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종조모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다. 장례식장에서 한나절 머물다가 집으로 내려왔다. 나에게는 넷째 할아버지의 아내가 되는 고인은 우리 집안에서 독특하고 특별한 분이셨다. 유교적 관습의 틀 속에서 옹기종기 유대관계를 지켜나가던 다른 친척과는 달리 깊은 산 속에 혼자 사는 꽃사슴과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 탑골을 본거지로 하는 함양박씨 일족이라는 소속감과 유대관계를 다지는 명절과 제사에 일절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집안의 다른 여인네처럼 일찌감치 종갓집 와서 음식을 장만하고, 차례나 제사가 끝나면 큰 방에 둘러앉아 왁자지껄하게 수다를 떨다가, 늦은 오후가 되면 성미 급한 남편들의 재촉에 쫓겨 명절 음식을 싸 들고 길을 떠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서 유교적 제례에 불참했을 수도 있고 워낙 허약한 분이어서 귀향길 자체를 자제했을 수도 있겠다. 종조모님은 일찍이 병약한 건강 문제로 유명했던 분이다. 집안 아주머니들이 번갈아 가면서 종조모님을 대신해서 빨래해주었다니 ‘시집을 올 때부터 병자’였다는 말이 대단한 과장은 아닌 듯하다. 나는 잘 모르지만 젊은 시절부터 종조모님에 대한 주변의 건강에 대한 평판과 진단을 고려하면 50년 전에 고인이 되었다고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50년 전에도 ‘아니, 아직 그 사모님이 살아 계신단 말이냐?’며 오래 보지 못한 지인을 놀라게 한 분이다.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모르는 사이에 고인이 되어서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것으로 놀라게 한 분이 종조모님 말고 얼마나 더 있을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시집온 이후로 평생 명절에 시댁을 찾지 않은 며느리를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아프고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식구로 여겼던 모양이다. 워낙 왜소하고 마른 체구이셨다. 종손인 나도 넷째 종조모님이 명절 때 고향에 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본 일이 없다.
이상한 일이다. 종조모님은 평생 명절 제사 차례에 불참했지만, 우리 집안 어른이라는 정체성에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다른 어른에 비해서 어른으로서의 위세와 친근감 또한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어른과는 달리 종조모님을 뵐 때는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하고 말을 하고, 옷깃을 한번이라도 더 여미고 인사를 했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50년 이상 이 세상을 함께 했지만 96세를 일기로 소천하신 작은 할머니를 뵌 적은 많지 않다. 20년 전인가 이런 일이 있었다. 작은 할아버지 댁을 인사차 갔었는데 할아버지는 어디 가시고 없고 할머니만 ‘이불을 끼고’ 안방에 앉아 계셨다. 근황을 여쭈니 ‘이불만 끼고’ 사신다고 하셨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오래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오랜만에 외출하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한 아이가 할머니 뒤를 졸졸 따라오더라는 것이다.
“너, 왜 나를 따라오니?”
“네, 할머니 저기 뒤에서 나쁜 아이들이 저를 따라와서 무서워요”
“아, 그래? 그럼 나하고 같이 가자. 이리 오너라”
아이를 만났다는 곳은 대구의 중심가 거리 중의 하나였고 할머니 말고도 지나가는 건장한 사람은 많았을 것이다. 그 아이는 왜 자그마한 키에, 구부정한 허리, 마른 체구를 가진 병자로 보이는 할머니 품으로 들어오려고 했을까.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는데 나는 그 아이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할머니는 연약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환자로 보이지 않았다.
영민함과 따뜻한 배려심이 묻어 나오는 눈빛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온화한 인상에서는 누구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의지와 힘이 내비치는 분이다. 품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내치지 않고 함께 걸었던 할머니의 행위에는 결심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평생을 기도하면서 살아오신 따뜻한 분은 무서울 것도 주저할 것도 없으니까. 장례식장이 있는 안성에서 한참을 운전해서 대전 밑으로 오니까 도로는 한산했고 초저녁 밤은 고요했다. 고향 집 내 방에서 벽에 기대어 있다 보면 은은하게 교회 음악 소리가 들려올 시간이다. 교회는 다니지 않았지만 마치 자장가로도 들리는 그 소리를 나는 무척 좋아했고 평온함을 느꼈었다.
어둠이 깔린 도롯가로는 안개처럼 수증기가 몽글몽글 올라가고 긴 여행에 지친 아내는 조수석에서 고요히 잠들고 있었다. 할머니와 나눴던 마치 꿈속에서 있었던 일로 느껴지는 추억이 생각났다.
그날도 딱 지금처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초저녁이었다. 고향 집에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할머니셨다. “이 좋은 것을 나 혼자 누리고 죽으면 죄가 될 것 같아서‘전화를 하셨단다. 첫 마디를 듣고 할머니가 하도 오래 아프셔서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명약’이라도 알려주시려나 싶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교회’ 말씀을 하셨다.
‘죽을 때까지 유교 사상을 버릴 수 없다’고 단언한 아버지의 아들이며, 그 아버지를 종교처럼 생각하는 아들인 나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이다. 구미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한마디도 듣지 못하는 것이 탑골을 본거지로 하는 함양박씨 남자들의 주요한 특징이다. 할머니가 알려주신다는 것이 귀한 정보가 아니라는 실망감은 다소 실망감은 있었지만 대략 20분간의 말씀을 조신하고 귀하게 들었다.
타고난 성품과는 다르게 말이다. 손자로서 어른의 말씀을 공손하게 들어야 한다는 윤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할머니의 말씀이 어찌나 따뜻했는지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할머니의 말씀은 온전히 손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 그리고 사랑만 있었지 세속적인 다른 말로 부를 수 없었다. 간곡하게 ‘가까운 아무 교회나 다녀라’고 하시는데 ‘알겠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 밖 에 없지 않은가.
무작정 할머니 품으로 와 함께 걸었던 그 아이도 나처럼 따뜻했을 것이다. 그날이 할머니와 내가 나눴던 처음이고 마지막 통화였다. 물론 예수님 믿으라는 이야기도 그랬다. 집으로 가는 길은 평온했지만, 할머니의 간곡하고 따뜻한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죄책감과 조문을 다 하지 못한 아쉬움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문득 유난히 하늘이 포근하게 느껴져서 올려 보았다. 그림 같은 구름 위에서 할머니와 내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할머니가 말씀하신 ‘이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은 멀지 않을 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안방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때 할머니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