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 로쟈의 문학 읽기 2012-2020
이현우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어 있는 책장. 이 문구만큼 독서가를 설레게 하는 말이 또 있을까. 반대로 독서가에게는 더 책을 둘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만큼 비극적인 것도 없다. 불행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서재가 꽉 차서 우울해하고 있던 차에 직장에서조차 직원이 늘어나는 바람에 그동안 사용했던 세 개의 사물함 중에 두 개를 비워야 할 처지다. 


비워줄 사물함을 열자 그동안 탐욕스럽게 모아왔던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동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폭소를 터트렸다. 묘한 수치심과 죄의식을 느꼈다. 직장인으로서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책을 직장에 둔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내의 눈을 속이고 몰래 본가의 서재에 책을 반입할 수 없는 노릇이다. 책이 앉을 자리는 직장에도 본가에도 없다.

 <이현우 선생의 문학 전집 서고>


한때는 세상의 고통을 이겨내는 동반자였던 책들이 솎아내야 할 잡초가 되었다. 처지가 달라지니 ‘구매해야 할 이유가 오만 가지’였던 책들이 ‘떠나보내도 좋은 이유가 오만가지’가 생겨나더라. 절판본이자 아끼던 <늑대 토템>, 꾸준히 구독하는 <녹색평론>, 칼 오베의 <나의 투쟁>도 보내기로 했다. 출판사에서 받은 내가 쓴 책은 더더욱 미련이 없었다.


내가 ‘버림’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는 와중에 유독 눈길이 가고 껴안게 되는 책이 있었다. 로쟈 이현우 선생의 <책에 빠져 죽지 않기>가 그 주인공이다. 내가 쓴 책도 아니고, 귀하디 귀한 희귀본도 아닌데 이 책을 ‘생존시켜야 할 소중한 한 권’으로 지목한 것은 ‘고심’의 결과가 아니고 ‘본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현우 선생의 독서 에세이는 책으로 점철된 내 성인 시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독서 생활의 아이콘이 로쟈의 독서 에세이다. ‘우리 때는’ 이런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고 설명하는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책으로 꽉 찬 내 서재를 한 권의 책으로 설명한다면 그 주인공은 당연히 내가 쓴 책이 아니고 로쟈 선생의 책이다. 우리 시대의 독자가 <책에 빠져 죽지 않기>와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를 게걸스럽게 읽는 것은 소가 싱싱한 풀을 뜯는 것만 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를 읽고 또 얼마나 장바구니가 가득 찰지 두려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기대와는 달리 ‘보통의 독자’라면 모두 알 법한 책들로 채워져 있었다. 누구나 잘 아는 문학책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문학 작품’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번역해서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기여한 번역가 사이덴스티커가 쓴 <나는 어떻게 번역가가 되었는가?>를 소개하는 꼭지 또한 서평이 아니라 차라리 한편의 뛰어난 단편 추리 소설로 읽힌다. 번역은 세계문학의 필수조건이라는 명제를 끌어내기 위해서 이현우 선생은 치밀하고, 흥미진진한 전개를 이끌어 간다.

이현우 선생의 ‘서평 문학 작품’은 세계문학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세계 공용어로서 에스페란토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한계는 사용자가 20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보다 고유한 문학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통찰을 거쳐서 유럽의 언어와 이질적인 일본어로 쓰인 <설국>이 어떻게 좋은 번역을 거쳐서 노벨상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현우 저자>


번역문학이 보편화 되지 않아서 노벨문학상이 지역 문학상에 머물러 있었던 시기에 톨스토이마저 그 수상자가 되지 못한 것이 비극의 ‘절정’이다. 번역이 세계문학의 필수조건의 시대가 되면서 대부분의 세계문학을 번역으로 접하는 우리나라야말로 세계문학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행복한 결말’을 이끌어 낸다. 번역의 중요성을 이토록 지적이고 우아하게 강조한 글이 또 있었나 싶다.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를 서평집이 아니고 문학작품으로 읽어야 할 이유는 좋은 소설에서나 발견되는 매력적인 서두와 말미에서도 찾을 수 있다. 가령 이런 서두.


소설은 왜 읽는가. 제인 오스틴의 유고작 가운데 하나인 <노생거사원>은 그 한 가지 답변을 제시한다. 등장인물이 아닌 작가 오스틴의 견해인데, 소설이란 “정신의 위대한 힘이 드러나고,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지식과 인간 본성의 변화에 대한 가장 행복한 묘사, 위트와 유머의 생생한 발현이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선별된 언어로 전달되는‘ 작품들을 가리킨다. 소설에 대한 최대치의 예찬 아닌가.


이현우 선생만이 쓸 수 있는 이런 말미는 어떤가.


그는 ‘생김새는 거무튀튀한 집시’이지만 ‘옷차림과 행동거지는 신사’가 돼 폭풍의 언덕으로 다시 돌아와 모진 복수를 시작한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오해의 산물일까? 그가 캐서린의 말을 끝까지 들었더라도 집을 떠났을까? <폭풍의 언덕>의 섬뜩한 교훈 하나는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는 하나의 좋은 문학 작품이기도 하지만 ‘독서 안내서’의 본분에도 충실하다. 오랜 강연과 무지막지한 독서로만 가능한 여러 번역서의 출간 이력과 서지 정보가 가득하다. 또 로미오와 줄리엣에 등장하는 키스 장면을 둘러싼 번역의 문제는 키스보다 더 달콤한 읽을거리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문장은 이현우 선생의 저자로서의 성실함을 보여준다.


조이스는 마지막 순간에 프랭크와의 탈출을 포기하고 주저앉은 이블린의 모습을 짐승에 비유한다. “묶인 짐승”(창비), “넋을 잃은 짐승”, “수동적이 되어 어찌할 바 모르는 짐승”,(민음사), “미약한 한 마리 짐승”(열린책들) 등으로 옮겨졌는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0-03-0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속아낼 때가 제일 마음 아프더군요.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짐이고.
책은 정말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건데 말입니다.

로쟈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더군요.
학교뿐 아니라 여기저기 강의 나가시면 언제 책을 읽고
쓰실까 하는데 다 해 내시는 걸 보면 철인같습니다.
박균호님도 그러시겠지만.^^

박균호 2020-03-06 17:06   좋아요 1 | URL
네 글쵸. 저는 주로 방학때 글을 쓰는 편이에요. 스텔라님 부디 코르나 사태를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도제희 지음 / 샘터사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받아 쥔 것은 책 두 권 분량의 원고를 마쳤을 때였다. 두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1년 남짓 동안 몇 백 만원의 어치의 책을 사서 읽었고 썼다. 두 권 모두 책에 관한 책이었다. 책이라면 신물이 나서 당분간은 잊고 살아야 하겠다고 작정했었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가 출간되었다는 것을 ‘난데없이’ 알게 되었는데 매력적인 표지며, 기발한 제목에 이끌려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달 정도만이라도 책을 잊고 살겠다는 결심을 한 지 며칠 만에 이 책을 금주에 받지 못하고 다음 주에 받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나를 발견하였다.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 부분에 당선된 실력을 갖추고도 십 수 년 동안 남의 글만 만지는 편집자로 살아온 저자의 첫 책이라니. 직장 상사와 박 터지게 싸우고 직장을 그만둔 후에 시작한 생존으로서의 도스토옙스키 읽기라니. 독서 에세이를 드라마보다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유혹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고 겪을 만한 ‘홧김에 퇴사’를 하는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막내아들 알렉세이를 소환하는 장면부터 뭔가 심상찮기는 했다. 평소에 붙어 다니는 절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단지 듣기만 하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재단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 ‘그녀’를 알렉세이에 비유하는 장면에서 적지 않은 신선함을 느꼈다.


전화번호와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 나는 수화기 너머로 19세기 제정러시아 시대에 살았던 알렉세이를 21세기 서울 서대문구로 불러낼 수 있었다. “너무 잘했어요. 재희 씨가 못 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거긴 정말 그런 데일 뿐이죠. 유능함을 발휘하기엔 그곳은 너무 수준이 낮다는 말이에요.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는 시종일관 제정러시아 시대에 쓰인 소설 속 등장인물을 21세기 일상생활로 불러들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도스토옙스키가 현대를 살아가는 드라마 작가로 착각이 되고 그의 소설들은 아침 일일 막장 드라마로 느껴진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독서에세이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매 꼭지가 서사가 뛰어난 단편 소설로 읽히기 때문이다. 


도제희 작가가 도스토옙스키를 가장 심오하게 연구한 독자라고는 못하겠지만 가장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등장인물 각자를 살펴본 독자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나라면 이 문장을 바꾸어 쓰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는 구절도 보이지 않는다. 도제희 작가는 도스토옙스키을 읽고 격려와 위로를 얻었겠지만 우리는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격려와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어제도, 오늘도 많은 세입자가 부당한 상황에 직면하거나, 초라한 공간에서 남루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고시원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닭장 같은 원룸에서 힘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지하의 습한 공기를 견디고, 옥탑방의 더위와 추위를 견디면서 불안한 앞날 걱정에 시름에 빠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그 방은 당신의 노동의 대가로 얻은 당신만의 방입니다”


또 아무도 갑의 폭력적인 월권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홀연히 주인의 모욕에 항의하는 <스쩨빤치코보 마을 사람들>의 노예 가브릴라 이야기를 들려주며 던지는 도제희 작가의 충고는 또 어떤가.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며 제 한 몸을 건사하는 사람들, 비록 자신의 고용인이라고 모욕을 준다면 참지 않는 사람들, 여행도 의식주도 학업도 필요 이상의 소비 대상으로 전락해 박탈감을 안겨 주는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만큼 우아한 이들이 있을까.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는 재미있지만 한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면접 자리에서 결혼이나 출산을 할 계획이 있다면 입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감수하고 취업을 했었던 ‘을’로 살아온 저자의 경험에서 나온 통찰력에 감탄과 공감을 하느라 되새김질을 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주도권까지 내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직장에서 누군가 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내 삶까지 좌우하려 할 때, 즉 내 사람의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는 양 굴려 할 때 거절할 만한 지혜와 배짱은 필요하다. 그러자면 우선, 내 인생의 모든 행운과 불운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감당하겠다는 주인 의식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아직 멀었단 걸 알았다. <노름꾼>의 가정교사의 대체에 정말 놀랐으니 말이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는 모처럼 몰입해서 읽은 책이지만 불후의 명작이라고 까지는 못 하겠다. 다만 곁에 두고 늘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책이다. 모두에게 형제처럼 느껴져서 위로를 구할 때 찾고 싶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막내 아들 알렉세이 같은 책이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책을 읽고 울게 된다면 그 주인공은 이 책이 될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0-03-02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지 않아도 저도 이책이 눈에 어른 거리더군요.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는데 리뷰 읽으니까 더 읽어 보고 싶어지내요.
근데 왠지 이런 ‘난데없이‘ 시리즈가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지금도 어떤 작가가 톨스토이나 셰익스피어를 쓰고 있지 않을까요?ㅎ

그나저나 계신 곳은 안전한지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건강하시 바랍니다.

박균호 2020-03-02 18:08   좋아요 0 | URL
네 염려 덕분에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고 울림이 많은 책이에요. 일독을 권합니다.
 
벤야민 번역하기
김재준 지음 / 소명출판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벤야민 번역하기>는 처음부터 끌리는 책은 아니다. 시선을 끄는 제목도 아니다. 표지가 수려한 것도 아니다. <벤야민 번역하기>는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의 책으로 생각했다. 국문학 관련 책만 수 백 권 이상을 낸 소명출판사 사장님조차 ‘책을 내긴 했지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책이니까 내가 딱히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이 책을 내지 못할 이유가 뭐냐? 는 저자의 물음에 대답을 못 해서 낸 책이라는데 이 책을 처음 접한 독자들은 ‘이 책을 쓴 이유가 무엇인가? 는 질문을 하게 될 것 같다. 내가 두려움 없이 이 책을 주문한 이유는 저자인 김재준 선생이 1997년에 낸 책 <그림과 그림 값>을 출간되자마자 재미나게 읽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을 전공한 직장인이 쓴 발로 뛴 그림 수집 이야기가 쉽고 재미있었다. 읽은 지 20년이 지났지만, 내용이 기억나는 책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20년 만에 만나는 오랜 친구를 만나는 심정으로 이 책을 펼쳤다. 두어 쪽만 구경하고 절망감에 사로잡혀 덮었다. 다정다감하게 그림과 그림 값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그분에게 2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한자, 중국어, 영어, 독일어 그리고 어떤 나라의 언어를 알 수 없는 문자가 맥락 없이 섞여 있고, 맞춤법을 무시하며, 폰트의 종류 크기, 색깔도 제각각이다.

 존칭어, 대화체가 갑자기 반말과 설명체로 바뀐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이 책은 독자들이 책이라는 상품에 기대하는 문법을 모두 지키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처음 만난 독자들도 이토록 당황하지는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책을 덮은 지 3일 만에 뭐라도 건져야겠다는 생각에, 그토록 따뜻하고 다정한 글을 쓴 저자가 이럴 리가 없다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책장을 넘기었다. 

이 책이 난해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었다.


Whanki 1975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김환기는 1974년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뉴욕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된 책 갈피 메모에서, 실은 그가 병원에 입원해 계속 작품 스케치를 남겼다고 한다. 세워서 그려진 유화가 아닌 책상에 눕혀진 수성캔바스 위의 수성물감의 작품. 그 작품들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 메모에 의거해서 작품을 만들어 보았다. 그냥 내가 보기에 좋았다. <벤야민 번역하기>중에서


그림을 좋아하는 저자 김재준 선생은 메모에 의지해서 그림을 재현했고 책을 수집하는 나는 포털 사이트에서 김환기가 책 갈피 메모를 남긴 책이 무엇인지 한참을 검색했다. 그림 수집이야기인 <그림과 그림값>이 1997년에 나왔는데 나는 2011년에 헌책과 희귀본을 수집하는 이야기 <오래된 새 책>을 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헌책 수집 이야기가 <그림과 그림 값>에서 기원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벤야민 번역하기>가 난해하다고 느낀다는 것은 인내심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겠다. 당장 18쪽에서부터 ‘준법 상태가 예외상태다’라는 문구가 보인다. 왜 모든 책은 소설, 시, 희곡, 철학, 여행서 따위의 틀 속에 속해야만 하는가? 왜 모든 책은 일정한 맥락을 유지하면서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가?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질문을 하지 못했는지 이상한 일이다. 

책이 자동차 부품도 아닌데 왜 ‘규격’에 따라야 한다는 말인가. <벤야민 번역하기>는 누가 만든 지도 알 수 없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책에 관한 구속을 벗어난 책이다. 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철학, 독서, 사회비평, 전쟁과 사회, 예술에 대한 글이 이어진다. 애초에 형식에 가둔 책이 아닌데 형식의 눈으로 이 책을 읽으니까 난해하고 이상한 책으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벤야민 번역하기>는 어느 한 장르로는 담을 수 없는 다양한 형태의 지식과 담론 그리고 새로운 시각이 가득하다. 저자가 담으려는 광대한 지식과 자유로운 이야기 거리는 <벤야민 번역하기>라는 그릇으로만 담을 수 있었을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달라진 것이 없다면 책을 읽지 않는 것만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 번역하기>는 좋은 책이다. 앞으로 언급될 흥미롭고 통찰력 있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책을 틀 속에 사로잡아 넣어서 그 책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알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책을 즐기는 범위를 제안하는 한계도 버릴 수 있게 해준다.  

 <벤야민 번역하기>를 읽으면서 한 단락 또는 한 문장을 독립된 책이라고 생각을 해보자. 그 순간부터 당신에게는 환장할 만큼 재미나고 통찰력이 넘치는 지식의 대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모름지기 책은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만 잠시 잊어준다면 이 책만 큼 재미난 책이 또 있을까 싶다. 

모름지기 책은 줄거리가 있어야 하고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이야기가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잊어 준다면 이 책은 인생의 색다른 경험을 당신에게 선물해줄 것이다. 이 책을 넘기다 보면 만나게 되는 흥미로운 이야기 몇 가지를 소개한다. 

우리 민족이 민중이 주체가 되어 권력을 비판하고 교체하는 아시아 국가에서 드문 민주주의의 성취를 이룬 것은 유교적 이념을 받아들인 유교 지식인이 가톨릭을 수용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19세기 후반에 일반 민중이 스스로 선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유교를 대표하는 시스템인 과거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인쇄기술과 서적의 보급이라는 문화적 인프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나라 산업화의 기틀을 이룬 경제개발계획과 농지개혁은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 초대 농림부 장관인 조봉암은 ‘평년작 기준으로 한 해 소출의 3할을 5년에 걸쳐 땅값으로 상환하는 조건으로 농지를 분배’하는 가장 성공적인 토지개혁을 했으며 1958년에 경제계획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놨는데 우리나라 산업 발전의 시작이 되었다.

책은 원전으로 읽어야 제대로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모든 독자가 여러 가지 언어를 통달할 수는 없다. 그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다. 우선 가장 원전에 충실한 번역본(예를 들면 천병희 교수가 번역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을 고른다. 그런 다음 해당 원서의 언어에 대한 기초적인 실력을 쌓는다. 번역본을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거나, 어떤 단어를 이렇게 번역했는지에 관한 궁금증이 생길 때 원서에서 그 부분만 찾아서 확인해 본다. 이렇게만 읽어도 원서로 읽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번역본으로 읽으면서도 원서가 가지고 있는 맛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왜 철학 책이 이해가 안 될까?
언어감수성이 부족해서, 특히 유럽 언어에 대한 감각이 없어서
* 왜 영어를 못할까?
영어만 하니까. 오로지 영어에 대한 실용적 욕망에 사로 잡혀서. <벤야민 번역하기>중에서


비스켄슈타인이 ‘나의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다’라고 말한 것이 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외국인과 대화를 하면서 ‘날씨’이야기와 ‘한국에 온지 얼마나 되었나는 질문을 던지고 나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 영어를 오직 기능에만 초점에 맞춰서 공부한 결과다. 
 

내가 <벤야민 번역하기>에서 가장 감탄했던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필립 로스의 소설 울분(indignation)에 나오는 주인공 마커스는 학구적이며 모범적인 학생이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집에서 멀리 떨어진 오하이오 주의 작은 학교에 편입을 한다. 그 학교에서도 이런 저런 갈등을 겪은 그는 한국전쟁에 징집되어서 1952년 어느 날 20살 생일을 3개월 앞두고 전사한다. 

신을 믿을 수도 찬송가를 들을 수도 없었던 마커스는 교회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채플을 등한시 한 그에게 학장은 대학을 다니는 내내 매주 수요일마다 채플에 참석해야 퇴학을 시키지 않겠다고 엄명했다. 마커스는 순종 대신에 학장의 책상을 내리치면서 ‘좃까 씨발’이라고 내뱉었다. 마커스의 학창시절과 꿈과 희망은 ‘좃까 씨발’로 종지부를 찍었고 오하이오보다 훨씬 더 먼 한국에서 스무 살이 채 되기 전에 죽었다. 학사 학위도, 미래도, 생명도 ‘좃까 씨발’과 함께 사라졌다.

평범한 독자는 이 대목에서 대체 원문의 어떤 말을 ‘좃까 씨발’로 번역했는지 궁금해 한다. 1950년대 미국 대학생이 그런 욕을 한 것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다 느낀다. 원문은 ‘Fuck you’다. 번역가는 아무래도 이 욕설만으로는 주인공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비범한 저자 김재준 선생은 번역의 문제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소설 속 주인공 마커스가 혹시 실존 인물이 아닌지에 관한 호기심을 가졌다. 한국전쟁 때 전사한 모든 미군의 명단과 통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기게 된 호기심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히 책과 자료를 모으는 것이 인문학의 출발 지점이라는 것을 이 사례로도 증명이 된다. 

한국 전쟁 미군 전사자 중에서 마커스의 고향 출신이 16명, 그 중에 19살은 3명, 그 중 1952년에 전사한 미군은 단 한명 그의 이름은 Russell John Graf 1933년생. 원산에서 전사했고 뉴저지에 안장됨.

필립 로스의 소설 울분(indignation)은 실존 인물 Russell John Graf를 모델로 삼았다.

번역, 통계, 전쟁사, 문학이 어우러진 이 에피소드는 <벤야민 번역하기>를 대표한다. 내 개인적인 의견이 그렇다. 책은 원래 독자에 따라서 다르게 읽히는 것이 정상이다. <벤야민 번역하기>를 읽고 나니 오히려 <그림과 그림 값>이 낯설다. <벤야민 번역하기>에 등장하는 비정상적인 것들로 오해받는 것들의 진가를 다른 책을 읽으면서 느낀다. 다른 책들이 밋밋하고 심심해서 못 읽겠다. 한동안 다른 책을 읽을 수 없는 난독증으로 고생할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이후 오랜만에 겪는 일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20-02-11 1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도 박균호님 같은 기분을 가져보고 싶단 생각에 보관함에는 넣었습니다만은, 아무래도 제 주제에 읽을 책은 아닌 듯 하네요 훌쩍-_ㅠ;

박균호 2020-02-11 21:12   좋아요 1 | URL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재미납니다. ^^

hsmgd71 2024-08-10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왜, 결국 책이란 그 자체, 형태는 벗어나지 못하면서 혁명적인 척하는 것인가? 왜 책은 종이에 쓰여야 하며, 제본을 통해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그런 질문에 도달하지 않는가? 책에 대한 혁명을 꾀하면서 책이란 틀에 여전히 기대고 있는가?
 
우리, 먹으면서 얘기해요
성수선 지음 / 오픈하우스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신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동사로 '먹다', '읽다', '쓰다', '사랑 하다'를 선택한 성수선 작가의 책을 오랜만에 읽었다. 잘 먹는 것도 돈을 버는 방편이 되는 시대이긴 하나 명색이 책을 4권씩 낸 작가이면서 대기업 팀장인 분이 '읽다'와 '쓰다'에 우선해서 '먹다'를 배치하는 것으로 보아 예사롭지 않은 책이라고 예상을 하긴 했다.

일러두기에서 '글맛을 살리기 위해' 관용적인 표현을 사용하였다니 톡톡 튀는 재치를 기대하기도 했다. 책 제목이 <우리, 먹으면서 얘기해요>이기도 하고 또 먹는 것을 쓰고 읽는 것보다 우선시하는 작가가 쓴 책의 첫 꼭지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짜장면(너무 평범하지 않은가)이라고 밝히는 것으로 보아 몹시 진솔한 글이겠다는 설렘을 느끼기도 했다. 며칠 전 도착한 여러 권의 인문학 책을 읽는 도중에 머리를 식히는 용도로 그만이다 싶었다.

우선 성수선 작가가 짜장면을 먹겠다고 서울에서 목포까지 기차를 타고 간 식당 이름을 메모하고 읽기 시작했다.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의 미래보다 그들이 결국 어떤 안주를 시켰을까. 그게 궁금했다. 사랑 앞에 무지해서, 타이밍을 놓쳐서, 말을 못 해서 사랑을 놓치고 또 놓쳤던 그들이 다시 만나 낮술을 마시며 시킨 안주는 뭘까? 설마 알탕?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서 치아 사이에 끼기 쉬운 음식을 시키지는 않겠지? 하면서도 영화 속의 눈치 없는 남자는 그러고도 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만나러 정성껏 화장하고 온 여자에게 "너 요즘 연애하냐? 안 하던 화장을 다 하고"라고 말하는 속 터지는 남자니까. 가지 않으려고, 일부러 마지막 버스를 놓치려고 화장실에 있는 여자의 속도 모르고 꼭 타야 할 승객이 있으니 기다려달라고 버스 기사에게 사정하는 남자니까.

이 부분을 읽자니 내가 그간 살아오면서 저지른 수많은 눈치 없는 짓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간다. 왜 이 책은 이토록 늦게 나왔다는 말인가. 좋아하는 음식 마파두부 이야기를 하면서 늙은 곰보 여자라는 요리 이름에 얽힌 유래를 설명하는데 읽으려고 곁에 두었던 인문학책을 저 멀리 밀쳐버렸다. <우리, 먹으면서 얘기해요>에는 인생, 철학, 인문학, 음식, 예술이 다 담겨있으니 이 책을 오롯이 읽고 싶어졌다.

성수선 작가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한 권이라도 쓰고 싶은' 것이 소원이었을 때부터 나는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들렀던 팬이었다. 그의 팬이었던 나도 책을 냈고 그도 책을 여러 권 냈지만 이런 구절을 읽자니 그가 저 멀리 내가 근접할 수 없는 세상으로 멀어져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유머가 넘치는데 유치하지 않고, 경쾌한데 경박하지 않고, 인생 철학을 이야기 하는데 꼰대스럽지 않은 글을 쓰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여행을 떠나서, 또는 낯선 동네에서, 밥 먹을 장소를 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된다. 먼 오지로 모험을 떠나는 대신, 지나가다 눈에 들어오는 식당에 들어가 보시라.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 평소 즐겨 먹지 않은 음식을 시켜 보시라. 조금 용기를 내서 주인에게 말을 건네 보시라. 우연과 즉흥에 몸을 맡길 때, 재미있는 일들은 의외로 많다.

평범하고 소박한 이 문구들이 왜 내게는 감탄스럽게 다가오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다만, 이건 알겠다. 나처럼 책에서 읽은 내용을 밑천 삼아 글을 쓰는 나부랭이는 절대로 쓸 수 없는 글이라는 것을. <우리, 먹으면서 얘기해요>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도움을 보장하는 조언들이 몇 가지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간단한 수학'을 활용해보자. 어떤 과제를 줬을 때 일을 추진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은 '간단한 수학'이다. 나는 지금 계약을 하고 마감을 해야 할 2건의 집필이 있는데 하루에 원고지 30쪽을 쓰겠다는 간단한 수학의 법칙을 실천하고서부터 진도가 빨라졌고 집필 일정이 정확해졌다. 하루에 원고지 30장을 쓴다면 한 달이면 900쪽이 되고 책 한 권 분량으로 부족함이 없다. 어떤 일을 할 때 이런 간단한 수학의 법칙을 설정하고 실천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위력을 발휘한다.

두 번째는 성수선 작가의 부모님이 알려주신 인생의 충고인데 남들이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머뭇거릴 때 앞장서서 밥값을 계산하라는 것이다. 딸아이가 다니는 대학에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 풍습이 있더라. 후배가 선배에게 신청하면 선배는 어김없이 그 후배에게 밥을 사주는데 한 달쯤 뒤에는 후배가 선배에게 밥을 사준다고 한다. 그걸 보은이라고 한다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귀여운 풍습'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만나서 밥을 사주고 보답하는 것이 원활한 인간관계의 첫걸음이기도 하고 자기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비결이기도 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결말이 정해져 있는데 머뭇거리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썩은 음식에 끼인 곰팡이뿐이라는 성수선 작가의 말에도 공감한다. 막연한 기대나 희망으로 망설이기보다는 과감한 결단을 하는 사람이 효율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이해하는데 소설 읽기만 한 것은 없다는 성수선 작가의 말에 깊이 동의를 하게 된다.. 소설가는 사람의 심리를 묘사하고 분석하는 대가들이다. 사람을 공부하겠다고 여러 사람을 일삼아 만나고 시행착오를 겪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또 나처럼 태생적으로 눈치가 없는 사람들도 소설을 열심히 읽다 보면 다른 사람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는 눈치가 늘어난다고 믿는다.

성수선 작가가 '먹어 본 자만이 맛을 안다'고 했으니 우선 <우리, 먹으면서 얘기해요>를 읽다가 메모해둔 전국의 맛 집을 둘러봐야겠다. 이영자가 말하는 맛 집은 그 맛깔스러운 맛의 표현이 매력적이지만 성수선 작가가 소개하는 맛 집은 맛도 맛이지만 그 가게 속에 담긴 아름다운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좋은 책이란 사람을 행동하게 만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0-02-1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책 제목일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클릭했다가 성수선 작가 플러스 좋은 책 기억하고 갑니다.

2권이나 계약하셨다니 부럽습니다.

박균호 2020-02-15 11:59   좋아요 0 | URL
아..유쾌하고 유익한 책이에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ijeije95 2020-03-07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류를 이렇게 맛깔스레 쓰시다니...넘 잼있게 읽고 갑니다.^^

박균호 2020-03-07 13:15   좋아요 0 | URL
앗...감사합니다..
 
종의 기원 톺아보기
찰스 로버트 다윈 지음, 신현철 옮김 / 소명출판 / 201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책이야말로 가장 자주 개정을 해야 하는 책 중의 하나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다른 분야보다 훨씬 빠르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과학 지식이 지금은 쓸모없고 틀린 지식이 된 경우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찰스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은 이례적이다. 6번에 걸친 개정판이 아니고 초판이 독자들로부터 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다시피 찰스 다윈은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한 과학자다. ‘왜 생물들은 서로 다르게 생겼을까?’라는 질문에 간단하게 ‘신이 그렇게 창조했기 때문에’라는 안전하고 편안한 대답 대신에 ‘사람의 이성과 연구’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한 사람이다.


신의 영역에 도전한 찰스 다윈에게 고초가 가해진 것은 당연했고 그도 사람인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박해 때문에 개정할수록 초판에 담긴 ‘패기’를 조금씩 거두어들여야 했다. 공공의 적이 되어 하도 시달리다 보니 개정을 하면서 문구를 바꾸기도 하고 어떤 챕터는 삭제하기도 했는데 오늘날의 독자는 그가 가장 눈치를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원 없이 한 초판을 가장 정본이라고 생각한다. 


<종의 기원>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겠다고 도전하는 독자들은 초판을 번역한 것인지 그 이후에 나온 개정판을 번역한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소명출판에서 신현철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종의 기원 톺아보기>도 초판을 번역한 판본이다. 톺아보기(샅샅이 훑어가면서 살핀다)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종의 기원 톺아보기>에는 무려 2,200여 개의 주석이 달려있다.


 이 주석들이 특별하고 귀한 이유는 본문을 이해하기 쉽게 도와줄 뿐만 아니라 현대에 일어나는 진화론과 관련이 있는 상황을 비교해가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국내에 출간된 여러 번역서 중에서 가장 친절하고 자세한 판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이 책을 번역한 신현철 선생조차 생물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대학원에 입학하고서도 <종의 기원>을 읽지 않았다. 생물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이면서 필독서인 <종의 기원>을 읽지 않는 죄책감에 시달린 신현철 선생과 선생의 협박에 못 이긴 대학원 동료들이 읽기 모임을 가졌지만 결국에는 ‘진정 읽을 수 없는 책’이며 매주 ‘난 잘 모르겠다’라는 선언을 해야 했던 책이니만큼 일반 사람들이 <종의 기원>을 지하철에 앉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다.


이 책을 덮으면서, <종의 기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는 단편적인 지식 몇 가지만이라도 확실하게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야생에서 살아온 동물보다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사육해온 동물들 사이에서 변이가 더 크다. 


가령 자연에서 자라는 말이나 개보다는 사람들이 키우는 말과 개들이 좀 더 다양하고 큰 변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자연 상태에서 자라는 동물보다 사람이 키우는 동물들은 좀 더 다양한 자연환경에서 자라고 또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관리 방식도 천차만별이다. 인류는 모든 기후조건에서 생활하며 각자의 환경에 따라 사육하는 동물의 용도와 관리방식이 다르다. 개 만해도 북극지방에서는 썰매를 끄는 용도로 개량할 것이고, 목초지에서는 양떼몰이 용으로, 사냥이 번성한 곳에서는 사냥용으로 점차 개량되기 때문에 야생 개보다 다양한 모습으로 변이가 된다. 


소도 그렇다. 따뜻한 열대 우림지역에서 농사용으로 사육하는 소와 춥고 건조한 히말라야산맥에서 사육하는 소는 그 외양이 판이하다. 


동물들은 각자의 환경에 따라서 모습이 뚜렷이 변화한다.


같은 식물이라도 기후가 달라지는 지역으로 옮겨 심으면 꽃이 피는 시기가 달라지듯이 동물들은 기후나 사육되는 목적에 따라서 식물보다 좀 떠 뚜렷하게 외양이 달라진다. 가령 사람들이 사육하는 오리는 야생 오리에 비해서 날개보다 다리가 발달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에 날라야 할 필요성이 적었지만 걸어 다닐 일이 많기 때문이다. 


우유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젖소는 젖무덤과 뒷다리 부분이 발달하는 반면 일을 시키기 위해서 키우는 소들은 앞다리 즉 상체 부위가 발달한다. 상체 부위가 발달하여야 수레나 쟁기를 끄는 데 유리하다 .어떤 나라에건 간에 사람들이 사육하는 동물들은 예외 없이 쳐진 귀를 가진 종이 있다. 예를 들면 쳐진 귀로 유명한 고양이 종 ‘스코티시폴드’는 사람들이 키우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종이다. 


귀가 쳐졌다는 것은 청각에서 불리하다는 뜻이며 이는 곧 외부의 위험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스코티시폴드’는 사람의 반려동물로 키우기 때문에 외부의 갑작스러운 위험을 알아차리는데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반면 항상 적의 침입이나 포식자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하는 야생 동물들은 귀가 쫑긋 서 있어야 한다. 주로 사람들에게 사육되는 동물들은 외부의 위험에 신경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귀를 쫑긋 세울 기회가 적고 결국 귀의 근육은 퇴화하며 귀가 쳐지게 된다.


사육하는 동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면 야생의 습성을 회복한다. 



애초부터 오랫동안 인간이 사육한 동물도 자연으로 돌려보내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야생의 습성을 회복한다고 한다. 동물원에서 태어난 곰이라든가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면 적응 기간을 거쳐서 야생 동물이 된다고 찰스 다윈은 설명한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양배추와 같은 야채들이 비록 인간에 의해서 재배된다고 하더라도 여러 세대에 걸쳐서 척박한 토양에서 살아남고 적응했다면 그 양배추 후손들을 역시 척박한 자연 상태에서도 혼자 힘으로 자랄 수 있다.


이 원칙이 모든 사육동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나게 많이 자연 상태에서 멀어진 변종을 겪은 동물들은 자연 상태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귀가 쳐져서 외부 위험을 감지하는데 불리한 스코티시폴드 고양이는 야생 상태를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또 오랫동안 사람이 발굽을 교체해준 경주용 말이라든가 수레를 끄는 말은 자연 상태로 돌려보낸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리에 염증이 생기고 병에 걸려 죽을 것이다. 


야생말들은 오랫동안 자연 상태에서 자랐기 때문에 발굽이 단단해서 사람이 관리해줄 필요가 없지만 이미 사람이 발굽을 갈아주는 데 익숙해져서 약해질 대로 약해진 발굽을 가진 사람이 사육하던 말을 자연 상태로 돌려보내면 그 자체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이미 사람들에 의해서 오랫동안 보살펴지고 집안에서 생활하도록 개량된 애완견들은 야생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다.



원시시대에도 품종 개량은 존재 했다.


보통 사람들은 품종 개량을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원시시대에는 현재의 유전자 조작 같은 기술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원시인들이 자신에게 중요하고 적합한 특징을 가진 식물이나 동물을 선택할 안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시인들은 오늘날의 과학자처럼 인위적으로 젖을 더 많이 생산하고, 더 큰 콩알을 열리게 하는 콩을 개량하지는 못했지만 좀 더 조심스럽게 보존함으로써 그 종이 번성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기근이 발생하면 생존하는데 더 가치가 있는 개를 남겨두고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가축을 도살했을 것이고 같은 돼지라고 할지라도 새끼를 더 생산하고 살짐이 오른 돼지보다는 그렇지 않은 돼지를 먼저 잡아먹었을 것이다. 화재가 발생해서 갑자기 피신해야 할 때도 열매를 많이 생산하는 씨앗을 먼저 챙겼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대적으로 우량한 특성을 보인 동물과 식물들이 살아남고 원시인들은 이들로부터 식량을 수월하게 얻었다고 생각된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본인들에게 좀 더 많은 식량을 제공하는 종을 선택함으로써 원시인들은 간접적인 품종 개량을 했다.


찰스 다윈은 ‘조류 인플루엔자’를 예언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판한 19세기에 조류 인플루엔자와 같은 문제를 거론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을 통해서 한 종의 사육동물을 농장주의 편의와 생산량의 극대화를 위해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개체 수를 사육하면 유행병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닭이나 돼지 그리고 소가 효율성의 극대화를 위해서 밀집된 형태로 사육을 하는데 매년 겨울이면 행사처럼 조류인플루엔자를 비롯한 전염병이 발생한다. 


개의 사람에 대한 애정은 유전자 질환 때문이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일수도 있겠지만 개들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육됨으로써 사람에 대한 애정과 충성심이 본능처럼 체득되었다. 가끔 개가 사람을 문다거나 가축을 죽였을 때는 여지없이 응징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개는 여간해서는 동료 가축을 해치지 않고 사람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낸다. 신현철 선생은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보고를 소개한다. 즉 개가 유난히 사람에 대해서 충성하고 애정을 품는 것은 사람에게서도 나타나는 윌리엄 증후군이라는 유전자 질병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연구 보고서다.


윌리엄 증후군이란 6번 염색체의 일부분이 사라지면서 생겨나는 현상인데 이 유전자병에 걸린 사람들은 극도의 사회적인 친화력, 친절이 생기며 낯선 사람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친하게 지내려는 성향이 생긴다고 한다. 


뻐꾸기가 다른 새의 둥지를 뺏는 이유?


뻐꾸기가 자신이 직접 둥지를 만들지 않고 다른 새의 둥지에다가 알을 낳는 것은 게으른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찰스 다윈과 그 동시대 과학자들은 뻐꾸기가 다른 새의 둥지에다가 알을 낳은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고 2~3일 간격으로 알을 낳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2~3일에 한번씩 알을 낳다보니 같은 둥지에 알을 낳는다면 먼저 낳은 알들과 나중에 낳은 알들을 같이 키워야 하는 문제점이 생기고 먼저 낳은 알을 양육하려면 한동안 다른 알을 낳지 못할 수도 있다. 


결국 뻐꾸기는 게으른 것이 아니고 매우 충실하며 부지런한 부모이기 때문에 다른 새들의 둥지를 훔친다고 볼 수 있다.


개미는 어떻게 노예를 가지게 되었나?


최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소설 <개미>를 통해서 ‘개미 박사’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찰스 다윈도 이미 19세기에 개미가 어떻게 다른 종을 노예로 삼게 되었는지 밝히는 공을 세웠다. 원래는 노예를 만들지 않았던 개미가 다른 종을 노예로 삼는 과정을 찰스 다윈은 이렇게 추측했다. 즉 천성이 부지런한 개미는 둥지 근처에서 발견한 다른 종의 번데기를 부지런히 날라서 보관했다. 물론 이렇게 저장된 번데기는 식량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식량으로 가져온 번데기가 부화하고 세상에 나왔을 때 그들은 그저 본능대로 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의도하지 않게 ‘식량’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을 발견한 개미들은 힘들게 알을 낳는 것보다는 그냥 남들이 낳은 알을 주워 와서 일을 시키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갈 필요가 없어진 일개미들은 노예를 키우는 습관을 영구히 간직하게 된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9-12-27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던 한 해였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했습니다.
새해에도 더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
얼마 안 남은 한해 마무리 잘하시구요,
희망찬 새해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박균호 2019-12-27 19:41   좋아요 0 | URL
에공...방금전에 스텔라님 글에 안부 남겨 두고 왔는데 ㅎㅎㅎㅎㅎㅎㅎㅎ 저야 말로 고마운 한 해 였습니다.

2019-12-27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9-12-27 22:04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저 그냥 평범한 영어 교사입니다 ^^ 읽기 어려운 책은 맞는데 역자분이 주석을 많이 달아주셔서 읽기가 한결 수월하고 재미가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