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미술기행 - 인간과 예술의 원형을 찾아서
편완식 지음 / 예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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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붉은색을 참 좋아한다. 예전에는 밝은 느낌의 빨강을 좋아했다면, 요즘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붉은색이 좋다. 뜬금없이 붉은색 타령을 하는 것은, 이 책을 선택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기때문이다. 표지에서 보이는 붉은색, 그리고 내가 아프리카를 떠올릴 때마다 함께 뒤따르는 붉은색의 기운.

아프리카의 미술이라..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아주 원시적인 그림을 상상했다. 아프리카라는 대륙이 주는 이미지, 미디어를 통해서 바라 본 아프리카의 모습, 항상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모습만을 보아 온 나였기에 그들의 에술작품조차도 아주 미개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펼치고 아름다운-이라고밖에 형언할 수 없는- 아프리카의 풍광과 그 아름다움 속에서 키워낸 에술적 감성, 미술적 표현들은 결코 미개하지 않았다.

삭막한 회색빛 도시만 보고 자란 사람들이 그려내는 음울함 미래상같은 그림들과 달리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느끼고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그려낸 그림은 희망이 잇고 활기가 있고 역동감이 있었다. 보는 것이 다르니 그리는 것이 어찌 같을까? 비록 재료의 풍부함과 부족함에 차이는 잇을지언정 결코 그들의 감수성은 떨어지지 않았다고 해야할까? 물론,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는, 생계형 미술가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무시할 바는 되지 못한다. 사실, 깡통 몇개 쌓아놓고 예술이라 칭하는 이해하지 못한 작품들보다는, 상업화되고 모방된 그림이라 해도 가슴에 따뜻함이 남거나 그도 아니라면 아프리카가 느껴지는 그림이라면 더 낫지 않을까?

저자와 함께 여행을 하며 두 명의 화가가 그림 그림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림보다 그림설명이 더 중요해진 요즘 작품에 지친 나는, 그림만으로 아프리카가 느껴지는 아프리카 미술에 박수를 보낸다. 더불어 가보지는 못하지만 책을 통해 그림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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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라는 단어는, 한편으로는 설레임을,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주는 느낌의 단어이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일을 하게 되었을때나 바라고 바라던 것을 하게 되었을 때의 '처음'은 설레임이 동반되고, 한번도 해보지 못한 것을 대하는 '처음'은 두려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처럼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아니어도 우리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세상은 언제나 설레임과 두려움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서관에 처음 간 아이는 어떤 느낌일까? 집이 아닌 공공의 장소에서 나의 것이 아닌 우리의 것을 사용하기 위한 준비단계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어디에서 공공의 물건, 공공의 장소라는 개념을 터득하게 될까? 보통은 놀이터가 아닐까 싶은데, 적어도 놀이터는 제재를 가하거나 어떤 정해진 규칙이 존재하는 장소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처음 사회를 만나고 공공의 물건에 대해 배우게 될 터이다.

우리 주변에서 아이에게 공공의 장소와 규칙에 대해 가르쳐줄 수 있는 좋은 곳이 어디가 있을까? 이럴 때, [도서관]은 너무나 멋진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아이가 책을 자주 접하게 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규칙을 가르쳐줄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빌리고 도서관을 이용하기 위해 대출카드를 작성하는 것에서부터 책을 빌려서 읽고 반납하는 과정, 규칙을 어겼을 때의 행동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가 딱딱한 설명문이나, 규칙벽보만으로 알게 되었을 때는, 아이들에게 별로 효과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있다. 게다가 처음 만든 대출카드, 처음 빌린 책, 처음 반납기일을 어긴 비벌리의 심리상태를 예쁘게 그려놓았다.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볍게 해소시켜준 점이 참 마음에 드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과 공공장소에서 지켜야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특히,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어떻게 다루어야하는가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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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서 숲을 바라보면서 살고 싶었던 난쟁이할아버지가 새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숲속 동물들이 모여들어 모두 함께 사는 집을 짓게 된 이야기입니다.

 

난쟁이 할아버지는 동화속에서 자주 나오는 인물이지요. 현실 속에서 난쟁이 할아버지를 만나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다가갈까요? 혹시 무서워하거나 이상하게 쳐다볼지도 몰라요.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에서 난쟁이 아저씨도, 곱추아저씨도 만나곤 했는데, 요즘은 그런 분들이 안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들이 만약 그런 분들과 마주치면 무슨 생각부터 할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아이들은 키가 큰 거인-혹은 거인처럼 보이는 농구선수나, 최홍만같은 사람들-들에 대해선 그다지 거부감은 없는 것 같아요. 사실, 거인이나 난쟁이나 우리 눈에는 뭔가 다른 사람이긴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의 눈은 난쟁이보다 거인에게 더 호의적이란 생각마저 드네요. 아이에게 난쟁이와 거인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줘야겠습니다.

이 책 속의 난쟁이 할아버지는 새집을 지으면서, 높은 곳에 전망대를 지어 숲을 바라보고싶어하셨어요. 그건, 키작은 난쟁이할아버지의 소원답지요^^ 집을 짓기 시작하자, 여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힘이 필요해졌어요. 난쟁이 할아버지 혼자서는 그 많은 일을 다 할 수 없었거든요. 그렇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난쟁이할아버지가 짓고 있는 새집에 동물들의 보금자리를 함께 만들기 시작했답니다. 물론, 집을 짓는 동안에는 할아버지도 별 생각이 없었던 듯하네요. 집이 다 지어지고 숲속의 수많은 동물들이 함께 모여 사회를 이루었지요. 그러자 난쟁이할아버지는 자신의 처음 생각이 떠오른거예요. 아, 나는 이런 집을 원하지 않았어...라고요...

 

사실, 난쟁이 할아버지 혼자 사는 멋진 집도 좋지만, 여러 동물들과 사이좋게 살아가는 집도 나쁘진 않았어요. 그래도 난쟁이할아버지가 처음 소원했던 전망대를 꼭 만들고싶었거든요. 이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이 사회성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소통하며 살것인가 하는 것을 말이지요. 그리고 건축설계경험이 있는 저자의 그림이 사실감을 더해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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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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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되는 단어는 바로 죽음이다. 졸업이라는 단어와 죽음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오버랩된다. 그러나, [죽음]이라고 해서 음울하거나 절망스러움과는 다르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한다. 특히 나와 관계있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 속의 [죽음]은 [삶]과 맞닿아있다.




[졸업]




아야는, 자살한 친아버지의 친구를 찾아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자살을 시도한 바 있고, 여전히 자살의 유혹 속을 거닐고 있는 아야. 학교에서 어이없는(?)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으면서도 아야의 모습은 경쾌하다. 툭툭 내뱉는 단어나 행동에서 다른 10대들과 차별되지 않는다. 아야는 아이들로부터 협박문자를 받거나 괴롭힘을 당해도 무시할 줄 아는 아이다.




이쯤하면, 아야의 왕따가 이야기의 주요내용일 것 같지만, 엉뚱하게도 이야기는 아야의 친아버지를 추억하는 내용이다. 40대의 와타나베가 스물여덟에 죽은 친구 이토의 이야기를 한다. 이토가 자살한 이유는 모른다. 젊은 아내와 뱃속의 아이까지 두고 옥상에서 뛰어내려야했던 이토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친한 친구였던 와타나베도 아내였던 가오리도. 이토는 그래서, 그 외로움을, 아픔을 함께 할 사람이 없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토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이야기하는 동안, 와타나베는 물론이고, 이 책을 읽는 나도 생각을 하게 된다.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왕따를 당할 수도 있는 아야를 보면서, 아무도 자살한 이유를 모를만큼 철저하게 혼자였던 이토를 보면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는다. 우리가 부딪치는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만, 주위의 시선도 적당히 필요하다.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아야에게는, 어머니와, 그녀를 사랑하는 새아버지 노구치씨의 사랑이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규정된 관계가 아니라 아야 스스로 한고비를 넘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서포트해주는 사람으로서의 가족이다.




졸업은 새로운 시작이라 했다. 우리가 초등학교를, 중학교를, 고등학교를 졸업한다는 것은, 한단계 더 나아가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바뀌고, 우리는 새로운 생활에 빨리 적응하고 또다른 졸업을 맞이한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힘들고 아프다고 해서 영원히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졸업은 새로운 희망이다.




[행진곡]




죽음을 앞둔 사람을 보고 있은 적이 있는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앞두었을 때는 특히 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일을 겪었고, 그로 인해 어린 시절을, 혹은 그 사람과의 특별했던 하루를 떠올리기도 했다. 코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앞두고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면 절대 빠질 수 없는 동생 마유미,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노래 때문에 학교에서 적응할 수 없었던 마유미의 일은 지금 코지의 아들 료스케와 겹쳐진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해”라는 단어보다 좀더 포괄적인 의미의 단어가 없을까? 사랑인줄 알았는데 구속이었고, 사랑인 줄 알았는데 대상에 대한 몰이해였다. 그래서, 네편의 이야기 중에서 [행진곡]이 제일 오래 기억될 것 같은 느낌이다.




[아버지의 마지막수업]




한때, 나도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교사로서의 사명감이랄까? 학생 때 보아 온 교사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스승의 모델을 찾을 수 있었던 사람은 행운아이다. 적어도 그런 교사의 모습을 통해 공교육을 불신하지 않고 믿고 따를 수 있는 이유가 되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학생들의 눈에 비친 진정한 스승이란 어떤 것일까? 생활을 감독하고 간섭하는 교사를 아이들은 어떻게 바라볼까? 세상이 변하고 가치가 변하면서 엄한 선생님은 교사로서의 권위로 인정받기보다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엄한 선생님과 폭력적인 선생님은 다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엄한 교사와 폭력적인 교사가 섞여버렸다. 더군다나 명퇴다 뭐다해서 연륜 있는 선생님들이 많이 없어지신 것도 한몫하겠지.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선생님 父子의 이야기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법은 많이 달라졌지만, 장례식에서 울어줄 제자 하나 없는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추신]

케이치군 나도, 천국에 가서도 쭉 케이치군 어머니란다.

이 한 줄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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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네가 읽은 것은 무엇이었니?' 내가 나에게 하는 질문이다.

나는, 김연수라는 작가에 대해 조금 거리감을 느낀다. 그의 책을 제일 처음 만났던, 94년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에서도 그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었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그 거리는 더욱 멀어졌고, 계간지를 통해 연재된 소설로 다 읽고서도 이해하지 못하다가 단행본으로 한꺼번에 읽으면 어떨까하며 읽게 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는 그나마 이해의 폭은 줄일 수 있었으나 그래도 역시 거리감은 존재했다. 왜일까? 왜, 나는,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작품을 벌써 세권째나 읽게 된걸까? 일단은, 내가, 나 자신의 내부의 소리보다 외부의 소리에 민감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주위 사람들의 평가와 더불어 문학계에서 소위 잘나간다는 사람들의 칭찬에도 귀가 쏠렸던 점.

계간지에 연재된 작품을 읽을 때는, 마치 단편들로만 여겨졌던 이야기가 단행본으로 읽게 되니 큰 줄거리를 이루었다. 그래서, 약간 이해도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작가가 이야기하는 시대적 사실들이 내가 경험한 그 시대의 것이란 점도 나의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배경에 대한 이해이지 소설에 대한 이해는 아니었다. 김연수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것일까?

전체적인 줄거리로 보아선, 운동권 학생의 이야기지만, 그것은 작중 화자의 이미지일 뿐 실제로는 운동권학생의 이야기가 아니다. 작중 화자가 독일까지 가게 된 배경으로서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소설 속에서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기에 읽기가 많이 더뎠다. 두번, 세번 읽으면 알까? 나는, 한국작가들이 80년대를 이야기하는 것에 지쳤다. 90년대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것에도 재미를 못느끼겠다. 한 30년 지나면 나도 김연수처럼 90년대를 바라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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