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불의 딸들
야 지야시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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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가나에서 미국으로 이어지는 3백년, 그리고 7대에 걸친 가족의 역사. 그리고 여성.

소설을 규정짓는 단어들만으로도 비극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아프리카 부족들간의 대립과 전쟁, 제국주의자들과 결탁한 노예사냥, 노예로 전락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인종차별..... 

떠올릴 수 있는 단어들은 모두 그렇게 비극적인 단어들이다.

과연 444페이지라는 분량은 저 비극의 무게를 다 감당할 수 있을까?

저 정도의 시간과 등장인물이라면 10권짜리 대하소설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작가는 독특한 서술방식을 선택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결정적 순간들이 있다.

그것이 삶의 평화를 인도하게 되거나, 희망찬 미래를 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순간일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은 몰랐지만 다른 이에게 치명적인 순간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 삶이다. 

작가는 바로 그 순간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되살리고, 가족과 삶들이 끊어진 지점들을 이어보고자 한다.


「이 문은 그들을 실어 갈 배들이 기다리는 해변으로 통합니다.」그들, 그들 항상 그들이었다.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투어 그룹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P442


300년간 그저 그들로 뭉뜽거려져 불리었던 사람들, 그럼으로 해서 숫자로만, 막연한 불행으로만, 옛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기억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 그들 각자의 삶이 어디에서 뒤틀리고 나락으로 떨어졌는지를 복원하는 것, 그럼에도 그들이라고 통칭되는 이들이 어떻게 삶을 이어나갈 힘을 얻고, 강인한 의지를 발휘했는지....

14명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그들에게 바로 그 이름을 부여해주고 싶었나보다.


소설의 제목 <밤불의 딸들>은 이 이야기의 시작 에피아와 에시의 어머니 마메에서 연유한다.

에피아의 아버지에게 강간당하고 딸 에피아를 낳은 마메는 에피아를 낳은 그 밤 그의 땅에 불을 지르고 도망간다. 그리고 에시의 아버지를 만나 그의 3번째 부인이 되고 에시를 낳는다. 

이부자매인 두 여성은 자신을 강간한 남성의 땅에 밤에 불을 질러버린 강인한 어머니 마메에게서 태어난 것이다.

아프리카 가나 지역을 지배하는 영국인 제임스와 결혼하여 그의 아내가 아니라 여자가 되는 에피아.

아프리카 부족의 대인의 딸에서 부족간 전쟁 포로가 되어 노예로 팔려나가는 에시,

이 두 자매는 잠시 가나의 영국인 성채 케이프 코스트에서 교차한다.

한 사람은 하얗게 눈부시게 빛나는 건물의 지상에서 총독의 아내가 아니라 그냥 여자로, 또 한 사람은 그 건물에 보관된 - 그야말로 팔려가기까지 보관된 노예로.(

이 건물의 상황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영국인들은 이곳에서 아프리카에서 벌어들인 부를 한껏 만끽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프리카 여자를 사들여 가족을 이루고, 교회를 만들어 신을 찾고 신의 자비와 용서를 노래한다.

유럽인의 여자로 팔려온 이들은 "내 남편은 죽어가는 짐승 냄새 같은 악취가 나는 지하 감옥에서 올라와"(47쪽)라며 그 악취를 견뎌야 하지만 그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는 알수가 없다.

건물 지하에 보관된 아프리카인들은 그야말로 쌓여있다. 자신이 누울 한뼘의 공간도 없이 내위에 사람이 겹쳐있는.... 그 상태에서 배설을 하면 그냥 사람들은 똥 오줌속에 방치되어 있는것이다. 이런 상황은 아메리카로 건너가는 배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실제로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배에 탄 아프리카인의 3분의 2는 죽었다고 한다. 설사, 탈수증 등 오염에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이....

유럽인들은 더 많은 부의 축적을 기원하며 신을 부르고, 지하 아프리카인들은 죽음의 공포와 극한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고파 신을 부른다.


에피아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계모에게서 "넌 아무것도 아니고 근본도 없어. 어미도 없고 이제 아비도 없어. 아무것도 아닌 데서 뭐가 자랄 수 있겠어?"라는 저주를 듣는데 이 말은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사이에서 태어날 자신의 아이들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어서 언제까지나 정체성의 혼란을 격어야만 하는 아이들의 운명을....

에피아의 아들 퀘이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다. 

같은 아프리카인 부족들과 전쟁을 하고, 그들을 잡아들여 노예로 팔아먹는 삶,

그래서 더 부자가 되고, 백인들보다 더 강해질거라는 꿈을 꾸는 친척 부족민들과 타협하며 약탈해온 부족장의 딸과 결혼해 그들의 꿈을 더 키워주어야 하는 삶이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어머니아래에서 자라는 퀘이의 아들 제임스는 자신을 둘러싼 노예무역을 하는 부족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첫눈에 반한 소녀를 찾아 모든 것을 버리는 삶을 택한다.

사랑을 택하고 그를 속박하던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그는 자유로워지지만 대신 짊어지는 것은 생계의 무게고, 그 무게를 그는 쉽게 벗어던지지 못한다.

그의 딸 아비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못하므로 꿈을 꿀 수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꿈을 찾아 다른 삶을 찾아 도시로 떠나지만 그녀에게 온것은 그녀를 강제로 회개시키려는 선교사에 의한  죽음이었고, 자신과 결혼하리라 믿었지만 끊임없이 배신을 하던 남자의 아이 하나뿐이다.

선교사의 손에서 자란 그녀의 딸 아쿠아는 그녀가 자란 기독교적 환경과 그녀의 원래의 뿌리 아프리카인의 영혼사이에서 방황하고 분열하는 이다. 

아프리카의 영혼은 그녀의 영혼을 잠식하고 일종의 환각 상태에서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만다.

그녀의 어린 두 딸이 불에 타죽는 장면은 왜 필요했을까?

노예무역을 발판으로 수많은 아프리카인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죽였던 그들 선조의 삶에 대한 속죄였을까?

그것이 자기 자식을 스스로 불에 태워 죽이는 것으로 갚아야 하는 것이어야만 햇을까?

에피아의 후손 중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 바로 이 아쿠아이다.

그녀는 딸들을 잃고 오래도록 살아남아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어줄 미래 세대를 보고, 그녀의 손녀에게 아프리카의 마음을 전해주는 인물이다. 

그녀의 손녀 역시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지만 아프리카에서 이제 막 이주해온지라 기존의 흑인사회에는 소속되지 못하는 떠도는 영혼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백인사회에 소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에피아의 후손들은 모두 자신이 소속되고 안정감을 찾을 공간을 갖지 못한 떠도는 영혼들이다. 

그것이 에피아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에피아의 다른 자매 에시의 삶은 더 잔혹하다.

고향을 뿌리채 빼앗겨버린, 심지어 노예의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어머니의 유품인 검은 돌을 잃어버린다. 

그것과 한짝인 에피아의 돌이 그녀의 후손들에게 그대로 대를 이어 전해진 것과 다르게말이다.

이건 결국 에시와 그녀의 후손들의 삶이 각각의 삶과 이어지지 못하고 계속 단절되리라는 암시와도 같다.

에시의 딸 네스는 노예로 태어난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지옥같은 미국 남부의 농장에서 네스는 도망치지만 다시 지옥으로 끌려가고 그 과정에서 굴복하지 않는 영혼이었던 남편 샘은 죽음을 맞는다. 

다만 아들 조가 붙잡히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수 밖에 없지만 그녀는 평생 아들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다.

그저 어디에 있든 신이 아들을 보호해주기를 빌뿐....

조는 다행히도 자유민 노동자로 살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옛 노예를 옛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라는 미국 법원의 판결은 그의 삶을 뒤흔들어 버린다.

이 법은 그저 신분증명서가 없는 흑인이라면 누구라도 납치해서 노예로 팔아버리는 악행을 만들어버리고그 과정에서 임신한 그의 아내가 행방불명되어 버린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자살해버리고 아들에게 자신의 아이들에게 붙인 태명이었떤 알파벳 순서 H라는 이름만 남겨준다.

성실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그저 열심히 일하는 평범한 삶이 왜 하룻밤새에 산산히 조각나버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는지, 노예제도의 야만을 이토록 적나라한 한순간에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H는 노예제도가 사라진 미국에서 살게 되지만, 인종차별은 여전하다,

얼토당토 않은 죄목 - 백인 여자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심지어 사실도 아니다-으로 H는 죄수가 되어야했고, 탄광에서 오랜 시간을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 무장하지 않은 흑인에 대한 가혹한 체포, 총격 등 현실은 H가 살던 때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듯 보인다.

H의 딸 윌리는 탄광촌을 벗어나고 싶어 뉴욕으로 가지만 그녀가 갈만한 곳은 할렘가일뿐이다.

윌리는 단지 노래를 부르고 싶었을 뿐이지만 그녀가 노래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그녀는 흑인이고 심지어 여자이므로.

남편이었던 로버트는 흑인이지만 그 먼 언젠가의 혼혈로 인해 하얀 피부색깔로 백인으로 오해 받고 뉴욕에서 그들은 같이 외출조차 할 수 없는 신세가 된다. 

심지어 로버트는 취직과 돈벌이를 위해서는 아내인 윌리를 부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맞는다.

사랑으로 부부관계가 유지 되는게 아니다.

자신을 부정하는 남편을 누가 사랑할 수 있을까? 

사회적 편견과 차별 정책이 사랑보다 훨씬 강하다. 

윌리의 아들은 할렘의 삶과 흑인에게 차별적인 사회에 온 힘을 다해 저항하지만, 그 안간힘은 결국 그를 마약중독자로 만들어버리고, 그들의 희망은 윌리의 아들인 마커스에 가서야 희미하게 피어오른다.

에시의 가족은 그녀가 고향을 강탈당한 이후 단절의 연속이다.

어디에서든 살아가지만 그 삶의 터전이 이어지지 못하고 끊임없이 가족은 해체되어버린다.

아프리카계 흑인들이 미국에서 일상적으로 강제되어진 삶이라는 측면에서 에피아 가족의 삶보다 더 비극적이다.


그들은 7대에 이르러 에피아의 후손 마조리와 에시의 후손 마커스의 만남에서 하나로 만나진다.

물론 그들은 서로의 조상들의 삶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아마도 그 수많은 단절들은 영원히 알 수 없게 할 것이다.

그러나 신의 뜻이든 아니면 전적인 우연이든 아프리카의 떠돌던 영혼과 단절된 미국의 흑인들의 삶이 하나로 이어지는 그 어디쯤에 이들의 삶의 진정한 복구가 있지 않을까?


소설은 각자의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만을 묘사하고 있지만,

독자는 자꾸 그 사이 막간의 기나긴 삶의 고통들을 자꾸 상상하게 된다.

그 상상 역시 고통스럽다. 

대하소설이 아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사이의 막간을 계속 상상함으로써 이 소설은 대하소설같은 무거움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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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18 17: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배경지식이 없는데도 리뷰만 읽어도 뭔가 고통이 느껴지네요. 아프리카 쪽 소설은 거의 본적이 없는데,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이미 보관함에 있다는..언제 담았는지ㅎㅎ)

바람돌이 2021-04-18 22:21   좋아요 4 | URL
가나출신 미국인이래요. 그래서 소설의 국적분류는 현대미국소설로 들어가더군요. 이 소설이 데뷔작이라는데 와우 광장해요. ^^

붕붕툐툐 2021-04-19 00: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더 다양한 나라 사람들의 책을 읽고 싶어요. 작가 이름 보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그냥 가나 사람이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은 맘이 살짝 들기도 했어요~ 그래도 읽고 싶은 책장에 고이 담아갑니다~~

바람돌이 2021-04-19 00:32   좋아요 1 | URL
어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니 반은 가나인 맞죠. ^^ 사실 가나와 미국 흑인사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했던 경험이 이 소설을 쓰는 기반이 되었다고 하네요.

단발머리 2021-04-19 13: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대로 이런 거대하고 장엄한 서사가 한 권으로 묶였다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하네요. 전 처음 보는 책이고 처음 듣는 작가인데 바람돌이님 리뷰를 읽으면서 바로 직감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마치 내가 이 세상에서 이 책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처럼 리뷰를 쓰게 될 것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꼭 찾아서 읽어보려고요. 읽다가 헤매는 부분에서는 바람돌이님 리뷰 읽으면서 따라가도 좋을 것 같고요.
좋은 리뷰 너무 감사해요!!!

바람돌이 2021-04-20 00:49   좋아요 0 | URL
저는 레삭매냐님의 뽐뿌에 의해서 읽었고요. 저도 처음 듣는 작가에요. 다 그럴걸요. 왜냐하면 이 책이 이 작가의 첫 책이래요. ^^
이 책에 아직 리뷰가 별로 없어서 이번에는 내용 소개에 치중해서 리뷰를 썼는데 단발머리님의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처럼 쓰는 리뷰 꼭 보고싶네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

희선 2021-04-21 0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긴 시간과 많은 사람을 한권에 담았군요 모든 시간을 다 알지 못해도 한순간만 봐도 뭔가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이 책이 그럴 듯합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4-22 10:09   좋아요 0 | URL
어쩌면요. 하나하나의 단편이 모인 형식과도 같아서 따로 봐도 괜찮을듯하긴 해요. 그리고 14명이나 되는 주인공들이 있는데 유난히 안타깝고 마음이 가는 사람이 있기도 해요. ^^
 
니카라과 라 라구나 - 200g, 에스프레소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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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단맛이 먼저 확 느껴지네요. 오렌지의 산미는 잘 모르겠습니다. 커피 본연의 쌉싸름함과 단맛이 잘 어우러져 다른 맛을 압도합니다. 에티오피아의 산미나 게이샤같은 강한 향을 싫어하시는 분께는 단맛덕분에 부드러우면서도 쌉쌀한 맛을 느낄 수 있는 좋은 커피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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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4-18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평이 다 좋네요!!! 궁금해서 마셔봐야겠습니다!!

바람돌이 2021-04-18 11:21   좋아요 1 | URL
달달 달달합니다. 제가 썼듯이 산미 싫어하시는 분들에게 최적화된 커피. 저는 약간의 산미가 섞인걸 좋아하므로 베스트는 아니지만 단 맛 덕분에 괜찮았습니다. ^^

수이 2021-04-18 11:23   좋아요 1 | URL
땡투 드리고 주문중입니다. 바람돌이님 평 읽고 다른 분들 평도 좋아서 아이스로 마셔도 좋을 거 같다 싶어요. 오늘도 화이팅! :)

바람돌이 2021-04-18 12:04   좋아요 1 | URL
아 저는 드립으로만 먹었는데 아이스로 먹으면 더 좋을듯하네요. 집에 들어가면 바로 아이스로 내려봐야겠습니다. ^^

mini74 2021-04-19 2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맛있는 커피도 권유하고 좋은 책도 소개하고. 정말 다 사는 곳은 다르지만 사이좋은 이웃사촌같아 참 좋습니다 *^^*

바람돌이 2021-04-20 00:43   좋아요 1 | URL
책에 관한 이야기를 잘난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좋은 친구들이 있는 곳이죠. 여기만큼 책 이야기를 맘껏 할 수 있는 곳이 어디에도 없어요. ㅎㅎ
 

1933년 3월 2일 베를린 슈포르트팔라스트 집회에서 히틀러는 "전 세계의 곡창 지대가 될 수 있는 나라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고 외쳤다. 단 한 단어,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단어만으로 히틀러는 소련에서의 떼죽음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호자인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결부시켜버렸다. 히틀러의 평가를 전적으로 거부 또는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는데, 그의 말이 거짓과 진실의 묘한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소련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은 기근에 대한 히틀러의 평가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와 뒤섞여 있던, 좌파 정치에 대한 그의 비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 P122

그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사회민주주의자들과의 연합을 피해야했다. 오직 공산주의자만 인류 진보를 이끌 자격이 있으며, 억압받는이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모두 시기꾼이자 사회주의 파시스트‘였다. 그들은 나치를 포함해 자신보다 오른쪽에 있는 모든 당과 연합할 것으로 여겨졌다. 독일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주적은나치가 아니라 사회민주당이었다.
- P123

하지만 나치 독일의  정치적 난민을 포함한 많은 이는 이를 소련의 승리이자, 소련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지한다는 증거로 봤다. 프랑스에서 인민 전선은가장 뛰어난 유럽의 지식인조차 소련을 비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 P132

스탈린의 정치적 재능 중 하나는 외세의 위협을 국내 정책 실패의전적인 원인인 것처럼 제시하고, 자기 자신은 어느 것에도 책임이 없는 듯 행동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는 정책 실패에 따른 비난을 받지않았고, 자신이 선택한 내부의 적을 외세의 앞잡이로 규정할 수 있었다.  - P137

지도부 숙청과 주요 기관 장악이 끝나자, 스탈린과 히틀러는 모두1937년과 1938년에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숙청을 실시했다. 그러나부농 박멸 작전은 대공포 시대의 전부가 아니었다. 이것은 계급 전쟁으로 간주되거나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련은 계급으로서의 적을죽이면서, 동시에 민족으로서의 적도 죽이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이 되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는 인종차별과반유대주의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하지만 국가 내부의 적에 대한사살 작전을 시작한 곳은 스탈린의 소련이었다.
- P161

1933년 기아 시기에 고안된 ‘폴란드 군사 조직은 우크라이나에 존재하는 환상의 조직으로 계속 존재했고, 이후에는 소련 전역에서 진행된 폴란드에 대한 민족 테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변모했다.  - P168

인민 전선 시대에, 소련의 대외적 영향력은 관용적인 이미지가 핵심이었다. 파시즘과 국가사회주의가 부상하던 유럽과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린치가 성행하던 남부인들이 있던 미국에게, 모스크바가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주된 근거는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다문화 국가‘라는 이미지였다. 예를 들어 1936년 제작되어 인기를 끈소련 영화 「서커스의 여주인공은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나 소련에서 인종차별을 피할 피란처를 찾은 곡예단원이었다.‘
- P171

이 3차 혁명은 사실상 반혁명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실패를 내포하고 있었다. 15년 남짓 동안 소련은 살아남은 시민들에게 많은 일을 해냈다. 예를 들어 대공포 시대가 징짐에 달했을 때 국가 연금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혁명 원칙의 근간을 이루던 일부 본질적 가정은 폐기되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 - P195

나치 독일의 공개적 폭력 행위는 소련에 도움이 되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인민 전선 지지자들은 유럽이 민족 간 폭력 행의에 빠지지 않도록 소련이 보호해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훨씬규모가 큰 민족 학살 작전에 돌입한 상태였다.  - P198

이렇게 블러드랜드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폴란드의절반을 소련에 내줌으로써, 히틀러는 폴란드 박멸 작전에서 몹시 잔혹하게 자행된 스탈린의 테러가 폴란드 본토에서 재현되게 했다. 스탈린 덕분에 히틀러는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에서 자신의 첫 번째 대량 살상 정책을 실행할 수 있었다.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공동 침공이후 21개월 동안, 독일인과 소련인들은 각각 폴란드의 절반을 지배하면서 비슷한 이유로 비슷한 숫자의 폴란드 민간인들을 죽였다.
두 국가의 살육 담당 기관은 제3의 영토에 집중했다. 스탈린처럼,
히틀러도 자신의 첫 번째 주요 민족 사살 작전의 대상으로 폴란드인을 선택했다.
- P208

폴란드 정복이 마무리되자, 독일과 소련은 서로의 관계를 재확인하려고 또 다른 만남을 가졌다. 바르샤바가 독일의 손에 떨어진 1939년9월 28일, 두 동맹국은 양쪽의 국경 확정과 우정 확인을 골자로 한새로운 조약에 서명했다. 서로의 영향권에 약간씩 변화를 준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바르샤바는 독일에, 리투아니아는 소련에 속한 땅이 되었다. - P226

폴란드의 모든 것은 그 땅에서 사라지고, "게르만족의 지배"로 대체되어야 했다. 히틀러가 쓴 대로, 독일은 "반드시 이 용납할 수 없는인종적 성분들을 봉쇄해 다시는 그들의 피가 더러워지지 않도록 하거나, 아니면 지체 없이 이를 없애 깨끗한 땅을 그 동지들에게 넘겨줘야 한다. 1938년 10월 초 히틀러는 하인리히 힘러에게 새로운 책무를 맡겼다. 이미 나치 친위대와 독일 경찰의 수장이었던 힘러는 이제
"게르만족의 지배를 확고히 할 제국 정치위원"으로서 인종 문제를 총괄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가 맡은 임무는 바로 독일에 병합된폴란드 지역의 토착민들을 쓸어버린 뒤 그 자리를 독일인으로 채워넣는 것이었다.
- P233

서유럽에서 이 기간은 명목상의 전시, 이른바 "가짜 전쟁으로 일컬어졌다. 이렇다 할 군사적 움직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프랑스와 영국은 1939년 9월부터 독일과 전쟁 중이었지만 그해 가을과 겨울은 물론이고 이듬해 봄 폴란드가 무릎을 꿇고, 파괴당하고, 독일과소련이 그 땅을 나누어 가질 때까지 그리고 폴란드인 수만 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만 명이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날 때까지도 서부 전선에서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다. 독일과 그의 동맹 소련은 얼마든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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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대량학살 하면 보통 홀로코스트가 떠오르며, 홀로코스트는빠르게 진행된 살인 공정‘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 이미지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명쾌하다. 독일과 소련의 살육 현장에서, 그 살육 방법은 오히려 원시적인 것이었다. 1933년에서 1945년까지 블러드랜드에서 살육된 1400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 중 절반 이상은 식량을비급받지 못해 죽었다. 20세기 중반, 유럽인들은 같은 유럽인을 무지무지하게 많이 굶겨 죽였다. 홀로코스트 다음가는 두 가지 최대 대량학살, 1930년대에 스탈린이 시행한 의도적 굶주림과 1940년대 초히틀러의 소련 전쟁포로 굶기기는 이런 식의 학살이었다. 그건 사실 계획상으로는 더 큰 규모였다. "기아 계획"에서 나치는 1941년과1942년에 걸친 겨울에 수천만 명의 슬라브인과 유대인을 굶겨 죽이려 했다.
- P15

어떤 기술을 썼든 간에 그 학살은 개인적인 살인이었다. 굶주리고있는 사람들은 종종 그들을 굶주리게 만든, 감시탑에 있는 장본인들의 눈에 보였다. 총살당하는 이들은 아주 근거리에서, 셋 중 둘은 소총의 가늠쇠 너머로, 셋 중 한 명은 머리에 권총이 겨눠진 채로 보였다. 중독사하게 될 사람들은 색출되고, 기차에 태워지며, 가스실로 밀려 들어갔다. 그들은 소유한 재물을 빼앗기고, 다음에 입은 옷을 빼앗기더니, 여성들은 머리카락마저 잃었다. 그들 한 명 한 명이 다르게죽었다. 그들 한명 한 명이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었기에.
- P16

나중에 히틀러는 독일 수상으로서 소련과 더불어 폴란드를 분할하는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단계를 밟으며, 그는 많은 독일인이 가졌던 극단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폴란드의 국경선은 부당하며, 그 국민은 국민 대우를 받을 이유가 없다!  - P38

1930년 우크라이나의 수확량은 1931년에는 달성할 수 없는 기준을 세웠다. 집단 농업이 개인 농업만큼 효율적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수준이었는데, 현실은 그렇게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1930년의 대풍작은 공산당이 1931년의 징발량을 설정할 때의 기준선을 제공했다. 모스크바는 우크라이나가 제공할 수 있는 양보다 훨씬 더 많은양을 기대했다. - P76

누구 못지않게 정치를 사적으로 풀었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기근또한 사적인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가 먼저 보인 충동적 행동이면서그 뒤로도 바꾸지 않았던 방침은 우크라이나 농민의 굶주림을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배신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의 집단화 정책이 비난받을 가능성은 허용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실행 과정에, 지역 지도자에게 있어야 했고 절대로 집단화라는 개념 자체에 있어서는 안 됐다. 1932년 상반기에 자신의 변혁을 밀어붙이면서, 스탈린이 골몰한 문제는 국민의 고통이 아니었다. 집단화 정책의이미지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굶주리는 우크라이나농민이 조국인 공화국에서 이반하고 있으며 "징징거림으로서 다른소련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 P79

스탈린은 현실을 완전히뒤집어서, 굶주림을 무기로 쓰는 쪽은 자신이 아닌 농민들이라고 상상했다. 카가노비치는 스탈린에게 우크라이나인들을 "무고한 희생자"
라고 말하는 것은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추악한 은폐 공작에 불과하다고 다시금 확인해주었다.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염려를 표현했다. 우크라이나는 "요새"가 되어야 했다.
두 사람은 징발 정책을 고수하고, 곡물을 최대한 빨리 수출하는 것만이 합리적인 대책이라며 뜻을 모았다. 이제 스탈린은 굶주림과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이 보이는 불성실함 사이의 관계도를 완성했고,
이에 최소한 자기 자신은 만족하는 듯했다. 굶주림은 파괴 행위의 결과였고, 지역 당원들은 파괴 공작원이었으며, 기만적인 당 고위 간부들은 폴란드의 간첩질을 하느라 부하 직원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 P82

스탈린의 주장에 따르면,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의 스탈린 정책에대한 저항이란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보이지도 않는 별스러운 행위였다. 저항은 더 이상 사회주의의 적들에게 열려 있지 않았는데, 이제그것은 ‘조용하며 거의 신성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날의 부농은 "온화하고 친절하며, 거의 성인 같은 친구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 죄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죄인으로 봐야 했다. 배고픔으로 서서히 죽어가던 농민은 겉모습과는 달리, 자본주의 열강을 위해 소련 평판 저하 작전을 수행하는 파괴 공작원이어야 했다. 굶주림은 곧 저항이었고, 저항은 사회주의의 승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이것은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한 공상에 그치지 않았다.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가 1932년 후반 사망자가 대거 발생한 지역을여행하던 중 실행토록 한 이념적 노선이었다.
- P88

하지만 스탈린은 소련에 대한 외부 세계의 관심을 끌지 않고도 수백만 명을 살릴 수 있었다. 식량 수출을 몇 달만 중단하고, 300만 톤에 달하는) 곡물 비축분을 풀거나, 하다못해 농민이 지역곡물 저장고를 이용할 수 있게만 하면 됐다. 1932년 11월이 되어서야실시한, 이런 단순한 조치만으로도 사망자 수를 몇백만 명에서 수십만 명 수준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팔땅만 끼고 있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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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도시는 전근대적인 공간과 근대적인 공간, 그리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거주 지역이 구분된 식민지 이중도시 (colonial dual city)‘였다. 도시 곳곳에는 산업화된 한국 음식, 일본 음식, 중국 음식, 서양 음식을 판매하는 공간이 자리 잡았다.
- P59

메뉴 중에서 인기가 많았던 음식은 설렁탕이었다. 하지만 일부 양반 출신들과 근대적 취향을 가진 모던보이 (modern boy)와 모던걸(modern girl)은 설렁탕을 먹고 싶어도 직접 음식점에 가서 먹는 것을 꺼렸다.
양반 출신들은 여전히 계층과 남녀 구분을 따졌고, 모던보이와 모던걸은 자신들도 식민지 국민이면서 하층민을 경멸의 대상으로 여겨 설렁탕집 출입을 삼갔다. 서울의 설렁탕집 주인 중에는 이런 ‘별난‘ 고객을 위해 배달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 P60

일본에도 중국 음식점이 많이 있지만 그곳에서 우동을 팔지는 않는다. 중국 대륙과 타이완의 중국 음식점에도 우동이란 메뉴는 없다. 그런데 왜 한국의 중국 음식점에만 우동이란 음식이 있을까? 그 이유는 식민지 시기 중국 음식점에서 국수류의 음식을 일본식 표현으로 우동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 P71

1970년대까지만 해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은 제국의 음식이 일방적으로 식민지에 전파되었다는 주장을 많이 펼쳤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 중에는 제국과 식민지의 지배관계가 해체된 후에 오히려 식민지의 음식이 제국으로 이71동하는 사례가 있음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커리가 그러하고,
일본의 야키니쿠와 가라시멘타이코가 그러하다.
- P99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이 멸치를 식재료로 여기지 않은 반면, 일본인은 말린 멸치를 국물 요리의 육수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했다. 김복인은 일본인의 멸치 사용법을 가지고 와서 조선인도 소고기 대신에 찌개나 국에 넣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지금이야 말린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기름에 볶거나 육수를 내어 먹지만, 이런 멸치 식용 방식은해방 이후에 생겨난 것이다. 해방 이후 멸치 어획량은 날로 증가했지만 일본 수출 길이 원활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언론에서 멸치의 영양과 맛과 요리법을 소개하면서 멸치 소비를 장려했다. 멸치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음식의 중요한 식재료가 되었다.
- P115

한반도의 식생활 역사에서 1937년부터 1953년은 중일전쟁 - 태평양전쟁 · 한국전쟁으로 인해 식량 부족 문제가 가장 심각했던 때였다. 이시기에 정권을 장악했던 조선총독부, 미국과 소련의 군정, 그리고 남북한의 정부는 식량 부족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통치자들은 식량 공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앞선 정권들이 행했던 조치들을그대로 따르는 선택을 자주 했다.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절미운동,
혼식과 분식 장려운동, 대용식운동 같은 정책은 미군정기, 대한민국의이승만과 박정희 통치 시기에도 계속되었다.
- P141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는 공짜가 아니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와 협정을 체결할 때, 도입 농산물의 판매액을 한국 통화로 적립하고, 그중 일부는 한국에 있는 미국 원조기관의 비용으로 충당하며, 나머지는한미 간의 합의에 따라 한국의 경제개발과 군사력 지원에 사용하기로약속했다. 미국의 밀 생산 농민들은 페기할 뻔한 남아도는 밀을 한국같은 저개발 국가에 판매하여 수익을 올렸고, 미국 정부는 원조 명분을내세워 한국 정부와 군사적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구축했다.
- P146

그러나 1960년대 공장제 식품과 1970년대 히트상품 중 대부분은일본의 공장제 식품을 모방한 것이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의 외교관계가 회복되기 이전에는 한국의 많은 식품회사가 비합법적인 방법으로일본 식품을 모방했다. 한일수교 이후에는 합법적으로 일본의 제조 기술을 사들여와 한국 시장에 제품을 내놓았다. 1960~1970년대 한국의식품회사는 일본이 미국에서 가져온 공장제 식품을 다시 도입하여 또다른 한국식 식품으로 변형해 식품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냉전으로 인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사이의 정치·경제·군사적 경계가 나뉜상태에서 한국의 공장제 식품은 미국→일본 → 한국‘으로 연결된 구도안에서 변신했다.
- P149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간편하게 먹는 식품의 개발은 제1차 세계대전때부터 이루어졌지만, 한국의 K-레이션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시작되었다. 같은 시기에 한국 음식의 인스턴트화가 진행되어 1967년8월 삼양식품은 베트남에 라면 10만 개를 수출했다. 베트남에는 군인40들 외에도 한진 · 대한통운·현대건설 같은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었다.
삼양라면을 비롯한 한국의 인스턴트식품은 이 회사의 직원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음식이었다. 이처럼 베트남전쟁이라는 참혹한 사건 이면에한국 정부의 외화 수입 증대, 한국 기업들의 성장, 그리고 공장제 한국식품의 확대라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담겨 있다.
- P167

미국식 패스트푸드 기업의 국내 진출은 한국 소비자들의 넉넉해진 주머니를 노린 외국 업체들의 노림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세계인이 모이는체육행사에서 낙후된 한국 음식점이 공개되는 것을 꺼려해 미국식 패스트푸드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소비자들은 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미국식 문화를 소비했다.
- P196

 오늘날 세계 곡물시장은 금융자본이 주도하며 곡물과 식품을 선구매하여 유통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세게 가 시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기농운동, 슬로푸드운동, 지역 농산물 소비운동 같은 사회운동은 초국가적 곡물 - 식품 유통 대기업을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이다.
- P245

식민지 타이완의 열대 과일 바나나가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 유입되는 이 흐름은 식민지가 제국에 포섭되어 ‘제국화 되는 한과정이었다. 한편으로 이러한 제국과 식민지 사이의 열대 과일 유통은 세계화의 전조였다.
- P250

세계 식품체제에 편입된 농산물 씨앗의 치열한 경쟁에서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농산물 씨앗의 재산권 확보는 식량 주권과 식랑 안보 그 자체이다. 중저가 한정식 음식점의 필수 메뉴인 샐러드에 들어가는 양상추, 잡채 재료로 사용되는 피망.
숙회로 나오는 브로콜리, 이 채소들의 씨앗이 누구 것인지 알아야 하는이유다.
- P263

세계화는 냉전의 장벽을 넘어 사람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능하게해주었다. 외국에서 처음 먹어본 이국적인 향신료는 입맛에 맞지 않게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귀국 후에도 그 향신료의 맛을 잊지 못해 그런 음식을 파는 곳을 찾아다니거나 만들어보려고 애쓴다. 심지어 외국 여행의 경험이 없는 사람도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맛에 대한 간접 경험을 하고 먹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 식품회사나 외식업체는 이런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구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상품화한다. 청양고추, 미국식 핫소스, 마라는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인적 세계화가만들어낸 ‘지구화된 맛‘ 이다.
- P281

"인간은 함께 식사하는 동물이다. 20 여러 사람과 함께 음식점에 가는이유는 서로 인간적 유대관계를 맺거나 지속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함께 식사‘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인류이기를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가정에서는 더욱 자주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  - P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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