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욘 티히의 우주 일지 ㅣ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이지원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평점 :
23세기 우주 비행사? 혹은 모험가? 여행가? 하여튼 로켓 하나 가지고 여기 저기 온 우주를 여행하는 이욘 티히라는 인물이 우주 여행 중 겪은 일들, 만난 인물들에 대한 단편들로 채워진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야 말았다.
아니 진정 이 소설이 인간과 다른 세계,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도 진지하게 질문하던 소설 <솔라리스>의 그 작가의 작품이 맞단 말입니까?
이름도 어려운 스타니스와프 렘!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재능을 가진거란 말입니까?
IQ 180이라더니 그것이 진정 사실이었다는것을 이제는 믿겠습니다.
네 믿고 말고요.
첫 이야기부터 독자는 일단 빵 터지고 시작한다.
우주 여행 중 운석이 날아와 우주선이 고장난다.
우주복을 입고 바깥으로 나가서 보조 조종간을 끼워야 하는데 이 일을 위해서는 누군가 스패너로 나사 머리를 잡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너트를 돌려야 한다. 즉 2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우주선에는 이욘 티히 1명밖에 없다.
어떻게 될까?
그런데 우주선이 거대한 중력장 안으로 들어가고 이 때마다 시간의 방향이 휘어서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게 된다.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옛날 영화 백투더퓨처 같은거라고 생각하자.
어쨌든 시간의 방향이 휘면서 오늘의 나가 어제의 나를 만나고 모레의 나가 내일의 나를 만나고....
이 나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우주선을 고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어야 할 지경이 되고.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할 지경인데 과연 이온 티히는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을까?
물론 정답은 책에 있다.
그러면 끝까지 빵 터지기만 하는 걸까?
물론 소설은 곳곳에서 빵빵 터진다.
유머감각이 어찌나 넘치는지 사소한 상황들을 묘사하는데서 머릿속에 그 상황이 순식간에 재현 되면서 빵 터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주 여행 중에 멀미를 일으킨 사람들이 우주 공간을 무슨 타구처럼 사용하면서 토해놓으면 그 토사물이 앞으로 수백만년동안 우주 궤도를 돈다든지, 이욘티히는 실제로 자신이 버린 다 타버린 스테이크가 자기 우주선을 빙빙도는 것을 끝도없이 봐야햇던 적도 있었다.
또는 우주에 있는 다른 종족의 설명에서 다른 행성인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려고 하는데 이 별의 사람들은 60도의 기온에도 얼어 죽기 때문에 천국 얘기는 듣고 싶어하지도 않고, 그 대신 펄펄 끓는 지옥에 대해서만 아주 흥미로워 한다든지.....
인간 상상력의 끝이 어디인지를 보고 싶다면 이욘티히를 읽으라고 과감하게 주장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빵빵 터지기만 했다면 아마 이 책을 끝까지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580페이지짜리 책을 농담만으로 읽을 수는 없는 법이니 말이다. 농담은 처음에는 엄청 신선하다고 보지만 농담이 끝까지 농담으로만 계속되다보면 아 내가 왜 이 책을 보고 있나 하는 생각을 어쩔수 없이 하게 되니말이다.
이욘티히의 여행은 대부분의 SF가 그렇듯이 현실을 향한 질문이고 풍자이고 때로는 대답이다.
아무리 복잡해보이는 사안도 풍자의 영역에 들어와 본질과 현상을 정확하게 갈라 보여주면 현실의 문제가 뚜렷이 보이는 법.
작가인 렘은 그런 면에서도 천재적인 안목과 이야기 구사능력을 보여준다.
우주연합의 새로운 회원이 되기 위해 참석한 회의에서 지구인은 도대체 잘한게 뭔지를 묻는 어떤 질문에도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리거나 고뇌에 빠지는 이욘 티히. 결국에는 너희 지구인들은 전 우주적 협력이 언제나 약탈과 헤게모니 쟁탈보다 더 이익이라는 점을 계산하지도 못하느냐라는 질책앞에서는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전쟁을 자연스레 떠올린다. 1960년대에 쓰여진 이 소설의 저 질책을 인류는 그 이후로도 한번도 제대로 새겨본 적이 없으니 어쩌면 이런 책의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아서일까?
그렇다면 나는 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도록 더더더 노오력해야겠다는 결심을 굳게 한다.
이 책의 풍자의 대상은 전방위적이다.
이욘 티히의 시간여행을 통해 인류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휘말리면서 인류의 미스테리로 불리우는 부분들이 어떻게 잘못된 시간조작이나 시간여행자들의 의도된 또는 의도되지 않은 실수에 의해서 일어났는가 하는 농담을 장대하게 펼치기도 한다.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 중 많은 수가 이 실수에 의해서 유배된 미래 27세기의 시간여행자들이라니....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뭐 이런 사람들말이다.
아 또 히에로니무스 보스가 있구나

르네상스기에 도대체가 알 수 없는 기괴한 그림을 그린 이 보스 역시 시간여행자란다.
그래서 오른편 그림에 시간여행 버스를 슬쩍 그려놓았다는데 솔직히 뭘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게 저 시대에 이런 그림을 그리려면 뭔가 시간여행자쯤은 돼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거다. ㅎㅎ
종교, 자본주의, 관료제, 인간의 자기중심주의, 어떤 것도 작가 렘의 풍자를 피해갈 수 없다.
그 풍자들은 지금도 유효하여 책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새 지금의 사회 현실과 지금을 살아가는 나를 돌아보게 된다.
온갖 말도 안되는 우주 대환장 파티 속에서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 지금 우리 현실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꿰뚫어보는 경험은 이욘 티히를 읽어야 할 이유이고, 또한 즐거움이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진정 천재 맞다.
사족 - 요즘 디즈니의 오리지널 드라마인 <만달로리안>을 재밌게 보고 있다.
1부가 다 끝나가도록 주인공의 얼굴을 한번도 못봤고, 두번째 주인공인 귀염둥이 요다의 목소리 한번 못들었다.
그럼에도 드라마가 창조하는 새로운 행성, 다른 종의 생물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SF를 보는 묘미는 상상의 한계를 넘어서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이 확 살아있는 드라마다.
렘의 소설처럼 깊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드라마는 책과 또 다르게 다른 세상을 눈앞에 재현해주는 재미가 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