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보이지 않는 손의 장난인가 싶게 지속적인 우연과 마주칠 때가 있다.
말하자면 올 4월, 바틀비(Bartleby)가 그랬다.

지난 달(3월)에 창비세계문학전집에서 우연히 바틀비를 만난 이후, 이제껏 모르고 살았던 바틀비가 어쩜 그렇게도 자주 내 앞에 나타나는지, 정말이지 H.멜빌의 바틀비는 너무 자주 그리고 아무 데서나 나타났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들뢰즈의『비평과 진단』은 물론, 부산 어느 서점에서 산『모든 기다림의 순간...』에서도, 절판으로 못 구했다가 뒤늦게 구매한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도 불쑥 나타나더니, 전혀 상관없는 검색어를 치고 찾아 들어간 어느 개인 홈에서마저 바틀비다. 그러니 이쯤 되면 웃을 수밖에.

예시나 조짐이었던 걸까.
4월은, 잔인한 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것과 연속으로 마주쳐야 하는 낯설고 불편한 경험 때문에 정신적으로 긴장상태인 날이 많아서 힘들었던 달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건, 구체적으로, 이제까지와 달리 "I would prefer not to-"를 마음대로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되고, 싫은 사람은 상대하지 않아도 되고, 불편한 상황에 놓여본 적도 없으며, 불편한 일을 할 필요도 없으며, 불편한 사람과 마주 볼 일도 없이 살았으니 낯선 상황들이 당연히 힘들밖에.
그리고 새삼 생각한다. 바틀비. 좁은 공간에서 아무 것도 없는 회백색 벽만 바라보며 "I would prefer not to-"만 반복할 때 바틀비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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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 - 자라지 않는 아이 유유와 아빠의 일곱 해 여행
마리우스 세라 지음, 고인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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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 인간은 죽음을 받아들일 때 보통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다섯 단계란 '부정(Denial), 분노(Anger), 교섭(Bargaining), 우울(Depression), 인정(Acceptance)'인데, 이는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일상이 위협받을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생후 5주인 아이에게서 선천성 뇌질환이 발견되었을 때의 부모도 위의 다섯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왜 하필 내 아이에게(우리에게)"는 숱한 고통과 상처를 이겨내며 "이 아이가 내 아이, 내가 이 아이의 부모"가 된다. 그런데 이즈음에 이르면 부모는 이미 강해져 있다. 
 
다섯 살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시장에 가는 엄마를 쫓아 폴짝폴짝 뛰어 가는 나를 웃는 얼굴로 돌아보던 엄마가 뜬금없이 "저어~기 가서 다시 뛰어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얼마쯤 되돌아가서 엄마를 향해 뛰어 가는데 그때 나를 보던 엄마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이 내가 엄마에게서 '부모의 얼굴'을 발견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결국 병원에서 처방 받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비싼 영양제를 석달여 먹는 걸로 나 어릴 적 소아마비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아이가 약하면 부모는 강해진다. 부모란, 부모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모에게 자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우문이다. 우리가 품어야 하는 물음은 '자식에게 부모란 무엇인가'여야 한다.  

7살이 되도록 정확한 병명조차 진단받지 못한 유유. 유유의 증세를 의학 용어로는 선천적 뇌질환, 일반적으로는 '뇌성마비'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유유와 같은 아이를 장애인이라고 부른다.
보통 이런 내용의 자전적 에세이는 '감동적'이라는 표현이 제격이고 실제로 대부분의 책이 그렇다. 가슴이 뭉클거리다 끝내는 콧날과 눈시울이 따끔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가만히, 조용히 사랑한다』는, 물론 감동적이지만, 콧날이 시큰하지도 눈시울이 따끔해지지도 않는다. 대신 다른 책에 없는 것이 이 책에 있다. 바로 '재미'다. 
저자 서문을 읽을 때만 해도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나는 이 책을 첫 일화부터 폴리스코프로 장식하는 마지막 일화 바로 앞까지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재미있게 읽었다. 그러는 한편 '재미있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당황스럽고 불편했다. 한 가족에게 불어닥친 예기치 못한 시련에 '재미'라는 표현을 써도 되는 것일까 고민이 되었다. - 딴 얘기지만 그러면 '재미'의 대척점에 있는 표현은 무엇이 있을까
나로 하여금 이러한 고민에 빠지게 한 건 유유의 아빠이자 이 책의 저자다. 물론 지면으로 옮겨진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겠지만, 픽션을 쓸 때 날짜를 매겨본 일이 없으며 그럴 날이 있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저자의 다른 글이 궁금할 정도로 저자는 유유와 함께 하는 나날을 담담하게 무겁지 않게 일상적으로 기술한다. 일례로 제노바 항구의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일어난 일화는 비록 유유로 인한 소동이긴 했으나 지극히 소시민적인 공감을 끌어낸다.
오에 겐자부로가 그랬던 것과 달리 자신을 장애인의 아버지로 규정 짓고 싶지 않은 내공의 차이일까. 이유야 어떻든 그는 자신의 책을 통해 읽는 이의 동정심을 자극하지도 의례적인 감동을 요구하지도 않을 작정인 듯 보인다. 그래서 이 책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를 돌보는 감동 실화도 아니고, 가족에게 닥친 불행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극복기도 아닌 다만, 가만히 조용히 유유를 사랑하며 보낸 7년의 궤적이다. 그래서 유유가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지, 예쁜 아이인지 일일이 설명하고 강조하지 않아도 책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게 된다. 유유는 정말 예쁜 아이구나. 아빠, 엄마, 누나로부터 사랑받는 아이구나, 라고.

나는 문학의 치유 효과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아니, 효과의 유무보다 타인의 불행을 자기 위안의 도구로 삼는 것 같아 '감동 실화'로 명명되어지는 여타 미디어의 소산물이 영 별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최근 정서적으로 제법 힘든 며칠을 보낸 여파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을 통해 위안을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보석같은 책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떠오른 건, 이 책이 '보석같은 책'이라는 거였다. 
마지막, 유유가 달리는 폴리스코프(빠르게 넘기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연속 이미지)는 자꾸만 되풀이해서 넘겨 보게 된다.

유유가 달린다. 유유가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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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독서』는 일종의 베스트셀러 감상기인데 이 책을 읽기 전에 많이 망설였던 것은, 저자가 일본인인 이 책 목차의 거의 전부가 일본 작가가 쓴 일본내 베스트셀러로(1999-2001) 채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어디선가 주워 읽은 이 책의 서평이 워낙 재미있었기에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했다. 그러니까 구입하기 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먼저 읽어 보는, 나름의 검증 시스템에 이 책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책을 읽은 소감은 "아, 정말 재미있다!"
책을 읽기 전에 망설였던 이유는 책을 읽고 나서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그 동안 내가 읽은 일본인 작가 중에 이 작가만큼 글을 재미있게, 맛깔나게 쓰는 작가는 보지 못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치사는 작가가 아니라 번역자에게 돌려야 할 것이지만 어쨌든 장마다 펼쳐지는 작가의 육성이 박장대소하게 재미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며칠 전 시부야역 근처에서 야식을 먹고 있을 때 생긴 일이다. 옆자리에 대학생이나 전문대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 둘이 앉았다. "셰익스피어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젊은이들이군. 셰익스피어가 어쨌다고?
"……누구더라?"
셰익스피어가 누구더라! 라는 말만 들어도 콧구멍에서 밥알이 튀어나올 지경인데, 질문을 받은 학생이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글쎄. 들어본 이름인데.:"
"유명인이라는데, 영 이미지가 안 떠오른단 말이야."
"그러네. 사진을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 그렇지. 누구인들 사진을 본 적이 있으랴.
아마도 그들은 개봉 중인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포스터를 본 게 아닐까(설마 영화를 보고나서 나누는 얘기는 아니겠지). - p.32,『취미는 독서』

이쯤에서 확인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냉큼 M군에게 전화했다.
"셰익스피어(라고) 아나?"
"어."
그렇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모르는 M군도 아는 '셰익스피어'인 것이다. 과연 저자의 콧구멍에서 밥알이 튀어나올만 하다.
저자와 나의 생각이 일치할수록 독서가 신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이웃나라 일본도 미국도 베스트셀러 기준이 백만 부라는 사실이 흥미롭지만, 하여간 베스트셀러에 대한 저자의 정의가 명쾌하다. 이를테면 100만 부 팔리는 책은 '평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사는 책이다.(p.84) 처럼.

『취미는 독서』를 읽게 된 계기도 그렇지만 내 경우 누군가 서평에서 책을 인용한 한 줄 혹은 한 문장에 혹해서 그 책을 읽게 되는 일이 빈번한데, 이틀 전에 주문해서 바로 어제 받은 다니엘 글라타우어의『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도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 소설의 특이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두 남녀가 주고 받은 이메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구매 버튼을 누르게 한 문제의 문장은 이것이다.


10분 뒤 Re:
레오, 그만 끝내죠. 당신이야말로 결정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넘어갔어요. 그 질문을 다시 한번 하죠. 레오, 저를 만나고 싶어요? 그렇다면 만나세요! 아니라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 혹은 이 관계를 지속하기는 할 것인지, 당신 입장을 얘기해보세요.

20분 뒤 Aw:
어째서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글로만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건가요?

2분 뒤 Re:
나의 메일 파트너가 나를 만나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어요. 구제불능 레오, 어쩌면 제가 가슴 큰 금발 여자일 수도 있잖아요!!!

30초 뒤 Aw:
그렇다고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20초 뒤 Re:
뚫어지게 보시구랴.  - p.117-118,『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이 외에도 오랜만에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었는데 2권과 3권이 그것이다. '독서일기' 시리즈 중 품절-절판으로 구입을 못했던 이 두 권이, 글쎄 그 사이 다시 출간되고 있는 게 아닌가. 얼른 주문, 소파 바로 옆 손을 뻗으면 가장 잘 닿는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 후루룩 맛있게 읽은 그의 독서일기는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 다만 3권은 시기가 그래서였겠지만 『내게 거짓말을 해 봐』에 관한 작가의 해제(라고 해야 할지)가 (좀) 지나치다 싶게 등장한다.
그 중 재미있어서 색인을 해두었던 문장을 옮긴다.

(전략)남성 에로시티즘의 분리적 성격과 여성 에로티시즘의 통합적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를 들면 이렇다. 남자는 여자가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녀의 직업이 화장실 청소부라 할지라도 상관치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가 아무리 동하게(?) 생겼다 할지라도 그의 직업이 그렇다면 동침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을 앞에 놓고 남자는 여자의 사회적 지위·계층·신망·명성에 신경 쓰지 않지만, 여자는 그 반대. 남자는 여자의 얼굴, 궁극적으로는 성기만을 향해 돌진하지만('돼지 얼굴 보고 잡아 먹나?'), 여자에게 에로티시즘은 최종적인 고려사항에 불과하다.
남자는 자신의 성행위를 순간적인 도취로 여기지만 여자는 성적도취와 연애를 혼동한다. 남자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어 있지만 여자에게는 분리되지 않는다. 하므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나가고자 하며, 남자는 그녀를 밀실에 감추어 두고자 한다. 여자는 자신의 사랑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고 나가 확인하고 싶어하며 남자는 자신의 사랑을 사적인 영역 가운데 보존하려 든다. 여자의 에로티시즘은 시간적/공간적 지속을 원하며 미래를 건설하려고 들지만, 남자는 오히려 현실과 미래를 망각하기 위해 에로티시즘은 사용한다.(중략)
  - p.122,『장정일의 독서일기 2』

'예쁘기만 하면 되는' 남자의 에로티시즘을 이보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하지만 그의 독서세계는 참 대단하다. 자신의 생각을 개념화하고 개념화한 그것과 부합되는 가장 적확한 단어를 골라내어 말과 글로 완성한다는 건 참으로 부러운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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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니체전집 13
프리드리히 니체 / 책세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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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A. 까뮈, P.피카소는 모두 내가 좋아하는 근대의 사상가, 문학가, 화가인데 놀랍게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바로 니체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푸코의 '광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해석, 까뮈의 문학에서 보여지는 음울하고 씁쓸한 부조리 밑에 깔려 있는 희망적인 시선, 후기 피카소의 주요 화풍을 이루는 해체와 재구성의 반복 등이 모두 니체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던 것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정작 '니체'는 몰랐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면 뒤늦게나마 푸코의 저서가 '니체 전집'이 그런 것처럼 재번역되어 완역본이 출판된 것과, 까뮈의 문학을 김화영이라는 동시대의 번역가를 통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평소 사람과 사람뿐 아니라 사람과 사물, 사람과 생각에도 연(緣)이 닿아야 하고 또 그것을 위한 '때'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말하자면 내게 니체가 그랬다. 따지고 보면 '니체'는, 구체적으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내가 지나온 시간의 어디에나 있었다. 대학2학년 때 교양 수업의 리포트 주제가 '차라투스트라의 위버멘쉬(당시엔 초인)'이었고, 좋아하는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는『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들추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단어를 제목으로 하여 소설『문』을 출판했고, 밀란 쿤데라의『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시작하는 첫 문장과 마지막에 흐르는 주제 의식 역시 차라투스트라가 그토록 외치고 다니던 '영원회귀'였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트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것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p.9,『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니체와 연이 없었다. 2006년, 추석을 앞두고 긴 연휴 기간에『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 것 역시 전혀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물론 읽으려고 책장에 꽂아둔 것이니만큼 언젠가는 읽겠지만 그 시기가 그 때는 아니었다.

니체전집의 정본을 완역, 예전의 오류를 바로 잡는다는 화려한 수식을 달고 책세상에서 출판된 새로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리포트를 쓰려고 의무적으로 읽었던(숱한 오역과 세간의 낡은 오해, 명예롭지 못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쓴) '짜라투스트라'와는 이름부터 '차라투스트라'로 바뀌어 있었고 '초인'은 '위버멘쉬'로 바뀌었다. 그 차이는 두꺼운 붉은색 장정의 고급스러운 외양만큼이나 내용의 질에서도 부인할 수 없을 만큼 극명하게 나타난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휴 얼마 전, 읽을 것을 고르다가 아무 생각 없이 잠깐 훑어만 보자고 꺼냈던 것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다 보니 연휴 기간 내내 계속되었고 연휴가 완전히 끝난 월요일 저녁, 결국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말았던 것은.
그 기간 동안 나는 아무 것도 못 했다. 다행히 집에 있던 컴퓨터는 두 대 모두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한 놈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또 한 놈은 모니터가 맛이 가는 바람에), 부산에 가려던 계획은 취소되었고, 긴 연휴 기간 TV에 방영한다는 영화들은 모두 이미 본 것들이었다. 이상하리만큼 완벽한 상황이었다. 니체가 장담했던 것 처럼, 나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선택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니체에게 선택된 나는 반신욕 중에 책을 욕조에 풍덩- 빠트리는 불행까지 겪어가면서(나는 아까워서 책에 밑줄조차 긋지 않는다) 말 그대로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외출해서도 '차라투스트라'를 들고 다니면서 읽었고, '차라투스트라'는 그 대가로 읽는 내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과 가슴 벅찬 감동을 내게 주었다. 하지만 읽는 과정은 그다지 즐거웠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문장이 현학적이면 심하게 조는 버릇이 있는데 은유와 비유, 상징으로 가득한 형이상학적인 문장의 틀 안에 유물론적 토대를 가진『차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정말로 많이 졸았다. 이렇게 니체의 사상은 때로는 나를 견딜 수 없이 지겹게 만들었지만 다음 순간 놀랄만한 집중을 끌어내면서 기어이 마지막 장까지 다 읽게 만들었던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면 늘 그렇지만 첫 페이지와 마지막 몇 페이지는 의지와 상관없이 집중이 흐트러지기 마련인데『차라투스트라-』는 드물게 마지막 한 장까지 씹어 먹듯이 정말 한 자, 한 자 열심히 읽었다. 아마 "이번에야말로"라는 오기와 (다행히) 집중할 수 있는 뭔가가 당시의 내게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책을 책장에 꽂고 돌아서서 한 나절이 지날 무렵, 비로소 미루고 미루던 숙제를 해치운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이런 기분이었다. 내가 한 뼘 정도 자란 것 같은, 사유가 더 넓어지고 깊어진 것 같은.
푸코의『광기의 역사』(나남. 개정판)를 보면 역자의 말에 '책을 번역하는 동안 자신의 배움이 진일보 한 느낌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는데『차라투스트라-』를 읽은 직후 내가 그랬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사실은 지금도 내가 책의 내용을, 니체의 사상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그 안에 오독은 없었는지 자신은 없다. 하지만 '아이가 반복되는 놀이에 질리지도 않고 즐거워하는' 바로 그 이유처럼 책을 들기 직전의 나와 책을 내려놓은 후의 내가 더 이상 같은 내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 니체가『차라투스트라는-』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위버멘쉬'는 자발적 의지에 의한 '긍정'과 '극복' 그리고 '생성' 즉, '긍정의 긍정을 통한 완벽한 자기 긍정과 자기 극복'이 아닌가 한다. 책을 다 읽은 지금에도 '영원회귀'나 '권력의지'에 대한 부분은 사실 잘 모르겠다. 책을 읽는 동안 집중한 부분은 7~80% 정도였고 하물며 읽었던 부분에서조차 내가 놓친 중요한 내용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을 완성하는 나머지 저서도 물론 읽어봐야겠지만 그리고『차라투스트라-』역시 몇 번 더 읽어봐야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어쨌든 '위버멘쉬의 자기 긍정'을 읽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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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비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창세기 비밀
톰 녹스 지음, 서대경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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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릿 만큼이나 잘 안 읽히는 장르가 팩션이다. 사실과 공상의 하이브리드는 긍정적으로는 장르의 진화로 볼 수도 있겠으나 저자의 관점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 공상의 소품이 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그다지 환영하는 장르는 아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읽는 과정은 지루했으나 다 읽고 나서 "음, 재미있군" 하는 소설이 있는데『창세기 비밀』이 그렇다.
『창세기 비밀』은『다빈치코드』류의 팩션인데 구체적으로 서스펜스 하드고어 팩션이다. 실제로 소설 여기저기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말 그대로) 하드고어(hard- gore)한 장면들은 몹시 적나라하고 생생하다. 그러나 이는 자극적인 설정으로 눈길을 끌려는 불순한 의도보다는 소설의 주제로 이어지는 가장 큰 줄기인 인신공희(人身供犧 : 인간을 재물로 삼아 신에게 바침)를 부각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실 이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내용보다 서술 방식에 있다. 필요 이상으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장면 장면은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기시감은 소설 내용의 전개가《인디아나 존스》류의 기존 할리우드 모험 영화의 공식을 착실하게 답습하는 것에 기인한다. 그렇다고 모험 영화를 관람하듯 소설을 읽는 것이 쉬운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이 소설은 주석이 많이 등장하는데 주석이 많다는 얘기는 그만큼 낯선 얘기가 많다는 의미도 된다. 실제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과 인물들, 그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 몇몇 문명과 부족들의 관습 등은 종종 독서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특히 이슬람 문명과 관련된 얘기들은 그 문명이 익숙하지 않은 만큼이나 때로 지루하고 때로 난해하게 다가온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터키의 샤늘르우르파와 영국 런던 두 곳이다. 소설은 이 두 곳을 오가는 교차 시점을 통해 진행되는데,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은 두 장소에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살인은 잔혹한 연쇄살인으로 이어지고 종내에는 '검은 책'을 둘러싸고 연쇄살인범과 주인공들이 대치하는 대결 구도로 치닫는다.
작가는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문명과 종교, 관습과 원시의식 등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끌어오는데 그 때문에 이 소설은 읽는 관점에 따라 단순한 모험 추리소설로 읽을 수도 있고, 인류 문명사에 비친 인류의 기원이라는 인문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한편 그런 점에서 아쉬운 점은 지나치게 평면적인 인물들이다. 소설을 B급 정서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타임스 기자 로브를 비롯한 크리스틴, 포레스터 등의 주요인물들이다. 이들은 말그대로 헐리우드 모험영화에서 쏙 빠져나온 듯 하다.
한편 이 소설은 등장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터키의 유적지 '괴베클리 테페'를 빼놓고는 얘기가 안 된다. 팩션의 주요 배경답게 실재하는 유적지 괴베클리 테페는 소설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약 1만 2000년 전 원시부족이 자신들이 세운 신전을 무슨 이유에선지 스스로 매장시켜버린 것을 두고 여러 가지 가설이 등장한다. 소설적 상상력이 기대는 것도 바로 이들 가설이다. 괴베클리 테페 신전의 미스터리와 관련한 인류 기원의 여러 가설 중에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의 이종교배 얘기도 있다.

몇 가지 점에서 원제 'Genesis Secret'의 Genesis는 '창세기'라는 의미보다는 '기원(혹은 시초)'의 의미로 읽는 것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좀 더 도움이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것도 바로 이 부분, '기원'과 관련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몇 가지 가상적인 설정 혹은 해석이었다. 이를테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기 전후의 성서적 배경을 수렵채집시대에서 농경시대로의 변화로 본다든지, 연쇄살인범 클론커리의 폭력적이고 가학적인 성향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 형질 때문으로 해석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살인이라는 행위를 유전 형질에 의한 태생적 기질로 보는 소설적 상상력이 흥미롭다. 인류사의 가장 큰 비극은 대부분 전쟁을 통해 발생되었는데 한편으로 전쟁을 통해 많은 영웅들이 배출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소설은 이러한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지도자들 중에는 전쟁광이 많았다고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이러한 가설을 토대로 뛰어난 지도자들이 지녔던 폭력적이고 살상적인 기질이 선조대의 인신공희와 유사점이 있으며, 인신공희 즉 살육을 즐기는 유전 형질이 우성 유전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물론 재미있는 관점이긴 하나 한편으로는 상당히 비약이 심한 얘기이므로 걸러서 받아들이는 주의가 필요하다.

활자로 된 것이면 무엇이든 손에 집히던 대로 읽던 시절, 그 책들 중엔 성경도 있었다. 성경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 특히 기억에 남는 인물 중에 아브라함이 있다. 아브라함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나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자신이 믿는 유일신의 제단에 바치려 했던 무조건적인 믿음과 순종 때문이었다.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공통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창세기 비밀』에서 중요한 소설적 장치로 등장한다.

- 가끔 종교가 요구하는 희생과 그 잔인성에 놀랄 때가 있다. 인간성의 고유한 특질이라 생각하는 품성인 질투심, 분노, 폭력성... 을 똑같이 드러내는 신은 종교 안에 깃든 또 하나의 미신으로 인간에게 그 무엇보다 두려운 공포의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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