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만추>의 시나리오 영상집이 나왔다. 화면이 워낙 예뻤다고 기억되는 영화라 영상집 출간이 그리 어색하지 않다. 

영화를 본 감상을 한 줄로 요약하면,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백치미인과 한 시간 쯤 마주 앉았다 나온 기분?
아무 장면이나 떼내어 광고나 뮤직비디오로 써도 좋겠다 싶은, 비에 젖은 시애틀과 두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 장면이 섬세하고 무엇보다 화면을 흘러넘치는 감성이 참 진하다.
그런데 그 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특히 초반 뮤지컬 장면은 뜬금없고, 의미도 없고, 지루했다. 반면, 애나의 중국어 고백에 '하오'(good)와 '화이'(bad)로 응답하는 훈의 동문서답식 대화 부분은 좋았다.
영화 전체를 통해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장면.
대사가 없는 그 몇 분 동안 약간의 소음, 보일듯 말듯 떠도는 먼지, 애나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 하나에도 굉장히 집중하게 만든다. 그 순간만큼은 애나가 되어서 훈을 기다리는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훈은 '김주원'과 자꾸 겹쳤고, 탕웨이는 사감이지만 물에 뜬 기름처럼 캐릭터와 약간 비켜가는 듯 느껴졌다. 한마디로 애나의 단독씬에서 몰입이 깨어지는 장면이 좀 있었다.

영화를 보고난 후 궁금했던 건 훈이 나타나지 않은 배경이었다.
감옥에 수감된 것일까, 아니면 2년 전 약속은 그에게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

대답은 원작에서 찾았다.

결말을 슬쩍 열어놓은 2011년작에 비하면 원작은 훨씬 친절하다.
역시 여운이 길게 남는 건 열린 결말이로구나...

영화 마지막, 애나가 훈을 기다리는 장면에서 황지우의 詩「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떠올린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덕분에 오랜만에 황지우의 시집을 꺼내 읽었다.
음, 이 詩는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 읽어도 내겐 역시 연인을 기다리는 감성으로만 읽힌다.
이 詩에 무거운 시대를 얹고 열변을 토하던 옛 친구가 문득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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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국도 Revisited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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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 읽은 책은『7번 국도』, 처음 구입한 책은 같은 작가의『우리가 보낸 순간 시/소설(세트)』이다. 물론 다른 책도 함께 구입했지만 어쨌든, 작가를 향한 호불호과 상관없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소설을 읽은 감상을 간단하게 정리하면『네가 누구든...』『밤은 노래한다』의 '연장선, 혹은 출발선에 있는 소설' 이랄까. 시기적으로는 출간이 앞서지만 이번에 전면 개정했다고 하니 소설의 위치가 애매하다. '나'는 타자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세계는 나의 바깥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내부에 존재하는가... 라는 이젠 꽤 익숙해진 작가의 내러티브가 펼쳐진다.
이번 소설이 낯설지 않은 건 위에 언급한 두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물 구도, 사건, 서사의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인데, 익숙하다는 건 모든 현상이 그렇듯 일장일단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냄새가 살짝 풍기는 게 기억에 남는데, 좀 지루해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작가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가 등장하기 때문에 책장은 쉽게 넘어가는 편이다.
다만 현대 일본 사소설의 특징적인 1인칭 정서가 등장하는 게 좀 마음에 걸린다. 뭐,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오히려 취향일 수도 있겠다 싶다.  
궁금한 건, 이번 소설은 절판된 초판본을 전면 개정했다고 하는데 그럼 이러한 부분은 개정 전의 것인지 개정 후의 것인지 하는 거다.
혹 개정 후의 것이라면 아마 이후에 나오는 작가의 소설은 구입하기 전에 고민을 많이 하게 될 것 같다. 

덧. 김연수 작가의 글을 읽고 나면 늘 그렇지만 '골이 난 일곱 살짜리 우등생'(?)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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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TO READ 시리즈 - 전16권 How To Read 시리즈
슬라보예 지젝.레이 몽크 외 지음, 김병화.안인희.고병권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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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첫 관문으로 삼아도 좋은 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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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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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광주인화학교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도가니』는 인호가 기간제 교사로 발령 받아 무진市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실화를 소설화할 때 즉 저널리즘식 글쓰기를 할 때 작가는 감상에 빠지거나 감정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인물들로부터 심리적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이건 기본이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전달자여야지 소설속 인물들과 함께 어울려서 울고 불고 떠들어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3자가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객관적인 사실을 정보로 전달해야 할 작가가 오히려 나서서 감정을 선동하고 있다. 저작이 사회소설일 때, 작가 공지영은 여전히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듯 보인다. 아니면 극복할 마음이 없던가.
"이 아이들에게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어요" 하는 것과 "가여운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정말 짐승, 악마 같은 놈들 아닌가요?" 하는 것은 어조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다. 이 작가를 보면 주목 받고 산 사람의, 주목 받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 같은 정서가 느껴진달까.
무엇보다도『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선 '죄 없는' 아름다운 청년 사형수가 왜 죽어야 하느냐고 사형제도의 부당함을 주장하여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더니『도가니』는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구성상의 몇 가지를 제외하더라도 그 결말에 이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은 결국 무죄 처리되어 자기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반면,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가는 인호는 물론이고 피해 학생들 모두 예전의 악몽으로부터 구원받아 새로운 보금자리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게 되어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감동적인 메시지로 매듭을 짓는 것으로 작가는 슬그머니 발을 빼버리는 것. 이런 동화같은 온화한 결말로 책 판매량은 늘었을지 모르나 독자 입장에선 사회적 독서를 할 기회가 제한된다는 점에서 작가 스스로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늘 감탄하지만 이 작가의 소재를 고르는 재주는 참 뛰어나다.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 터.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재료도 그것을 다룰 줄 모르면 소용없는 법. 곪은 상처를 치료하려면 상처를 찢고 고름과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지켜보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적어도 사회고발소설을 쓰려고 작정했다면 그 정도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소설외적인 문제일 뿐, 몇 년 새 아동성범죄가 너무도 만연하고 있는 요즘, 다시 한번 광주인화학교 사건을 대중에게 환기시켰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이 해낸 역할 - 잊혀진 사건에 대한 주의 환기 - 에 비하면 저런 부분들은 차라리 부수적이고 하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광주의 옛이름이 무진주(武珍州)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 무진은 김승옥의『무진기행』에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 무진(霧津)이다. 문학 비평집을 읽다 우연히 마주친 짧은 문단에 반해서 그 날로 전집을 구입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김승옥의 무진市인 것이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찹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 pp.159-160,『무진기행』   

김승옥의 영향일까. 이번 공지영의 소설은 예전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담백하고 묵직한 문장들이 많이 등장한다.

강인호가 자신의 승용차에 간단한 이삿짐을 싣고 서울을 출발할 무렵 무진시(霧津市)에는 해무(海霧)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흰 짐승이 바다로부터 솟아올라 축축하고 미세한 털로 뒤덮인 발을 성큼성큼 내딛듯 안개는 그렇게 육지로 진군해왔다. 안개의 품에 빨려들어간 사물들은 이미 패색을 감지한 병사들처럼 미세한 수증기 알갱이에 윤곽을 내어주며 스스로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버렸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선 사층짜리 석조건물 자애(慈愛)학원도 그렇게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 p.7,『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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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세 달 전인가, 알라딘에서 중고샵 책 상태에 관한 설문을 할 때 선택 항목을 보고 불안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최상 항목에 책에 서명하고, 줄 긋고, 표지 찢어진 등의 내용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됐다. 혹시 이런 항목들을 보고 '아, 이 정도는 최상이라고 해도 될라나?' 생각하는 어설픈 판매자들이 등장하는 건 아닌가 노파심도 들었다.

내 경우, 책을 구입할 때 기본적으로 소장 목적이 포함된다. 일단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이유가 뭐든 사정이 어떻든 타인에게 주는 건 물론이고 되팔거나 버리지 않는다. 때문에 중고샵을 이용할 땐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 - 품절/절판으로 책을 구할 수 없을 때 고민고민 하다 구입한다. 상태가 좋은 책이 없으면 차라리 읽기를 포기하고 그게 언제가 되든 재출간을 기다린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말 그대로 새 책입니다' 

라는 설명이 부연되어 있으면, 구매자는 '말 그대로 새 책이려니'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중고책인데, 중고에 새 것을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배송비까지 물면서 적지 않은 가격을 치를 땐 판매자의 '최상'을 믿기 때문이다. '새 책에 가깝다' 하면 '새 책에 가까우려니' 기대하는 게 잘못인가?  

중고샵에 바라는 건 아주 소박하고 단순하다. 책 상태에 관해 판매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라는 것.

읽지만 않으면 새 책인가? 정체불명의 오염 흔적에 알 수 없는 도장들이 잔뜩 찍히고 묵은 먼지로 책은 누렇게 변색되고. 이게 말 그대로 새 책인가? 분명한 건 상품 설명에, '새 책이지만 심한 노끈 자국이 있습니다', '먼지로 인한 오염 자국이 심합니다' 등의 솔직한 설명만 있었어도 구입하지 않았을 거다.

돈 버는 판매자가 아니라 돈 쓰는 구매자를 위해 알라딘은 보완책을 마련하길 바란다.

중고 상품을 등록할 땐, 하다 못해 상태를 '최상'으로 등록하는 상품엔 최소한 상품의 사진이라도 올리게 하던가. 상태가 설명과 다르면 간단하게 환불처리 할 수 있도록 해주던가.

이게 어려운가? 아주 간단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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