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는 서평집이 또 하나의 대세인지 자꾸 서평집을 읽게 된다.
제법 읽었던 서평집들 중 지금 읽고 있는 이 책
와우! 멋지다.
미친듯이 줄그어 가면서 읽고 있다.
정희진씨의 서평집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와 연달아서 읽어 약간 비교가 되는데, 그 비교는 일단 다 읽고 하기로 하고.....
내 입장에서는 이라영씨의 이 서평집이 좀 더 간절하게 다가온다.
고통과 소외에 대한 이해가 없는 지적 작업은 왜 위험한가. 타인의 고통이 세상에 더 잘 들리도록 목소리의 연대를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외면함으로써 스스로 고통의 방음벽이 된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른다. ‘나는 몰랐다‘라는 뻔뻔한 항변은 앞으로도 알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타인에게 고통의 방음벽을 놓는 행위는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은, 그저 이기적인 인간의 간접적인 폭력 행위에 불과하다. - P20
나는 분노한다. 분노에 잠식당하지 않으려고 읽고, 보고, 쓴다. 수시로 우울하다. 우울함과 잘 살아가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 분노와 우울을 오가는 와중에도 오만이 싹튼다. 내오만을 다스려 무지를 발굴하기 위해 읽고, 보고, 쓴다. 몸을움직여 이야기를 전하러 가는 그 ‘북우먼‘들처럼 나도 꾸준히몸을 움직이고 생각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그렇게 성실하게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 믿는다. - P28
2017년 가을 전미도서재단의 평생공로상을 받은 애니 프루는 수상 소감에서 오늘날을 "카프카적인 시대A Kafkaesquetime" 라고 말하며 입을 열었다. 암울하며 모순으로 가득 찬 부조리의 시대라는 뜻이다. 믿고 싶은 가짜뉴스를 신뢰하며, 불리한 사실을 외면하면서 소외와 차별의 역사에 일조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폭력에 무디어지고 있다. 이 모순의 시대를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 P40
의사가 아는 사람이라면 환자는 ‘알려진 사람‘이 된다. 마찬가지로 이 사회에서 발화 권력을 가진 주체들은 ‘아는 사람‘이지만 약자와 소수자들은 그들에 의해 ‘알려진 사람‘이 된다. 사회의 소수자들이 알려진 사람이 되지 않고 스스로 발화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 P53
여성의 성폭력 생존기도 일종의 트라우마 회고록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저항서 사다. 질병이 흔적을 남기, 폭력도 사람의 몸과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성폭력 피해자를 ‘피해자‘라고만 하지 않고 피해 생존자‘ 혹은 ‘고발자‘라고 하는 이유는그의 삶을 ‘피해‘ 안에 가두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성폭력 피해는 극복과 치유의 대상으로 머무르기보다 적극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 이야기다. 말하지 않는 피해자가진정한 피해자가 되는 문화를 휘청거리게 하기 위해서는 기를 쓰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꾸는방식이다. - P60
법과 관습을 지배하는 남성 권력이 여성의 신체를 오직재생산과 성애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언어를 통제한 채 어떻게 착취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몸과 언어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사회의 약자와 소수자들이 공통적으로 몸과 언어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니압제자에게 깔린 몸과 언어를 구출하러 끝없이 깊고 깊은 해저를 탐험하기로 한다. 불태워진 ‘마녀‘들은 부활할 테니. - P74
나를 집어삼키려는 폭력적 욕망 앞에 굴하지 말고 놀아야 한다. 노는 여자와 정숙한 여자를 분리하는 사회에서 정숙한 여자는 안전한가. 그럴 리가. 정숙한 여자는 남편, 아버지, 오라등 가족관계에 있는 남자들이 ‘알아서 지배하도록 사회가 나버려둘 뿐이다. 노는 여자가 안전할 때까지 여자들은 제 자신을 실험할 권리가 있다. - P108
돌아다니는 여자에게는 언제나 소문이 따라온다. 남자라무슨 관계일까, 가서 뭐 했을까, 여자가 말이야…... 그러거나말거나, 오늘도 여자들은 설치고 돌아다닌다. 도시를 유당하는 만보객은 대체로 남성이었다. 런던을 돌아다니며 제 언어로 도시를 스케치한 버지니아 울프의 ‘런던 산책기‘가 반가운까닭도 여성의 돌아다님이 남성보다 많은 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쁜 발에 머물지 않고 여행하는 발, 노동하는 발, 곧제 길을 찾아 나서는 발들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움직이는 몸에서 움직이는 생각을 발견한다. - P125
여성의 미덕은 언급되지 않는 것이다. 사라지라는 뜻이다. 가장 훌륭한 여자는 죽은 여자다. 여성의 피해 경험이 사회를 전복시키는 발화로 작용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영원한 ‘피해자의 자리에 처박아두고 관음하기 위해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피해자 되기‘를 부추긴다. - P134
2003년 떠난 노동자 김주익의 유서에도, 2004년떠난 노동자 김춘봉의 유서에도, 그리고 또 다른 노동자들의수많은 유서에 "나 한 사람 죽어 ~할 수 있다면"이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그들은 죽음으로 목소리 내고자 했다. 살고 싶어서 죽은 사람들이다. 내 슬픔은 누구에게 등을 보이는가. 내 슬픔은 누구의 얼굴을 바라보는가. 이름 없이 공적인 얼굴을 상실한 자들을 애도하고 싶다. 1991년 부산에서 한 노동자는 팔에 다음과 같이적고 투신자살했다.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고 미경이다." 그는 권미경이다. - P159
인간은 순환하지 않는다. 그러나 연대를 통해 말을 이어갈 수는 있다. 누군가의 고통 끝에 있는 문을 닫아버리는 애도가 아니라 활짝 열고 그 고통의 청취자이며 용감한 목격자가 되는 애도를 이어갈 수 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그렇게 타자를 통해 순환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 P165
인정받기에 대한 불안을 잠재울 용기가 없으면 은둔할 수 없다. 대부분은 ‘셀러브리티‘를 욕망하지는 않더라도 ‘노바디 obvity가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에 비하면 ‘무명인‘, 곧 ‘나는 아무나다‘라고 말하는 자세는 내면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단단함이 있기에 가능하다. - P193
여자 인생의 서러움을 쏟아내며 서러움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서로의 서러움을 위로하지만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한다. 때로 이런 형태가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유통된다. 가부장제에서 수용 가능한, 가장 안전한 페미니즘의 형태다. 서러움에 대한 공감으로 분노를 해소한 뒤 다시 가부장제에서 마련한 제자리로 돌아가 성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올바른 여성들. 싸우면서 식구들 밥은 다 챙겨주는 태도, 그야말로 ‘빨래터 수다‘로 한풀이를 할 뿐 남성에게 아무런 불편함을 주지않는 목소리가 가부장제가 허락한 페미니즘이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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