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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기행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평점 :
톨스토이 아저씨가 말한것처럼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이 책을 보면서 생각하고 싶은 건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아니라 어떤 국가적 사회적 환경이 인간이 인간답다고 느끼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지켜진다고 느끼느냐이니까.......
조만간 세계적인 거장이 될 그러나 아직은 본국인 콜롬비아의 정치를 비판하는 칼럼을 쓴 것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탈리아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젊은이의 좌충우돌 여행기로 읽을까?
그러기에는 그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들이 심상치 않다.(아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노벨 문학상의 마르케스라는 이름에 지레 짓눌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도 아직은 그저 르포물을 쓰는 아직 미숙한 글쟁이일뿐이다. 책은 술술 잘 넘어간다.)
마르케스가 동유럽을 여행한 시기는 1950년대 말이다. 대충 짚어보니 1957년쯤 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책 소개여러 글에서 마르케스가 20대였다고 막 우기고 있기 때문이다.
1957년이면 만나이로 29살이니까 20대 맞고, 우리 나리로는 31살인데, 아무래도 뭔가 모험을 하고 새로운 경험을 하기에는 20대라고 하는게 좀 낫긴 하겠다.
어쨌든 20대인지 30대인지 이 위대한 작가는 어느 날 프랑크푸르트의 카페에 앉아 있다가 새로 산 자동차를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친구의 말에 "철의 장막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보러가자" 며 여행이 시작된다. (아 쉽구나.... 우리는 지금도 그래 자동차가 있으니 북한이나 한번 갔다올까? 안되잖아...... )
'철의 장막'은 장막도 아니고 철로 돼 있지도 않다. 그것은 빨간색과 흰색으로 칠한 나무 방책인데, 꼭 이발소 간판 같다. 그 장막 안에 석 달 동안 머무르고서, 나는 철의 장막이 정말로 철의 장막이기를 바라는 건 일반 상식이 모자란 결과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십이 년 동안 집요하게 선전을 해 대면, 그로 인해 생겨난 신념이 모든 철학 체계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24시간 매일 저널리즘 문학에 매달리면 상식적인 생각이 극단적으로 무너지고, 그래서 우리는 은유나 암시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 9쪽
이념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누구나 머리로는 알지만 사실 이것을 진짜로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처음 사회주의 이념을 접했을 때 느낀 것은 그야말로 환희의 신세상이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모두가 인간적인 존엄을 유지하고,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모든 자원을 누구나가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세상 - 천국이 그려지는건 순식간이다.
아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로 행복하겠구나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만 해결되어도 나머지 문제는 부차적이니까 천천히 천천히 하나씩 해결해가면 되니까.....
따라서 1917년 러시아 혁명 후의 소련, 1945년 2차대전 종전 후의 동유럽에 대해서는 수많은 유럽의 지식인들이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사실상 이쪽의 여러 억압적인 상황들에 대해서 많은 유럽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거야라며 눈을 돌리는 참담한 상황도 많았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어쩌면 당대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일단면을 냉정하게 볼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일 수도 있겠다.
이들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동독안에 섬처럼 위치했던 베를린이다.
500여km를 달려 베를린으로 들어가면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의 거리는 브란덴브라크 문 하나일뿐이다.
동유럽 프롤레타리아와의 첫번째 접촉은 동독 국영식당에서였다.
이곳의 기억을 마르케스는 잊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데
나는 일상생활의 가장 단순한 행위, 즉 아침 식사에 그토록 온 정신을 쏟는 애절한 장면은 처음 보았다. 슬픈 얼굴을 하고 누더기를 걸친 100여명의 남자와 여자가 수증기로 가득한 홀에서 잘 들리지 않는 소리로 두런 거리면서 감자와 고기와 달걀 프라이를 먹고 있었다. -21쪽
그러니까 이런 문장이다.
사회주의 국가에 살고 있던 노동자들은 아침을 국영식당에서 먹는다. 심지어 메뉴에는 고기와 달걀이 포함되어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을까?
심지어 그들은 담배를 요청하는 여행자들에게 너도 나도 뜯지도 않은 담뱃갑을 내밀수 있는 집단적 아량을 가진 존재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도 여전하다.
혁명의 완전한 중심에서 모든 것이 낡고 추레하며 노쇠한 듯 보이는 현상.
그들은 말한다.
"아무것도 안 줘도 괜찮아요. 하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이 때의 동독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침 식사에 달걀프라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독일이 두 개로 나뉘어 있고, 기관총을 든 소련 병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서독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 역시 미군 병사들을 보고 싶지 않다.
그들은 그래서 불행하다.
사람이 밥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시기의 동독이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다음으로 도착하는 체코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다.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체제가 나름대로 조화를 이루며 유지되고, 사람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사람들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연극연출가들과 의사들의 서구로의 이주를 막기 위해 국가에서는 그들에게 막대한 급여를 제공하고 바츨라프 거리에서는 언제든지 공연이 진행중이다. 국가의 출판물 통제에 대해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위협적이지는 않다.
사회주의 경제의 흔적은 클럽 여가수의 낡은 나일론 스타킹에서 보일 뿐이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동독과 체코는 다르고, 다시 옆나라인 폴란드와도 다르다.
폴란드의 바르샤바는 특별한 도시이다.
전쟁 중 히틀러는 이 곳의 폴란드인과 유대인들을 모두 절멸시키고 게르만족의 새로운 이주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다.
도시의 파괴는 전면적이었고 치명적이었다.
심지어 전쟁 막바지에 독일군이 후퇴할 때 쫒아오던 소련은 독일군이 도시를 파괴할 시간을 더 내어준다.
전쟁 이후 폴란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폴란드 유격대가 부담스러웠던 소련은 독일이 그 폴란드 유격대를 전멸시킬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잿더미가 된 바르샤바 - 위키피디아>
바르샤바 사람들은 이 폐허를 다시 살린다.
전쟁 후의 그 가난 속에서도 빵과 신발을 희생하여 옛 바르샤바를 재건한다.
18세기 폴란드의 궁정화가였던 베르나르도 벨로토의 바르샤바 그림과 전세계 사람들에게 모은 사진과 엽서를 바탕으로 바르샤바 재건에 나서는 것이다.

<바르샤바 재건 - 위키피디아>
그런데 이 작업에 재앙이 발생했으니 바로 소련이 선물한 건물 - 문화과학궁전이다.

지금의 모습이야 저렇게 번듯하지만 모든 국민들이 헐벗고 굶주려가면서도 바르샤바의 옛 모습을 재현하겠다고 발벗고 나설때 소련이 선물이랍시고 건축해서 덩그렇게 놓인 저 위압적인 건물은 바르샤바 사람들에게는 어떤 느낌을 줬을까?
대부분의 폴란드 사람들이 뼈대만 남아있는 건물에서 비바람을 맞아가며 살고 있던 시기에.....
저 건물을 부수고 싶어했던 폴란드인들의 마음과 그럼에도 부숴버릴 수 없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마음사이의 간극이 강대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역사를 되새기게 하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렇게 소련에 대해서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들만의 사회주의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평일과 토요일까지 사회주의 얘기하다가 일요일이 되면 카톨릭 미사를 보기 위해 교회에 가는 폴란드인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아니 꼭 이해하려 노력해야 할까?
그저 그것 역시 그들의 삶의 방법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그들이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말이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는 하나의 거대한 전시장처럼 보인다.
사회주의란 이런것이야를 보여주고, 그것의 승리를 보여주는 거대한 깃발이랄까?
사람들은 일사분란하게 동원되고, 자신의 체제가 얼마나 우수한지를 보여주고 외국인을 환대함으로써 체제우위를 보여줄 전시장말이다.
1917년 이후 1950년대까지 철저한 언론 통제와 세뇌는 이곳의 사람들 뇌를 마비시킨 듯하다.
우주산업을 벌이고 핵을 개발하는 나라에서 사람들이 형편없는 신발을 신고 사십년을 견디면서도 의문을 품지 않는것, 모스크바에서 만난 어떤 사람도 마릴린 먼로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는 에피소드,
마르케스가 전하는 모스크바의 모습은 조지오웰이 전하는 도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마르케스가 전하는 동유럽의 모습은 지금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과거의 유산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은 결국 한 사회의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 충족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오래된 고민을 다시 들추기 때문이다.
경제력과 삶의 질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 오늘 대한민국 땅에서도 우리들은 내내 헬조선을 얘기한다.
우리들의 자존을 공격하고 절망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우리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고민하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