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인사에게 나의 전작인 <수집의 즐거움>을 증정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한심한 것인지 어쩐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책이 나에겐 없다. 기형적일 정도로 큰 방을 온통 책으로 가득 채운 내가 정작 내가 쓴 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섯 권의 책을 냈는데 최근작인 <독서 만담>만 구석에 몇 권 있는 게 전부다. 


할 수 없이 동네 서점(내 친구 가게다)에 재고를 문의해봤는데 이미 5년 전에 출간된 책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별수 없이 인터넷 서점으로 주문했다. 왜 나는 내가 쓴 책을 소장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근원을 생각해봤다. 


작은할아버지께서도 수필가셨다. 그분이 참 존경스러운 것이 언제나 원고지와 펜을 가지고 다니셨다. 언제 어디서나 떠오르는 내용이 있으면 원고지를 메워나가셨고 국어사전을 끼고 사셨다. 대구지방의 수필동인지에 글을 발표하셨는데 그걸 모아서 단행본으로 펴내기도 했다. 애당초 팔려고 낸 책은 아니고 팔릴 책도 아니었다. 제목이 <액운아 물렀거라>였는데 지금은 인터넷에서도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경성사범을 나와 25세에 교감을 27세에 교장에 취임하셨다. 내가 코흘리개였을 때도 교장 선생님이셨고 장가를 갈 때도 교장 선생님이셨다. 당신의 아들이 서울대 경제학과를 들어가 일찍이 운동권에 투신했고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교장직을 내려놓았다가 한참 뒤에 복직하는 우여곡절을 겪으셨다. 


평생 꽃길만 걷다가 아들이 수배되고 우리 집을 비롯한 온 친척 집에 형사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고초를 겪다 보니 여러 가지 회한이 드신 모양이다. <액운아 물러서거라>라는 제목 자체가 그분의 심경과 책의 내용을 말해준다. 당신께서는 우리 집에 들리실 때마다 오실 때는 원고지와 펜을 들고 오셨고 가실 때에는 늘 나의 장서 서너 권을 빌려 가셨다. 물론 책 애호가 답게 반납하시는 법이 없었다. 


당신의 서재에 가끔 갈 때마다 나도 탐나는 책이 있긴 했지만 감히 빌려달라는 부탁을 못 했다. 대신 당신의 저서는 온 집안에 배포되었고 소장되었다. 그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아마도 내가 유일하지 싶다. 당시 상주지역 국회의원의 저서 <엄마가 없는 너의 천국엔>은 상주시민임을, <액운아 물렀거라>는 함양박씨의 일원임을 알려주는 아이콘이었다. 


당신의 서재엔 <액운아 물렀거라>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추측건대 자비 출간의 형태가 아니었나 싶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왠지 측은한 느낌이 들었고 책을 낸다는 것이 확실히 돈이 되기는커녕 구차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더랬다. 타인의 책장에 꼽히지 않고 저자 자신의 서재에 방치된 할아버지의 저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일 년에 한번 동인지가 나올 때마다 할아버지께서는 집안 식구들에게 배급하셨다. 오타가 난 것은 볼펜으로 일삼아 수정해서 주셨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나 되니까 할아버지가 쓴 꼭지라도 읽었지 집안의 사람 누구도 그 책을 유심히 읽는 것을 보지 못했다. 우리 집안 사람들이 참 기특한 것이 수십 년간 공짜로 책을 꼬박꼬박 무료로 배급받았으면서, 집안의 사람이 낸 책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다는 개념이 정착되었을 것 같으면서, 정작 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너도나도 ‘네가 쓴 책이라도 돈을 주고 사야지’라며 너도나도 앞다투어 ‘구매’를 했다. 물론 새 책이 거듭해서 나올수록 그 구매 정신은 희미해졌고 내 사촌 동생은 <독서 만담>의 출간 소식을 보고도 조용히 ‘좋아요. ’만 누르고 사라졌다.


할아버지 방에 수북이 쌓여있는 당신의 저서는 글을 쓰는 사람의 비애를 느끼도록 해주었다. 내가 쓴 책을 내 서재에 쌓아둔다면 ‘잉여다움’이 느껴질 것 같다. 그 책들을 볼 때마다 나의 ‘무명’을 느껴야 할 것 같다. 나의 패배를 되새기게 될 것 같다. 한국시리즈에서 패한 2등팀이 우승팀의 시상식에 참가하는 기분 일것 같다. 내가 내 책을 내 서재에 두지 않는 이유다. 내 책이 새로 나오더라도 작은할아버지처럼 집안사람들에게 배급도 하지 않고, 알리지도 않는다. 내 딸아이는 며칠 전 서점에 갔다가 서점주인으로부터 내가 <독서 만담> 냈다는 것을 알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할아버지의 정성이 존경스럽다. 매년 새 동인지가 나올 때마다 일일이 집안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나눠주신 정성 말이다. <액운아 물렀거라>에는 우리 아버지와의 일화도 등장하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도 추억도 없는 경상도 사내에게 기록으로 아버지의 흔적을 남겨준 할아버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액운아 물렀거라>는 여전히 소중히 간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네번째 책 <수집의 즐거움>의 초판이 거의 다 팔려가고 있고 출판사 대표는 아마도 새 판을 찍지 않을 것 같다. 내 책은 소장하지 않는 그간의 관례를 깨고 최후의 10부는 내 몫으로 남겨달라고 부탁을 했다. 말하자면 절판분 수집가인 내가 내 책을 수집하게 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오래된 새 책>이 비록 절판 본과 희귀본 수집을 다룬 선구자적 책인 것처럼 인식되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이 업계에서 전설은 조희봉의 <전작 주의자의 꿈>이다. 이 책을 통해서 헌책에 관심을 끌게 되었고 희귀본 수집가로서의 꿈을 키웠더랬다. 


조희봉 선생은 절판분, 희귀본 수집가의 선구자답게 자신의 책이 절판 본이 되는 비애를 먼저 맛보셨고 나도 그 양반의 뒤를 이어갈 모양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2-15 11: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끔 헌책방에 가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내가 쓴 책이 헌책방에 발견되면 무슨 생각이 들까? 아무래도 작가 입장에서는 책은 자식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상황을 맞이하면 유쾌한 심정이 들지 않을 겁니다. ^^;;

박균호 2017-02-15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ㅠㅠ

낭만인생 2017-02-15 12: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어쨌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번 책은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것 같습니다. 순천히 책을 좋아하는 저의 느낌이긴 하지만...

박균호 2017-02-15 12:58   좋아요 0 | URL
네 좋은 말씀과 격려 고맙습니다

stella.K 2017-02-15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만 그런 게 아니었네요.ㅋㅋ
저도 제 책이 나온 건 집안 식구들 중엔 엄마 밖엔 모릅니다.
같이 사는 제 동생도 모르죠.
예쁜 조카에게 알린 건 책이 나오고 3개월 정도 됐을 땐데
알리는 게 왤케 쑥스럽던지...
그나마 엄마한테 알린 건 엄마는 오래 전부터 눈이 안 좋고
책을 안 읽으시는 분이라 또 안 알릴 수는 없고해서.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수집의 즐거움 1쇄가 소진되셨다니.
저는 꿈같은 일입니다.ㅠㅋ

박균호 2017-02-15 13:01   좋아요 1 | URL
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냥 2017-02-15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래된 새책을 읽고 숨어사는 외톨박이가 집에있다는 사실을 알고 업청 좋아한 기억이 납니다.
우리집에는요. 자비 출간한 시집이 참으로 많이 쌓여있답니다.
같이 사는 시인이 벌려 논 일인데요. 자기책을 냈으면 열심히 나누기라도 해야 할텐데 그것도 게을러서 안하더라구요. 사실 우리나라 시인들은 거의 대부분 자비출간에다 우편요금까지 들여서 자비로 지인들에게 보내는게 통상적이지요.
그런데에 비하면 절판이 된다는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새로 생긴 알라딘 중고매장에 갔더니 출간한지 2년 된 딸아이의 책이 중고로 나와있길래 냉큼 사왔답니다. 좀 재미있기도했어요.저도 허핑턴 포스터에 블로그로 참여 한 적이 있는데 박균호님도 그때 가끔 글을 올렸기 때문에 웃으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서 답글로 인사라도 합니다.

박균호 2017-02-16 01:59   좋아요 0 | URL
아..여러모로 인연이 많으신 분이네요. 정말 반갑습니다. 잘 알려진 시인조차도 시집으로 인세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요새 사정이 그렇답니다.
허핑턴이라면 누구신지 알듯도 하고요. 궁금하네요. 여튼 반갑습니다.

2017-02-16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16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송인 김미화 선생은 내 어린 시절 배꼽 도둑이었고 지금은 깨어있는 시민으로 존경하는 분이다. 서울에 가는 김에 그분께 드릴 <독서 만담>에 서명을 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는 끔찍한 악필의 소유자다. 자필로 서명하는 것을 책 한 권 내는 것만큼 힘들어한다. 신언서판이 확실히 맞는 말인 것이 나의 성품은 나의 필체를 닮았다. 


성격이 급하고 꼼꼼하지 못하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께서 부모님께 드렸다는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균호는 뭐든지 제일 일찍 끝내요’ 공성면 인창1리의 이장이시자 무려 공서국민학교 학력관리위원장님이셨던 아버님께 잔뜩 예의를 차려서 완곡하게 표현하신 말씀이다. 한마디로 뭘 시키면 대충하고 논다는 이야기다. 


악필이라고 다 같은 악필이 아니다. 악필도 일관성이 있으면 그 자신의 개성 있는 필체인데 나의 경우는 그렇지도 못하다. 언젠가 내 필체를 보고 직장 동료의 일성이 이랬다. ‘발가락으로 써도 네 글씨보단 낫겠다” 


그래도 책을 쓴 사람이라고 자필서명을 부탁하면 겨드랑이에 땀이 샘솟는다. 단 몇 줄 적는 것인데도 담임선생님 앞에서 외우지 못하는 구구단을 겨우겨우 말하는 심정이다. 심혈을 기울려서 적어주었는데 '피식' 웃으면서 '선생님 글씨는 잘 못 쓰시네요'라고 내 면전에서 말한 사람이 정확히 3명이나 있었다. 적확한 사실이라 원망은 하지 않는다. 


 집에 혼자 있을 땐 연습장에 미리 적어보는 예행연습을 거친다. 안동 양반이 연습 삼아 제사를 미리 지내보는 식이다. 혹여나 SNS에 인증사진을 올리면 어쩌나 전전긍긍하고 그게 현실화되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다. 


심지어는 인증사진을 내 SNS계정에 태그를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그 게시물을 삭제했다. 연습하고 적어도 글자를 잘 못 적는 경우도 허다하다. 문구를 적을라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서 철자가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다. 연습장에 적어놓고 옮겨 적는 이유다. 믿지 못하겠지만, 증정 문구를 잘 못 적어서 그쪽을 찢어버리고 다음 쪽에 적는 경우도 많다. 


처음에는 그 책은 폐기했는데 요즘은 아까워서 그냥 그쪽은 찢어버리고 흔적을 없애고 다음 쪽에 적는다. 최근엔 젊은 처자에게 그런 식으로 서명본을 보낸 적이 있었다. 우연히 그 처자랑 대화를 나누는데 궁금한 것이 있단다. 찢어버린 그 페이지에 무슨 말을 적었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다른 말을 적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찢어버리고 새로 적었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잃어버린 그 문구가 몹시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여기서 또 대충하는 버릇이 발휘되어서 찢어버린 쪽의 흔적을 완벽하게 처리하지 못한 것이다. 그 처자의 질문을 받고 머릿속이 또 하얗게 되었다. 그 처자의 생각처럼 제발 다른 말을 적었다가 새로 적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처자를 허무하게 만들지언정 없는 말을 지어낼 수는 없었다.


이렇게는 살 수 없겠다 싶어서 대안을 생각해봤다. 장서표의 대명사인 ‘남궁산’ 선생에게 의뢰해서 제작한 내 장서표의 사본을 많이 만들어서 내지에 붙여주고 내 이름만 적어서 보내는 방식 말이다. 남궁산 선생이 완성된 판화 원본을 보내주실 때 복사해서 사용하라고 별도로 흑백 판화를 보내주셨었다. 


문제는 흑백판화 원본을 어떻게 복제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펜글씨 학원이라도 다녀야 할까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7-02-14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그럼 제 책 받아보시고 놀라실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악필이거든요.ㅠㅠ
그런데 누구는 멋있다고 해서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ㅋ

사인본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건 좀 무리겠죠?ㅠㅋㅋ

박균호 2017-02-14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회가 되면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ㅎㅎ
 

책 읽기를 좋아하면서 어쭙잖게 책을 다섯 권이나 냈다. 자연스럽게 저자와 독자의 입장을 동시에 경험한다. 우선 저자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보자. 나의 경우에는 두껍고, 웅장한 장정판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간 책을 내면서 늘 아쉬웠던 게 내가 만족스러울 만큼의 웅장한 체구로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뭔가 거대한 작업을 했고 공부를 많이 한 느낌이 들기 위해서는 일단 책이 커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중고등학교 시절 빽빽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뿌듯해하는 기분 말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원고지 900매 정도가 보통 크기의 책이 나오니까 내가 동경하는 벽돌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천 매의 원고가 필요하겠다. 내가 십 년 동안 매진해서 그런 원고를 완성했다고 한들 내 책을 내줄 출판사는 없을 터이고 그걸 읽어줄 독자도 드물겠다.

요즘 독자들은 두꺼운 책을 싫어한다고 한다. 독자의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200페이지짜리나 1,000페이지짜리나 책 한 권일 뿐이다. 독서에 있어서 성취감은 중요하다. 내가 한 해에 몇 권의 책을 읽었다는 뿌듯함 말이다. 벽돌 책은 독자들의 ‘수치 계량학’적인 성취감의 적이다. 두꺼운 책은 독자들의 ‘유동성’에도 방해가 된다.

침대에 누워서, 지하철에서 또는 화장실에서 읽기 힘들다.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자세로 읽어야 하고 독서환경을 위한 별도의 ‘세팅’이 필요하다. 저자의 입장으로 돌아가면 내 책이 기왕이면 장정판 위에 소프트 커버를 또 덮고, 간지도 있었으면 좋겠다. 독자는 띄지가 귀찮다. 계륵에 가깝다. 버리자니 찜찜하고 그냥 두자니 책장을 넘기는 데 방해가 된다.

띄지를 버릴 것이냐? 말 것이냐라는 의제는 독서가의 영원한 고민거리다. <독서 만담>을 내면서도 편집자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두툼하게’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책을 낼 때는 독자의 입장을 잊어버리고 저자의 입장이 된다. 편집할 때 삭제가 되는 구절이 있으면 마치 내 살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느낀다. 내가 쓴 원고로 도대체 어느 정도의 두께가 되는 것일까 하는 주제로 밤을 새워 추측한 적도 있다.

<독서 만담>은 저자보다는 독자의 입맛에 맞게 나왔다. 어쩌다 보니 원래 실으려고 했던 꼭지 4개가 누락이 되었는데 그 녀석들이 제 자리에 들어갔다면 저자의 입맛에 맞는 두께에 좀 더 가까운 책이 될 뻔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독서 만담>을 읽은 독자에게는 후식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독자에게는 애피타이저가 될 집 나간 내 자식 한 명을 소개한다.

====================================

요사이 아내가 딸아이와 나를 두고 탕평책을 쓰고 있는 듯하다. 하긴 식구가 달랑 3명인데 한 사람을 소외시키면 부작용이 없을 리 없다. 그리고 딸아이가 너무 기고만장해지면 부모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를 맞을 수도 있으니 아내의 조치가 이해되기도 한다. 백화점에서 내가 멜 가방을 사느라 딸아이가 노래 부르던 바지를 미처 사지 못한 일만 봐도 아내가 적당히 딸아이를 견제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더구나 며칠 전 내가 딸아이에게 뽀뽀를 하겠다고 덤볐는데 평소처럼 딸아이는 짜증을 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아내는 “왜 자꾸 애를 귀찮게 하느냐”고 나를 꾸짖고는 했다. 그런데 이날은 나보다 딸아이를 혼내면서 “몇 초만 참으면 되는데 그걸 가지고 뭘 짜증까지 내느냐”고 되레 나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아내의 훈훈한 조치에 감격하고 결초보은할 기회를 찾았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주방을 돌아보니 설거지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그리고 TV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젊고 잘생긴 남자배우가 열연하는 드라마가 나온다. 나는 살며시 주방으로 향했고 아내가 드라마를 시청하는데 조금도 불편이나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설거지를 했다.


일희일비

잘생긴 배우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상스러운 그릇 씻는 소리가 섞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설거지를 했다. 음지의 설거지를 마친 뒤에는 조용히 서재로 복귀했다. 아내가 드라마 속 멋진 환상에 맘껏 취해 있다가 현실세계의 꾀죄죄한 남편을 보고 실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책을 읽는데 아내가 빨래를 널라는 분부를 내리셨다. 세탁기로 달려가서 냉큼 산더미 같은 빨래를 담아들고 을씨년스러운 베란다로 나갔다. 옷의 종류별, 크기별, 두께별로 엄격히 분류하여 세탁물을 건조대에 널고 있는데 마침 외출했던 딸아이가 돌아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내가 딸아이에게 “너도 베란다에 나가서 아빠를 도와주거라”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딸아이가 “이제 막 집에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일을 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항했지만 아내는 “아빠 혼자서 저렇게 고생하는데 자식으로서 돕는 것이 도리 아니냐“고 호통을 친다. 빨래를 널던 나는 감격해서 눈물을 왈칵 쏟아지려고 했지만 눈물에 젖은 빨래를 다시 세탁기에 넣어야 할 걱정 때문에 간신히 참았다. 눈물을 닦으면서 빨래를 정성스럽게 건조대에 널고 있는데 아내의 명령에 마지못해 베란다로 향하던 딸아이가 “흐흑” 하는 이상한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나는 본능적인 위험을 직감했고 딸아이가 베란다 문을 잠그기 직전에 탈출할 수 있었다. 

아내는 무서운 사람이다. 일찍이 통신사로 일본에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원숭이를 닮은 소인배고, 감히 우리나라를 침략할 인물이 못 된다며 왕과 국민에게 말한, 노회한 정치인 학봉 김성일의 후예가 아니었던가. 그녀는자신을 위해 보은하려는 남편을 베란다에 가두고 장난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갑자기 베란다 문을 잠그기 위한 액션을 취하면 눈치가 없는 나라도 금방 탈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나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딸아이가 아버지를 도와주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활용했다. 

아내는 나를 속이기 위해 나에게 들릴 만큼 큰소리로 딸아이에게 나를 도와주라고 했다.  한편 딸아이에게 들릴 정도의 아주 작은 속삭임으로 베란다 문을 잠그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아내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딸아이는 노회한 안동 양반의 후예가 니다. 딸아이는 지리산 자락 함양박씨의 후예다. 순박한 농부의 피를 좀더 많이 물려받았다. 딸아이가 아빠를 교묘하게 속인다는 긴장감을 감추고 불과 4m 정도만 베란다로 향했으면 아내의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실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딸아이는 역시 순박한 지리산 자락의 농부 출신 함양박씨의 후손이다. 털끝만큼도 남을 기만하지 못하는 유순한 성격 탓에 민중을 맘껏 요리한 양반네 후손인 아내의 욕심을 채워주지 못했다. 


희노애락이 담겨 있는 이야기 

아내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내게 절대 끌려 다니지 않는다. 나의 용도와 장점을 잘 파악하여 필요할 때마다 적재적소에 쓴다. 그리고 웬만하면 본인 스스로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자신의 뜻을 잘 구현해줄 충직한 딸아이가 있지 않는가. 응급의학과 전문의 남궁인이 쓴 병원에세이 『만약은 없다』를 읽다가 아내 못지않게 현명한 사람을 발견했다. 

논산훈련소에는 4주간의 훈련을 마치면 공중보건의가 되는 전문의들만 모아 둔 중대가 있다. 대한민국의 10대 도시에 종합병원을 몇 개씩 세울 만큼 전공이 다양한 수백 명의 전문의들만 모아 둔 중대라서 그 위세가 대단하다고 한다. 본인들이 모두 전문의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잡다한 질병을 다 달고 살아서 그 중대는 마치 질병의 경연장과도 같은 모습이라고. 수백 명의 의사인 동시에 환자인 그 양반들을 치료해야 할 군의관은 이제 겨우 인턴을 마치고 복무 중인 중위였다. 그 어린 군의관이 전문의 병사들을 치료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에게 수영하는 방법을 가르친다든가 혹은 교황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나 진배없는 웃기는 상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어린 군의관은 수백 명의 의술에 도가 튼 환자들을 짧은 시간에, 그것도 효율적으로 진료를 해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전문의 환자들의 불평도 전혀 없었다. 그 군의관의 비법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늘 하던 것처럼 서로 진료를 보시고 차트에 적어오시면 됩니다.” 

이 영민한 군의관은 전문의 환자끼리 서로서로 상대방을 진료하고 차트를 기록하는 방식을 적용했다. 전공이 각양각색이니 모든 종류의 질병에 대한 진료가 환자들끼리 셀프로 가능했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면 수백 명의 무리 중에서 피부과 전공의를 불러서 진료하게 하고 자신은 “피부과 선생님이 하신 말, 잘 들으셨죠?”라고만 하면 되는 일이다. 

『만약은 없다』는 이것 말고도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병원과 환자의 이야기가 많다. 애잔한데다 사람 사는 냄새가 진득하기로 유명한 박경철의 병원에세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리더스북)과 비견되는데 그보다 드라마틱하거나 동화스러운 면은 적지만, 좀더 사실적이고, 치열하며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준다. 철학서나 자기계발서보다 더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기도 하다. 평소 최상급 사용을 금기시하는 나이지만 이 책에만큼은 최상급의 찬사를 주고 싶다.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2-13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네 반갑습니다 제가 이따가 보내드릴께요 주소 알려주세요

2017-02-13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요 증정본이 없어서요 포인터가 많으니 주문해드릴깨여

박균호 2017-02-13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회되면 서명 해드릴께여

2017-02-13 1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20부 받았는데 다 증정했고요 싸게 사는 건 불편해요 ㅎㅎ

박균호 2017-02-13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책은 제가 나중에 사서 보겠습니다 ㅎㅎㅎ

2017-02-13 14: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궁 ㅎㅎ 오해 마셔요 경북 김천시 부곡동 우방아파트 108동 101호 박균호 01067767131 입니다 감사히 잘 읽을께요

2017-02-13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13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시고 간단한 서평 남겨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당

2017-02-13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3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그럼요

박균호 2017-02-13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가 우리집 신주소도 아직 모르는 바보라 ㅠㅠ

stella.K 2017-02-13 14:5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책도 내시고, 이사도 하시고.
올해 시작이 좋으신가 봅니다.^^

박균호 2017-02-13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해요

2017-02-14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4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여긴 시골이라 잘 들어올거에요 ㅎㅎ 감사합니다 잘 읽을께요

2017-02-14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2-14 18:55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착각을 해서 급하게 수정했어요...ㅎㅎ 편안한 저녁 되세요..
 

나는 문예반에서 하루 만에 쫓겨난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달리 잘하는 것도 없고 그나마 덜 움직이고 되는 곳 같아서 문예반을 선택했는데 담당 선생님께서는 내가 쓴 글을 보더니 ‘넌 안 되겠다 나를 반품시키셨다. 나이를 먹어가도 달리 좋아하는 것은 없이 유일한 소일거리가 책 읽기인 삶을 살아갔다. 서른이 되도록 글쓰기와는 여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회적인 현상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출현이다.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그때쯤 일선 학교에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나는 그 학교에서 손글씨가 아닌 워드프로세서로 시험지 원안을 작성한 최초의 선생이 되었다. 다른 이유는 없고 워낙 악필이기 때문이다. 그때쯤 인터넷 언론사가 탄생했다. 원고지에 글을 써서 해당 언론사에 우편으로 보내는 수고를 하지 않고 컴퓨터에서 곧바로 글을 보낼 수 있고,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정책은 귀차니즘을 신봉하는 나에겐 최적이었다. 


원고가 기사로 채택되지 않을 수도 있고, 비중이 작은 기사는 1천원, 톱기사로 채택되어봐야 1만 원이 지급되는 환경 속에서 260만 원가량의 원고료를 받았다. <올해의 기자상>을 나에게 주지 않을 것 때문에 ‘삐져서’ 탈퇴를 고려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나의 글은 문예반에서 쫓겨난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터넷이라는 문명이 나타난 초창기라서 나처럼 벌거숭이도 날뛸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인터넷은 훌륭한 글쓰기 연습장이 되었고 출간제의를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거꾸로 보는 위인’이란 기획을 내게 제시하셨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쓸 자신이 없었다. 내가 역사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는 생각도 들고 자칫 후손들이 나에게 소송이라도 걸면 어떡하느냐는 공포감도 들었다. 그 기획은 거절하는 대신 ‘내가 헌책과 희귀본을 좋아하고 수집하니 그 경험에 관한 글’을 쓰겠노라고 제의를 했고 출판사 측은 수락했다. 출판사의 사정으로 출간이 연기되다가 어렵게 2011년 가을에 나온 책이 <오래된 새 책>이다. 


오래된 절판본이 새 책으로 재출간되기를 희망하는 뜻으로 제목을 지었다. 아니 선택했다. 지금에야 밝히지만 <오래된 새 책>은 서평가로 유명한 <로쟈>님의 블로그에 있는 카테고리 이름이다. 물론 그 카테고리도 절판되었다가 재출간된 책을 소식을 전하는 코너다. 코너 이름을 책 제목으로 사용해도 되겠느냐는 부탁에 <로쟈>선생은 ‘제가 그 말에 저작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라며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새삼 고마운 일이다. 


<오래된 새 책>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동아일보는 문화면의 톱뉴스로 내 책을 소개했고 공중파에서는 촬영기사를 우리 집으로 보내서 취재해갔다. 출간된 지 열흘 만에 초판이 다 팔렸다. 열흘 만에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2쇄를 찍겠단다. 대뜸 오·탈자를 수정해서 찍으라고 부탁했는데 ‘시간이 없다’라고 하셨다. 2쇄를 찍자마자 책은 더는 팔리지 않았고 나의 짧았던 영광은 사라졌다. 


두 번째로 낸 <아주 특별한 독서>는 ‘신간이 언론에 소개되지 않기도 하는구나’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오래된 새 책>을 내고 하도 많은 언론사에서 취재하고 소개가 되어서 ‘책을 내면 원래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읽을 만한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주변 사람들의 부탁에 대한 ‘답’으로 낸 책이다. ‘삼국지’나 ‘문학 전집’을 출판사별로 장단점을 분석한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세 번째로 나온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는 나에게 ‘책 팔기의 어려움’을 더욱 가혹하게 알려주었다. 아내와 딸아이에게 치이는 40대 유부남의 비애를 재미나게 쓴 책인데 ‘재미’를 추구하는 내 글쓰기의 ‘원형’을 마련한 책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자신이 있어서 기존의 책보다 더 나은 조건의 인세를 요구했는데 이를 수락하고 출간한 출판사에 체면을 제대로 구긴 책이기도 하다.


네 번째 책은 <수집의 즐거움>이다. 피겨, 만화책, 카메라, 운동화, 연필 등의 물건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그분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재미있고 유쾌한 작업이었지만 원고를 쓰면서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있긴 있었다. ‘음식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모임’의 회장을 겸하는 한 수집가분과 식사를 하면서 푸짐한 밥과 국 반찬을 모조리 먹어치워야 했고, 피겨 수집가의 소장품을 구경하기 위해서 3층 건물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옥탑방에 올라가느라 고소공포증에 시달려야 했다. 


1인 출판사에서 낸 이 책의 영업사원은 따로 없었다. 대표를 할 사원이 없는 사장과 저자인 나는 영업사원으로 변신했다. 대외적인 상황도 좋지 않았다. 언론보도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사장은 사장대로 나는 나대로 모든 지인에게 책 구매를 강권했다. 내 여동생, 누나, 그뿐만 아니라 조카들의 코 묻은 돈까지 약탈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게,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여자에게도 한 권의 책을 선물한 것이 아니고, 사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출판사 사장도 여기에 차마 쓰지 못할 눈물겨운 노력을 했더랬다.


 한 달 동안 온·오프를 가리지 않고 영업을 했는데 어디 출판사의 영업사원으로 취직해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출간된 지 2년이 다가오는 최근에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초판이 거의 소진되어 간다는 ‘보고’를 받았다.

또다시 눈물이 나려 했다. 

우리 둘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하루에 메신저를 달고 살았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초판이 거의 다 팔린것은 좋은 일인데 2쇄를 찍어야 할지 고민이란다 . 절판본 수집가의 책이 절판되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최후의 10부는 내 몫으로 남겨두라고 했다. 내가 내 책을 수집해야 하다니 가혹한 현실이다.

다섯 번째 책이 <독서 만담>이다. 책과 재미라는 내 인생의 화두를 담은 책이다. 워낙 내성적인 성격이라 초등학교 시절부터 ‘점잖다’라는 칭찬 아닌 비아냥을 꼬리표로 삼은 나의 글이 코미디 프로그램보다 재미나다는 칭찬을 받을 땐 의아하다. 그냥 일상이 무료하고 너무 진지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지하철이나 직장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권하지 않는다. 혼자 키득키득 웃다가 미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 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의 깃털보다 내가 가벼웠던 시절
염신현 지음 / 이불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어나 여자를 처음 사귀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무려 3년 동안 이어진 짝사랑을 종지부 찍고 공부를 하겠다며 혈서로 다짐한 며칠 후였다. 대학입학시험을 2주 앞두고 새 출발을 했지만 불과 1주일 만에 첫눈에 반한 여학생을 발견했다. 2층에 있는 교실 창가에서 늘 하던 대로 지나가는 여학생의 평점을 매기는 놀이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별 다섯 개로도 불가능한 인형보다 더 예쁜 운명의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늘 앞서가는 남자들의 본능이 발휘되었는데 그 여학생과 사귀게 되더라도 몇 달 후면 고등학교를 졸업할 신분이라는 점을 인지하고 이내 그 여학생을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내 인생의 모든 행운의 기운이 그때쯤 집중되었는지 며칠 뒤에 대학입학시험 하루 전날 그 여학생이 내게 고백을 해왔다. 그 여학생이 ‘오늘 저녁 학교에 나오실 거냐? 잠깐 볼 수 있느냐?’고 물어온 것. 

그날 이후로 몇 달간 누구보다 달콤한 사랑을 나눴는데 언젠가 그 여학생에게 나를 좋아하게 된 계기를 물었었다. 내가 잘 생긴 것은 다 아니까 진솔하게 대답해 달라고 물었는데 그 여학생의 대답은 의외였다. 자신을 좋아하지만, 엄청 못생겨서 싫어한 선배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학교 본관 건물에서 그 남학생이 걸어 나와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내가 걸어 나오더란 것이다. 

최근 ‘염신현’ 작가의 <당신의 깃털보다 내가 가벼웠던 시절>이라는 매력적인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타이밍 
여자 때문에 운 일이 있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오래전부터 언젠가 꼭 울어야지 했다가 그 울기에 좋았던 날 곁에 있던 여자가 걔였던 것만 같다. 여자한테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옳지 사랑인 게야 했었는데 돌이켜 생각하니 그냥 고백을 간절히 하고 싶었던 차에 마침 그때 나를 지나쳤던 여자가 걔였던 것만 같다. 

어쩌면 그 여학생은 나를 애초부터 좋아했던 것이 아니고 그 못생긴 선배에 몸서리를 친 나머지 다른 대타가 필요한 시점에 내가 나타난 것은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확실히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이 책을 읽고 나니 굳어진다. <당신의 깃털보다 내가 가벼웠던 시절>이 2016년의 독서가 된 것도 오로지 타이밍 덕분이다. 

습관적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했는데 5천 명에 가까운 친구들의 글이 순식간에 지나치는 찰나에 한 분이 올린 이 책의 사진이 내 시선을 고정했다. 단순하면서도 수려한 세련미가 넘치는 이 책의 표지가 눈에 띄었다. 제목은 또 얼마나 시적이고 울림을 주는가 말이다. 나는 책이라는 물건을 참 좋아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표지디자인과 장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국내와 해외서적의 간격이 가장 큰 부분이 디자인과 장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정도 표지디자인이라면 그 어떤 해외서적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제목과 표지만으로 책 전체를 읽은 것 같은 포만감을 느끼고 싶다면 단연코 나는 이 책을 손꼽고 싶다. 서둘러 읽고 이 세련된 책의 서평을 남기기로 했다. 나는 서평을 쓰기 위해 읽는 책은 험하게 다룬다. 책장을 접고, 메모를 곳곳에 남겨두어야 서평을 쓰기 편하기 때문이다. 서평을 쓰기 위한 책은 거의 부검하다시피 하는 편이다. 

첼로 연주자 
자기 세계에만 빠져 사는 사람은 
잠시 남의 세계에 빠지는 걸 사랑이라 하고 
자기 세계로 돌아오는 걸 이별이라 하고, 
자신의 연주만 듣는 첼로연주자처럼 눈을 감고선 
추억이라 한다. 자기 세계에만 빠져. 

서평용 책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는 나의 오랜 버릇은 위의 첫 구절을 읽고 나서 무너져버렸다. 215편의 사랑에 관한 짧은 생각과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 이 책을 오래 곁에 두고 소중히 간직하면서 읽기로 작정했다. 

겨울 햇볕이 내려쬐는 따뜻한 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 책을 읽는 행복이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