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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와 버들 도령 ㅣ 그림책이 참 좋아 84
백희나 지음 / 책읽는곰 / 202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은 작가 이름을 보고 믿고 읽는 그림책이다.
이번 그림책은 연이와 버들도령... 어렸을 때 들어봤고, 옛이야기로 읽었던 그 이야기다.
이 그림책 맨 뒤에 보면 참고한 책이 있는데
<계모의 학대>, <정에 정도령>, <반반버들잎 초공시와 엽엽이>, <버들잎 도령>,
≪연이와 버들잎 소년≫, ≪한국과 일본의 계모 설화 비교 연구≫가 그것이다.
그림책의 내용은 익히 아는 바, 계모 이야기를 읽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 그림책에서는 그녀를 '나이 든 여인'이라고 표현한다.
나이든 여인은 연이에게 일을 아주 많이 시키고
연이는 그저 시키는대로 묵묵히 따르면서 살 뿐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 가족 관계는 드러나지 않는다.
나는 이 지점이 마음에 들었다.
어렸을 때, 이웃에 계모와 함께 사는 친구가 있었다.
하도 나쁜 계모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나는 그 친구도 엄마도 같을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이 그림책은 나이든 여인과 연이의 관계를 가족 관계로 한정 짓지 않는다.
'가족'의 의미가 많이 달라진 요즘이기에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기 등장하는 '나이 든 여인'은 연이에게 일도 많이 시키고
한겨울에 상추를 뜯어오라고 시키는 심술궂은 여인이다.
이 추운 겨울에 상추를 구할 수 없음에도 연이는 묵묵히 상추를 찾아 나선다.
이런 모습을 보면 연이도 참 갑갑한 아이다.
요즘 아이라면, '지금은 상추를 구할 수 없어요'라고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겠지?
그저 시키는대로 따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텐데 말이다.
어쨌든 연이는 상추를 구하러 눈 속을 걸어다니다
추위를 피할 곳을 찾아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연이는 꿈 속 같은 공간과 버들도령을 만난다.
솔직히 처음에 그림책을 펼쳤을 때, 흐릿한 부분이 영 눈에 거슬렸다.
흐릿한 배경 앞에 선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또렸하게 보였지만.
작가의 의도가 분명 있을 것이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고민한 결과겠지만 말이다.
책을 다 읽은 다음 다시 그림책을 보니 흐릿한 배경 덕에 입체감이 더 살아나는 것 같다.
봄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따뜻한 동굴 속 이미지가 포근하게 느껴진다.
버들도령은 연이에게 상추도 주고, 귀한 꽃도 준다. 그 꽃은 살살이, 피살이, 숨살이 꽃이다.
뭐에 쓰는 꽃인지 알려주지 않지만 그 이름으로 짐작이 가능하다.
정말로 위급할 때 쓰라고 준다.
나이든 여인은 한겨울에 상추를 뜯어 온 연이를 의심하고
이번에는 화전을 부쳐먹고 싶으니 진달래꽃을 따오라고 시킨다.
그리고 살살 뒤를 밟아 연이의 비밀을 알아챈다.
연이가 집에 와서 화로에 진달 화전을 부치고 있을 때
나이 든 여인은 동굴에 불을 질러버린다.
어른어른 화전을 부치고 있는 장면이 불타는 동굴을 대신한다.
화마로 모든 것이 사라진 동굴에서 연이는 버들도령의 흔적을 발견한다.
이야기를 구전으로 듣거나, 글로 읽을 때와는 달리 죽은 버들도령의 모습은 훨씬 직관적이다.
동굴이 불타는 모습이 진달래 화전을 부치던 장면 만으로 짐작이 가능했던 것과 달리
버들도령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재가 날리는 동굴에서 황망한 연이의 얼굴.
연이는 이 광경 앞에서 목놓아 울지 않는다.
오히려 버들도령에게서 받았던 도움이 더 이상하게 느껴지고
이렇게 좋지 않은 일 앞에 놓여 있는 자신의 모습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죽은 도령이 가여웠던 연이는,
뭔가 소중한 걸 놓아주고 싶었지만 가진 게 없었기에 버들도령에게서 받았던 꽃을 놓아준다.
정말 위급할 때 쓰라고 주었던 그 꽃은 버들도령을 살린다.
그리고 연이와 버들도령은 하늘로 올라간다.
아마도 그곳에서는 행복하겠지?
자, 이런 이야기의 끝에는 권선징악적 결말이 항상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이 그림책의 마지막에는 '나이 든 그녀'의 마지막을 이렇게 알려준다.
나이가 들어 죽었다고.
응? 뭔가 이상하지?
보통 같으면 큰 벌을 받고 그렇게 아이를 괴롭히면 안된다는 이야기로 끝나기 마련인데.
나이가 들어서 죽었단다.
죽음 자체는 그녀에게 벌이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쓸쓸히 죽었다는 것이 벌이었던 듯하다.
옛이야기를 낯설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이야기로 바꿔 낸 그림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