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연애조작단>(이하, '시라노')는 추석 연휴 때 부산에서, <무적자>는 어제(금요일) 저녁에 봤는데, 간단평을 하면 '시라노'는 오밀조밀 아기자기하고, <무적자>는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거친 인상이 든다. <시라노>는 코믹 멜로이고, <무적자>는 액션 느와르이니 당연한 얘기인가 싶기도 하고.

<시라노>를 연출한 김현석 감독의 예전 작품은 <YMCA야구단>과 <스카우트>를 봤는데 이 감독은 연출보다는 각본 쪽에 더 재능이 있는 듯하다. 연출을 못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야기는 조밀하게 잘 쓰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늘 얼마쯤 부족하다 싶은 찜찜함이 남는다.
시라노는 17세기 프랑스 작가 에드몽 로스탕의 5막 시극에 등장하는 인물로 박색의 외모 때문에 자신의 사랑을 숨기고 친구의 연애편지를 대필하는 인물. 이러한 플롯을 그대로 빌려온다는 점에서 영화는 이를테면 극속 극 형태를 취하는데, 연애에 서툰 사람들의 연애를 성사시켜주는 일을 업으로 하는 '시라노 에이전시'를 중심으로 이곳을 찾는 연애 초보들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하지만 능동적으로 시라노 역할을 자처했던 에이전시 대표 병훈(엄태웅)은 어느 날 에이전시를 찾아온 상용(최다니엘)으로 인해 소설 속 시라노처럼 옛 애인 희중(이민정)과 고객 상용 사이에서 매파 노릇을 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는 뭐랄까, 요소 요소에서 톡톡 튀는 대사와 설정들은 웃음도 나고 재미도 있지만 막상
극장에서 나온 후에 영화를 기억할만한 인상적인 임팩트가 없다. 다만 영화에서 헤어진 옛 애인과 재회했을 때 병훈이 보여주는 몇 가지 행태들이 눈에 띄는데 기존 로맨틱물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정형을 탈피한, 지극히 현실적인 병훈의 반응/역반응이 꽤 신선하다. 시라노의 거대한 코가 병훈에겐 어떤 형태로 감춰져 있는지 보는 것도 영화를 보는 재미.

<무적자>는 리메이크 원작 <영웅본색>을 못 본 이유로 일단 비교는 불가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을 안 본 것이 득일까 실일까 갸우뚱 기우뚱 했고, 덕분에 영화관에서 나올 때 제일 먼저 한 건 원작인 <영웅본색>을 봐야겠다는 결심이었다.
내용은 딱, 남자들 얘기다. 영화를 보는 중에 두 번 웃었는데 모두 <영웅본색> 주제가 나올 때였다(영화는 안 봤지만 주제가는 안다).
송해성 감독의 영화는 이번이 처음인데 감독의 스타일을 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 건, 그만큼 이 감독의 노선이 분명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기억에 남는 송승헌 씨 연기. "은서야~" 할 때 고개를 비틀며 입가를 아래로 살짝 늘이는 버릇이 여전히 남아 있긴 한데 발성이 굉장히 묵직해졌달까, 배우 느낌이 물씬 나는 것이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 했다.
여하튼 재미있는 건 나는 영화 속 남자들의 의리, 우정, 형제애 이런 것에 제법 유치한 감동을 느꼈는데 정작 이 영화를 본 (내 주위)남자들은 상당히 냉정하게 반응하더라는 것.
여담이지만, DVD가 출시되면 꼭 한번 세어보고 싶다. 태민이 끌고 온 부하들과 영춘의 총에 맞힌 태민의 부하들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많은지.
영화 전반에 걸쳐 리얼리티는 많이 떨어진다. 줄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이야기야 어차피 픽션이므로 감안하고 본다) 단적인 예로, 대한민국 현실에 어울리는 건 아무래도 총싸움보다는 칼싸움인지라 비록 등장인물들이 무기밀매업에 관계되어 있다고는 하나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시도 때도 없이 해대는 총질은 아무래도 이건 좀 아니올시다 싶다. "마이 뭇다 아이가"가 달리 명대사이겠는가.
(그러고 보니, '고마해라'가 '마이 뭇다' 앞에 오냐, 뒤에 오냐로 친구랑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이 난다) 

<시라노>도 <무적자>도 원형을 과거의 작품에서 빌려오거나 가지고 왔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마침 요즘 읽고 있는『클래식 중독』(조선희 / 마음산책)은 저자의 옛 영화 다시 보기 기록으로, 영화 얘기에 덤으로 영화와 얽힌 내외적 수다로 가득하다.
나는 기자 혹은 기자 출신이 저자인 책은 사전 정보가 없어도 거의 고민 없이 장바구니에 담는데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대부분)서술간 사실 관계가 명확하고, 글이 의도하는 바가 뚜렷해서 가독성이 좋으며 무엇보다 기자 특유의 촌철살인의 어법을 읽는 것이 즐겁다는 것이 그들을 신뢰하는 이유다.
이 책은 작가가 기자 출신(연합통신 기자, '씨네21' 편집장 등)이라는 점 외에도 옛날 영화에 대한 호(好)가 나와 통했다는 점에서 꽤나 재미있게 읽고 있다.
사실 옛날 영화는 '옛'이 풍기는 어감 탓인지 왠지 촌스럽고, 고루하고, 밍숭맹숭 심심할 것 같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일례로 내 경우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옛날 영화와 마주쳤을 때 거의 대부분 그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되는데, 반면 영화가 현대물인 경우 금방 다시 채널을 돌려 버리는 일이 많다.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라기 보다는 여러 의미로 깊은 인상을 받은) 옛 영화는 국내 작품은 <최후의 증인>, 국외 작품은 <줄 앤 짐>(프랑소와 트뤼포 연출)이다. <최후의 증인>은 몇 년 전에 <흑수선>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 되기도 했는데 원작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이루었던 김성종의『최후의 증인』. 이 외에도『클래식 중독』에서도 언급되는 <어제 내린 비>도 무척 인상이 깊었던 영화로 기억에 남는데, 영화를 보고 나서 혹시 원작 소설이 있을까 찾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각본은 (조선희 씨에 의하면)당대 최고 신문 연재 인기 작가였던 최인호이다. 

시간이 관여하는 모든 사물은 저마다 고유한 역사를 가지는데 영화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그러므로 작품의 품질을 시간의 선/후로 가리는 것은 소모적인 낭비로 보인다. 이번 연휴에 영화를 고를 때 확 끌리는 작품이 없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요즘 들어 옛날 영화가 여러모로 양적 질적으로 더 풍성했고 더 재미있었다는 아쉬움이 부쩍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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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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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성장소설이라는 건 책을 다 읽고서야 알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느꼈던 감상은 어른을 위한 동화랄까, 소설이 참 착하다라는 것. 정말 소설이 착하다.
내용은 제목이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중2 때 담임이 내준 반성문을 30년이 지나서야 쓰게 된 나의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통로였던 웅변을 그만둔 직후 나선 백일장. 그리고 그 백일장에서 중압감을 못 이기고 우연히 읽은 남의 글을 '일부' 가져다 쓴 것이 빌미가 되어 쓰게 된 원고지 500매의 반성문. 그러나 벌을 수행하면 죄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에, 또 그 외에도 내,외적인 이유와 변수들로 인해 나는 반성문을 쓰는 것을 자꾸만 미루게 된다. 그리고 30년 만에 담임선생님의 병실에서 다시 화두처럼 떠오른 아직 쓰지 않은 반성문과 과거의 기억들. 그리하여 목련을 보면서 마침내 쓰기 시작하는 반성문은 자신의 잘못과 마주하는 당혹감을 지나자 이내 지나간 시간을 향한 향수를 불러오는 추억 여행이 된다.
내용 중에 아내가 나에게 '반성이 아니라 변명처럼 보인다'고 지적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어쩐지 공감이 가는 대목이었다.
사실 긴 학창시절 동안 반성문을 써 본 경험이 없어 잘 모르지만 만약 반성문을 쓴다면 나 역시 자기 최후 변론 같은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정성을 들인 문장이 참 예쁘게 다가오는데 그래서인지 목련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마치 시인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담인데, (소설 속)김 작가가 쓴 백일장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눈 오는 겨울, 정거장, 소녀, 소녀가 두고 간 사진... 그 위에 덧입혀진 까까머리 중2 남학생의 정서가 궁금하다.

「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이 어른을 위한 착한 소설이라면 이어지는 단편「진부의 송어 낚시」는 한 편의 유쾌한 콩트를 읽은 듯한 느낌이 든다.
짧은 분량임에도 상당한 존재감을 가지고 다가온 정미도, 정미의 담임도, 송어축제 게시판을 수놓는 글들도 모두 깨알같은 잔재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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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퍼케이션>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이퍼케이션 1 - 하이드라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우혁의 신작 소설 『바이퍼케이션』을 받아 들고 책 후면의 소개글을 읽었을 때 조금 당황했다. 배경도, 등장인물도 모두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국내 작가가 외국인을 주인공으로 쓰는 소설에 알러지가 있다. 물론 서양이든 동양이든 보편적인 가치관의 바탕 그림은 대동소이할 것이나 중요한 건 정서의 뿌리가 다르다는 차이점은 상대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정도로는 쉽게 좁혀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말이 통하는 것과 정서가 통하는 건 엄연히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다행히 작가가 이에 대해 후기에서 언급하고 있다. 사실 작가의 말처럼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이 이야기의 큰 기둥을 이루는 이 소설은 이야기의 규모나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질감의 무게를 볼 때 국내가 감당하기엔 확실히 시놉시스의 규모가 지나치게 방대하다. 무엇보다도 본문에서 잠깐 언급되지만 서양사를 크게 양분하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그 중에서도 헬레니즘의 근간이 되는 그리스 신화가 이야기의 기둥이고 보면 이야기의 무대가 국내를 벗어나 미국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바이퍼케이션』을 끌어가는 요소는 미국 소도시. 연쇄살인범. 모방 범죄. 과격하지만 인간적인 베테랑 형사. 유년기 상처를 지닌 천재 프로파일러 청년이다. 여기까지는 같은 장르의 여느 소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연쇄살인범을 쫓는 형사와 프로파일러가 엽기적이고 불가사의한 사건의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도 큰 줄기만 보면 흔하고 익숙한 이야기다. 그런데 작가는 이 흔한 이야기에 신화를 끌어온다. 그것도 그리스 신화다. 주인공은 헤라클레스. 그리고 헤라클레스의 12과업. 헤라클레스의 정적으로 부활한 하이드라. 이쯤 되면 책장이 넘어갈수록 궁금해진다. 천재 프로파일러 에이들의 분석처럼 이 모든 이야기는 단지 헤이워드 부인의 분열된 자아가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걸까, 아니면 과학과 이성으로 증명하지 못하는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린 것일까. 그리하여 『바이퍼케이션』은 읽는 동안 두 개의 추리를 요구한다. 첫째, 과연 헤라클레스는 헤라의 분열된 자아인가 아니면 그의 주장처럼 실제로 부활한 신화 속 영웅인가. 둘째, 하이드라는 과연 누구이며(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그리고 제각각으로 보이는 엽기적인 사건들은 모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쯤 되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여 책을 손에서 놓지 않게 되는 건 당연한 일. 

책장을 넘어가게 하는 속도, 소일을 제쳐두고 독서를 우선 순위에 놓게 하는 흡인력. 이는 모두 작가의 힘이다. 서머셋 몸도 말했다. 소설은 첫째도 둘째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그런 의미에서 이우혁은 정말 얘기를 재미있게 하는 작가이고『바이퍼케이션』역시 세 권이라는 분량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단숨에 읽힌다. 오히려 이야기의 규모를 봤을 때 분량이 짧은 듯 느껴진다. 데이터가 너무 많아 흘러넘친다고나 할까. 장르의 전형에 충실한 한편 그 안에 꾹꾹 눌러 담은 작가의 세계관까지 읽어 내기엔 여러 모로 시스템의 과부화가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신화만도 벅찬데 데카르트와 융까지 등장하니 머리가 바빠지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갈 길이 바빴던 탓인지 이야기를 통해 펼쳐져야 할 그리스 신화와 관련한 내용의 상당수가 에이들의 입을 통해 서술되는데 책을 읽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새로운 장이 시작할 때마다 등장하는 인용은 그 자체로 엽기적인 한편 흥미진진하여 나중에 따로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담이지만 언젠가 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 분이 여행객들 중에 가장 골치 아픈 부류는 머리 나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했던 게 인상적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세계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부류를 들라면 나는 두 말 않고 어설픈 휴머니즘으로 무장한 어설픈 영웅을 꼽겠다.

사실 그리스 신화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신화가 재미있는 이유는 신화의 주인공인 신들이 우리 인간들과 하등 다르지 않아서인데 특히 신화 속 얘기를 풍성하게 하는 일등공신은 뭐니뭐니 해도 질투하는 신들이다. 물론 질투하는 신의 최고봉은 헤라(로. 주노) 여신이고. 헤라가 없었다면 그리스 신화를 다룬 책의 두께는 상당히 얇아지지 않았을까. 물론 이 소설 『바이퍼케이션』도 탄생할 수 없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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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카르마
이상민 지음 / 푸른물고기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스크림>은 공포영화의 법칙을 비웃는 한편 공포물의 장르적 속성을 충실히 따르는 아이러니를 앞세워 흥행에 성공한 공포영화였다. 말하자면 기존 장르를 비틀긴 하되 어디까지나 장르 안에서 노는 영리한 영화인 셈인데 사실 장르적 규칙(공식)을 지키는 것은 관객 혹은 독자와의 약속이다.
이젠 너무 익숙한 뻔한 얘기들, 즉 무리와 떨어져 혼자 남는 인물은 죽임을 당하고, 의심 없이 믿었던 인물이 실은 범인이더라, 등의 내용은  그것이 진부하든, 식상하든 간에 결국 그것의 장르적 속성 - 뻔한 공식 때문에 재미를 얻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생리적으로 시각적 공포에 약한 나는 공포, 호러라면 대놓고 기피하는데 무섭기도 하거니와 장르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과정에서 으레 양념처럼 쫓아오기 마련인 이야기 또한 영 별로다. 그러니까 생각나는 한 예로 <텍사스 전기톱 연쇄 살인 사건>을 본 직후 내가 가장 많이 투덜거렸던 말은 '비상식적인 상황에 비상식적으로 반응하는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어'였다. 사람이 수상하면 가까이 안 하면 되고, 집이 수상하면 그 집에 안 들어가면 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면 그만일 것을 괜스레 묘한 고집을 피우다 비명횡사하는 인물들에 시달리다 보면 머리로야 쿨하게 '저들도 불쌍한 피해자야' 이해하고 싶지만, 실상 가슴은 '너 때문에 내가 미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내 취향이고, 공포영화의 장르적 특성이 그러하다. 보편성 혹은 상식선이 깨어지는 지점, 바로 거기에서 공포가 비롯된다.
이상민의 신작 제목인『카르마』는 업(業)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이 소설의 분위기를 귀띔해주는 포석 역할을 한다.
시작은 10년 전 폐교. 추억을 만들기 위해 폐교 체험을 온 여대생들은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데 촛불 몇 개를 밝히고 돌아가며 자신이 아는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10년 후, 10년 전에 일어난 사건에 알게 모르게 얽혀 있는 인물들이 10년이 지나 우연히 그러나 미리 예정된 대로 한 자리에 다시 모인다. 그리고 시작되는 복수.
장르에 충실하다는 얘기는 장르적 재미를 잘 살렸다는 말도 된다. 그런 의미에서 『카르마』는 공포물의 성수기인 한여름에 읽기에 제격인 소설이다.
이 소설이 눈에 띄는 점은 장면의 전환인데 여러 등장인물들로 시점을 옮겨 가며 씨줄과 날줄을 엮듯 장면을 얽는다. 다만 중반까지 적당히 긴장감을 주며 몰입도를 높이던 장면 전환이 후반으로 갈수록 전환 주기가 지나치게 짧아지고, 그 횟수가 많아지다 보니 오히려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이 된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구체적인 장면 장면의 공감각적 느낌이 두드러지는 덕분에 책을 다 읽고 나면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 든다.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송윤아, 이동욱 주연의 2006년作 <아랑>이다.
연기(緣起)는 세상의 모든 만물은 인(因)과 과(果)의 사슬로 이어져 있다는 불교 용어인데,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그것이 정말 인과에 의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원래 세상 일이라는 게 그렇다. 세상에 일어나는 무수한 일들은 모두 이유가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이제껏 내가 본 가장 무서웠던 공포영화는 극장판 <기묘한 이야기>의  첫번째 에피소드 '눈 속의 하룻밤(雪山)'인데, 공포물의 단골 클리셰인 ’왜 네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인 걸까‘라는 이야기는 언제나, 늘, 예외 없이 섬뜩하다. 이러한 클리셰는 <카르마>에도 등장한다. 

“다섯인데 여섯이야. 다섯인데 여섯이라고. 왜 여섯이지? 원래 다섯이잖아. 그런데 여섯이야! 나머지 하나는 어디서 온 거야? 어디서!” - p.19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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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인기를 끌었던 공중파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는 매 회 꼭지가 세 개 정도로 구성되었다. 그 중 세 번째 꼭지는 '무서운 이야기'였는데, 정말이지 무서웠다. 화면이.
사실 나는 좀 심하게 겁이 많아서 공포물이라면 아주 기겁을 하는데 그래서 이 방송을 볼 때마다 거의 매번 기절하기 직전까지 자지러지고는 했다. 그럼 안 보면 되지 않느냐, 싶겠지만 그게 또 그렇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궁금하고, 툭하면 시꺼매지는 화면은 무섭고, 인 것. 그리하여 매주 자학하는 심정으로 TV 앞에 앉곤 했는데, 우스운 건 같은 공포물이라도 텍스트엔 그다지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거다. 그러고 보면 내가 공포를 느끼는 감각은 이미지와 시각적인 것에 국한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일례로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는 읽을 때 책 표지에 덮개를 씌우고서야 읽을 수 있었던 것처럼. 각설하고,
쓰네카와 고타로의 『야시(夜市)』는 한 마디로 설명하면 일본 만화 『백귀야행(Ichiko Ima)』류의 소설판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판타지 호러?, 환상 호러? 혹은 괴기 호러?... 뭐라 부르든 그 쪽 장르의 만화책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연 『백귀야행』과 국내에 영화로도 개봉된『음양사』다. 『백귀야행』은 6, 7편서부터 다소 지루하고 긴장이 떨어지는 감이 있어 그 뒤로 열심히 챙겨보지 않지만 1~5권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이 에피소드가 좋다. 『음양사』는 서울문화사에서 정식 판권을 가지고 출간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절판되어 버렸는데 게으름을 피우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땅을 쳤다. 결국 아쉬운대로 중고 시장에서 다른 출판사 것으로 구했는데 여러모로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서울문화사판으로 다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일본은 섬기는 신(神)도 많고 그래서 귀신도 많고, 그에 따른 민간 설화나 괴담도 정말 많은 나라다. TV에선 귀신 체험과 관련된 프로그램이 끊임없이 방영되고 수많은 제보들이 매주 TV에서 재연된다. TV에서뿐만이 아니다. 주변 사람에게서도 귀신을 봤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한 마디로 <주온>이나 <링>같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게 하나도 안 이상한 나라다. 숱한 제보 중엔 가짜도 많지만 그래도 어쨌든 채택되어 재연되는 제보는 늘 무섭다. 다음은 몇 년 전 일본에서 머물 때 아마 후지TV에서 봤던 걸로 기억하는 내용.

사진의 배경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방이 한 칸 씩 있고 마루 앞은 마당인 구조를 가진 집인데, 마루 중앙에는 커다란 상이 하나 놓여 있고 상 뒤로 문갑 같은 것이 있다. 제보해 온 사진은 마루를 배경으로 어린 딸아이를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사진을 현상한 가족은 경악했다. 분명 사진을 찍을 때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았던 마루의 상 위에 여자의 머리가 있었던 것. 딸아이 뒤로 시커먼 형체의 여자의 머리가 옆으로 누운채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사실 사진을 현상했더니 찍을 때 없었던 새로운 장면이 나타났다, 라는 내용은 가장 흔한 제보이면서 또 가장 조작이 많다고 한다.) 

사실은 나도 비슷한 체험을 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직접 겪었던 유일한 체험인데 그 일은 시나가와(品川)에 있는 사촌언니의 집에 놀러갔을 때 일어났다. 엄마와 같이 군마(群馬)에서 온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는데, 사촌언니는 외출하고 엄마와 나는 옷 방에서 짐을 풀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처음엔 엄마가 투덜 투덜 하는 것을 무성의하게 흘려듣고 있었는데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엄마의 말이 귀에 쏘옥 들어왔다.
"시계 소리가 어디서 이렇게 나는지 모르겠네. 이 방은 시계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랬다. 옷 방은 말 그대로 옷과 가방, 신발이나 옷장만 있을 뿐 시계라고는 작은 탁상 시계 하나 없었고 엄마와 나는 손목 시계도 차고 있지 않았다. 말 그대로 '시계'과 관련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너무나 크고 뚜렷하게 들리는 커다란 시계의 초침 소리. 왜 있지 않은가. 벽에 거는 커다란 벽시계. 딱 그 소리였다.
이상한 한편 신기했던 엄마와 나는(엄마 역시 살면서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옷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심지어 옷장 위까지 털었다, 결국 시계는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우리가 소리의 진원지를 찾는 그 와중에도 초침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시계도 못 찾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는 것도 실패한 우리는 나중엔 포기하고 산책을 나갔는데, 놀랍게도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시계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후 사촌언니를 비롯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했지만 아무도 우리 얘기를 진지하게 듣지도, 믿어주지 않았다. 심지어 "옆 집에서 망치로 못을 박는 소리를 잘 못 들은 게 아니냐" 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나마 나 혼자 안 들은 게 어딘가 싶었다. 적어도 그 얘기를 믿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은 있는 셈이니까. 안 그랬음 복장 터져서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야시』는 일단 재미있다. 빨간색 표지의 양장 안에는 「바람의 도시」 와 「야시」 두 개의 중편이 있는데 둘 다 재미있다. 이런 류의 얘기들은 하나를 꺼내 먹으면 또 먹고 싶어서 손을 집어 넣게 되는 과자 봉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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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0-08-30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에 덮개를 씌우면 잘 읽으시는군요ㅋㅋ 야시의 표지는 별로지만 내용은 보고싶네요^^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8-31 09:26   좋아요 0 | URL
워낙 시각적인 공포에 취약해서...(흑흑)지하철 역에서 우연히 영화 '주온'의 포스터와 맞닥뜨리고 심장마비에 걸릴 뻔 한 1인이랍니다;;;
<야시>는 이쪽 장르답게 읽고 나면 그닥 기억에 남지 않지만 읽는 동안은 재미도 있고 책장도 술술 잘 넘어갔던 소설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