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알렉산드라 해리스 지음, 김정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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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의 일생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보면서 소설과는 달리 이 사람을 삶을 좀 더 알고싶다는 생각을 강렬하게 하게 된다.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때론 투사처럼 보이고 때론 살아가는 모든 것에 연민을 느끼는 섬세한 여성으로 보이기도 하며, 여성의 역사를 얘기하는 곳에서는 치밀한 학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이런 다면성이야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아름다운 인간에 대해서 좀 더 내밀한 것까지 알고싶다는 욕구를 끊을 수가 없다. 

단 그녀의 소설이나 에세이는 읽기가  쉽지 않으므로, 그녀의 삶에 대한 글은  일단은 좀 쉽게 알아먹을 수 있게 워밍업부터 시작하고픈 마음이 막 솟구치는데 이 책이 딱 그 지점에 위치한다. 


버지니아 울프를 한마디로 대표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쓰는 사람>이라고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정말 너무나 성실하게 글을 썼고, 바로 그 글을 쓰는데서 삶의 의미와 존재이유를 찾았던 사람이다.

존재 이유를 가진 사람은 염세적일 수 없다. 더더군다나 성실하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채워나가는 사람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쓴다.

소설을 쓰고, 일기를 쓰고, 에세이를 쓰고, 서평을 쓰고.....

그녀가 남긴 글의 양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열심히 <쓰는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녀는 쓰기 위해 열심히 읽는 사람이었으며, 론볼이라는 스포츠를 평생 즐긴 사람이기도 하고, 산책을 즐기며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명민하게 관찰하는 사람이었고, 당대의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촉각을 세우며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고 발언하는 사람이었다. 

동시에 자기 집에 출판사를 만들고 직접 책을 출판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편지를 쓰고,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삶의 마지막까지 보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를 염세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단 하나 그녀의 신경쇠약이었는데, 그것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아마도 조울증이었던 듯 싶다. 

얼마전에 읽었던 책에 의하면 조울증은 우울증과는 다른 신체 질환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발병하는, 당시에는 제대로 원인이나 치료방법도 없어서 그저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울증의 시기를 무조건 버텨내야만 했던 질병의 고통속에서도 그녀는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가고 쓰고자 했다.


단지 그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삶 전체를 애수와 염세주의로 얘기하는 것은 너무 부당하지 않은가? 그녀의 병을 알면서 나는 그녀의 자살도 삶에 대한 절망이나 세상에 대한 염세주의로 생각해서는 안되는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이 더 이상 진행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결짓고자 하는 욕망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지금 태어났다면 그래서 조울증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아주 나이 든 노년의 울프가 쓴 더 원숙해진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녀의 자살을 나는 절망으로 읽기 보다는 자신의 삶의 마지막 마침표를 스스로 찍음으로써 자신의 <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마감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통해 바라본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 - 그래서 이런 글을 쓸 수 있었구나-과 그녀는 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계속 가지고 살았을까 하는 의문들이 이율배반적으로 뒤섞이게 만든다.

역시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녀의 그 이율배반들까지 이해하게 될 때 온전히 그녀를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그건 불가능하리라...

나 자신조차도 나를 다 알지 못하고, 그 때 내가 왜 그랬지? 나는 왜 이런 생각을 못 버리지 하면서 살아가는게 인간이니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로 알려져있다.

나 역시 처음 그녀의 이름을 안 것은 이 시를 통해서인데, 이 시속에서 풍기는 그녀의 이미지는 지나치게 감상적이다.

<목마와 숙녀>는 많은 사람이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알게 했지만, 그녀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 - 낭만적인 소녀감성, 염세주의자, 불행한 삶에 침몰당한 여성작가 이런 식의-를 심어주는데도 너무 큰 공헌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의 이름을 부를 때 함부로 부르지 말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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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지 2021-04-15 08: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쓰는 사람으로 존재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 차분하게 기술한 리뷰를 읽으며 이 책을 접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오늘 하루도 웃어서 행복한 시간 보내길 바랍니다.

바람돌이 2021-04-15 14:51   좋아요 1 | URL
저처럼 버지니아 울프를 막 읽기 시작했다면 먼저 그녀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성지님도 오늘 하루 웃으며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4-15 0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목마와 숙녀 첨들어 봐서 찾아봤어요. 바람돌이 님이 그렇게 표현하신 이유를 알겠더라는~! 저는 버지니아 울프 책을 몇권 안읽어봤는데, 읽고 싶어지네요^^

바람돌이 2021-04-15 14:56   좋아요 1 | URL
어머 여기서 또 새파랑님이 젊다는 게 보이네요. ^^ 저처럼 연식이 오래된 이들 중 중고등학교 때 책 꽤나 읽는다 하면 저 시가 아주 유명했거든요. ㅎㅎ 저도 몇권 안 읽었어요. 버 지니아 울프 책 2권, 관련 책 요것까지 2권이 다입니다. 이 책은 저처럼 입문하는 사람한테 딱 좋은 것 같아요. ^^ ,

scott 2021-04-15 11: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생각에 동감 !!
[낭만적인 소녀감성, 염세주의자, 불행한 삶에 침몰당한 여성작가]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건
영문학자들(버지니아 울프를 전공한)의 잘못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고딩때 올랜도로 울프 여사 책을 처음 읽고 난후 대학에 들어가서
영문학 전공하는 친구가 울프 올랜도 강독 수업 있다고 알려줘서 한한기 수강(청강)한적이 있는데 분열된 자아 동성애 ,,,이런쪽으로만 집중했어요.
이후 울프 여상가 남긴 일기 기타 지인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읽어보니
바람돌이님 말씀처럼 정말 성실하고 근면하게 글쓰기에 집중하며
스포츠 활동을 활발히 하며 변화하는 사회를 면밀하게 관찰하며 혼돈의 세계 속에 여성이 어떤 목소리를 내야할지 줄기차게 자기 목소리를 냈던 인물입니다.
병에 시달리고 정신병으로 몰아간건 후대인들의 편협한 시각이라는것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았어야 하는데 어린시절에 방치 당하고 학대 당한,,,
울프 여사가 남기고 간 작품들이 현시대에 더더욱 활발하게 읽고 재조명 해야 할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1-04-16 00:15   좋아요 1 | URL
그쵸 그쵸 scott님
울프는 정말 성실한 생활인 작가. 그녀의 병이나 동성애는 진짜 그녀 삶의 일부일뿐 그녀 삶 전체와 작품의 결정적인 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근데 scott님은 고등학생 시절에 벌써 울프를 읽었다니 우와 오늘도 존경합니다. ^^

2021-04-16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6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9 13: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20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4-18 01: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가 글을 써서 조금 괜찮아지기도 했겠지만, 나중에는 그게 좋아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더군요 힘들어도 자기 삶을 살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었다면 치료를 받기도 했을 텐데... 자기 마음도 모르고 다른 사람 마음은 더 모르겠지요 저도 요새 좀 그런데,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희선

바람돌이 2021-04-18 01:40   좋아요 1 | URL
버지니아 울프의 병과 그녀 자신을 떼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녀의 글을 병과 너무 관련짓는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그녀의 정신분열이 그녀의 글을 낳은 것 처럼... 그녀는 단지 몸이 아팠을 뿐, 글을 쓰는 그녀의 정신은 누구보다 건강햇다고 생각합니다. ^^희선님 남은 주말 편안히 보내세요. ^^
 

지금 미국에 가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아. 혁명을 이끌기에도. 게다가, 백인 학교에 가면 백인들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걸 배우는 거야. 그럼 돌아와서 백인들이 원하는 나라를 세우겠지. 계속해서 그들에게 봉사하는 나라. 그럼 우리는 영원히 자유를 얻을 수 없어.」 - P331

「우리는 힘을 가진 사람 이야기를 믿는다. 바로 그 사람이이야기를 쓴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역사 공부를 할 때 항상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의 이야기를 놓치고 있을까?
이 목소리가 나오게 하기 위해 누구의 목소리가 억눌렸을까?
그 답을 알게 되면 그 이야기도 찾아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더분명한 - 그래도 여전히 불완전하긴 하지만 - 그림을 볼 수있다.」 - P337

젊었을 때 야우는 그들이 왜 사람들에게 애초에 잘못을 저지르지말라고 설교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용서는 사실 뒤에 이루어 시는 행위, 즉 나쁜 행동 뒤 미래의 일부였다. 사람들의 눈을 미래로 돌리면 현재에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 P353

악행을 저지르는 건 그게 너든 나든, 어머니든아버지는, 황금해안 사람이든 백인이든, 어부가 물에 그물을던지는 것과 같지. 어부는 고기를 잡으면 자기가 먹을 한두 마리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물에 던지면서 그 고기들이 다시 예전처럼 살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해서 한때 잡혔던 걸 잊을 수는 없는 법이지, 하지만 야우, 그래도 넌 스스로 자유로워져야 한다.」 - P360

「우린 돌아갈 수 없어요, 안 그래요?」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그의 팔을 만졌다. 그녀는 이제야 그가 꿈속 인물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라도 한 것처럼 그날 밤 그를 만난뒤 가장 진지해 보였다. 우린 애초에 가본 적도 없는 곳으로돌아갈 수가 없어요. 거기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니까. 여기가 우리 거니까.」 그녀는 할렘 전체를, 뉴욕 전체를, 미국 전체를 손에 잡으려는 듯 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 P379

「넌 옛날에 시위 행진을 했으니 뭔가 좀 했다고 생각하지?
나도 행진했다. 나는 네 아버지와 어린 아기와 함께 앨라배마에서 먼 길을 행진했다. 머나먼 할렘까지. 내 아들은 나와 우리부모님이 본 세상보다 나은 곳에서 살 거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유명한 가수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로버트는 백인을 위해 탄광에서 일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것도 행진이었다. 카슨.」 - P389

우리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했지. 〈장님은 우리가 볼 수 있다고 해서 우리를 미쳤다고 하지 않는다.」 - P435

자신이 여기 이렇게 자유롭게 살아 있는 것은 당위가 아님을마조리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어느 감방에 처박히지 않은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이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믿음 덕이 아니라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P437

「이 문은 그들을 실어 갈 배들이 기다리는 해변으로 통합니다.」그들, 그들 항상 그들이었다.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다. 투어 그룹은 아무도 말이 없었다. - P442

마조리는 그가 서 있는 곳, 불과 물이 만나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고 두 사람은 심연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커스는 성 안에서 느꼈던 공포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것이 불과 같은 것임을, 지배되고 억제되는 야생의 것임을 알았다. - P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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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 오빠들과 다른 사람들이 잡혀갔을 때,
우리는 슬퍼하면서 군사력을 키웠어요. 그게 무슨 의미죠? 우리가 잃은 것에 대한 복수로 우리도 빼앗는다? 난 그게 납득이안돼요. - P154

조는 고개를 끄덕여야 한다는 걸 알았고, 그렇게 했다. 마아쿠가 말을 이었다. 백인들 신은 백인들하고 똑같아. 자기만 신이라고 생각하지. 백인들이 자기들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가 니아메나 추크우 같은 신들 대신 신이 될 수있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그걸 용납하기 때문이야.  - P189

조는 자신의 혈통이 단절되고 영원히 가족을 잃은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는 했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조상들은 어땠는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고, 자신의 근원에 대해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있어도 영원히 듣지 못할 터였다. - P200

프랫 시티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지만 H가 살아 본 다른어느 곳보다 나았다. 그런 곳은 처음이었다. 백인들과 그 가족들이 흑인들과 그 가족들 이웃에 살았다. 두 개의 피부색이 같은 노조에 가입하고 같은 목적을 위해 싸웠다. 탄광이 그들에게 살아남고 싶으면 서로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들은 동료 광부와 동료 전과자밖에 몰랐기에, 버밍엄에 살면서 차라리 잊는 편이 나은 과거를 활용해 보려고 애쓰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았기에 애초에 그런 정신으로 광산촌 생활을 시작했다.
- P252

하나님이 왜〉라면 아사모아는 <예>, <예>였다.
- P277

그들의 울음은 소리가 없었지만 아쿠아는 그 소리가 무당이 즐겨 피우던 파이프 담배 연기처럼 그들 입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쿠아는그들을 안고 싶어서 손을 뻗었다. 손에 불이 붙었지만 그래도그들에게 닿을 수 있었다. 곧 그녀는 아이들을 불타는 손에 안고 아이들의 머리칼과 석탄처럼 끼만 입술을 이룬 불의 밧줄을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불의 여인이 마침내 아이들을 다시 찾은것에 평온함을, 심지어 행복감을 느꼈다. 그녀가 아이들을 안고 있어도 불의 여인은 싫어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빼앗으려고하지 않았다. 대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판틀랜드의 바다색이었다. 아쿠아가 어릴 때 본초록도 아니고 파랑도 아닌 그 색. 그 색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파랗게 더 파랗게, 초록으로 더 초록으로, 쏟아지는 눈물이 아쿠아의 손에서 타오르는 불을 끄기 시작할 때까지. 아이들이사라지기 시작할 때까지.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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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 검정고시 감독관 강제 동원 차출

내가 맡은 임무는 처음으로 해보는 복도 감독관.

시험장 감독관, 본부요원, 검수요원 뭐 다 해봤는데, 복도 감독관은 처음이다.

시험시간동안 복도에 대기하면서 수험생 안내, 돌발상황시 시험본부와의 연락 등등......

어쨌든 그를 위한 나의 준비물은 아래 사진들과 두꺼운 겨울 옷.

학교 건물의 복도는 항상 가장 추운곳이다.

교실들이 남향이니 복도는 항상 북향, 덕분에 햇빛도 잘 안들어오고 항상 바깥보다 더 추운 곳이 복도다.

다 넣어두었던 겨울 쉐타와 코트를 다시 꺼내 입고 아래 물건들을 들고 출발.

 

 

 

 

말이 감독관이지 사실 복도 감독관은 할일이 없다.

그냥 시험시간동안 복도에 책상 하나 놓고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 나의 임무다.

그 시간들을 위해 2권의 책을 준비했고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은 키득거리며 순식간에 다 읽었고,

<밤불의 딸들>은 초반에 집중이 힘들어서 - 왜냐하면 자꾸 졸렸기 때문에 - 얼마 못읽었다.

왜 추우면 더 졸리는지 모르겠다. ㅠ.ㅠ

 

아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저 책이 아니다.

바로 저 메가폰!

아니 복도 감독관에게 저런 메가폰이 왜 필요하지?

담당자에게 들은 이야기인즉슨

학교가 시험 중간에 정전이 돼면 방송이 불가능해지므로, 그 땐 복도 감독관이 저 메가폰을 들고 복도 중간에서 큰 소리로 방송원고를 읽어야 한다는 거다.

".... 고사준비를 알리는 시간입니다. 응시자는 책상 위에 붙여 놓은 스티커에 기재되어 있는 ......"어쩌고 저쩌꼬 저 방송원고에 있는 내용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다 읽어야 한다고..... 길기도 무지하게 길다. ㅠ.ㅠ

저 메가폰을 들고???

아 순간 내 머리 속을 강타한건 형태는 개화기 동동구리무 장수요. 목소리는 어릴 적 골목에서 심심하면 울려퍼졌던 "계란이 왔어요. 굵고 싱싱항 계란이 왔어요"(아 이말은 진짜 딱 특유의 억양이 있는데 여기선 재현이 불가, 물론 나는 아침에 메가폰의 이유를 묻는 동료 샘들에게 저 계란방송을 재현해주면서 한바탕 웃음을 주긴 했다. ㅎㅎ)

 

근데 왜 하필 보기좋고 모양좋고 소리도 좋은 빵빵한 마이크가 아니고 메가폰이냐고?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1회성 학교 행사에 누가 마이크와 엠프를 사겠냐 말이다.

나 같아도 안산다.

그러니 대신할 물품을 창고에서 찾다가 발견한게 구석에 처박혀있던 저 메가폰이겠지.... ㅠ.ㅠ

 

하여튼 저 메가폰의 존재이유를 안 그 순간부터 나는 우리 동네 까마귀 공동체의 무사평안을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왜 내가 갑자기 까마귀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시리라!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태풍도 아닌데 갑자기 정전이 되는 사태를 상상하기 힘들것이다.

하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그런 일은 일어난다.

2년 전 이 학교에서 그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이들이 전국 공통으로 치는 영어듣기시험을 열심히 치고 있던 그 순간에 갑자기 학교 전체가 정전이 됐다.

영어듣기 방송 out, 학교샘들 모두 멘붕(특히 영어샘들), 아이들 전부 어리둥절....

어쨌든 한전에 빨리 신고를 했고, 영어듣기 시험을 치던 학생들, 감독하던 교사들 전부 사태가 해결되고 다시 영어듣기 시험을 칠 때까지 교실에서 못나오고 대기 상태.

한전의 빠른 대처 덕분에 전력은 복구되었고, 1시간 넘게 걸렸던 영어듣기 시험은 어쨌든 무사히 치뤄졌다.

 

궁금한 건 정전의 이유.

그 때 당시 교무실에 있던 난 제일 먼저 한전에 전화를 했었는데, 정전 되기 직전에 분명히 학교 건너 길쪽에 뭔가가 쾅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었다. 물론 그것도 한전에 신고할 때 얘기했고..

이후 한전에서 한 얘기는 까마귀 한 마리가 전깃줄에 부딪혀서 죽으면서 합선이 일어나 어쩌고 저쩌고였는데....

아니 그 새들은 전깃줄에 잘만 앉아 있더니 그게 부딪히기도 한다는걸 처음 알았다.

한전은 안타깝게도 정전의 원인을 밝혀내고 전기를 복구해주었을 뿐 그 까마귀의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듯했다.

까마귀의 죽음은 자살이었을까? 아니면 실족사였을까? 혹시 다른 까마귀에 의한 살인 아니 살조였을까?

그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가 저 메가폰을 들지 않기 위해,

오늘 하루 제발 우리 동네 까마귀사회가 무사 평안하기를 간절히 기원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까마귀 사회는 무사평안했나보다.

나는 저 무거운 메가폰을 들지 않고,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멍청히 복도에서 추위와 졸음을 견딘 대가 12만원을 받았다.

그 돈을 까마귀들을 위해 썼으면 나의 하루가 참으로 보람찼을텐데,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나는 그 돈을 몽땅 나의 위장에 술과 안주를 퍼넣는데 쓰고, 일요일 하루종일 골골거리고 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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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4-12 01: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복도 감독관이라는 것도 있군요 복도는 교실보다 춥지요 평소에는 정전 되면 그렇게 걱정할 거 없겠지만, 시험 때는 큰일이겠습니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어서 저 메가폰도 준비한 거군요 이번에는 정전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까마귀가 전깃줄에 부딪힌 거였다니... 어쩌다가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무도 모르겠습니다

주말이 다 갔네요 바람돌이 님 이번 주 즐겁게 시작하세요


희선

바람돌이 2021-04-14 00:10   좋아요 2 | URL
뭐 설마 까마귀들이 또 전깃줄을 향해 돌진하기야 하겠냐만... ㅎㅎ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지요. 희선님은 주말 잘 보내시고 새로운 한 주 잘 보내고 계시지요? 며칠 좀 피곤했나봐요. 답이 늦었어요. ^^;;

새파랑 2021-04-12 06: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말이었지만 책도 읽고 돈도 받고 술도 먹고 괜찮은 감독관 임무 같아요 ^^ 정전의 원인이 까마귀라니 세상엔 신기한 일이 많네요 ㅎㅎ

바람돌이 2021-04-14 00:11   좋아요 2 | URL
이번 감독관 임무는 괜찮았습니다. 교실 감독관은 정말 아무것도 못하고 꼼짝없이 시간을 죽여야 하는데 복도가 좀 춥기는 하지만 그래도 책이 있으니까요. ㅎㅎ 거기다 돈도 받았잖아요.

2021-04-12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4-14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청아 2021-04-12 09: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자시험, 영어시험 감독관 몇번 해봤는데 영어는 듣기평가때 마다 제가 더 긴장이 되서 진땀흘린 기억납니다. (뭐라도 잘못되서 애들한테 피해줄까봐..)
그런데 정전이라니, 생각만해도 아찔하네요. 게다가 까마귀ㅠ

바람돌이 2021-04-14 00:13   좋아요 2 | URL
세상엔 의외의 일들이 일어나니까요. 누가 상상이나 했겠냐 말이지요. ㅎㅎ
교실 감독관은 사실 아무것도 못하면서 긴장은 긴장대로 하게 되는데 복도 감독관은 뭐 괜찮았습니다. 이것도 다 나이 많다고 배려해준거예요. 슬프게도.... ㅎㅎ

syo 2021-04-12 09: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까마귀들도 시험보는 날이었나봐요.
비둘기어 듣기 시험?

바람돌이 2021-04-14 00:14   좋아요 2 | URL
아!!! 그래서 시험 스트레스로.... 불쌍한 까마귀. ㅠ.ㅠ

psyche 2021-04-13 12: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계란이 왔어요. 굵고 싱싱한 계란이 왔어요˝를 읽는 순간 그대로 머리에 소리가 재생되네요 ㅎㅎㅎㅎ 지금도 그런 트럭이 오나요?

바람돌이 2021-04-14 00:15   좋아요 3 | URL
아 정말 이 억양 그대로 재생되시면 우리 연식이 비슷하다는? ㅎㅎ 지금은 다 없어졌죠.
옛날에는 저 억양으로 계란도 오고 휴지도 오고 했었는데 말이죠.

하양물감 2021-04-1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생 때 시험감독알바를 자주 갔었어요. 그때 생각이 나네요^^

바람돌이 2021-04-15 00:25   좋아요 1 | URL
아 대학생 시험감독 알바도 있군요. 대학생들한테는 괜찮은 알바일듯 하기도 해요. 저같은 직장인에게는 그저 주말을 쉬어줘야 다음주 생활리듬이 안 깨져서인지 왠만하면 안하고 싶거든요. 근데 이놈의 교육청은 교사들 쓰는게 제일 교육 적당히 해도 되고 편하니까 맨날 교사들 동원이에요. ㅠ.ㅠ

2021-04-15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피아는 영국인들이 배우자를 아내가 아닌 여자〉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아내는 대서양 건너편 백인 여자들에게만해당되는 말이었다. <여자>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군인들이그 자신은 셋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인간들에게는 오직 한 사람과의 결혼만을 허락하는 그들의 신에게 노여움을 사지 않기위해 쓰는 말이었다.
- P39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며, 이것은 희고 저것은검다>고 부르고 싶어 하는 욕구를 에피아는 도무지 이해할 수없었다. 그녀의 마을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의 무게를 견뎠다.

「내가 살아서 내 딸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걸 듣게 되다니 약한 게 뭔지 알고 싶니? 약한 건 사람을 자기 소유물처럼다루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아는게 강한거고 - P66

그들은 거기서, 숲 지대에서 그렇게 살았다. 먹거나 먹히면서, 포획하거나 포획되면서, 보호받기 위해 결혼하면서 퀘이는영원히 쿠조의 마을에 가지 못할 터였다. 그는 약해지지 않을터였다. 그는 노예 사업에 몸담았고 희생이 필요했다.
- P112

네스는 그 목소리들을 듣지 않는 법을 터득했다. 그녀는 에시가 자신에게 말하던 트위어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일자로굳게 다물린 어머니의 입술, 네스가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사랑의 말들을 내보내던 그 입술만 남을 때까지 마음을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이제 트위어 구절이나 단어 들은 짝이안 맞거나 균형을 잃은 잘못된 상태로 떠올랐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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