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 부인이 어제 아이를 유산했어. 출산 예정일을 몇 주밖에 안 남기고 말이야. 무슨 충격 때문이라는데 내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자기 남편 얼굴을 쳐다보고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어."
"여자가 청혼을 거절하는 것은 남자들에게 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죠." ㅡ 제인 오스틴
- P32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마음놓고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가 천국이라고,
ㅡ 버지니아 울프
- P84

유르스나르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쓴 작가로, 호텔 객실에 있건, 야간열차 안이건, 여객선 선실에 있건, 어디서든 머릿속을 비워놓은 다음 그 안을 소재와 주인공들로 채워넣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의 초안도 그렇게 탄생했다. 기차 안 또는 강의를 하러 가는 차 안에서 한 권의 참고 서적도 없이 쓴 것이다. "이따금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글을 쓰기 전에 한두 시간 정도 그리스어 공부를 했지요."
- P148

사유하지 않는 것
그것이 범죄다. ㅡ 한나 아렌트
- P158

보부아르는 본인의 회고록 마지막 권인 『종결산」에서 이렇게썼다. "나는 대작가가 아니다. 대작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히 전해주는 데서 존재 가치를 두고 싶다."
- P182

진실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이야기되는지가 중요하다.
ㅡ 엘사 모란테 - P205

글로 쓰인 단어들에는 인간 본성의
가장 고귀한 부분부터 가장 추악한 부분까지
끌어내는 놀라운 힘이 있다. ㅡ 나딘 고디머
- P241

당신이 정말로 읽고 싶은책이 있는데 
아직 그런 책이 없다면
당신이 직접 써야 한다. ㅡ 토니 모리슨
- P256

상상할 수 없다면 가질 수도 없다.
ㅡ 토니 모리슨 - P261

나는 글을 쓸 때면언제든 약한 쪽에 서려고 노력한다.
강한 쪽은 문학이 설 곳이아니니까.
ㅡ 엘프리데 옐리네크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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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점으로부터 이어진 넓은 길은 조사위원들을 "절대적 폐허의무(nothingness of absolute ruin)의 세계로 인도했다. 그곳에는 식은 용암지대와 같은 회색의 돌무더기와 자갈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무질서하게 흩어진 돌조각과 콘크리트 건물의 잔해, 여기저기 크게 쌓여있는 돌무더기, 부서진 벽, 불타고 남은 건물 목재, 잿빛의 기둥, 바닷가에서 퍼온 것처럼 산산이 부서져 있는 자갈들까지 그곳에는 무엇 하나온전한 것이 없었다. 몇시간의 조사를 통해 대략적으로 과거의 건물들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을지 그저 추측 가능했을 뿐이다.  - P173

이렇듯 수많은 북한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유쾌하게 웃으면서 지내다.
가도, 언제든 마음속의 가장 어두운 심연으로 급속히 추락하곤 했다. 사실상 이 당시 북한사람들의 상당수가 일종의 정신적 외상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다. 가족과 이웃을 잃고 자신의 모든 재산이 한줌의 재로 사라진 상황 속에서, 그리고여전히 폭격기가 일상적으로 머리 위를 배회하는 상황 속에서 정신적건강함을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P188

이 감옥들은 전쟁 이전 시기의 물류창고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을 내에서 가장 큰 농산물 보관소나 화약창고 같은 곳이 사람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활용되었다. 응당 이곳에는 화장실이나 세면실 같은 것이 따로 설비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이곳에 함께 수용된 수많은 성인남녀와 아이들에게 엄청난 수치심과 모욕감까지 안겨주었다. 마치 2차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를 향해 달려가던 유대인 수송열차 안처럼수많은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용소행 열차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져 죽고 밟혀 죽고 병들어 죽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황해도의 여러 창고 안에서도 병약한 아기들과 노약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어나갔던 것이다.
- P194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지역 기독교 인구가 급증하는 데 ‘전쟁‘ 이라는비평화적 상황이 매우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청일전쟁의 전화(戰禍) 속에서 민중들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위해 서양 선교사들이 주관하는 교회로 몰려들면서 기독교가 평안도와 황해도 각처로 급속히 확산되어 나간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기에는 동일한 믿음을 갖고 생존을 위해 교회로 몰려갔던 사람들이 과거와는 달리 비참한 상황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북한주민들은 미군이 교회를 폭격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집단적으로 폭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들 중 하나였던 교회는 오히려 미군 폭격기의 주요 타깃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펠턴이 노인에게 물었다.
- P196

"당신은 기독교도인가요?"
그는 대답하기를 거부하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펠턴은 다시 물었다.
"크리스천이세요?"
노인은 고개를 들면서 펠턴을 응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펠턴은 포기하지 않고 세번째로 반복해서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기독교인이었지. 평생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어. 하지만 지금은……" 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의 노쇠한 몸이 떨리고있었다.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았기때문에 나는 더이상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 P197

이렇듯 미군을 학살의 직간접적 주체로 지목하고 있는 증언들은 사실상 국제여맹 조사단 활동의 정치적 성격을 평가하는 데 매우 중요한분석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왜냐하면 최근 국내학계의 황해도 집단학살에 대한 연구 성과들에 의하면, 학살사건의 명백하고 중요한 가해사 중 하나로 이 지역에 뿌리를 둔 한국인 ‘우이 치안내‘를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을 개진하고 있는 논저들은 대체로 한국전쟁당시 황해도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대부분 피란민)의 구술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관련 구술자료는 꽤나 일관성 있고 방대한 편이다. 우익청년들의 학살행위에 대한 미군의 직접적 지시나 방조 여부에 대해서는여전히 학계 내의 합의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황해도 본토박이우익청년들의 학살행위 가담은 부인하기 힘든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고 있다.
- P205

1948~49년 제주4·3사건 당시 진압군을 지휘했던 박진경,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이 그로부터 불과 3~4년 전까지만 해도 위와 같은 폭력적군사문화의 일본군 하급 장교였다는 사실은 결코 쉽게 간과할 사안이아니다. 게다가 4·3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948년 여순사건 당시에도 온건한 입장의 송호성(宋, 광복군 출신)을 대신하여 일본군 출신의 백선엽(白善華), 백인엽(白仁壁), 김백일(金山一), 김종원(金宗元) 등이강경진압을 주도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신참변과 난징대학살로 이어진 일본군의 잔혹한 폭력성은 불행히도 해방 직후의친일파 미청산 및 친일군인들의 권력 장악과 함께 한국현대사 속에서부활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펠턴은 산 사람을 생매장하고, 나체로 끌고 다니고, 무차별적으로 신체를 훼손하는 일이 믿기지 않았겠지만, 수년 전 일본군이 점령했던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이 같은 일들은 언제든 현실에서 재발 가능한 악몽이자 트라우마와도 같은 사건들이었다.
- P226

국제여맹의 현지조사 시점은 미공군의 ‘초토화정책 수행 직후의시점이었던 것이다. 1950년 11월 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북한지역내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 군사적 목표로 간주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실제 11월 8일 신의주 대공습을 시작으로 북한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불살라버리는 작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1950년 11월 북한 주요 도시들의 파괴율에 대한 미공군 자체 평가에 의하면, 만포진 95퍼센트, 고인동 90퍼센트, 삭주 75퍼센트, 초산 85퍼센트, 신의주 60퍼센트, 강계75퍼센트, 희천 75퍼센트, 남시 90퍼센트, 의주 20퍼센트, 회령 90퍼센트가 완전 파괴되었다고 한다. 폭격 피해에 대한 국제여맹의 주장은 전혀과장되지 않았던 것이다.
- P286

보고서 발표 직후 덴마크의 한 언론은, 이 여성들이 자신의 고국으로돌아오기 전까지 "서방 국가의 어떤 사람들도 한국 민중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 P294

그러나 북미와 서유럽에서 위와 같이 국제여맹 보고서에 대해 다소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례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보고서에 반영된 여성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철저히 묵살되거나 노골적으로 탄압받곤 했다.
미국정부의 공식적 반응은 철저한 무시와 무대응이었다.  - P295

1951년 매카시즘이 정점에 달해 있던 미국에서 레드콤플렉스를 활용한 특정 세력의 무력화는 매우 쉬운 일이었다. 미국정부는 그 같은 ‘빨갱이‘ 낙인찍기 임무를 미국 내의 보수적 여성단체들에게 위임했다. 정부는 전면에 나서지 않는 대신, 자국 내의 애국주의적 여성단체들을 활용해 좌파적 여성평화운동을 억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 P295

그런데 국제여맹은 한국에 조사위원회를 보낸것이 결정적 문제로 지적되어 , 결국 1951년 유엔 내의 모든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16 냉선 초기 가 많은 회원국을 거느리고 있던 국제여성단체가 한국전쟁 관련 활동을 이유로 유엔 내 지위를 완전히 박탈당했던 것이다.
- P296

수난은 국제여맹이라는 조직적 차원에서 그치지 않았다. 여러명의한국전쟁 조사위원들이 북한지역 조사활동을 이유로 끔찍한 정치 · 사회적 탄압을 받았다. 물론 중국, 소련,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공산국가출신 조사위원들은 귀국 후 특별한 정치적 조치를 받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P296

명확한 자유주의적 정치성향의 덴마크 조사위원들이 북한여성 원조에 적극적으로 임한 이유는 간명했다. 북한지역에서 다수의 타협할 수없는 진실들" (irreconcilable facts)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펠턴의 관점도 마찬가지였다. 펠턴은 조사 과정 내내 다양한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실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 있었다. 펠턴은 이를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 유일하게 확실한 사실이란 "시체가 매일 쌓여갔다"는 것이었다. - P316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전쟁 상황하에 살아가고 있다. 분단체제라는 전쟁과 같은 굴레 아래에서 문자 그대로 악전고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전쟁의 지속‘과 ‘전쟁의 형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제기했던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전쟁이 왜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지, 그 수행 방식은 왜 그토록 잔인했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더 진지하고 집요하게 물어보아야만할 것이다.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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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소이탄 공격을 통한 신의주의 완전 파괴는 당대 미공군 문서를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입증된다. 앞서 간략히 설명했듯이, 1950년10월까지만 해도 맥아더는 대량의 소이탄을 사용한 신의주 대공습 작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1950년 11월 유엔군은 공중폭격정책을 과감히 수정하여 기존과는 완연히 다른 노선을 전면적으로 채택했다. 1950년 11월 5일 맥아더의 초토화정책이 현실화된 것이다. 11월8일 신의주 대폭격의 실행은 한국전쟁기 유엔군 작전사는 물론, 인류평화사와 냉전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터닝포인트 중 하나였다. 유엔군은 과거의 역사 속에 박제해버리고자 했던 2차세계대전의 악령을 한반도 상공에 다시 불러들이고 있었다.
- P138

유엔군은 신의주라는 도시 자체를과거 아무런 인공적 구조물도 없었던 시절로 돌려놓으려는 듯이 맹렬하게 파괴했다. 1950년 11월 17일, 맥아더는 주한미대사 존 무초를 만난자리에서 북한지역 전체가 사막화될 것이라고 공언했는데, 이는 결코과장된 허풍만은 아니었다.  - P146

그녀의 주거공간은 무덤 크기 정도의 토굴이었다. 그녀는 그 구덩이안에서 남편 및 네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목재가 토굴을 떠받치고있긴 했지만, 어린아이의 주먹질만으로도 곧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토굴 안에는 양초와 작은 양푼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그것이 가재도구의전부였다. 그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의 식량은 시 당국에서배급하는 쌀과 콩에 의존한다고 말했다. 물은 200~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급수 펌프에 의존했다.
- P149

이 여성 외에도 많은 신의주 시민들이 소이탄 폭격 당시의 저공 기총소사(strafing)에 대해 증언했다. 조사위원들은 이 기총소사로 인해 신의주 시내 전반이 더욱 철저하게 불타버린 것으로 파악했다. 조사위원들은 "어째서 피해가 이다지도 막심한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지만, 반복적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파악할 수 있었다.
"시의 직원들이나 데중들을 만니 우인히 대화를 나누며 질문한 결과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와 인터뷰한 모든 사람들은 첫번째의 파상적인 소이탄 투하 이후 불을 끄기 위해 거리로 나간 사람들이 저공비행기총소사에 의해 조직적으로 사살되었다고 말했다. 도시에 대한 완전소각은 화재진화를 시도한 민간인들을 기총로사하는 과정에서 초래되었다. - P151

북한주민들의 진화작업을 방해하기 위한 또다른 활동은 소이탄 투하직후 도시 전역에 걸쳐 시한폭단을 투하하는 행위였다. 국제여맹 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미공군 폭격기들은 주로 소이탄 투하 후에 다량의 시한폭탄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시한폭탄은 다양한 시간대에 걸쳐서 산발적으로 폭발했는데, 낙하 후 20일 이후에 폭파하는 경우도 있었다. 며칠 뒤 국제어맹 조사위원들은 평양지역 현지조사 과정에서10~20분 간격으로 세발의 시한폭탄이 폭발하는 광경을 지적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자칫하면 조사위원들의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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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제2차세계대전의 강력한 영향력하에 ‘평화‘와 ‘인도주의‘의 문제가 전쟁의 발발, 전개, 정전 과정 전반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 최초의 국제전이었다.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좌파적 여성주의자들 또한 동시기 평화운동의 적극적 주체로서 세계 모든 대륙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다.
- P12

그러나 최소한 이 책은 1951년 당시 북한지역에 거주하는여성들을 ‘북한여성 (North Korean women)이 아닌 ‘한국여성‘ (Koreanwomen)으로만 호칭하면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제3세계 여성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고자 했던 외부세계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료하게보여줄 것이다. 냉전은 이 여성들의 존재를 역사에서 왼전히 삭제해버리려 했지만, 흔들리는 분단체제와 달냉전의 현실 속에서 국제어맹의활동은 지속적으로 재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국 최고의 여성 엘리트였던 이들이 왜 유서를 쓰고 압록강을 건너갔는지, 그리고 그 잿빛 현장에서 여러차례 북한여성들을 부둥켜안고 쏟아낸 굵은 눈물의 의미가무엇이었는지 진지하게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P22

그런데 스티버니지 개발계획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추진된 막대한국방비 증액에 의해 그 실행 과정에서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영국노동자들은 자신 앞에 펼쳐졌던 장밋빛 미래가 빠르게 되색되어가는모습을 무력하게 비라보았다. 냉선과 한국전쟁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화의 파고가 영국의 정치와 노동자들의 일상을 격렬하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펠턴의 한국행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영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에 대해 좀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 P26

전쟁 승리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던 처칠 정부가 외교와 군사문제에집중할 때, 노동당은 국내문제‘에 대한 주요 책임과 역할을 떠맡았다.
유럽 전역에서 독일이 전황을 유리하게 전개해나갈 때, 처칠 정부는 다급한 상황 속에서 영국인의 ‘공동체의식‘과 ‘사회개조‘ 의 필요성을 환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희구가 광범하게 유통되었고, 토인비(A. J. Toynbee), 케인즈(J. M. Keynes)와 같은 지식인들이그 같은 기대에 진보적 열정을 불어넣었다. 전쟁 승리는 반드시 진보와동행해야 할 것이었다." 그 같은 진보와의 동행은 『타임즈 ( The Times)기사의 설명에 의하면, "수백만의 보통사람들이 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우리의 적보다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위한 정책이었다.
- P28

 1951년 4월 북한행 직전의 모니카 펠턴은 영국사회의 정치 - 경제적미래상에 대해 우울하고 비관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영국의 ‘희망이 벌써 사라져간다 거나, ‘세계를 향한 우리의 희망의 일부분‘
이었던 스티버니지의 운명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다. 펠턴은 다름 아닌 한국전쟁의 발발과 냉전의 심화 과정이 영국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역행시켜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 한국전쟁 발발 이후 매우 짧은 기간 동안 영국의 외교와 재무정책은 급속한 변화를 맞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의 두려움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P30

국제여맹 영국 지부가 한국전쟁 조사단 참여 여부를 의뢰하는 초청장을 나에게 보냈다. 나는 비록 그 이전까지 이 단체와 연결된 적이전혀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초청에 응하는 것이 노동당 평생 당원으로서 노동운동에 도움을 주고, 노동당의 가장 훌륭한 전통의 일부분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래, 이 나라의 국민들은 북한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얻을 수 없었고, 심지어 지난가을 이래로 남한으로부터 제공된 보고들 또한 점점 디 심하게 검열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영국 노동운동의 가장 큰 동력은 언제나 사실에 근거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견해의 기초를 형성하는 일반 당원들의 열정으로부터형성되었다. 나는 한가지 목표만을 갖고 있었다. 그 유일한 목표는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었고, 진실을 발견할 경우 그것을 세상에 알리는것이었다. - P35

한국전쟁은 1945년 이래 애틀리 노동당 정부가 추진해온 사회주의적정책을 심각하게 역진시키고 있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라는 구호 아래 시행된 다양한 사회보장과 주택 정책들이 막대한 국방비 증액에 의해 휘청거렸다. 이에 맞서 노동당 좌파 의원들은 당의 사회주의적 전통에 따라 쉽게 묵과할 수 없었던 미국의 비인도적 공중폭격과 이승만 정부의 잔학행위 관련 보도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과연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영국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희망던 사회보장 계획을 퇴보시키면서까지 국방비를 대대적으로 증액하는것이 적절한 선택인지 논쟁이 일었다. 1951년 4월, 펠턴은 이 같은 논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 P36

국제여맹은 이내 전후 여성운동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중 하나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심지어 1949년 미국 내의 페미니스트들조차 국제여맹이 "이제껏 세계가 보아온 그 어느 조직보다도 단연 대단한 여성 조직(the most tremmendous women‘s organization)으로 성장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국제여맹 자료를 가장 광범하게 조사하여 이 분야 최고의연구자로 평가되고 있는 프란시스카 더한(Francisca de Haan)의 표현에 의하면, "국제여맹은 1945년 이후 가장 크고, 아마도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여성단체"였다. 1951년 외제니 꼬똥(Eugénie Cotton)의 주장에 의하면, 국제여맹은 전세계 9100만 여성들을 대변하는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 P57

즉 국제여맹은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여성단체들 중에서 진보적 좌파 여성주의에 공명하는 단체들을 전반적으로 아우르고 연결하는 상위의 지붕조직이었던 것이다. 이 진보적 좌파조직의 핵심 주장은 평화, 여성의 권리,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인종주의 등으로서, 기존 여성운동의 주요 흐름이나 당대의 대표적 국제여성단체들과는 꽤나 상이한 주장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 P58

국제여맹은 그 활동 초기부터 남아메리카와 동남아시아 여성 조직들과의 연계를 형성하고, 그곳 여성의 삶을 조사하기 위한 진상조사단(fact-finding mission)을 파견했다. 1946년 국제여맹의 첫번째 진상조사단이 아르헨띠나, 칠레, 브라질, 우루과이에 파견되어 현지 여성 실태조사와 그곳 여성운동가들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그리고이해에 개최된 국제여맹 평의회(council meeting)를 통해, 향후에 개최될 모든 평의회에서 반드시 식민지 여성의 삶의 문제와 인종차별의 젠더적 영향에 대해 논의할 것을 결의했다. 표현 그대로 남아메리카 아시아 · 아프리카 여성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국제여맹 이전의 어떤 국제여성단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중요한 역사적 변화였다.
- P68

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유럽에서 파시즘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고,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여전히 식민주의가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은 응당 세계 곳곳의 수많은 여성들의 일상에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국제여맹은 이렇듯 파시즘과 식민주의로 고통받는 여성들과의 연대를 공식적으로 천명했던 당대의 유일한 국제어성단체였다. 또한 국제여맹은 냉전이 본격화되기 이전 시점부터 스페인, 남아메리카, 동남아 등의 지역에 지속적으로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던 세계 유일의 국제여성단체이기도 했다. 1951년 국제여맹의 북한 현지조사단 파견 조치는 결코 이 단체의 역사와 무관한 일회성의 정치적 이벤트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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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종이책의 물성이 아니라 책이라는오래된 매체와 그 매체를 제대로 소화하는 단 한 가지 방식인독서라는 행위다. 세상에는 그 매체를 장식품, 장신구, 장난감, 부적, 팬클럽 회원증, 후원금 영수증 등으로 소비하는 이들도 있다. 그것은 소비자의 자유겠으나, 그런 소비를 독서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 P113

나는 오히려 읽고 쓰면 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실제로는 편리한 면죄부로 쓰이는 것 아닐까 의심한다. 힘들게 행동하지 않으면서, 읽고 쓴다는 쉽고 재미있는 일만으로 자신이 좋은 인간이 되고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런 허약한 가설에 기대 은근한 우월감을 즐기는 듯비칠 때에는 좀 딱해 보인다.
- P156

요즘은 "책을 왜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타인과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내가 아닌 남의 이유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해도 될 것 같다. 타인과 세계를 체험하지 않고 이해하는 방법은 언어뿐이고, 그들은 무척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주 긴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긴 언어를 순서대로 기록하고 재생하는 가장 효율적인 매체는 책이라고, 다른 사람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다 보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도 있을 테고, 헌데 가끔은 그 질문에 대해 "그야 물론 재미있으니까"라거나 "억지로 읽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대답하고픈 충동도 인다.
- P158

이런 왕국을 각자 세우면 어떨까. 우리 모두,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을 써보는 것만으로도 당신 한 사람을 위한 정신의영토, 취향의 도서관이 탄생한다. 탐색하고 고르는 일은 그자체로 의의가 있고, 해보면 꽤 즐겁다. 읽고 싶은 책들을 숙제가 아니라 가능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시작이다.
참고, 이 왕국은 한 번 건설하면 땅이가 끝없이 확장된다. 아시다시피, 읽고 싶은 책들은 읽은 책보다 언제나 훨씬더 빠르게 늘어난다.
- P234

서구 지식인들이 진영 논리(‘누가‘의 문제)에 빠져 소련의 실체를 보지 못하거나 보고도 눈 감았을 때 오웰은 그러지 않았다. ‘누가‘를 따진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파시즘과 자본주의에맞서 싸운 체제라고 믿었다. ‘어떻게‘를 살핀 오웰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공통점을 봤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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