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 손택의 유명한 비유처럼 우리 모두는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왕국의 이중국적자다. 하지만 질병의 왕국으로 이주할 때 필요한준비물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전 세계를 휩쓴코로나19로 언젠가 질병의 왕국에서 사용할 본인의 여권을 한번씩 들춰본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 포스트 코로나 혹은 영원히지속될 것 같은 코로나 시대에는 느닷없이 질병의 왕국으로이주할 이들을 위한 기본 매뉴얼이 절실하다. - P19

뜻밖의 비극에 원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든 가족, 친척들이 저마다 자신의 지난 과오와 크고 작은지병, 사소한 악행에서 이유를 찾았다. 경미한 교통사고였는데도굳이 병원을 찾아 엑스레이를 찍었다고 조카가 저주를 받을 리없다. 임신인 줄 모르고 초기에 먹었던 두통약이 손녀의 중병을야기할 리 없다. 그만큼 모두에게 운명적이고 비극적인 일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발병 원인은 나한테서찾는 것이 가장 쉬웠다. - P39

결혼한 여자의 사랑은 왜 항상자기파괴적인가. 국가가 복지로 책임졌어야 할 돌봄이 가족에게전가되고, 모든 가족구성원이 함께 나눴어야 할 책임은 사랑이라불리며 여자에게 전가된다. 그렇게 여자의 사랑은 이름을 잃고주인을 살해한다. 그 과정이 너무 가혹할 때는 운명이라고도한다. - P42

 그러니까 진짜비극은 아이의 병이 아니었다. 팔자 센 엄마의 운명에 원인을돌리고, 엄마의 사랑으로 모든 고난을 극복하라는 가스라이팅이바로 비극이다. 이 오래된 관습이 여자의 진짜 사랑을 파괴한다. - P42

윤이는 언제나 나를 이해하거나 용서했다. 그리고 자기도사과를 잊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매일 밤 차곡차곡 쌓아 올린일대일의 관계, 둘 간의 사랑과 믿음, 온전히 두 사람만 알 수있는 관계의 역사, 이것은 모성이 아니다. - P49

보이지 않는 돌봄노동의 강도를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자기도모르게 모성 신화를 강화하고 여성을 억압하는 공모자가 된다.
불평등한 돌봄노동은 그렇게 모성 신화의 스테로이드제가 되어온갖 부작용을 남기며 내성을 키운다. - P56

나의 간병을 통해서야 나는 알았다. 아이에 대한 나의 감정이상호호혜적인 사랑에 기반한다는 것을. 내 돌봄이 모성에서발현된 헌신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의리와 도덕에 더 가깝다는것을 의도치 않고 실현하게 된 이 모종의 윤리가 사실은 이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누구와도 이런 종류의사랑을 다시 하기 어려울 것이다. 윤이가 아닌 그 누구도 나를이렇게 사랑해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감정을 모성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 P62

이제 나는 안다. 일하는 엄마가 졌던 돌봄 부채를 일거에중도상환한 지금에서야 주저 없이 확신하게 됐다. 여성의 야망은마치 식욕처럼 사회로부터 통제받는 욕망이라는 것을.  - P88

엄마의 몫은 전체이자 마지노선이다. 그래서 엄마들은 코로나팬데믹이나 경제불황, 가혹한 회사 탓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일과 돌봄을 저글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지금껏일과 돌봄이 구분되지 않는 삶을 꾸려왔고, 그래서 돌봄이자신의 또 다른 일인 것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가 단한 번만이라도 돌봄에 절실해지기를 바랐다. 자신의 일만큼이나돌봄에 치열해지기를 기대했다. 그건 엄마의 의무가 아니라부모의 의무다. - P98

 그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언어는천편일률적이고, 현실을 외면한 채 관념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그것은 키치다. 소도시 변두리에 느닷없이 들어선, 먼나라의 르네상스 양식을 조야하게 흉내 낸 왕궁예식장 같은키치다. 책에서 본 성평등을 흉내 내고 아직 실현되지 못한인간해방을 추종하고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가부장제인 가짜성곽이다.  - P100

다시 말하면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의 붕괴,
정치의 실패다. 사람들 간의 숱한 갈등이 폭력 사태나 전쟁으로이어지지 않고 대개 공동체 안에서 해결되는 것은 정치가작동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시스템에서는 생명 존중, 인권보호처럼 모두가 동의하는 공통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견이나차이를 어떻게든 극복하고 협력하며 우리는 그것을 정치라고부른다. - P110

피곤한 여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드센 딸이 되고 싶지 않아서화를 숨기고 마땅히 느낄 법한 불편을 자신의 예민함으로 형질전환해온 인정투쟁의 연대기가 비단 나만의 역사일까.  - P113

엄마나 아빠가 부족해서 가족이 흔들리는 게 아니다.
이상적인 가정이 불가능한 근본적인 원인은 가족이라는 작은공동체의 불완전성, 그리고 돌봄을 오로지 개인에게 떠맡기는사회 구조에 있다. 남편이 돌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것도 문제이지만 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가 실은 더 근본적인원인인 것이다. 그 구조를 바꿔내지 않으면 아내도, 남편도,
무엇보다 아이들도 영원히 피해자 위치에 머물게 된다. 가해자는없고, 피해자만 늘어나는 이 유독한 시스템은 가계를 통해 대를잇는다는 점에서 더 위험하다. - P126

그중에서도 돌봄노동은 공공의 개입이 사실상 없다고봐도 좋을 정도다. 우리처럼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는나라 어디에서도 이렇게 보호자가 폭 80센티미터도 안 되는간병인 베드에서 쪽잠을 자며 돌봄을 도맡지 않는다. 병원의간병서비스는 당연히 비급여항목이고, 간호간병통합병동은턱없이 부족하다. 무급 가족노동, 정확히는 여성 가족구성원의헌신에만 기댄다. 여성의 역할은 변화했는데 남성의 역할이가사노동, 돌봄노동으로 확대되지 못한 것처럼 국가의의료 정책도 돌봄노동, 간병노동에 대응하지 못했다. - P134

아이 컨디션에 따라 온라인스쿨과 학교 정상등교를 병행해도 되는지 문의했더니 학교에서난색을 표했다.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경우, 담임교사와특수교사, 보건교사 전부가 아이의 의료적 상황을 지속적으로추적해야 하고, 현장학습이나 급식 등 교장 선생님까지 나서야할 사안이 많아 어렵다고 했다. 윤이가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난치병이라 당장 복귀도 어려운아이에게 공직자가 번외 열정을 쏟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아픈 학생과 동행할시스템이나 인프라가 전무했다. - P156

내러티브와 달리 일화는 철저히 개인을 중심에 두며,
플롯처럼 인과관계를 중시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 일화를이론과 결합하려는 시도가 바로 일화 이론이 된다. 일화 이론을알게 된 후, 나는 이번에 시도했던 읽다생각하다-쓰다-산다의순환이 앞으로도 내게 유효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개인과사회, 사랑과 정치, 이론과 경험, 인식과 실천이 더 이상 대립하지않고 결합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도 발견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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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에게 프랑스는 식민지 권력의 본산이 전혀 아니었다. 그곳은 정말로 모국이었고, 파리는 유일하게 그들의 삶에 광채를 부여하는 빛의 도시"였다. - P11

소외된 사람이란 자신이 될 수 없는 게 되려고 애쓰는 사람인데, 현재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사랑하지 않아서다. 새벽 두시, 잠이 들려는 순간에 난 혼미한가운데 절대 소외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 P18

 아버지도 어머니나 마찬가지로 오로지 서구문화만이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믿었고 그걸 습득하게해준 프랑스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는 동시에, 어머니도 아버지도 피부색으로 인한 열등감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총명하고 가장 지적이라고 믿었는데, 그확실한 증거는 자신들이 속한 "위대한 흑인 혈통의 전진.
이런 게 ‘소외된다‘는 걸까? - P20

내게는 이 이야기 전체가 특히나 이국적이었고 비현실적이었다. 노예제와 노예 매매, 식민지 억압과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
가끔 상드리노가 들려줬던 경우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내게 말해준 적이 없었던 피부색에 얽힌 편견들의 무게가 대번에 내 두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백인은 흑인과 어울리는 법이 없다는 걸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원인을, 내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어리석음과 측정할 길 없는 맹목성으로 돌렸더랬다. - P137

 내가 속한 계층은 눈 씻고 찾아봐도 내놓을만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내가 속한 계층을적대하기 시작했다. 그 계층에 속했기 때문에, 나는 풍미도 향기도 없는 존재가 되었고 내가 이웃해 지냈던 프랑스 어린이들의형편없는 모사품이 되었다.
나는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었으니, 프란츠 파농이 내놓을글은 바로 나를 위한 거였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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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제가 달라져야 이런 풍경이 바뀐다는 뜻인가요?"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평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도 좋구요. 서핑을 배우거나봉사활동을 한다거나.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 P27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 P34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P35

시간여행자는 어떤 사건을 지켜보고 어떤 사건을 외면할지 결정할 수 있다. 어쨌든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결말은 똑같다. 다만 어떤 징검다리를 거쳐 그결말에 이를지는 각자가 선택할 수 있다. 시간여행자는 관찰할 사건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자신의 기억을 수정할 기회를 가질 수있다. 기억이 수정되면 우주의 운행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고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 - P71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 P97

선사시대, 혹은 아직 인간이 지구에 나타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하늘 별들만이 가득한 하늘.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처럼 시간 역시계속 뻗어나갔다.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시간이 시작되던 그 순간까지.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사막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에서 본 ‘깊은시간deep time‘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깊은 시간이 그의 눈앞에펼쳐져 있었다. - P107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 P121

 한 사람을 기억하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라고. 그러고 나니 그 부분이 마음에 들더라. 그래서그 밤을 보낼 수 있었던 거야. 자는 듯 마는 듯, 웃는 듯 우는 듯,
한 사람을 기억하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라고 흥얼거릴 수있어서. - P182

시간이 지나면 지훈 역시 쫓기듯 다른 사람을 만나서 또 사랑이라는 걸 할 것이다. 첫번째 사랑은 두번째 사랑으로만, 그리고 그모든 사랑은 마지막 사랑으로만 잊히는 법이니까. 하지만....
하지만 꼭 구해야만 했을까, 배수로 속의 그 고양이? - P193

"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 P196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 P207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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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하나의 사고방식이겠지. 하지만 유일한 건 아니야. 사람은 어디에 살아도 좋고, 무엇을 행복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어디서 어떤 식으로 살아도 좋아. 살아도 좋다는 걸 구체적으로 보증하는게 내일이다. 나는 지방공무원을 인생을 걸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 - P295

하지만,
미노이시에 온 것은 숫자로만 표기되는 이름 없는 시민이 아니었다.  - P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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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책을 사랑하는 분들은 롯데월드 118층의 스카이전망대같은 곳 안가실듯요. ㅎㅎ 물론 저도 수학여행이 아니라면 안갔을듯합니다만...


그래서 사진 몇장 투척합니다.
118층까지 엘베타고 올라가면 뭔 영상을 강제로 보래요
영상이 나쁘진 않은데 자기들 건물 광고성격도 있어서 보면서 쬐끔 짜증났거든요
근데 짧은 영상 마지막에 뒷 배경 커튼 올라가면서 서울 야경이 똭 펼쳐지는데 저절로 탄성이...
멋있더라구요.
욕한거 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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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4-06-08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지네요 가고 싶어요 ㅋㅋ

바람돌이 2024-06-10 09:42   좋아요 0 | URL
한번쯤은 괜찮은 체험이었어요. 이벤트 느낌이랄까요? ㅎㅎ

희선 2024-06-25 0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있게 보이지만, 빛이... 도시, 그것도 서울은 밤이 되어도 어둡지 않은 곳이네요 어느 나라 도시나 다르지 않겠습니다 수학여행 가셨던 건가요 유월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4-06-26 22:54   좋아요 1 | URL
요즘의 도시들은 다 그렇지 않을까요? 정말 6월이 얼마 안남았네요. 잘 지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