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월든 : 숲속의 생활 - 1854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전행선 옮김 / 더스토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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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을 처음 읽었던 때가 생각난다.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었다. 수중에 가진 돈도 얼마 없었기에 여성전용 고시원의 방 하나를 빌려 들어갔다. 책상 하나와 내 몸 하나 누우면 몸을 돌리기도 불안했던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그래도 그 책상 한 귀퉁이에 책을 한 권 두 권 쌓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책 '월든'이다.

당시에 샀던 책을 제법 오래 갖고 다녔는데, 다시 읽으려고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분명 어딘가에 있겠지만, 찾다가 포기하고 새 책을 한 권 샀다. 같은 표지의 책이 보였지만, 똑같은 책 2권이 생기는 것보단 낫겠지 싶어 이 책을 선택하였다. 1854년 오리지널 초판본 디자인이란다.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이 책도 이름은 알지만 읽지 않은 사람이 더 많겠다 싶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 책을 쓸 당시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 숲속에 혼자 살았다. 그가 월든 호숫가로 간 목적은 돈을 들이지 않고 살기 위해서도, 대단한 희생을 치르며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방해받지 않는 곳에서 개인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은 형 존과의 추억을 글로 남기는 것이었다. 소로는 '집을 마련하고 나면, 농부는 그 집 때문에 더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가난해진다."(P.52)고 하였다. 이 문장을 읽는데 딱 지금의 현실과 어쩜 이리도 들어맞을까 싶었다.

"대다수의 사람이 마침애 모든 편의를 제공하는 현대식 주택을 소유하거나 빌릴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고 해 보자. 문명의 발달과 함께 주택도 개선되었지만, 그곳에 거주하는 인간의 수준까지 똑같은 정도로 향상되지는 않았다."(P.53)

나는 아직 내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부동산'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더 많이 섞여버린 요즘, 내 집 하나 갖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가 사는 곳이 곧 그의 신분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몇 십억 짜리 집에 사는 이들은 구입한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들에게 단지 내에 차를 갖고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들만의 세상에 우리는 없다. 아파트 브랜드와 평수가 우리를 규정짓는다. 소로의 말대로 집이 문명의 혜택을 받았다고 해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도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늘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하고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소로는 "그런 집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 집을 등껍질 삼아 사는 거주민의 삶이지, 집 자체의 독특함이 아니다"(P.72)라고 말한다.

소로의 숲 속 생활을 엿보는 것도 좋았지만, 직업 탓인지 관심사가 그러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독서'에 관해 쓴 글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고전은 인류의 생각을 담은 가장 고귀한 기록"(P.150)이라는 그는 "책은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조심스럽게 쓴 만큼 열심히 삼가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P.150)고 주장한다. "책은 세상의 소중한 재산이고 모든 세대와 민족에 속하는 유산이다."(P.152) 고전을 원어로 읽지 못하는 사람은 인류 역사에 관해 충분히 배울 수 없다. (P.153)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자를 읽을 줄 알거나, 남이 읽어주는 글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이는 삶을 더욱 유익하게 살아가며 지혜도 쌓여간다.

소로는 숲에서 지낸 첫 여름에 책을 읽지 못했다고 말한다. 노동의 참맛을 알아가던 그 여름은 몸으로 세상을 배우고 있던 터다. 자기가 지은 집에서 이런 저런 방문자들을 맞이하며 숲 속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 소로는 집을 사기 위해 빚을 지고 집값을 갚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안타깝다고 여겼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소로가 2020년대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면 어떤 이야기를 했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추가: '월든'을 읽으면서 소로가 그리스 신화와 이야기들, 동서양의 고전이 이야기하는 가치들을 인용한 문장이 꽤 많다는 것을 알았다. 서양 인문학의 중심에 '그리스 신화'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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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첫 미래 교육 - 디지털 금수저를 물려줘라
임지은 지음 / 미디어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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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살아갈 아이를 위한다면 '부모력'을 점검해야 한다. 첫째, 아이가 진짜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둘째, 아이의 개성과 강점을 최대치로 이끌어주고 있는가? 셋째, 주입식 교육 대신 생각하는 힘을 길러 주고 있는가? 배움의 즐거움을 일깨워주고 있는가? 넷째, 아이에게 비교와 경쟁 아닌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가? 다섯째, 아이에게 실패를 두려워 않고 도전하며, 끝까지 해내는 힘을 길러 주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에 앞서 아이가 자존감의 뿌리를 단단히 내릴 수 있도록 돕고 있는가? (p.9)

저자는 인공 지능 미래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을 '부모력'이라고 설명한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내 아이가 살게 될 미래의 모습을 1장에, 디지털 네이티브를 위한 부모교육을 2장에, 미래 인재로 키우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3장에, 초불확실성 시대 아이의 마음 근육을 키우는 법을 4장에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읽을만한 내용은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2장에 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 기기를 접한'디지털 네이티브'이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터치 몇 번으로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세대이다. 부모 세대의 관점으로 아이들의 디지털 기기 사용을 바라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언제 스마트폰을 주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맘카페 단골 질문이다. 정답은 없다. 아이마다 성향도 다르고 기질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정의 상황도 모두 다르다. 저자는 분명한 건 '스마트 기기를 사용할 준비가 됐다고 판단될 때 다음단계로 넘어가야 한다'(p.55)고 말한다. 아이가 어릴 때는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좋은데 세계 보건 기구 WHO에서는 만 2~4세 어린이는 하루 1시간 이상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특히 만 1세 이하는 전자기기 화면에 노출시켜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신체 활동과 충분한 수면이 필요한 영아기에 뇌 발달에 영향을 끼치거나 비만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중독성이 강한 스마트폰이지만,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쓰는 법을 가르치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 네이티브를 위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1. 온라인 평판과 디지털 풋프린트: 온라인에서 남긴 발자국은 평생 남을 수 있다. SNS에 올린 개인정보나 온라인 활동이 나중에 직장을 구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2. 개인 정보 지키기: 인터넷과 온라인에서 안전을 가르치고 낯선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그런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이다. 인터넷 상에서도 나의 안전은 내가 지켜야 한다.

3. 사이버불링(사이버 괴롭힘): 사이버불링이란 사이버 공간에서 약자를 괴롭힌다는 뜻의 불링이 합쳐진 합성어다. 사이버불링과 같은 행동을 하면 그것이 범죄가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줘야 하며, 사이버불링을 당했을 때 부모나 학교에 바로 알려야 한다는 것도 가르친다.

4. 악플이 달렸을 때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미래(그리 멀지 않은)에는 디지털 리터러시의 차이가 빈부의 차이를 만든다. 디지털 리터러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누구는 인터넷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바꾸고, 누구는 중독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디지털 리터러시란, 디지털 세계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았는 능력을 말한다.

저자는 부모가 아이를 위해 '디지털 멘토'가 될 것을 주문한다. 즉, 스마트폰과 함께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정보 생산자가 되는 시대기에 '디지털 쓰레기'를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비판적인 독해능력이 필요하다. 콘텐츠를 다각도로 살펴보고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도 디지털 리터러시이다.

디지털 세계에 필요한 능력은 자기조절력이다. 자기조절력은 뇌의 전두엽과도 관련이 있다. 전두엽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감정 조절을 잘하고 정서가 안정돼 있다. 또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도 깊다. 실허어하지만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의지력, 하고 싶지만 하면 안 되는 일을 참는 자제력, 비교를 통해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판단력, 복잡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고력,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분출하지 않는 감정조절력이 모두 전두엽의 영역이다. 자기조절력을 키우는 것은 주요 양육 목표가 되어야 한다.

자기조절력을 키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긍정적인 태도로 애착과 신뢰를 보여 준다.

2.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고 표현하도록 도와준다.

3. 지나치게 허용하지도, 억압하지도 않는다.

4.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과정을 칭찬한다.

5. 아이의 안 되는 행동은 단호한 말로 훈육한다. (P.76)

저자는 인공지능과 맞설 무기는 비판적 사고라고 말한다. AI는 정보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정보 출처가 믿을만한지도 알지 못한다. 플랫폼 알고리즘은 개인의 취향, 성향 등에 따라 선택한 정보 위주로 제시한다.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자기 생각과 같은 정보만 편식하여 확증편향이 커진다.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통해 인간은 인간 지성을 만들어간다. 자기주장이 있다는 것은 생각이 깨어있다는 증거다. 자기만의 생각과 그걸 표현할 수 있어야 '나답게' 살 수 있다.

시청각 자료는 교육적 효과를 높여 준다. 그러나 디지털 기기와 콘텐츠에 익숙해진 뇌는 '읽는 힘'을 기르기 어려워진다. 눈으로 글자를 읽고, 머리로 이해하고, 생각하는 '깊이 읽기'를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P.112) 뇌 전체를 활용하는 독서야말로 느린 생각을 가장 효과적으로 만들어내는 행위이며, 창의적 연결 능력을 갖춘 인재들은 독서를 통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육성할 수 있다.

남과 다른 나를 만드는 방법으로 '독서' 만한 것이 없다. 읽는 힘은 초등 시기에 일러야 한다. 평생 배움의 시대에 평생 읽는 뇌는 차별화된 무기다.(P.115) 이와 함께 글쓰기도 중요해지고 있다. 생각하는 힘이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글쓰기는 필요성이 커질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책의 내용에서 그나마 조금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2장도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그래도 한번쯤 디지털네이티브로 살아가는 아이들과 디지털이민자로 살아가야 하는 부모 세대 간의 차이는 아이를 키울 때 무엇을 조심하고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알게 해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아쉽게 느껴진 부분은 '내 아이'를 어느 시기의 아이로 대상으로 잡아야 할 지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유아, 어린이,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내 아이'의 범위는 확대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부분의 내용이 다른 도서를 통해 읽었던 내용이라서 알고 있던 내용을 정리는 할 수 있었지만, 신선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육아서, 교육서, 경제경영서를 넘나드는 내용이 조금 산만한 점이 아쉬웠다. 그래도 관련 도서를 많이 읽어보지 못한 부모라면 도움이 되겠다.

최근에 EBS에서 문해력에 관한 프로그램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아이들의 문해력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그것이 학교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았다. 미래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읽기'와 '문해력'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영상이나 즉각적인 시청각자료가 많아지고는 있지만 기본은 문자로 된 정보가 훨씬 많다. 결국은 읽어내는 힘이 부족한 아이들은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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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같은 안녕 북극곰 무지개 그림책 76
아멜리 자보·코린느 위크·오로르 푸메·샤를린 왁스웨일레 지음, 아니크 마송 그림, 명혜권 / 북극곰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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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벨기에의 병원에서 일하며 죽음에 가까 있는 아이들이 잠시나마 아픔을 잊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그림책의 글을 썼다고 한다.

인기많고 누구나 좋아하는 이제도할머니의 병이 심해서 고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모두들 최선을 다해 할머니를 돌보지만...

"할머니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할머니는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어. 할머니가 떠나는 걸 받아들여야 해."

엄마는 파랑이가 할머니와 쌓은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파랑이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슬퍼지지만 그때마다 행복한 순간을 떠올린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지만, 그 누구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연이어 읽은 책이 죽음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제도할머니는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파랑이를 안아주기도 하고,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편안히 눈을 감는다. 죽음을 앞둔 자나 남겨진 자나 모두에게 슬프고 아프고 힘겨운 이별이지만, 그리움을 안고 추억을 떠올리면 언제나 우리 곁에 함께 있을 수 있다.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이별이지만,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는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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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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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의 외래어 표기는 여전히 적응이 잘 되지 않아 '똘스또이'는 낯설다. 톨스토이의 작품은 '읽고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하지도 못했던' 중학생 때 읽었다. 그래서 늘 읽었다는 기억은 있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거의 떠올리지 못했다. 얼마 전에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읽었고, 이번에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었다.

"이반 일리치는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동료였고 그들 모두가 사랑했던 사람이다. (중략) 그가 사망하고 나면 알렉세예프가 그 자리에 임명될 것이고 알렉세예프 자리에는 빈니꼬프나 시따벨이 임명될 것이라는 설이 이미 나돌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사무실에 모여 있던 이 고위급 인사들이 이반 일리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린 생각은 이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자신과 동료들의 자리 이동이나 승진에 대한 것이었다." (p.8~9)

이 장면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신문에서 읽은 그들 동료들의 생각으로, 소설의 서두를 장식한다. 나와 내 주변을 둘러보면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며,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추모하기에 앞서 남은 자들의 삶을 걱정하거나나에게 닥쳐올 변화에 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리게 된다. 1800년대의 그들과 지금의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한다.

동료의 죽음을 듣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직장 내 보직 이동 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죽은 이가 자신이 아니라 '그'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리고 예의상 추도식에 참석해서 미망인을 위로하고 귀찮지만 인사는 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이반 일리치의 부인도 장례를 치르며 남편의 동료들을 상대하기도 하고, 앞으로 살아갈 일에 대해 이것 저것 준비를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대성통곡을 하며 쓰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 익히 아는 장례식장의 풍경을 떠올려보라. 그들이 죽은 이반 일리치를 생각하며 울지 않는다고 욕할 수 있을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죽은 이의 보험 처리를 하고, 재산을 분할하며 남은 자들의 삶을 챙긴다.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알린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동료들은 '귀찮지만' 예의상 추도식에 참석하고, 아내와 딸은 그가 남긴 재산과 더 받을 것이 없는지만 생각한다. 이반 일리치는 어떤 삶을 살아 온 사람일까?

이반 일리치는 항소법원 판사로 재직하던 중 4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삶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말한다. 지극히 끔찍한 것이었다고.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 정도까지는 괜찮다고 인정되는 한도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는 착실하게 근무하며 자신의 입지를 다졌고 모든 일을 수준 높고 절도있게 수행했기 때문에 그를 뒤에서 험담하는 사람도 없었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고 예의 바르게 처신했기 때문에 모두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결혼도 평생 그렇게 해왓던 것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진행하였다. "쁘라스꼬비야 표도로브나와 같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어 자만심이 채워졌고, 동시에 고위층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일을 행한다는 생각이 들었기"(p.31) 때문에 결혼을 하였다.

이반 일리치에게 가정은 갖춰야 할 조건이었다. 사랑이 없는 아내와의 관계는 당연히 삐걱댈 수 밖에 없는데, 그는 가정을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아내가 매달릴수록 이반 일리치는 생활의 중심을 자신의 직무로 옮겨갔다. 이반 일리치에게 가정은 '남들이 보기에 겉으로나마 품격을 잘 지키는 것'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이쯤 되니 이반 일리치의 아내가 장례를 치르며 슬퍼하기보다 현실적 문제를 더 고민했던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이기에 모든 것을 용서해야 한다거나 고통을 감내하면서 받아줄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정보다 일을 중시하는 것이 워커홀릭이어서가 아니라 가정이나 아내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녀'를 더 응원하게 된다.

이반 일리치는 "혼자 있으면 견딜 수 없이 끔찍하게 외롭고, 누군가를 부르자니 다른 사람이 곁에 있으면 상태가 더욱 악화된다는 것"(p.89)을 잘 알고 있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통증보다 혼자라는 끔찍한 외로움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죽음' 앞에 서면 '더 살고 싶어질까?'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나는 3년 전 암 수술을 하였다. 암이라는 것이 워낙 '죽음'과 가까운 병이어서 나 또한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만약 죽는다면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가 아주 어리지 않다는 것에 안도했고, 치료를 받을 수 있을만큼 의료보험 덕을 볼 수 있다는 것에도 안도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아, 내가 '삶'이라는 것에 그렇게 미련이 있는 사람은 아니구나. 그저 살아있는 동안에 보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다 해야겠구나.

이반 일리치는 죽음 직전에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죽음의 순간이 온다. '고통' 없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겠나마는, 그래도 나는 이 한 세상 잘 살다 간다고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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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14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하양물감님 그런 일도 있으셧군요. 잘 견디고 이겨내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죽음앞에서 어떨지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인간 대부분의 죽음이 저렇지 않을까 싶어 씁쓸하네요. 톨스토이 같은 대가가 그려낸 죽음의 진실 같기도 하구요.

하양물감 2021-04-11 23:16   좋아요 0 | URL
누가 알 수 있겠어요? 죽음이 나에게 닥치지 않는 이상 뭐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토록 매혹적인 고전이라면 -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고전 읽기의 즐거움 서가명강 시리즈 15
홍진호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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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일의 고전 명작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던 홍진호 교수가 그 답을 제시하기 위해 썼다.

첫 번째는 작품이 쓰인 시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상세하게 소개함으로써 작품에서 얘기되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통적인 문학작품을 올바르게 감상하고 즐기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p.12~13)

어떤 해석이 작가가 의도한 것이었는지, 혹은 더 타당한 것인지는 여기에서 논할 바가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문학 작품은 그것이 시이든 소설이든 희곡이든 겉으로 드러나는 이야기 뒤에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줄거리가 전부인 소설도 많지만, 일반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문학작품들, 특히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작품들은 줄거리 이면에 무언가 다른 것들을 숨기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학작품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즐기는 것은 이 숨은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 즉 우리가 '해석'이라 부르는 세심한 독서와 성찰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p.32)

우리는 대중문화라고 하는 것들을 접할 때 머리 속에서 이미 '해석'을 하고 있다. 미디어는 지금 우리의 현재를 실시간으로 반영한다. 그러니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즉각적이고 순간적인 반응이 따라오는 시대이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해야 하고, 생각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고전문학이 어렵거나 지루할 수 밖에 없다. 거기에 고전이라 하면 서양의 고전이 대부분이다보니 한국 사람에게는 더더욱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저자는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것은 줄거리 이면에 무언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루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줄거리 이면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세심한 독서가 필요하다. 대강의 줄거리만 알아서는 그 이면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해석을 위해서는 작가나 작품에 관련된 정보를 알아야 한다. 작가가 살던 시대나 개인적인 삶에 대한 정보도 필요하다. 작가가 살던 지역의 사회문화적 상황을 아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어떤 고전은 이런 정보가 있으면 이해할 수 있는가하면, 어떤 고전은 이런 정보가 주어져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렇지만, 선행 정보가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작품만 있다면, 그렇게 많은 서양 고전들을 우리가 좋아할 수 있었을까? 인간의 보편적 감정을 다루고 있거나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거나 해결되지 못한 사회적 상황이나 현실에 공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독일의 소설을 소개한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통』, 폰 호프만스탈의 『672번째 밤의 동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시골의사』 가 그것이다.

헤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방황, 저항, 방랑과 같은 키워드를 만날 수 있다. 1919년에 헤세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데미안』은 독일문학의 오랜 전통인 '발전소설'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전통적인 인간관이나 가치체계는 파괴되었지만 새로운 인간관이나 세계관이 자리를 잡지 못한 시대였다. 헤세는 소설 곳곳에서 내면에 대해 언급한다. 철학이나 종교, 윤리나 관습 등과 같은 외부의 가르침이나 명령이 아닌 내면의 목소리를 따를 때 올바른 삶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헤세의 삶을 이해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데미안』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꼭 그런 이유를 알아서였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데미안』을 중학생 때 처음 읽었고, 그때는 특별한 감동을 느끼지 못했는데 성인이 되어서야 내용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고 감동을 받는 것은 작가의 상황이나 그 이면의 내용을 알아서가 아니다. 이 책이 그렇게 감동을 받거나 공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고전으로서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괴테는 자신의 이야기와 예루살렘의 이야기를 엮어 『젊은 베르터의 고통』을 완성하였다. 괴테도 이 책을 출간할 당시 익명으로 출간을 했다고 한다. 이 소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벌어진 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독자의 감동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이라고 한다.

이 소설이 출간된 후 베르터를 따라 자살한 남성들이 최소 12명이라고 한다. 오늘날 유명인의 자살을 모방하여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베르테르효과'라고 하는 이유다. 그래서 괴테는 두 편의 시를 삽입하여 자살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젊은이들은 그렇게 사랑하기를 갈망하고

모든 소녀들은 그렇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 욕망 중 가장 성스러운 것.

그런데 쓰디쓴 고통이 솟구쳐 나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걸까?

사랑스러운 영혼이여, 너는 눈물을 흘리고, 그를 사랑한다.

너는 그의 기억을 굴욕감으로부터 구한다.

보라, 그의 넋이 그의 동굴에서 네게 손짓하는구나.

남자가 되어라, 그리고 나를 따르지 말라고.

p.107~108

저자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이 18세기와는 완전히 다른 오늘날에도 사랑을 받는 이유는 바로 재미있는 줄거리때문이라고 말한다. 고전문학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지만 모든 작품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당대의 문화적 요구에 의해 쓰여진 책이니 우리가 그 시대를 알지 못하면 당연히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깊이 있고 좋은 내용을 담은 책이라도 재미있지 않다면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이 읽어온 고전이 되기는 어렵다. 드러난 줄거리 이면의 내용을 조금만 알아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고전이 많다.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바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 해당 작품을 먼저 읽어보라고 하였다. 나는 이 책에서 소개한 소설 중에서 폰 호프만스탈의 『672번째 밤의 동화』를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래서일까.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책을 덮은 후 『672번째 밤의 동화』를 찾아서 읽을 확률은.... 낮다. 어쨌든 이 부분을 어렵게 넘기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시골의사』 가 나온다. 역시 읽어본 책, 그리고 아는 내용이 나오니 더 술술 이해가 된다.

카프카의 작품은 해석을 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라고 한다. 그나마 『변신』은 아주 쉬운 편? 굳이 카프카가 살던 시기의 사회적 현상을 알지 못해도 지금의 우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착취와 인간소외로만 이 책을 읽었을 경우에 그러하다. 『시골의사』 는 그 내용만으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소설이다. 저자는 『시골의사』를 정신분석학의 측면에서 해석한 내용을 소개한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소설이다.

이 책에서 다룬 작가와 작품은 우리가 표면적으로만 이해했던 작품을 한번 더 생각하고 이해하게 만든다. 이렇게 사회문화학적으로, 혹은 정신분석학적으로 또는 작가의 삶을 살펴봄으로써 작품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 이 도서는 21세기북스의 협찬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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