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픽션을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가?

인생살이의 많은 것들이 대부분의 많은 남성들은 그저 주어지는 것일 때, 

여성이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싸우고  쟁취해야 하는 것이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페미니즘이 출발할지도 모른다.

만약에 우리가 다같이 가난하고, 다같이 자기만의 방이 없으나 다 같이 열심히 일한다면 세상을 향해 여자들이 이렇게 싸우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문제는 언제나 불평등이다.


하필이면 이 책이 "글쓰는 여자의 공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것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기인할지도 모른다.

그 힘든 공간을 만들어내고 어쨌든 글을 썼던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말이다.

이 책을 손에 든 것은 왠지 짜릿할 듯한 이 제목 때문이다.

어쩌면 내 안에 내재해 있는 훔쳐보기에 대한 은밀한 욕망의 발현일지도 모르겠다.

좀 더 순화해서 말하자면 궁금증, 호기심이겠지만 어차피 호기심이나 훔쳐보기나 오십보 백보다.


솔직히 책은 실망스러웠다.

제인 오스틴의 유러스러한 말로 시작할 때는 기대감을 잔뜩 갖게 했는데 말이지.

"홀 부인이 어제 아이를 유산했어. 출산 예정일을 몇 주밖에 안 남기고 말이야. 무슨 충격 때문이라는데 내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자기 남편 얼굴을 쳐다보고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 ㅡ (32쪽)


시작부터 빵 터졌는데 문제는 이게 끝!!!!!


그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얼굴과 그들의 공간, 그리고 그들이 한 말 중에서 인상적인 문장들을 뽑아놓은 장들이 이 책의 재미의 다였다. 

사진만 봐도 별 문제 없을 듯한 책이다.


대부분 평범한 서재였지만 가끔은 특이한 곳들이 눈에 띈다.



거투르드 스타인은 글을 쓰기 전에 그림을 보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온 벽을 그림으로 장식해놓았고, 설사 피카소의 그림이라 할지라도 맘에 안 들면 글쓰기에 방해된다고 불평하며 입맛까지 달아난다고 했다니...

부러운 이다.

그림으로 가득찬 벽과 커다란 책상, 나의 로망을 다 실현한 이 분은 그런데 왜 저렇게 불편한 자세로 글을 썼을까?





클로딘 시리즈의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는 말년에 고관절염으로 인해 침대에서 생활해야 했다고 한다.

침대에서 화장을 하고 손톱을 다듬고 사람들을 맞이하며 글을 썼다고 한다.

현대라면 완벽한 외출 또는 출근 복장인 그녀의 모습을 보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언가 외적인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 글쓰기의 시작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먹고 치우고 나서 아이 학원을 보내고 잠옷차림(이라고 쓰고 추리닝)으로 식탁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나는 이렇게 잡글만 쓰고 있다.

어쩌면 제대로 된 글을 쓰려면 집에서도 출근하는 것처럼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하는 의식같은 경건함이 필요한 걸까?




이 책속 작가들 중에는 이렇게 아예 야외에서 글을 쓰는 작가도 있다.

그 충격적인 죽음으로 인해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실비아 플라스.

그녀는 어디서나 글을 썼단다.

집의 구석진 계단에서도 이렇게 야외에서도 타자기를 들고 다녔다는데....

이렇게 치열하게 썼는데도 글쓰기가 그녀 자신을 구원해주지 못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사진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 도리스 레싱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직후에 인터뷰를 하고 있는 노작가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주변의 흔한 동네 할머니처럼 집앞 계단에 걸터앉아 인터뷰를 하는 모습!

아 진짜 이 사진 너무 좋다.

어쩌면 이분은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 취재진을 들이거나, 개인 공간을 공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듯하다.

그녀가 허락한 공간은 딱 집앞까지...

너희들 "Stop!!!"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이분의 이야기도 읽고 싶었는데 이 책속에는 사진만 있다. 

어쩌면 작가도 도리스 레싱의 공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가 싶은데 그럼에도 이 사진을 앞쪽 화보에 넣은건 나처럼 이 사진이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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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7-24 15:1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도리스 레싱 인터뷰 사진은 진짜 최고네요!!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07-25 02:06   좋아요 1 | URL
멋지죠? 이런 멋진 작가들의 글을 볼 수 있다는데 늘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7-24 16:3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ㅋ 도리스 레싱 사진 보고 왠지 친근함이 느껴졌어요 ㅋ 책은 전혀 안그렇던데~!!

바람돌이 2021-07-25 02:09   좋아요 2 | URL
책은 오싹하죠. 공포물도 아닌데 말이죠. ㅎㅎ
런던거리를 거닐다가 어쩌면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은 포즈예요. ^^
아니면 우리 시솔길을 걷다가도 만날 수 있는 할머니같죠? ^^

페넬로페 2021-07-24 16:4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실비아 플라스라는 작가의 이름을 처음 들어요. 근데 넘 멋지네요^^
그리고 노벨 문학상 작가인 도리스 레싱도요. 그 어디가 되었던 읽고 쓰고자 하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네요.
그래도 좋은 서재는 늘 저의 로망입니다^^

바람돌이 2021-07-25 02:12   좋아요 2 | URL
시인이자 단편소설 작가예요. 알라딘 서재분들이 이 분의 자전적 소설인 ‘벨 자‘를 많이 보시더라구요. 저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부엌에서 가스오븐에 머리를 집어넣어 자살한 것으로 유명해요.
도리스 레싱은 80대이 나이에도 글을 쓰지 않으면 몸이 아프다고 했다죠?
넓고, 푸른 정원이 보이고, 햇빛이 잘드는 그런 서재는 저도 로망입니다. 현실은 지금도 식탁에서 이러고 있어요. ㅎㅎ

그레이스 2021-07-24 16: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진들이 너무 멋있어요~♡

바람돌이 2021-07-25 02:12   좋아요 1 | URL
실제 책 자체가 글보다는 사진이 다했다는 느낌이에요.
다른 작가들의 초상 사진도 굉장히 인상적인 사진이 많았어요.

mini74 2021-07-24 17: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도리스 레싱. 저도 좋아하는 작간데 포즈가 딱 울 엄마 같아요 ㅎㅎㅎ

바람돌이 2021-07-25 02:13   좋아요 2 | URL
ㅎㅎ 우리 어머님들 포즈 맞죠?
시골길 가다보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포즈!!

붕붕툐툐 2021-07-24 17:2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제가 글을 못 쓰는 이유는 제 작업실이 없어서라 생각했는데, 실비아 플라스를 보니 그냥 글을 못 쓰는 거였네요. 도리스 레싱 멋져요~

바람돌이 2021-07-25 02:13   좋아요 2 | URL
저는 멋지진 않지만 서재가 있어도 글을 못씁니다. ^^

붕붕툐툐 2021-07-25 16:44   좋아요 1 | URL
와우! 서재 있는 여자시군요~ 멋지십니당~👍👍
그리고 저는 진심 바람돌이님이 글을 잘 쓰신다 생각하는데, 그게 다 서재 덕이라 안도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07-27 01:04   좋아요 0 | URL
서재는 있으나 저는 식탁을 더 좋아합니다. 여름엔 에어컨이 있고, 겨울엔 온돌이 더 따뜻하게 올라와요. ㅎㅎ
서재방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습니다. ㅎㅎ 그래서 남편 줘버렸습니다. 시험문제 낼때만 집중하려고 서재 이용해요. ㅎㅎ

scott 2021-07-24 18:3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제 포스팅에 도리스 레싱 작가님 서재와 집필실 사진 올렸습니다
마침 도리스 레싱 작품 황금 노트북 재독 하며 자료들 찾으면서 평전 읽고 있었거든요

새벽에 바람돌이님 포스팅에 댓글 달았는데
사라 졌어 엉 ( ´•̥̥̥ω•̥̥̥` )

바람돌이 2021-07-25 02:15   좋아요 3 | URL
아 스콧님 포스팅 보고 왔어요. 완전 감사 감사!! 스콧님 글 읽으니 도리스 레싱이 더 좋아졌어요.
우와 근데 정말 언제 이렇게 긴 포스팅 쓰고 책읽고 하시는지 궁금요.
혹시 잠은 주무시나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학교의 경쟁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크세노크라테스는 25년 동안 아카데미아의 수장으로서 플라톤 철학의 기본 방향을 거스르지 않으며 충직한 유산 관리인 노릇을 했다.
하지만 이는 곧 비판 정신이 생명인 철학적 창조력의 고갈을 뜻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뤼케이온에서 철학 연구의 새로운길을 열었다. 그의 관심은 이성의 눈으로 파악하는 수학 법칙의 세계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 확인하는 운동과 변화의 세계였다.
. - P185

사람은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삶을 얻는 데서 즐거움을 느낀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연구한 이론학은 이런 인간 본성의 표현이다. 특히 그의 이론학에서는 자연physis 에 대한연구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자연 세계 전체 · 생명 · 인간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고, 천문학 · 기상학 · 물리학 ·화학·생물학· 심리학 등을 학문으로 정립했으며, 이 모든 학문을 위한 수단으로서 논리학의 기초를 놓았다. 그의 연구에서 진지한 고려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은 아카데미아에서 중시한 기하학이나 수학뿐이다. 그에게 자연에 대한 얇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리 인식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순수한 학문이었다.
- P191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 중에도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많다. 특히 윤리학 · 가정학 · 정치학 분야 저술이 그런데, 그는 이를 한데 묶어 "인간적인 것에 대한 철학"(니코마코스 윤리학』 X 9)이라고 불렀다. 이 철학의 질문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잘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인간을 잘 살게 하는 정치는 어떤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런 실천철학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것이 동물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과제였다.
- P224

인간은 지성의 능력 덕분에 자연의 사다리 꼭대기에 올라섰지만, 바로 그 능력 때문에 추락의 위험성을 항상 안고 산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정치와 윤리는 인간의 삶에서 있으면 좋고 없어도 크게아쉬울 것 없는 사치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최악의 상태로 추락하지 않고 지성적 존재로서 잘 사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런 생각에서 출발해 각각 개인과 국가 공동체의 수준에서 어떻게인간이 잘 살 수 있는지를 연구한다.
- P235

가치의 기준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주관적 즐거움을 행복의수단으로 내세우는 행복론은 사회적 불행을 방치하고 조장하는 위험한 이론이 될 수 있다.
- P238

이 즐거움은 자기기만이나 자기 파괴에서 오는 즐거움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 능력을 올바르게 실현하는 데서 오는 자기실현의 즐거움이다. 결국 습성의 탁월성이란 우리가 ‘인간으로서 타고난 능력을잘 실현해서 잘 살게 하는 내면의 에토스고, 이 에토스는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얻어진 행동의 습관적 성향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찾은 것은 욕망이 내 주인이 되는 것이아니라 내가 욕망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 P248

나는 돌산을 지나면서 ‘레스보스의 납 자‘가 공정함의 은유일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철학과 실천적 지혜의 모든 것을담은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실천적 지혜는 레스보스의 납 자처럼유연하다. 그것은 탁월성이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를 개별적 상황에서 적용하는 지혜다. 곧은 잣대를 놓지 않으면서 울퉁불퉁한 현실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자‘의 삶이다.
- P252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정치학과 윤리학은 하나의 연장선위에 있다. 윤리학이 개인적 수준의 행복을 다룬다면, 정치학은 국가 수준에서 행복의 조건을 찾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사람도 국가라는 정치 공동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한 개인의 행목은 이 공동체를 띠나시 실현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이런 근본 전세히에 국기의 기원이니 구조, 다양한 정체와 동치술, 시민 교육 같은 문제를 다룬다. 물론 그 가운데 핵심은 정체에 관한 논의다.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가 국가의 질료 라면,
그것들을 결합시켜 통일체를 만드는 정체는 국가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건축자재들이 일정한 형상에 따라 조직되어 집이 만들어지듯, 국가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도 정체에 따라 국가를 이룬다. 그럼 행복한 국가를 만들어 내는 정체는 어떤 것일까?
- P259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체론에도 플라톤의 영향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정치학 연구는 과거에 존재했고 당대에 존재하는 수많은정체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스승의 연구 방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의 논리가아니라 경험적 관찰과 이에 바탕을 둔 이론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연구는 그가 생명체를 연구할 때와 똑같은 태도와 방법을 취한다. 그는 생물학에서 개별 종을 관찰해서 그것들의 신체적,
기능적 특징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동물을 다양한 단위로 분류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개별 정체를 관찰하고 그것의 특징을 분석했으며 유형을 분류했다. 플라톤이 처음 착안한 여섯 가지 정체분류는 이렇게 해서 더 확고한 기반을 얻는다.
- P260

목표를 올바로 세우라! 하지만 현실적 조건을 무시하지 말고 그 안에서 목표를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숙고하고 이를 실천하라! 동물이 아닌 인간에게는숙고와 선택을 통해 주어진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는 이것이 도시국가의 황혼기를 산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담아낸 미네르바의 지혜고, "인간적인 것에 관한 철학"의 핵심이며,
그로부터 2400년 뒤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사람다운 삶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 P277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눈을 연다는뜻이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배운다는 의미다. 수많은 이론들에 현혹되는 우리에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관찰하고 또 관찰하라!‘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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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뜻에서 아리스토텔레스 학문 전체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현상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인간적인 것에 관한 철학", 즉 인간의 의식활동에 대한 기술, 습성과 행동의 상관관계에 대한 분석, 수많은 정치체제에 대한 기록은 그 가운데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그의 현상학적 논의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는 그의 안내를 따라우리 안에서 또는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실험이나 측정 기구 없이도 관찰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읽기의 가장 큰매력이라고 생각한다.
- P17

‘관찰자‘와 ‘국외자‘를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테오로스theros‘ 다.
객관적으로 관찰하려면 국외자의 시선이 필요하고, 국외자가 할수 있는 일이 관찰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명적으로 ‘테오로스‘
의 삶을 살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그곳 사람들의 운명을 걱정하며 철학을 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 P22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과 달리 현실에 참여하지 않았으며참여할 수도 없었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인간의 현실과 그를 둘러싼 자연의 현실을 더욱더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생애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각각 비오스 테오레티코 스 bios thedretrikos그리고 비타 콘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 즉 ‘관찰자 삶의 전형을보여준다.
- P23

다채로운 자연이나 사포의 애절한 서정시 말고도 레스보스섬을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다. 레스보스는 서양 생물학의 탄생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섬에 머물면서 물고기와 철새 들을 연구한 것이서양 생물학 연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레스보스는 식물학과 광물학의 고향이기도 하다. 레스보스에 함께 머문 것을 시작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탐구에 동행한 테오프라스토스가 식물과 광물을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은 레스보스의 에레소스가 고향인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레스보스섬 체류를 권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에레소스의 해변에 사포를 기리는 조형물과 함께테오프라스토스의 두상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94

아테네의 아카데미아를 떠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레스보스는 새로운 아카데미, 노천 아카데미아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적변증술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관찰과 기록이었다.  - P117

카페에서 한 시간 넘게 나눈 대화는 난민 문제로까지 이어졌다.
내가 난민 때문에 고민이 있지는 않은지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우리도 난민이었다." 여행 전 본 기사에서 시리아난민 아기에게 우유를 먹이던 할머니가 했다는 말과 똑같았다. 기사에 따르면 어머니가 "1922년 그리스-터키 전쟁을 피해 레스보스섬에 온 난민" 이었다는 할머니는 "난민 자녀로서 그들을 친절하게대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라고 말했다.
- P131

윤리적으로승인된 행동은 반복을 통해 내면의 습성으로 굳어진다. "우리는 정의로운 일을 함으로써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절제 있는 일을 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며, 용감한 일을 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II 1) 이것이 에토스다. 에토스는 흡혈박쥐의 나눔처럼 고정된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획득된 행동 성향이다. 공동체는 에토스를 공유하며 윤리를 형성한다. "난민 자녀로서그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도덕적 의무"라는 레스보스섬 할머니의 말은 이런 에토스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 P133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사람도, 마케도니아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아테네에서 시민권이 없는 거류민이었다. 이런 조건이 정치에대한 거리두기를 내면식 성형으로 굳히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강력한 정치적 발언은 대중의 마음과 권력을 얻으려는 의지가 있을때 강해진다. 이소크라테스나 데모스테네스는 그런 권력의지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의지를 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에게서 앞을 향한 의지는 권력을 향한 의지를 대신했고, 그는 이 의지를 최대한 발휘할 조건을 찾았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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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부인이 어제 아이를 유산했어. 출산 예정일을 몇 주밖에 안 남기고 말이야. 무슨 충격 때문이라는데 내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자기 남편 얼굴을 쳐다보고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
"여자가 청혼을 거절하는 것은 남자들에게 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ㅡ 제인 오스틴
- P32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마음놓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ㅡ 버지니아 울프
- P84

유르스나르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쓴 작가로, 호텔 객실에 있건, 야간열차 안이건, 여객선 선실에 있건, 어디서든 머릿속을 비워놓은 다음 그 안을 소재와 주인공들로 채워넣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의 초안도 그렇게 탄생했다. 기차 안 또는 강의를 하러 가는 차 안에서 한 권의 참고 서적도 없이 쓴 것이다. "이따금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글을 쓰기 전에 한두 시간 정도 그리스어 공부를 했지요."
- P148

사유하지 않는 것
그것이 범죄다. ㅡ 한나 아렌트
- P158

보부아르는 본인의 회고록 마지막 권인 『종결산」에서 이렇게썼다. "나는 대작가가 아니다. 대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히 전해주는 데서 존재 가치를 두고 싶다."
- P182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이야기되는지가 중요하다.
ㅡ 엘사 모란테 - P205

글로 쓰인 단어들에는 인간 본성의
가장 고귀한 부분부터 가장 추악한 부분까지
끌어내는 놀라운 힘이 있다. ㅡ 나딘 고디머
- P241

당신이 정말로 읽고 싶은책이 있는데 
아직 그런 책이 없다면
당신이 직접 써야 한다. ㅡ 토니 모리슨
- P256

상상할 수 없다면 가질 수도 없다.
ㅡ 토니 모리슨 - P261

나는 글을 쓸 때면언제든 약한 쪽에 서려고 노력한다.
강한 쪽은 문학이 설 곳이아니니까.
ㅡ 엘프리데 옐리네크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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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으로부터 이어진 넓은 길은 조사위원들을 "절대적 폐허의무(nothingness of absolute ruin)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식은 용암지대와 같은 회색의 돌무더기와 자갈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무질서하게 흩어진 돌조각과 콘크리트 건물의 잔해, 여기저기 크게 쌓여있는 돌무더기, 부서진 벽, 불타고 남은 건물 목재, 잿빛의 기둥, 바닷가에서 퍼온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있는 자갈들까지 그곳에는 무엇 하나온전한 것이 없었다. 몇시간의 조사를 통해 대략적으로 과거의 건물들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지 그저 추측 가능했을 뿐이다.  - P173

이렇듯 수많은 북한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유쾌하게 웃으면서 지내다.
가도, 언제든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심연으로 급속히 추락하곤 했다. 사실상 이 당시 북한사람들의 상당수가 일종의 정신적 외상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다. 가족과 이웃을 잃고 자신의 모든 재산이 한줌의 재로 사라진 상황 속에서, 그리고여전히 폭격기가 일상적으로 머리 위를 배회하는 상황 속에서 정신적건강함을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P188

이 감옥들은 전쟁 이전 시기의 물류창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을 내에서 가장 큰 농산물 보관소나 화약창고 같은 곳이 사람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활용되었다. 응당 이곳에는 화장실이나 세면실 같은 것이 따로 설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이곳에 함께 수용된 수많은 성인남녀와 아이들에게 엄청난 수치심과 모욕감까지 안겨주었다. 마치 2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를 향해 달려가던 유대인 수송열차 안처럼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용소행 열차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져 죽고 밟혀 죽고 병들어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황해도의 여러 창고 안에서도 병약한 아기들과 노약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어나갔던 것이다.
- P194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지역 기독교 인구가 급증하는 데 ‘전쟁‘ 이라는비평화적 상황이 매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의 전화(戰禍) 속에서 민중들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위해 서양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교회로 몰려들면서 기독교가 평안도와 황해도 각처로 급속히 확산되어 나간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기에는 동일한 믿음을 갖고 생존을 위해 교회로 몰려갔던 사람들이 과거와는 달리 비참한 상황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주민들은 미군이 교회를 폭격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집단적으로 폭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들 중 하나였던 교회는 오히려 미군 폭격기의 주요 타깃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펠턴이 노인에게 물었다.
- P196

"당신은 기독교도인가요?"
그는 대답하기를 거부하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펠턴은 다시 물었다.
"크리스천이세요?"
노인은 고개를 들면서 펠턴을 응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펠턴은 포기하지 않고 세번째로 반복해서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기독교인이었지. 평생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어. 하지만 지금은……"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의 노쇠한 몸이 떨리고있었다.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았기때문에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 P197

이렇듯 미군을 학살의 직간접적 주체로 지목하고 있는 증언들은 사실상 국제여맹 조사단 활동의 정치적 성격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분석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최근 국내학계의 황해도 집단학살에 대한 연구 성과들에 의하면, 학살사건의 명백하고 중요한 가해사 중 하나로 이 지역에 뿌리를 둔 한국인 ‘우이 치안내‘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을 개진하고 있는 논저들은 대체로 한국전쟁당시 황해도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대부분 피란민)의 구술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관련 구술자료는 꽤나 일관성 있고 방대한 편이다. 우익청년들의 학살행위에 대한 미군의 직접적 지시나 방조 여부에 대해서는여전히 학계 내의 합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황해도 본토박이우익청년들의 학살행위 가담은 부인하기 힘든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
- P205

1948~49년 제주4·3사건 당시 진압군을 지휘했던 박진경,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이 그로부터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위와 같은 폭력적군사문화의 일본군 하급 장교였다는 사실은 결코 쉽게 간과할 사안이아니다. 게다가 4·3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948년 여순사건 당시에도 온건한 입장의 송호성(宋, 광복군 출신)을 대신하여 일본군 출신의 백선엽(白善華), 백인엽(白仁壁), 김백일(金山一), 김종원(金宗元) 등이강경진압을 주도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신참변과 난징대학살로 이어진 일본군의 잔혹한 폭력성은 불행히도 해방 직후의친일파 미청산 및 친일군인들의 권력 장악과 함께 한국현대사 속에서부활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펠턴은 산 사람을 생매장하고, 나체로 끌고 다니고, 무차별적으로 신체를 훼손하는 일이 믿기지 않았겠지만, 수년 전 일본군이 점령했던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이 같은 일들은 언제든 현실에서 재발 가능한 악몽이자 트라우마와도 같은 사건들이었다.
- P226

국제여맹의 현지조사 시점은 미공군의 ‘초토화정책 수행 직후의시점이었던 것이다. 1950년 11월 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북한지역내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 군사적 목표로 간주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실제 11월 8일 신의주 대공습을 시작으로 북한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불살라버리는 작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1950년 11월 북한 주요 도시들의 파괴율에 대한 미공군 자체 평가에 의하면, 만포진 95퍼센트, 고인동 90퍼센트, 삭주 75퍼센트, 초산 85퍼센트, 신의주 60퍼센트, 강계75퍼센트, 희천 75퍼센트, 남시 90퍼센트, 의주 20퍼센트, 회령 90퍼센트가 완전 파괴되었다고 한다. 폭격 피해에 대한 국제여맹의 주장은 전혀과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 P286

보고서 발표 직후 덴마크의 한 언론은, 이 여성들이 자신의 고국으로돌아오기 전까지 "서방 국가의 어떤 사람들도 한국 민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 P294

그러나 북미와 서유럽에서 위와 같이 국제여맹 보고서에 대해 다소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례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보고서에 반영된 여성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철저히 묵살되거나 노골적으로 탄압받곤 했다.
미국정부의 공식적 반응은 철저한 무시와 무대응이었다.  - P295

1951년 매카시즘이 정점에 달해 있던 미국에서 레드콤플렉스를 활용한 특정 세력의 무력화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미국정부는 그 같은 ‘빨갱이‘ 낙인찍기 임무를 미국 내의 보수적 여성단체들에게 위임했다. 정부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 대신, 자국 내의 애국주의적 여성단체들을 활용해 좌파적 여성평화운동을 억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 P295

그런데 국제여맹은 한국에 조사위원회를 보낸것이 결정적 문제로 지적되어 , 결국 1951년 유엔 내의 모든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16 냉선 초기 가 많은 회원국을 거느리고 있던 국제여성단체가 한국전쟁 관련 활동을 이유로 유엔 내 지위를 완전히 박탈당했던 것이다.
- P296

수난은 국제여맹이라는 조직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러명의한국전쟁 조사위원들이 북한지역 조사활동을 이유로 끔찍한 정치 · 사회적 탄압을 받았다. 물론 중국, 소련,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공산국가출신 조사위원들은 귀국 후 특별한 정치적 조치를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P296

명확한 자유주의적 정치성향의 덴마크 조사위원들이 북한여성 원조에 적극적으로 임한 이유는 간명했다. 북한지역에서 다수의 타협할 수없는 진실들" (irreconcilable facts)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펠턴의 관점도 마찬가지였다. 펠턴은 조사 과정 내내 다양한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 있었다. 펠턴은 이를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이란 "시체가 매일 쌓여갔다"는 것이었다. - P316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전쟁 상황하에 살아가고 있다. 분단체제라는 전쟁과 같은 굴레 아래에서 문자 그대로 악전고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전쟁의 지속‘과 ‘전쟁의 형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제기했던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전쟁이 왜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지, 그 수행 방식은 왜 그토록 잔인했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더 진지하고 집요하게 물어보아야만할 것이다.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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