다보니 여간 힘든게 아니다. 그럴 때 나는 집으로 돌아와, 혹은 카페 같은 곳에 가서 '평소의 나'로 돌아간다. 이게 릴렉스이고 이게 나를 다시 충전시키는 일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만이 '나'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봤던 영화 '인사이드아웃'도 떠오른다. 내 안에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내가 여럿 있다.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적절한 나를 발동시켜야 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필수적인 여건이다. 눈치도 좀 챙길 줄 알아야 하고, 스트레스도 확 날려버릴 수 있어야 하고, 신중하게 고민하고 생각도 해야 한다.


그림자라는 특이한 소재로 내 행동의 여러 면을 생각하게 해 준 그림책이다. 거기에 페이지 페이지마다 작은 볼거리가 곳곳에 숨어있는 그림책이어서 그걸 찾는 재미도 있다. 색감이나 무늬의 사용도 다채로워서 그림책을 보는 눈이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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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6-17 1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표지그림 진짜 좋은데요. 그림책의 아이디어도 좋고.... 도서관 가는 날에 한번 살펴봐야겠어요. 내가 가진 또 다른 얼굴은 뭐가 있나 생각 좀 해보면서요

하양물감 2022-06-17 15:5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표지보고 골랐어요. 제목이 마음에 안든다는 이야기예요^^
너무 평범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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