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사들이 SNS에 올린 게시물 때문에 곤욕을 치를 때마다 ‘SNS는 인생의 낭비다라고 말한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팀의 감독인 퍼거슨의 선견지명을 되새긴다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SNS에 올렸다가 곤욕을 치르는 것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SNS를 즐기는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책을 읽는 사람과 비교되어 자투리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과연 SNS는 단지 시간 죽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아름다운 모습과 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행위인가꼭 그렇지만은 않다. SNS는 이 시대의 천재가 만들어낸 도구다자동차나 비행기보다 더 혁신적인 발명품이다어떤 물건이나 제도라도 사용자에 따라서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을 한다. SNS를 굳이 잘 사용해야 한다는 지침에 구속될 필요도 없이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목적을 가지고 사용한다면 천리마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효과를 얻는다.

 

SNS를 글쓰기의 장으로 애용하는 나의 상황을 설명해보자지방 소도시에 사는 나의 주변에 출판이나 글쓰기 또는 책과 관련이 있는 인사는 동네서점 사장논술학원 원장이자 시조 시인지역 신문사의 편집장이자 사장이 전부다. SNS의 세계로 가면 사정은 다르다고등학교 시절 흠모했던 시인대학 시절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던 소설의 저자내가 즐겨 있는 책들을 펴내는 출판사의 사장편집자온라인서점 간부 등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다.

 

나는 페이스북 사장만큼이나 페이스북의 안녕을 기원한다함께 책 이야기를 나누고자신이 저술한 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출판업계의 사정을 경청할 수 있는 상대가 페이스북에 있다페이스북이 주는 효용성과 정보의 가치는 너무나 커서 페이스북이 없는 글쓰기를 상상하기 어렵다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나라고 무심결에 페이스북에 로그인해서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시간이 왜 안 아깝겠는가적어도 글쓰기를 좋아하고 책을 간헐적으로 내는 나로서는 페이스북이 주는 혜택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의 시간 죽이기는 그따위에 불과하다.

 

나는 페이스북을 이렇게 활용한다

끊임없이 인터넷으로 사실을 점검하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글을 쓰는 나로서는 책을 내겠다고 사전 한 권만 들고 산속에 틀어박히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생활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나의 저작물을 고려해보면 다른 사람과 일상생활을 하지 않고는 쓸 수도 없다한 꼭지를 쓸 때마다 독자들의 피드백이 필요해서 SNS에 매번 포스팅한다독서만담(북바이북)이나 그래도 명랑하라아저씨!(바이북스)에 사용된 소위 자기 비하 개그’ 문체는 몇 년 전 내 글에 달아준 페이스북 친구의 지금까지 선생님이 쓴 글 중에서 제일 재미나요라는 댓글 덕분에 탄생한 것이다.

 

별 생각 없이 쓴 글인데 그 댓글을 읽고 이런 문체를 재미있어 하는 구나라는 사실을 알았다그 이후로는 쭉 시시콜콜 개그 문체를 고수해왔다그 결과물이 위에서 언급한 그래도 명랑하라아저씨!와 독서만담이다페이스북에서 읽은 댓글 하나 덕분에 내가 올린 글마다 선생님 덕분에 오늘도 웃고 갑니다라는 댓글을 매번 받았고어쭙잖지만 책을 두 권이나 냈으니 페이스북에 엎드려 절을 해도 시원찮다.


생각날 때마다 한 꼭지씩 포스팅했고 독자들과 소통을 즐겼으며 칭찬을 많이 받았다웃고 즐기는 사이에 책을 낼만큼의 분량이 되었다한 가지 문체를 고수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별 생각 없이 지나칠 수도 있는 일상 속에서 재미있는 글감을 발견하고는 한다페이스북을 활용한 나의 글쓰기에 창작의 고통이란

없었다.

 

페이스북은 마감의 압박 또한 없다나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게으름뱅이에게는 이보다 더 쾌적한 글쓰기 공간이 어디에 있겠는가페이스북 친구들은 끊임없이 내가 올린 글의 편집자이자 독자이자 교정자가 되어준다하다못해 틀린 맞춤법을 지적해주는 이도 무엇보다 소중하다내가 쓴 글을 혼자서 읽고 퇴고를 한다면 나만의 생각에 함몰되어서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의 견해를 듣지 못한다.

 

재미나다고 생각한 글에 독자들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하고별 기대 없이 올린 글에 환호하기도 한다확실히 작가가 자신의 글에 대해서 자평을 하는 것은 위험하다작가는 독자들의 호감과 공감을 먹고사는데 실시간으로 독자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말이다인터넷에서 공짜로 읽을 수 있는 글을 굳이 돈을 주고 사람들이 사 볼까 하는 우려는 접어두시라당신이 책을 냈을 때 가장 먼저 지갑을 여는 독자는 평소에 당신의 글을 매일 읽었던 페이스북 친구들이다당신의 글을 좋아하고 읽었던 독자는 웹으로만 읽었던 글을 종이에 인쇄된 형태로 읽어보고 싶어 한다읽지 않더라도 소장하고 싶어 한다어느 작가의 책이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모아서 출간되었다고 해서 책값을 아끼겠다고 그 작가의 페이스북 계정을 찾은 다음 책 한 권의 분량의 포스팅을 일일이 스크롤을 내려가며 읽을 정도로 알뜰한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나는 페이스북을 이렇게 관리한다

우선은 특별히 부탁하지 않는 이상 내 글쓰기와는 무관한 게시물을 공유하지 않는다아니다공유 자체를 경계한다심지어 내 책이 출간되고 내 책에 대한 찬사가 가득한 서평 기사나 글을 공유할 때도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게시물을 삭제한다사람 마음은 다 똑같다자신의 글이 없고 공유만 잔뜩 해놓은 이와 친구를 맺고 싶은가나의 페이스북 계정은 원고지라고 생각한다원고지에는 오로지 자신의 글로만 가득 차야 한다.

 

내가 꿈꾸는 페이스북 생활이란 이런 거다내 책이 나왔다고 해서 내 책 나왔으니 돈 주고 사시요라는 포스팅을 올리지 않는 것내 책에 대한 서평 기사가 나왔다고 해서 제발 공유 좀 하란 말이야라며 그 기사를 공유하지 않는 것평소와 다름없이 독자들의 배꼽을 도둑질하기 위한 만담을 포스팅했는데 선생님 새 책 나왔네요축하합니다라는 독자들의 댓글에 점잖게 어떻게 아셨어요?’라며 무심히 반문하는 것내 페이스북 계정에 내가 쓴 책을 구매한 인증사진을 태그하는 독자에게 정중하게 내 계정은 오로지 나의 것이니 수고스럽게 그런 인증사진을 안 올리셔도 됩니다라며 부탁하는 것다시 말하자면 페이스북 나의 계정에서는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나의 이야기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관리를 한다는 말이다내가 방송국을 운영하는 것도 아닌데 중간에 광고를 끼워 넣어서 좋을 게 없다.

 

모 온라인서점에서 별도로 활동비를 받기 때문에 상도덕을 생각해서 내 글을 올릴 때 온라인서점 블로그 주소를 링크하는데이마저도 내키지 않는다내 글을 읽어주는 독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쾌적한 글 읽기 환경을 제공하고 싶다굳이 링크해서 새로운 창을 열어야만 내 글을 읽고 싶게 하고 싶지 않다내 글을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굳이 그런 불편함을 끼치고 싶지 않다공유된 기사를 읽고 싶어서 환장할 정도로 소개 글을 남기지 않는 이상 그 기사를 읽어줄 만큼 한가한 사람은 많지 않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같은 글이라도 링크 없이 타임라인에 고스란히 포스팅하는 것이 링크 속에 넣어서 포스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좋아요를 얻는다현대인들은 광고라면 치가 떨린다당신의 독자는 또 한 번의 클릭은 또 한 번의 광고에 노출되는 일이라거나 다른 누군가의 돈벌이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각박한 세상에 소통하겠다고 당신의 친구가 되어준 고맙고도 불쌍한 독자들을 자본주의의 먹잇감으로 내몰 필요도 없고 그 노릇을 감수해주는 친구는 많지 않다.

 

내가 원문을 페이스북에서 다 읽을 수 있도록 하고 하단에 링크를 걸어두는 이유다각자 취향대로 편하게 내 글을 읽으라는 의도다링크된 사이트가 가독성이 더 좋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나는 독자 편의 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작가다댓글이 100개가 달려도 일일이 답글을 남긴다독자가 친히 금쪽같은 시간을 투자해서 내 잡문을 읽어주는 것으로도 부족해 친히 댓글을 하사하셨는데 감히 그 댓글에 좋아요를 클릭하는 것으로 끝내는 무례한 짓은 하지 않는다답글을 달아주는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마치 복사하기 기능을 사용한 것처럼 똑같은 내용을 남기지 않는다조금씩 다르게댓글을 달아준 친구의 상황에 걸맞은 답글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재미있는 글을 쓰더라도독자들이 내 글을 읽고 싶어 하더라도 작가는 독자들의 이 될 수 없다나의 글에 좋아요를 매번 눌러준다는 것이 매번 재미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그간 읽었던 재미있는 글에 대한 감사와 신의의 표시로 비록 재미가 없는 글이지만 좋아요를 적선하는 독자도 있다.

 

다른 작가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는 내 책에 대한 서평을 그 어떤 글보다 정독한다칭찬하면 쑥스럽고 악평을 하면 서운하지만분노는 하지 않는다내가 쓴 글은 뼈를 깎는 고통이 동원되지 않았다산속에 틀어박혀 수도승 생활을 하면서 쓴 글도 아니다그저 매일 독자들과 웃고 즐기면서’ 쉽게 쓰인 글이다들인 피와 땀이 없으니 분노할 자격이 없다그저 잠시 귀신에게 홀려서’ 지갑을 연 독자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을 뿐이다.

 

 

기획회의’ 437(2017. 4. 5) 특집' 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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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4-16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의 첫 책이 나올 때 여기에 호들갑 좀 떨긴 했지요.
첫 책이니 오죽했겠습니까?
늘 독자로만 있다가 아마추어 작가가 되었으니
아마추어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부터는 그러지 말아야죠.
그때부턴 프로 아닙니까?
프로 작가들도 자기 블로그나 sns에 글을 쓰고 책으로 묶어낼 땐
냈는지 마는지 무심하잖아요.
뭐 한 번 정도 회고하는 글 정도 올리겠죠.
그게 ‘나 책 냈소.‘ 알리는 거겠죠.
그런데 문제는 저의 두 번째 책은 언제 나올지 몰라
그 무시함듯 시크하게가 안 되고 있다는 거죠.
전 뭘 가지고 두 번째 책을 써 보나 고민중에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ㅠㅋ

박균호 2017-04-16 19:19   좋아요 2 | URL
그런 고충이 있으셨군요...꼭 두번째 책을 내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17-04-16 19:29   좋아요 1 | URL
ㅎㅎ 아니어요.
그냥 균호님 글 읽은 김에 투정 한 번 해 본 겁니다.
글 써서 돈 벌어먹을 생각이었다면
이런 투정도 안 하죠. 그냥 쓰면 되니까.
그리고 글이란 게 어디 닥달해서 나오는 거던가요?
다 시간의 퇴적물 아니겠습니까?
그냥 꾸준히 책 내는 사람들 부럽기도 하고 해서.
부러우면 지는 거라던데...ㅋㅋ

어린왕자 2017-04-25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지난주까지 독서만담을 읽은 독자입니다. 저는 집은 경주이고, 올해 울진 후포로 발령나서 혼자 살고 있는 초등교사입니다. 책을 사량하는 것과 낯선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이 저와 닮아서 낄낄거리며 읽었답니다. 에피소드 중 귀곡산장 휴게소가 궁금한데. 알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가까운 곳이면 남편과 가보려고 합니당^^

박균호 2017-04-25 11:18   좋아요 0 | URL
아...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0708sm&logNo=220839265080 여기랍니다...ㅎㅎㅎ
 

수업시간에 focus라는 단어가 나와서 칠판에 적었다. “이게 무슨 뜻일까?”라고 물었다. 한 여학생이 남자친구에게 ‘초점’이라고 속삭였다. 남자친구가 돋보이게 하려는 마음이다. 불행하게도 남자친구 녀석은 잘 못 알아듣고 나에게 ‘초급’이라는 뜻이라고 말해 버렸다. 

어이없어하는 내 표정을 보고 또 다른 녀석이 이렇게 말한다. “에이, 선생님 저건 ‘초보’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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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16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박에 빠진 사람은 ‘Poker’라고 생각할 겁니다.

박균호 2017-03-16 15:26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ㅎㅎ

cyrus 2017-03-16 15:34   좋아요 1 | URL
재미없어도 아재개그라고 생각해주세요.. ㅎㅎㅎ

박균호 2017-03-16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재미있는대요..ㅎㅎ

moonnight 2017-03-23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학생의 마음이 눈물겹네요ㅎㅎㅜㅜ;

박균호 2017-03-23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2017-03-28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3-28 20:51   좋아요 0 | URL
네 수정해서 2쇄 나왔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2017-03-28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균호 2017-03-28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씀을요 진심으로 정말 고맙습니다
 

<독서 만담>을 내고 두 번 째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예상 질문지를 무시한 송곳 질문에 진땀을 흘린 경험을 토대로 이번엔 작가 선생에게 ‘대본대로’ 가자고 요구했고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우린 거의 대본대로 갑니다”라는 작가분의 답변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고 이 나이 먹도록 여의도에만 있을 줄 알았던 방송국이 상암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신기해하면서 택시를 탔다. 


약속된 시간이 10분 앞으로 다가오자 지금껏 유유자적하듯이 문자로만 연락을 주고받았던 작가분이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역시 방송국 직원들에게 ‘약속 시간’은 금인 모양이다. 아무리 촌놈이라도 방송국 정도는 제대로 찾아갈 자신이 있다면서 작가분을 안심시켰고 내 눈앞에는 방송국처럼 생긴 건물이 보였다. 


방송국 앞이라는 기사 양반의 말을 듣고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동네의 시청처럼 군계일학의 건물이 아닌 여러 내로라하는 건물이 꽉 차 있는데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도무지 알지 못했다. 내가 촌놈이라는 것을 익히 아는 작가분은 적절한 시기에 또 전화를 걸어왔다. ‘초록색 동상’이 세워진 곳 근처란다. 그 동상을 지나면 ‘물방울 조형물’이 보일 텐데 바로 그 뒤 건물이 바로 내가 갈 곳이라는 것. 


문제의 초록색 동상은 쉽게 찾았다. ‘물방울’이 보이지 않는다. 물방울이라고 하길래 빗물을 생각했다. 빗물만 한 크기의 물방울이 마치 보석처럼 엮어져 있는 조형물을 상상했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입안이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눈앞에 웬 집채만 한 조형물이 보이긴 했다. 물방울이라고 하기엔 너무 커서 뒤로 물러서서 그 ‘괴물체’를 다시 보았다. 어찌 보면 물방울처럼 생기긴 했다. 작가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야 했다. “물방울처럼 생겼는데 집채만 한 크기에요 ‘라고 말이다. 


다행히 방송작가 선생은 나를 발견했고 스튜디오로 향했다. 진행자분은 푸근한 아저씨 스타일이셨고 도저히 대본에도 없는 질문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독서 만담>을 꺼내시는데 물을 쏟아서 책표지가 물에 넣어진 라면 사리처럼 불어 있었다. ‘너무 열심히 보시다가 물을 쏟았다는데’ 책을 열심히 보는 것과 물을 쏟는 행위의 상관관계가 언뜻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분명 내 책을 꼼꼼히 보신 것은 확실했다. 


내가 책 수집가라는 것을 알고선 본인이 너무나 아껴서 ‘집 밖으로 절대 가져 나오지 않는 희귀본’을 노란 봉투에 서너 권 넣어오셨다. 자연스럽게 ‘뭘 또 이런걸’이라며 그 책들을 내 가방에 넣으려고 지퍼를 열려는 순간 똑똑한 작가분은 나를 대신해 적절한 질문을 던지셨다. 

“와, 이 책을 박균호 선생님에게 선물하시는 거예요?” 진행자분은 단호했다. ‘그냥 구경만 시켜드릴’ 것이란다. 하마터면 실수할 뻔 했다.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초판본을 비롯한 여러 권 보여주셨는데 애써 ‘진귀한’ 물건을 보는 시늉을 했다. 녹음이 시작되었다. ‘우린 대본대로 해요’라고 듣고 왔는데 첫 질문부터 ‘우리도 대본대로 하지 않아요’는 식이다. 억만금을 남기는 부모의 유언보다 더 집중해서 진행자분의 질문을 들었다. 


예상 질문지에 맞춰서 생각해둔 ‘주옥같은’ 멘트를 하나도 하지 못해서 분했다. 심지어 책 내용의 일부를 나더러 낭독하란다. 군대 시절 말고는 경상도를 벗어나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구사하는 사투리로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다. 확실히 글을 쓰고 나면 낭독해봐야 한다는 선현의 가르침이 맞다. 글이 얼마나 지저분하고 너저분한지 읽다가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 


권투라면 수건을 던지고 싶었고, 야구라면 패전처리전문 투수를 올릴 터였다. 당황하고 창피해서 차마 스튜디오 밖의 P.D 양반의 얼굴도 못 쳐다봤다. 방송국 물을 한두 해 먹은 것도 아니어서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보면 딱 견적이 나올 텐데 녹음은 계속 이어진다. 듣기로는 녹음이라 언제든지 ‘끊어 갈 수 있다고’ 했는데 내가 그로기 상태가 되었는데도 ‘끊지’ 않는다. 


치욕스러운 시간은 끝은 났다. 고통의 시작이 다가왔다. 저자 서명을 해달란다. 붕괴한 정신을 간신히 가다듬어 서명하는데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진행자분이 말을 건넨다. 이건 마치 뇌수술을 하는 의사에게 중국집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것과 진배없다. 대답하지 않았다. 서명하기에도 너무나 힘든데 진행자의 방송시간외에 하는 질문에 대답할 여력 따위는 없다. 


방송작가분은 나의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위로가 되었다. 작가분은 촌놈의 안위가 걱정되었는지 방송국 밖까지 배웅을 해주었고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다. 본인이 맡은 다른 프로그램에도 <독서 만담>을 소개하시겠단다. 


다음 날 저녁 세 번째 라디오 출연이 이어졌다. 지역 프로그램이라 편안했고 예상 질문지 따위는 주지 않았다. 이미 부 번을 속은(아니 농락당한) 나는 질문지를 받았다고 해도 연습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질문지와는 상관없는 질문이 쏟아질게 뻔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속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는데 이번엔 속을 일이 없었다. 원래 사전 질문지를 주지 않고 그냥 편안하게 대화를 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란다.


진행자분은 과연 편안하게 대화하듯이 인터뷰를 이어나갔고 속은 것에 대한 분노가 없었던 나는 지난 두 번의 방송보다 훨씬 더 잘 인터뷰에 응했다고 자평할 만 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작가분은 ‘어쩌면 이게 제일 어려울 수 있어요’라며 한가지 미션을 주셨다. 일일 d.j가 되어서 동네 주민들에게 노래 한 곡을 선택하고 ‘추천의 변’을 남겨 달라신다. 


“안녕하세요? 포항시민 여러분, 일일 D.J 박균호호 입니다. 제가 들려드릴 곳은 국카스텐의 ‘나비’입니다. 평소 아내가 좋아하는 곡이에요. 저와 함께 국카스텐의 ‘나비’를 들어보아요”라는 논평을 뱉어낸 나는 거의 토할 지경에 이르렀다. 지역방송국에서 듣기 거북한 사투리로 노래를 신청한 분들의 ‘위대함’을 알겠다. 


역시 다정하고 내 책을 진심으로 좋아해 준 진행자분의 배웅을 받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심각한 손상을 입어서 혀끝만 닿아도 아픈 오른쪽 어금니로 삼겹살을 씹어버렸고 골프연습장에서는 공을 맞히고 싶었으나 허공만 세 번 가른 다음, 아픈 허리를 부여잡고 숙소로 향했다.


방송 내용 듣기 : http://www.podbbang.com/ch/70 후반부에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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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7-03-12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맛 겸손이셨네요. 친근한 목소리로 방송 잘 하셨는데요.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저랑 같은 생각 많으셔서 막 웃으면서 들었습니다. 호호^^

박균호 2017-03-16 18:54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해요 ㅠ

오해관 2017-03-13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송을 먼저 듣고 책 구매하려고 하네요^^
포항이 고향이라... ㅎㅎ 잘들었습니다^^

박균호 2017-03-16 18:54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해요 더 반갑네요
 
엄마 아빠 딱 10분만 놀아요! - 아이의 마음이 자라는 하루 10분 몰입 놀이 행복한 성장 2
노은혜 지음 / 갈매나무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놀이 지도 상담사 노은혜가 쓴 <엄마 아빠 딱 10분만 놀아요>는 아이들과 놀아주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이런 종류의 책을 만날 때마다 ‘이 책의 저자는 실생활에서 얼마나 잘할까?’라는 삐딱한 생각이 든다. 남에게 충고하고 지도를 하는 내용과 본인의 실생활은 다른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행복 전도사가 자살을 하고, 말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의 저자가 강연에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경우를 듣고 보았다. 

<엄마 아빠 딱 10분만 놀아요>는 내가 가진 선입견과는 거리가 멀다. 이 책에는 ‘아무개 연구에 따르면’ 이란 말이 끊이지 않고, 저자가 직접 상담소로 찾아온 아이들을 겪은 사례를 바탕으로 저술했다. 저자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개인적인 사례를 일반화시키는 오류와는 거리가 멀다. 

내 딸아이가 <엄마 아빠 딱 10분만 놀아요>가 말하는 ‘결정적 시기’ 즉 유아기에 나는 아이와의 ‘놀기’를 힘겨워했다. 아이와 한 시간 정도라도 재미나게 놀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착하고 신뢰할만하다고 믿는다. 노동하는 사람도 아니면서 딸아이에게 ‘피곤하다’라는 말을 자주했다. 

딸아이와 놀이를 할 때 의사 놀이를 제안했고 나는 ‘아파서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 있어야 하는 환자’ 역할을 자원했다. 한두 번 시행착오를 겪은 딸아이는 의사 놀이를 하대 반드시 자신의 환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엄마 아빠 딱 10분만 놀아요>를 읽어보니 아이와 놀 때는 그들과 공감되는 언어를 사용하며, 부모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도록 해줘야 한다는데 그저 ‘아파서 골골하는 ‘딸아이에게 ‘간지럽히기‘라는 처방을 내린 돌팔이 의사였다. 

딸아이는 낮에는 ‘놀이’도 좋아했고 잘 때는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기를 즐겼다. 자신이 사는 세상과는 다른 아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재미났던 모양이다. 기껏해야 수박 서리 한 이야기, 썰매를 타다가 물에 빠진 이야기, 아버지 몰래 곶감을 빼먹던 이야기일 뿐인데도 딸아이는 깔깔거리며 웃어주었다. 재미난다는 반응을 아끼지 않았다.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재가 고갈되었다. 경험이 바닥나서 창작이 필요했다. 내가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때 실감했다. 관대한 딸아이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웃으며 질문을 던졌고 재미나다는 칭찬을 했다. 나의 창의력의 빈곤 때문에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딸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군대에서 선임이 연애담을 들려달라고 강요를 할 때 사용했던 방법을 썼다.
아무 소설에서나 읽었던 내용을 적당히 내 이야기처럼 들려주었다. 딸아이는 여전히 나의 팬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읽었던 책도 생각이 나지 않자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마구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콘텐츠가 점점 부실해졌고 매일 밤 ‘천일 야화’를 머릿속으로 집필하는 처지가 되었다. 

내가 지금 그나마 글을 쓰는 작가가 된 것은 8할이 그때 딸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생각해내느라 겪었던 창작의 고통 덕분이다. 딸아이는 겹치는 이야기에도 흥미를 잃지 않았고 나를 격려해주었다. 나는 딸아이와 놀아주는 것을 힘겨워했고 많이 놀아주지 못한 죄책감을 안고 산다. 세상에는 나 같은 부모들이 제법 있는가 보다. 동아대 류미향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36개월 미만의 자녀를 두고 있는 부산의 엄마 네 명 가운데 세 명이 3세 미만 자녀에게 스마트폰 사용을 허락한다’고 한다. 요즘 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어쩌면 한 시간 이상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는 여건 자체가 되지 않는 부모가 많지 않겠는가. 

<엄마 아빠 딱 10분만 놀아요>는 아이들과 오랫동안 놀아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아이와 오래 놀아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나의 경우도 그렇다. 딸아이는 도무지 지치고 잠들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더욱 힘겨워한 것은 아닐까? <엄마 아빠 딱 10분만 놀아요>의 우리 아이가 잘 자라게 도와줄 ‘하루 10분 몰입 놀이 레시피’라는 개념이 어쩌면 요즘 부모들에게는 구세주다. 

<엄마 아빠 딱 10분만 놀아요>는 ‘아이와 많이 놀아주세요’ ‘아이에게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느끼게 하여주세요는 식의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조언을 하지 않아서 좋다. 아이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놀이를 소개(준비물, 난이도, 장소, 인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할 뿐만 아니라 매 장마다 구체적인 팁을 제공해준다.

예를 들어 ‘집중력을 높이는 놀이 규칙’을 위해서는 ‘한 번에 하나의 장난감을 준다. 제한된 영역에서 놀이하도록 한다. 아이가 선택한 장난감으로 놀이를 시작한다. 아이가 놀이를 통제할 수 있도록 주도권을 준다는 식의 매뉴얼이 제공된다. 

내 방문을 열고 ‘아빠 나랑 놀아줘’라고 투정을 부리던 딸아이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끔찍이도 슬프다. 요즘 우리 부부는 딸아이에게 ‘학원을 가지 말고 같이 놀러 가자’라고 유혹을 하고 공부방에서 거실로 나오면 ‘우리랑 좀 놀다가 가’라고 애원을 하는 처지다. 딸아이가 주말에 학원을 가겠다면 더욱 슬퍼진다. 

내 딸아이가 ‘아빠 나랑 같이 놀아줘’라고 애교를 부릴 때 <엄마 아빠 딱 10분만 놀아요>가 곁에 있었다면 지금의 후회는 상당 부분 줄어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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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3-08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을 정말 좋아해서 만약 결혼해서 자녀를 돌보게 되면 10분도 자녀들과 못 놀아줄 것 같습니다.. ^^;;

박균호 2017-03-08 08:5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아무리 책을 좋아하셔도 10분은 투자해주세요.

yureka01 2017-03-08 09: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놀아 달라는 시간이 그리 길지가 않더군요...그 때 시간내서 못놀아주면 놀아줄 기회가 없죠..초등생만되어도 아이가 부모보다 더 바빠지더군요..운전도 면허를 득하는 이유가 자동차가 흉기가 될 수 있고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조건을 얻은 사람에게만 부여되고..면허 취득에 학습과 연습을 하거든요..부모도 자식이란 존재에 대한 연습은 못하더라도 학습은 해야 하거든요. 무면허 운전자가 모는 차는 위험하거든요..자식도 비슷한 거였더라는....

박균호 2017-03-08 09:57   좋아요 1 | URL
맞아요. 아이가 놀아달라고 했던 시절이 참 행복햇다라는 것을 그땐 몰랐어요.ㅠㅠ

나비종 2017-03-12 0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는 뭐가 그리 힘들었는지 동화책을 읽어달라는 아이의 말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했던 기억이 두고두고 후회되더군요.
이제는 불쑥 자라 친구인 듯 대화가 통하는 아이를 보면 기특하면서도 한 켠에 찡한 마음이 있습니다.

박균호 2017-03-12 12:53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뭐가 그렇게 바쁘고 힘들었는지..ㅠ
 

나만의 녹음기를 중학교 2학년 무렵 즉 1982년경에 처음 가졌다. 녹음기는 속칭이며 이 기기의 정식 명칭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카세트플레이어 겸 녹음기’쯤이 되겠다. 산골을 떠나 대구로 전학했고 이제 갓 중학교 2학년이 된 나를 위한 누나의 선물이었다. 대구의 서문시장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녹음기’를 샀으니 노래가 담긴 ‘카세트테이프’가 필요했다. 등굣길에 늘 지나던 서문시장의 손수레 자판에서 ‘아무 생각 없이’ 집어든 것이 ‘비틀즈’의 명곡이 수록된 테이프였다. 


당연히 비틀즈가 누군지도 몰랐고 듣다 보디 괜찮아서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주야장천 비틀즈만 들었다. 야구글러브와 함께 녹음기는 나의 애장품이자 자랑거리였다. 방학 때마다 시골집으로 내려갔는데 그때마다 ‘촌놈’들에게 자랑할 신문물을 자랑했고 전파했다. 


무려 투수용 야구글러브의 오너인 나는 동네 야구팀의 투수로 활약했고 포수용 글러브를 가지게 되자 주전 포수가 되었다. 접착제를 이용해서 조립하는 장난감 로봇이나 탱크는 촌놈들에게 ‘눈으로 구경하는 것만 허용할 뿐’ 절대로 만지게 하지 않았다. 대구에서 접한 신문물 중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포르노 사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펜트하우스나 플레이보이의 한쪽을 자른 것에 불과했지만, 종이라는 물건의 정체성을 상실할 때까지 소중히 가지고 다녔고 촌놈들에게 ‘관람’을 시켰다. 


말하자면 도시 문명의 전파자였던 셈이다. 촌놈들은 나의 소장품과 신문물에 경외심을 표했고 나는 도시 사람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졌다. 반전이 발생했다. 촌놈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야한 음성’이 담긴 테이프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자식을 생산할 수도 있는 행위’를 하면서 발생하는 모든 음란한 대화와 신음이 담겨 있었다. 


나의 위치는 추락했고 나는 촌놈들에게 ‘야한 음성 테이프’의 청취를 위해서 구걸을 해야 했다. 분한 마음으로 대구로 돌아왔다. 등하굣길에 서문시장을 지나다니면서 ‘비틀즈’ 테이프를 산 노점상에서 놀라운 물건을 발견했다. 촌놈들이 나에게 들려주었던 내용이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테이프였다. 


다가오는 방학 때 그간의 수모를 갚아 주어야 했다. 호시탐탐 그 테이프를 노렸고 군침을 흘렸지만 차마 중학생 신분으로 살 수는 없었다. 대구 시민이 모두 모여 있는 것처럼 분주한 시장바닥에서 그 테이프를 주시라고 주인에게 말할 용기가 없었다. 자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누나에게 ‘방위성금’을 내야 한다며 받아낸 천 원짜리 지폐가 주머니에 있었고 당시 그 노점상에서 파는 테이프는 500원 균일가였다. 


용기도 용기지만 문제는 그 테이프의 내용이 내가 원하는 것인지를 확실할 수 없었다.

테이프 제목의 두 글자는 내가 원하는 것이었지만 마지막 한 자 즉 ‘폰’이 거슬렸다. 지금은 폰이라고 하면 당연히 휴대용 전화기로 다들 알아듣지만 당시로써는 전화기(telephone)이라는 말만 사용되었다. 


폰이라는 글자의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몇 날 며칠을 연구했다. 실마리를 국어 시간에 들은 ‘활음조 현상(euphony)에서 얻었다. 활음조란 발음할 때 듣기 좋고 편한 음이며 두 단어가 연속될 때 말하기 편하게 발음이 변화하는 현상이라고 배웠다. 한마디로 ‘좋은 소리’라는 뜻인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포니’ 소리라는 의미이며 ‘폰과 친척 정도 되는 말이라는 것이라고 추정을 하였다. 


오랜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내가 본 그 테이프는 ‘성교를 할 때 발생하는 소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십번을 지나다녔지만 차마 용기를 못 냈는데 천금 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서문시장 근처 인적이 한적한 골목길을 지나는데 또 다른 테이프 노점상이 그 물건을 팔고 있었다. 


거스름돈을 받을 생각도 없이 돈을 던지고 수개월 동안 노리던 그 물건을 쥐어 들고 자취방으로 달렸다. 그때의 감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방문을 잠그고 떨리는 손으로 섹스폰(표준어는 색소폰이란다) 테이프를 넣은 다음 재생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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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0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색소폰 음악은 오래오래 각인되셨겠습니다^^. ㅎㅎㅎ

박균호 2017-03-06 13: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가 기다리는 내용은 언제 나오는지 궁금해서 고상한 음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던데요.

나비종 2017-03-12 02: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읽은 글 중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극적인 긴장감이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군요. 특히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듭니다. 매력적이고 유쾌한 단편 소설의 느낌을 주는 글입니다.^^

박균호 2017-03-12 10:53   좋아요 0 | URL
아...최고의 칭찬 감사해요.

박균호 2017-03-12 10:53   좋아요 0 | URL
아...최고의 칭찬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