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신동 탄생‘은 아이의 재능에만 달린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모차르트 가족의 그랜드 투어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감안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일러준다. 아이의 재능을 조기에 발견할 수있는 부모의 전문가적 식견과 아이가 충분히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마련해주는 추진력이다. 모차르트 가족의 그랜드 투어는 레오폴트의 예술적 감식안과 추진력,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이라는 삼박자가 행복하게 맞아떨어진 경우였다.
- P72

그랜드 투어를 떠날 당시에 이들 남매는12세와 7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로 돌아왔을 때 난네를은 15세, 모차르트는 10세였다. 더구나 이들 남매의 놀라운 재능을접한 유럽 궁정 귀족이나 상류층은 똑같은 재주에 두 번 놀라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모차르트 남매의 음악적 재능도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에서 예외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성공리에 유럽 투어를마쳤지만, 정작 레오폴트의 시름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레오폴트는 어떤 비장의 카드를 마련하고 있었을까.
- P87

따지고 보면 이유는 여러 가지다.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면 베토벤의 음악적 유산을 충실히 계승할 것인지, 고전주의 양식은 완성된 것으로 보고 오페라 같은 다른 분야로 개혁을 확산시킬 것인지를 놓고 독일 음악의 진영이 양분됐다. 이 복잡다단한 논쟁을 딱 한마디로 압축하면 ‘교향곡이냐 오페라냐‘가 된다. 전자에 해당하는슈만과 브람스가 교향곡에 매진했던 반면, 후자의 대표 주자인 바그너가 음악극의 혁신을 주도했던 건 우연이 아니다. 미리 의도했던 건 아니었지만 이러한 현상은 교향곡과 오페라의 교집합이 줄어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 P90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에 들어맞는 예외적 존재가 모차르트다. 교향곡 41 곡과 피아노 협주곡 27곡, 바이올린 협주곡 5곡과 현악 4중주 23곡, 오페라 22편까지 정식 번호가 붙은 작품 수만 봐도 어디하나 빠지는 장르가 없는 전천후 작곡가가 모차르트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은 그 속에서 18세기 전체 음악을 듣게 된다"는스위스의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 P90

한 가족에서 두 스타가 탄생하기 힘들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클래식 음악사에서유독 여성들이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힘들다. 단네를 역시예외가 아니었다. 1769년부터 남동생 모차르트가 이탈리아에서 눈부신 음악적 성과를거두는 동안 난네를은 어머니와 함께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었다. 반대로 1777년부터 모차르트가 어머니와 파리 여행을 할 당시에는 레오폴트와 함께 잘츠부르크에 머물러다했다. 난네를 역시 작곡을 했고, 동생 모차르트도 편지에서 난네를의 작품을 듣이 평가했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편지에서 난네를의 작품에 대해서는 언급한 적이 없다. 레오폴트가 특별히 비정하거나 부당했다기보다는 남녀 차별적인 당시의 고정 관념이 투영된 결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아쉽게도 난네를의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 P114

마지막으로는 신분적 질서의 대립도 깔려 있었다. 아버지 레오폴트는 음악가가 교회와 궁정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않으면 비렁뱅이신세로 전락하는 봉건적 세상에서 실있다. 반면 모차르트는 봉건적질서에 넌더리를 내고 ‘프리랜서 음악인‘이라는 전인미답의 세계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이들 부자는 세대와 지역, 신분이라는삼중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눈에는 아버지 레오폴트와고항 잘츠부르크, 내주교가 구질서의 삼위일체 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이들 부자의 진정한 비극이었다.
결과적으로 모차르트는 대주교와의 갈등을 통해서 아버지 레오폴트로부터도 독립을 쟁취한 셈이었다. 거꾸로 레오폴트의 입장에서는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떠나려는 모습이 자신에 대한 거부로 보였을 것이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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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4-25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차르트한테 누나가 있었군요 그것도 재능이 있는... 버지니아 울프가 셰익스피어한테 여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걸 쓰기도 했던데, 모차르트한테 누나가 있었네요 누나가 쓴 곡은 전해지지 않았다니 아쉽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4-25 02:04   좋아요 1 | URL
굉장히 재능이 뛰어났다죠. 그럼에도 동생에게 밀렸고, 아버지 레이폴드에 의해 결혼한 이후 평범한 삶을 살았다는데 어쩌면 그녀의 재능도 모차르트 못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대인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동쪽에서의 총살은 어떤 식으로든 수십만 명의 소련인과 연루된 일이었다(그런 점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라인 서쪽인 피점령 폴란드 소재죽음의 공장들에서 중요한 작업은 소련인들이 했다.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베우제츠에 소련인 직원들이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독일군이 부역자를 필요로 하고, 찾아냈음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부역활동은 증오스러운 파시스트 침략자들에게 가열차게 저항함으로써, 조국의 영예를 지켰노라‘는 ‘단합된 소련 국민이라는 신화에 걸림돌일 수밖에 없었다. 그 점에서 유대인 대량학살은 잊혀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 P613

소련 유대인의 크나큰 인명 피해, 그 대부분은 소련이 침략한 땅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들 유대인은 폴란드, 루마니아, 발트 삼국의 국민이었으며, 독일의 침공이 있기 전까지 고작 21개월(폴란드의 경우),
또는 12개월(동북부 루마니아와 발트 삼국의 경우) 소련의 치하에 있었을 뿐이다. 전쟁 중 고난을 겪은 소련 국민은 대부분 독일군의 점령이전에 소련 체제에서 고통받았다. 소련과 나치 독일의 동맹 때문이었다. 이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소련의 입장에서 전쟁은 1941년에 시작되었으며, 고통받은 국민은 "평화롭던 소련 인민 "이어야 했다. - P617

 소련 유대인은
"근본 없는 코즈모폴리턴" 이면서 "시오니스트일 수 있었다. 미국에이끌리는 유대인은 미국의 새로운 위성국가를 지지할 수도 있으리라.
이스라엘에 이끌리는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새 종주국을 지지할 수도있으리라. 어느 쪽이든, 아니 둘 모두일 수도 있을 텐데, 소련 유대인들은 더 이상 믿을 만한 소련 국민일 수 없었다. 적어도 스탈린의 눈에는 그랬다.
- P624

홀로코스트는 많은 유대인을 공산주의로 이끌었으며, 소련을 해방자로 여기는 이념을 따르도록 했다. 그러나 이제는 폴란드의 통치권을 유지하고 스탈린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지도적 유대 공산주의자들이 홀로코스트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1946년 12월, 베르만은 이미 그 방향으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유대계 폴란드인의 사망자 공식 통계 발표치는 크게 늘리는 반면,
유대계는 줄여서 양쪽 다 같은 숫자(300만 명씩)가 되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홀로코스트는 이미 정치적 문제가 되어 있었는데, 그것도 위험하고 어려운 사안이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역사적 사건과 마찬가지로 변증법적으로 이해되어야 했다. 그것이 스탈린의 이념 노선에, 그리고 현재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 P635

서구와 미국 역사가와 기념운동가들은 스탈린주의적 역사왜곡을 시정하려 하면서도 아우슈비츠 동쪽에서 희생된 거의 50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과 나치에게 죽은 거의 500만 명의 비유대인 희생자는 간단간단히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동방에서 특히 유대인들이 많이 죽어간 사실과 서방에서의 지리적 조건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홀로코스트는 유럽사에서 제자리를 찾았다고 볼 수 없다. 유럽인과 그 밖의 사람들이 아무리 ‘홀로코스트를 잊지 말자고 말한다고해도 말이다.
스탈린의 제국은 히틀러의 그것을 포괄했다. 철의 장막은 서방과동방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도 장벽을 마련했다. 이제 그 장막이 걷힌 상태에서,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볼 수 있다.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있었던 유럽의 참된 역사를,
- P669

모든 죽음은 숫자가 되었다. 이오시프에서 유니타의 죽음 사이에나치와 스탈린주의 체제는 블러드랜드에 1400만 명 이상의 피를 뿌렸다.  - P671

집단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유대인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집단수용소로 보내진 유대인들은살아남은 유대인들에 속해 있었다. 그것이 집단수용소가 유명해진또 다른 이유다. 그들은 수용소에 대해 설명했다. 오래 일하다가 끝내죽은 사람들이 아니라, 전쟁 끝 무렵에 들어와 바로 해방된 사람들이.
유럽 유대인을 말살하려던 독일의 정책은 집단수용소가 아니라 헤움노, 베우제츠, 소비부르, 트레블린카, 마이다네크, 아우슈비츠 등지의구덩이, 가스 차량, 살인 공장 등으로 실행되었다.
- P675

독일 점령 상태에서 대부분의 폴란드계, 소련계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가 주요 살인 공장이 되기 전에 이미 학살당한 상태였다. 비르케나우의 가스실과 화장 복합시설이 1943년 봄에 자리잡았을 때,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된 유대인의 4분의 3 이상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다시 보자면, 소련과 나치 체제의 손으로 의도적으로 살해된 수없이 많은 사람의 90퍼센트 이상은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이 가동하기 시작할 무렵 이미 끝장나 있었다. 아우슈비츠는 죽음의 푸가의 ‘코다 밖에 안 되었다.
- P676

그로스만 소설의 등장인물 하나가 부르짖듯이,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핵심적인 공통점은 일정 집단의 사람들에게서 사람으로여겨질 권리를 빼앗는 그들의 능력에 있었다. 따라서 유일한 답은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외치는 일, 외치고 또 외치는 일뿐이었다. 유대인과 부농은 사람이다. 그들도 사람인 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 모두가사람임을 알았다. 이것은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허구적 세계‘라고 불렀던 것에 저항하는 문학이었다.  - P681

스탈린은 유토피아를 재정립하는 능력이 있었다. 스탈린주의 자체가 목표 수정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추동했던 유럽 혁명에서, 그 혁명이 불발하자 소련의 방어로 후퇴한 것이었다. 1920년, 북은 군대가 공산주의를 유럽에 확산시키는 데 실패하자, 스탈린은 후퇴 계획을 마련했다. 일국사회주의,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를 하나의나라 소련에서 완성하는 게 먼저라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5개년 계획이 재앙을 가져오자, 그는 수백만 명을 의도적으로 굶어 죽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정책 추진 과정의 일환이라 설명하고, 그 덕으로 무서운 국부이자 정치국의 지배자라는 위상을 굳혔다. 1937년에서 1938년, 내무인민위원회를 부농과 소수 민족 박멸에 내세운 뒤, 그는 그것이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했다고 설명했다.  - P684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 정의상으로 희생자란 죽은 사람이며, 다른 이들이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이용하는 저항할 수가 없다. 희생자들의 죽음을 내세우며 어떤 정책을 미화하거나스스로와 희생자를 동일시하는 일은 쉽다. 범죄자들이 저지른 행동을 이해하는 일은 별로 매력이 없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더 중요하다. 어쨌든 도덕적 위험은 누군가가 희생자가 될 때보다 범죄자나 방관자가 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나치 학살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인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예를 들어 베네시나 예렌부르크 같은 비범한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전쟁 중에 그런 유혹에 빠졌다. 그 체코 대통령과 유대계 소련 작가는 그런 식으로 독일인들에 대한 복수를 정당화했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인간성을 부인해버리면 윤리란 불가능해진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
- P703

"나는 믿고 싶었기 때문에 믿었다." 그에게는 도덕 감각이 있었다. 비록 잘못되었지만, 마르가레테 부버노이만이 카라간다의 굴라크에 있을 때, 동료 재소자가 그녀에게 "달걀을 깨지않고 오믈렛을 만들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 많은 스탈린주의자와 그동조자들은 대기근과 대공포가 빚은 희생이 정의롭고 안전한 소련국가를 세우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그토록 희생자의 규모가컸던 것은 그만큼 희망도 강력했다는 뜻이다.
- P705

희생자는 애도자의 뒤에 가려져 있다. 살육자는 숫자들 뒤에 숨어있다. 막대한 죽음의 숫자를 읊조리는 것은 익명성의 흐름에 숨어버리는 일이다. 죽은 뒤에 서로 경쟁하는 국가별 추념에 따라 명단에 실리고, 개별적인 삶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숫자의 일부가 되어버리는것, 그것은 개인을 말살하는 일이다. 그것은 역사에서 빠지는 일이다.
- P715

블러드랜드의 대량학살의 역사에서, 기억은 다음과 같은 이름을포함해야만 한다. 포위 속에서 굶어 죽은 100만 명의(100만 배의 하나의) 레닌그라드 시민들 각각, 1941년에서 1944년 사이에 독일군에게 살해된 310만 명의 (310만 배의 하나의) 소련 전쟁포로 각각, 1932년에서 1933년 사이에 소련 체제 아래 굶어 죽어야 했던 330만 명의(330만 배의 하나의) 우크라이나 농민 각각도 이들의 숫자를 완전히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들을 나타내고 있다. 무시무시한 선택을 해야 했던 농민 가족, 구덩이에서 서로의 몸을 덥혀주려 애쓰던 포로들, 레닌그라드에서 가족들이 한 명씩 죽어가는 모습을 봤던 타냐 사비체바 같은 아이들,
- P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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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4-2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백 쪽이 넘는 책이네요. 저로선 엄두를 못 내겠네요. 그런 분량은 두 권짜리로만 읽어 봤어요.
책이 무거울 것 같습니다. 이런 책은 읽고 나면 뿌듯하지요.

바람돌이 2021-04-23 15:2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래서 제가 독서대가 필요했습니다. 너무 무거워요. ㅠ.ㅠ
이 책 읽을 때는 바른 자세로 책상에 앉아서, 아니면 서서 일게 되더라구요. 네 벽돌책은 우리의 올바른 자세를 위한 아주 좋은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좀 바쁜 주간이기도 해서 진짜 허덕이며 읽었어요. 딱 일주일 걸렸네요. 어쨌든 다 읽고 나니 뿌듯하기는 합니다.
 

여기에 따르면, 게토 봉기는 단순히 유대인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투쟁이었다. 이것은 폴란드 낭만주의의 언어로 받아들여졌다. 즉 누군가의 행동은 그것이 가져온 결과보다는 의도로 판단해야 하고, 희생은 고결한 것이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은 영원히 존경받을 고결함의 극치라는 것이었다. 때로는 과장되거나 때로는 망각되는 빌네드의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바르샤바 유대인 레지스탕스 문제는 유대인의 존엄성뿐만 아니라 누군가는 더 애를 썼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렇지 않았던 폴란드인, 영국인, 미국인을 포함한 인류의 전체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었다. - P526

독일군의 패배가 눈앞에 있다는 것은 분명 반길 만한 소식이었지만, 마찬가지로이내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접수할 것이라는 예상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폴란드 국내군이 독일군과 공개적으로 싸워 승리한다.
면, 그들은 붉은 군대가 자신들의 집을 차지하는 상황을 맞이할 것이었다. 반대로 그들이 독일군과 싸워 패배한다면, 곧 들이닥칠 소비에트에게 자신들은 손쉬운 상대이자 무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꼴밖에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소비에트와(혹은 서방 동맹국들과) 협상할 자리조차 얻지 못할 것이었다. - P536

이런 점에서보면, 폴란드는 소련뿐만 아니라 서방 동맹국들에게도 배신당한 것이었다. 이들은 폴란드인들에게 타협할 것을 요구하며, 폴란드인들의 손에 기대 이하의 결과물만을 쥐여주었다.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국토의 절반이 적국에 양보된 것이었다.
- P538

독일에 맞선 합동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스스로 정체를 밝힌 폴란드인들은 훗날 소련 지배에 저항할지 모를 위험인물들로 다뤄졌다. 소련은 폴란드 독립을 주장하거나 대변하는 조직 따위를 지원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소비에트 지도부 및 내무인민위원회의 눈에 폴란드인들의 정치 조직은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소비에트 책동의일부일 뿐이었다.
- P539

 소련의 관점에서 보면,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인들, 그리고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폴란드인들을 줄인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것이었다. 독일은 상당수가 겹치는 폴란드 지식인 및 폴란드 국내군 병사 제거라는,
소련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을 대신 해줄 것이었다.  - P550

미코와이치크가 모스크바에 도착한 1944년 7월 말, 영국대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건넸다. 즉 폴란드 영토의 절반인 동쪽 땅을 포기하고, (학살의 책임은 소비에트가 아닌 독일에 있다는 소련 버전의 카틴 대학살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미코와이치크가 알고 있던 것처럼, 루스벨트 역시 카틴에 대한 소비에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쪽을 선호했다.  - P551

 다 죽어가던 수감자들을 해방시킨 미군과 영국군은 자신들이 나치즘의 공포를 목격했다고 믿었다. 그들의 사진작가와 촬영기사들이 베르겐벨젠과 부헨발트 등지에서 찍은 사체 및 시체나 다름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히틀러가 저지른 최악의 범죄를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바르샤바 유대인 및 폴란드인들이, 그리고 바실리 그로스만과붉은 군대의 병사들이 인지하고 있었듯이, 이는 진실과는 거리가 먼이야기였다. 오히려 최악은 바로 바르샤바 폐허 속에, 트레블린카 벌판에, 벨라루스 습지대에, 바비야르 구덩이들 사이에 있었다.
- P561

스탈린은 자신이 구상한 동유럽 제국에서 대량학살 정책만큼은 구상하고 있지 않았지만, 폴란드는 인종적 순수성이 지켜지는 지역의중심이 되어야 했다. 독일은 독일인들만의 나라가 되고, 폴란드는 폴란드인들만의 나라가, 그리고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서쪽 지역은 우크라이나인들만 사는 땅이 될 것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소수 인종을 대표하기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한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나라의 소수 인종들을 청소하도록 시킬 작정이었다.  - P565

신생 폴란드는 피란이 추방으로 바뀔 때쯤 수립되었다. 휴전과 함께공식적으로 수복 지구로 불리던, 폴란드의 새로운 서쪽 영토에서는조직적인 인종 청소가 시작되었다. 1945년 5월 26일, 폴란드 공산당중앙위는 폴란드 영토 내의 모든 독일인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 P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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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여름까지의 유토피아는 다름의 네 가지였다. 바로 소련을 몇 주 만에 무너뜨릴 전격적 승리가 그 첫번째 였고, 두 번째 유토피아는 3000만명을 굶겨 죽일 굶주림 계획이었으며, 전쟁 뒤 유럽의 유대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릴 마지막 해결책이 그 세 번째, 소련의 서쪽 땅들을 독일의 식민지로 만들이른바 동유럽 종합 계획이 그 네 번째 유토피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이 되자, 히틀러는 유대인 말살에우선순위를 배정하는 쪽으로 전쟁 목표를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 그의 심복들은 그러한 바람들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적, 행정적 책임과 재량권을 지니고 있었다. - P337

정치적 계산과 그간 해당 지역 주민들이 받았던 고통들이 이들의그 같은 집단학살에의 참여를 온전히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폭력은 독일인들과 해당 지역 비유대인들을 한데뭉치게 만들었다. 분노는 독일이 바랐던 대로 소련에 협력한 자들보다는 유대인들을 향하게 되었다. 독일의 주장에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겪은 아픔의 원흉이 유대인들이라 믿었건 믿지않았건 이제 스스로가 새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행동을 통해 나치의 세계관을 좀더 분명히 해주고있었다.  - P353

하지만 이 같은 심리적 나치화는 너무나 명백했던 소련의 잔혹 행위들이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집단학살은 소비에트가 갓 들어와 그들의 시스템을 최근까지 안착시켰던 곳, 지난 몇달 동안 소련의 강압적 기관들이 체포와 처형 및 강제이주를 집행했던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소비에트와 나치의 공동작품, 즉 소비에트 텍스트의 나치 버전이었다. - P354

힘러는 이미 1941년 7월에 여성 및 어린이 학살을 대놓고 지지해오.
고 있었고, 따라서 1941년 8월에 벌어진 유대인 공동체 몰살은 앞으로 다가올 히틀러의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을 위한 일종의 맛보기 작업이었다. 그것은 파멸적 전쟁 뒤에 있을 환희에 대한 그림, 죽음 뒤에찾아올 새로운 삶, 다른 인종의 절멸 뒤에 나타날 한 인종의 부활에대한 청사진이었다. 나치 친위대 대원들은 그러한 꿈과 인종주의를공유하고 있었다. 보안경찰들도 이따금씩 그것을 공유했으며, 여기에참여하는 것을 통해 타락의 길을 함께 걸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독일 국방군 장교 및 사병들이 나치 친위대와 본질적으로 똑같은관점을 가졌던 것은 흔한 일이었다.  - P372

감시하던 독일인들은 이들에게 앞으로 그곳에서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 숨기려들기는커녕 구덩이를 잘 파라. 내일 네놈들 아내와 엄마가 묻힐 거니까"라고 했다. 이튿날인 8월21일, 우츠크에 있던 여자와 아이들이 그곳으로 끌려왔다. 즐겁게 웃으면서 먹고 마시던 독일인들은 여인들에게 "나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므로 살 권리가 없습니다"라고 외도록 했다. 그러고는 한 번에 다섯명씩 옷을 벗고 구덩이 앞에 나체로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했다. 다음차례인 여인들은 앞서 사망한 시체들 위에 나체로 누운 채 총을 맞았다. 같은 날, 유대인 남성들은 우츠크성 뜰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 P399

스탈린은 스스로 유대인 집단학살에 대해 언급한 지 불과 하루 만에 이렇듯 자기 자신과 인민을 옛 제정 러시아와 연결 짓고 있었다.
소련 서기장으로서, 다른 이들도 아닌 혁명 이전 러시아 역사 속 영웅들을 끌어들이면서 그는 이 유령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러시아인을 여사의 중심에 두는 방식을 통해, 독일의 침략으로러시아인들보다 더 큰 고통에 시달린 사람들을 비롯한 여타 소련 인민들의 역할을 암암리에 축소시기버리고 있었다.  - P407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벨라루스 땅에서 대략 총 200만 명의 인명 손실이 있었다고 보는 것은 적당하면서도 오히려 수치를 비교적적게 잡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밖에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독일을 피해 달아났고, 또 다른 200만 명이 강제노동을 위해 끌려가거나 여타 이유로 원래 살던 곳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944년에 시작된 소련의 강제이주로 25만 명이 넘는 사람이 폴란드로 추방당했으며, 수만 명 이상이 수용소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벨라루스 전체 인구의 절반이 죽거나 사라졌다. 이것은 유럽의 그 어떤 나라도 겪지 못한 비극이었다.
- P451

돼 숨을 거두게 된다. 앞선 1939년에서 1941년 사이, 독일에서는 이미 여섯 곳의 학살 시설이 장애인, 정신병자를 비롯해 이른바 ‘살려둘 가치가 없는 인간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가동되고 있었다. 히틀러의 총통부는 바르테란트 내 폴란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스 실험 뒤, 독일 국민을 학살하기 위한 비밀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이 프로그램은 의사, 간호사, 경찰 간부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핵심 기획자는 히틀러의 주치의였다.  - P460

그라이저 휘하의 제국대관구 수도 포즈난 보안방첩대SD의 수장은앞선 1941년 7월 16일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다. "다가올 겨울에는 모든 유대인을 먹여 살리기에 식량이 부족하다는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노역에 쓸 수 없는 유대인들을 일종의 신속한 대비 작업을 통해 먼저 없애버리는 것이 오히려 가장 자비롭고 인간적인 해결책은 아닌가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입니다.  - P462

동방 총독부에 있던 폴란드 유대인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리던 나치의 정책은 이제 죽은 하이드리히를 기리는 뜻에서 "라인하르트 작전"
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암살에 대한 언급은 독일인들의 화풀이 대상이 될 만한 희생양들을 만들어냈고, 유대인 대량학살은 그의 죽음에대한 보복으로 등장했다. 나치의 세계관에서, 1942년 5월에 벌어진하이드리히 암살은 1941년 12월 미국의 선전포고와 마찬가지 역할을 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공격받은 나치들 사이에 올곧은, 또 정당한 연대의 감정이 생기게끔 했고, 독일이 처한 곤경과 정책의 진짜 원인에 대한 관심을 흐트러뜨렸다. 하이드리히는 이 전쟁의 원흉인 이른바 전 세계적 규모로 펼쳐지는 유대인 음모에 희생된 매우 유명한 희생양이 되었다.
- P471

폴란드 유대인 학살이라는 단일 목적을 위해 지었던 트레블린카, 소비부르, 베우제츠의 학살 공장들과 달리, 아우슈비츠의 시설들은 독일의 유대인 및 기타 사람들에 대한 정책 변화에 따라 서서히바뀌는 모습을 보였다. 아우슈비츠 시설의 발달 과정은 동부 거대 식민지의 꿈이 유대인 멸족 프로그램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여실히드러내준다.
- P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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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이 받아들였던 것은 19세기 후반의 수정된 다원주의로, 이에 따르면 진보는 가능하지만 그것은 오직 인종 혹은 계급 사이의 폭력적 투쟁의 결과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폴란드의 상층 계급을 말살한다거나(스탈린주의) 원래 폴란드인들은인간 이하의 존재인데 감히 그에 맞지 않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계층을 파괴하는 것(국가사회주의)은 정당한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이 지점에서 서로 꽤 딴판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는 모종의 타협이 가능했고, 그것이 이내 폴란드 정복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두 동맹국은 서로 어마어마한 수의 이른바 잘 교육받은폴란드인 계급을 말살함으로써 폴란드에 피었던 유럽 계몽주의의 과실을 없애버렸다.  - P279

바로 현대 세계에서 거대한 대륙 제국이 세계 시장으로의 안정된 연결 통로 없이, 그리고 막강한 해군력 없이, 어떻게 번영을 누리며 자신의 지배력을 확보해낼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다.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스탈린과 히틀러가 내놓은 기본 답안은똑같았다. 즉 그런 국가는 반드시 넓은 땅을 보유하고 경제적 자급자족을 일궈낼 수 있어야 하며, 체제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따라서 스탈린주의의 내부적 산업화 혹은 나치의 식민지 토지개혁과 같은 이른바 자신들의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시민들을 보유해야만 한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사람은 풍부한 식량, 원자재, 광물자원으로뒷받침되는 거대 규모의 제국주의적 경제 자립 국가를 지향했다.  - P283

그 시절 레닌그라드의 참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기장은 당시 열한 살 소녀였던 타냐 사비체바가 적은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1년 12월 28일 새벽 12시 30분, 제나가 죽었다.
1942년 1월 25일 오후 3시, 할머니가 죽었다.
1942년 3월 5일 새벽 5시, 레카가 죽었다.
1942년 4월 13일 새벽 2시, 바샤 삼촌이 죽었다.
1942년 5월 10일 오후 4시, 레샤 삼촌이 죽었다.
1942년 5월 13일 아침 7시 30분, 엄마가 죽었다.
사비체프 집안 사람들이 죽었다.
모두 다 죽었다.
타냐 혼자만 남았다.

타냐 사비체바는 1944년 세상을 떠났다.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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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1-04-19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피에 젖은 땅 읽으심미꽈? 저는 이제 그만 알라딘을 들어와야 할 것 같아요,,, 넘 뒤쳐져서,,ㅎㅎㅎㅎㅎㅎㅎㅎ

바람돌이 2021-04-20 00:45   좋아요 1 | URL
라로님 글을 보고 희망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말씀을 하셔요. ㅠ.ㅠ 이제 막 일 시작하셔서 그것도 생활리듬이 왔다갔다 하는 일을 하시면서 라로님만큼 책을 읽어내는 사람도 진짜 없어요. 저는 좀 바쁘다 싶으면 한달에 한권도 제대로 못읽을 때 많았는걸요. 우리 오래 오래 봐야 하니까 이런 말은 아니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