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쉽고 재미있다. 그야말로 단숨에 읽힌다. 서술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특기할 만한 묘사도 없다.『허삼관 매혈기』의 장점은 한 마디로 '캐릭터의 힘'이다. 해학적인 대사의 옷을 입고 생생하게 펄떡이는 인물들은 소설을 읽는 내내 즐거움을 준다.
중국産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익숙해진 말투와 정서가 그대로 느껴지는 문체도 즐거웠고 그 속에서 살아서 펄떡이는 인물들, 특히 '허삼관'과 그의 아내 '허옥란'은 책을 덮을 때 즈음에 마치 괜찮은 친구 두 사람을 사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허삼관은 지극히 소시민적인 사람이다. 지극히 속물적인 저울질 끝에 아내감을 고르고, 그 아내와의 사이에 난 첫 아들이 제일 정이 가고, 그 아들이 자신의 씨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아들에겐 국수 한 그릇도 사주기 싫은 (비록 '매혈한' 돈이라서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서도) 쪼잔하기 그지 없는 인물이다. 허삼관은 분명 영웅적인 인물도 휴머니즘적 귀감이 될만한 존경스러운 아버지도 아니다. 하지만 허삼관이 눈물을 흘릴 때마다 가슴이 찡한 것을 보면 소시민적 정서는 영웅적 무용담을 넘어서는 그 이상의 뭔가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허삼관은 위기 때마다 피를 팔아서 그 돈으로 위기를 해결하지만 사실 그에게 매혈은 자신이 하나의 인간으로서 건재하다는 상징이요, 가족을 거느리는 가장으로서의 능력의 상징이다. 그러니 늙고 허약해진 허삼관이 더 이상 매혈을 못 하게 되자 울면서 돌아다니던 그 심정이 어떠했을꼬.
특히 허옥란과 마주 앉아서 "이렇게 맛있는 볶은돼지간은 처음이야"라고 말 하는 허삼관의 모습은 해학의 절정을 느끼게 한다. 맛있는 볶은돼지간을 먹으면서 허삼관은 병원의 채혈담당(혈두)이 자신에게 면박을 준 얘기를 허옥란에게 미주알 고주알 들려주고 허옥란은 "막내아들 삼락이보다도 더 어린 주제에 어른 공경 할 줄 모른다"고 허삼관을 거들어 혈두에게 욕을 퍼붓는다. 이 때 근엄하게 한 마디 하는 허삼관.

"그걸 가리켜서 좆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지만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정말 귀엽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신 이야기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8년에 출판되어 06년에 22쇄까지 인쇄된『변신 이야기』는 스테디셀러라는 명성에 비해 오타가 지나치게 많다. 가령,

그대가 바람을 타고 도망쳐보아라. 내게서 도망칠 수 있다. (p.262)
→ 도망칠 수 '없다'
여신은 피쿠스왕에게 말씀하셨어요. 나를 사로잡은 그대의 그 아름다운 눈, 여신은 나를 사로잡아 이렇듯... (중략) (p.263) 
'여신인' 나를 사로잡아...

이런 식인데, 1권에선 드문드문 나타나던 이런 오타들이 2권에서는 페이지를 넘기기가 무섭게 쏟아진다.
그리고 오타만큼이나 지나치게 넘쳐나는 지시대명사 <이>와 <그>. 나중엔 이 두 개의 지시대명사를 의도적으로 지워내면서 읽어야 할만큼 독서에 방해가 되었다.
그래도 책은 재미있다. 특히 현몽의 형태로 인간 앞에 나타나서 자기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신들은 박장대소할 만큼 귀엽다.
신들의 시대는 저물고 영웅의 시대를 거쳐 인간의 시대로 향하는『변신 이야기2』는 트로이아 전쟁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읽다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이유는 아킬레오스(그/ 아킬레스)의 유품인 방패를 놓고 권리를 주장하는 장면에서 영웅 오뒤세우스가 매우 비겁하고 잔꾀를 부리는 용렬한 소인배처럼 묘사되기 때문.
작가의 트로이아 편들기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다음은 트로이아의 마지막 희망인 아이네이아스의 함대가 바다에서 가라앉을 때 여신의 도움을 받아 바다의 요정으로 전신(轉身)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이 바다에서 그토록 오래 험한 파도와 싸워왔다는 사실을 아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은 폭풍에 시달리는 배를 보면 다가가 그 배를 구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을 태운 배는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오뒤세우스의 배가 난파당하는 것도 그저 구경만 한 적도 있고, 알키노오스의 배가 석화하는 것도 깔깔대면서 구경한 적도 있다. - p.273

(트로이아 전쟁 때) 신들까지도 반으로 나뉘어서 트로이아와 그리스 연합군을 응원했다더니 막상 트로이아를 열심히 편드는 신들만 등장할 뿐, 그리스 연합군을 응원하는 신들은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다. * 이 와중에도 유피테르(그. 주피터/제우스)는 남의 아내를 훔쳐온 파리스의 트로이아를, 그의 아내인 유노(그. 주노/헤라)는 엉뚱한 놈에게 왕비를 빼앗긴 그리스연합군의 편을 든다.

이와 같은 노골적인 트로이아 편들기의 배경은, 바로 이『변신 이야기』가 로마 신화이기 때문이다. - 로마는 트로이아의 유민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오늘날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의 구분이 거의 없어졌다고 하지만 원저자인 오비디우스는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팍스로마나 시대의 사람이고 보면 (시오노 나나미의『로마인 이야기 6』참고), 역사를 자신의 뿌리 위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인간의 귀여운 애국심은 동서고금의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중언부언인 건 알지만 다시 한 번. 명성을 감안, 교정의 필요성이 정말로 절실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변신 이야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
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신과 아라크네는 방 이쪽저쪽에 놓인 베틀로 올라가 날실을 걸었다. 둘 다 부테허리를 허리에 감고 잉아에 날실을 꿴 다음 재바른 손놀림으로 씨실을 북에다 물려 날실 사이로 밀어넣었다. 씨실에 날실을 지날 때마다 바디가 이 씨실을 쫀쫀하게 짰다. 옷을 걷어올려 젖가슴을 질끈 동여매고 여신과 처녀는 있는 힘과 기를 다해 베를 짰다. 이 둘의 손은 쉴새없이 베틀 위를 오고갔다. 어찌나 열심이었던지 이들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까맣게 잊고 일했다. 이들이 베에다 짜넣은 실에는, 튀로스 염료로 물들인 보라색 실은 물론이고 색조가 조금씩 다른 여러 가지 색실이 섞여 있었다. 한 가지 색실이 다른 색실과 겹치는 부분에서는 어디서부터 이 색실에서 저 색실로 바뀌었는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소나기가 하늘에다 그려놓은 긴 활꼴 무지개와 흡사했다. 무지개가 지닌 여러 가지 색깔의 띠는, 맞물리는 곳에서는 하나로 보이지만 여기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전혀 다른 색깔로 보이는 법이다. 옛 이야기의 내용이 그림으로 짜여 들어가면서 금빛 색실도 이 갖가지 색실에 섞여들어갔다. - p.242,『변신이야기1』

* 발췌한 부분을,『그리스 로마 신화』의 저자로 유명한 미국 작가 토마스 벌핀치는, 과학적인 사실과도 일치하는 묘사라고 이 대목을 극찬한 바 있다, 라고 본문에 부연 설명이 있다.

1. (설명과 상관없이)발췌한 부분은 읽으면서 사실적이고 기술적인 뛰어난 묘사에 감탄하는 한편 운문이라는 원문이 궁금해진 대목이다.

2.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했던『변신이야기』는 읽고 보니 중국의『서유기』나『삼국지』만큼이나 잘 알려져 있는『그리스 로마 신화』였다. 자라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듣거나 읽어봤을 밤 하늘의 '큰 곰자리와 작은 곰자리'같은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들,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사연이 깃든 '수선화'나 아폴로를 사모한 요정의 슬픈 '해바라기'이야기같은 꽃과 꽃말에 얽힌 이야기들, 부엉이와 까마귀따위 새들에 얽힌 이야기 등등등... 추억의 앨범을 꺼내보는 듯한 신화 이야기는 이제는 조금 시시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어우러진 신(神)들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여전히 매력있는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어릴 때 흥미거리로 읽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읽는 장점은 예전보다 좀 더 확장된 자신의 세계관을 확인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에 있다.

3. 중 1,2 정도의 자녀에게 필독서로 권하기에 좋은 책이다. - 아직 2권은 시작하지 않았지만 두 권을 모두 읽고나도 이런 감상이 달라질 이유는 없다.

4. 운문인 원문을 산문으로, 또 라틴어 원전을 영어본/일본본을 가지고 중역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태생적인 오류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번역의 요소중 가독성만 놓고 보면 이윤기의 번역은 훌륭하다고 할만 하다. 매끄럽고 재미있고 소설과 산문으로 다져진 역자의 문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러나 어디까지 '서브 노트'로서의 역할일 뿐 라틴어 원전의 번역을 읽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5. 초보적인 실수들이 군데 군데 눈에 띈다. '쌍둥이 자매 아폴로와 디아나'라던지(자매가 아니라 남매다) 인명의 불일치 그리고 그 외 정말로 기초적인 오타 등등.

6. 책을 읽다 보면 올림포스산의 오만방자하고 질투쟁이에 유아적인데다 난잡하기 그지없는 신들의 가계도를 한 번 정리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정말 재미있는 신들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7. '대체로' 나는 만연체에 그닥 거부감이 없는 것 같다. 영미권 소설에 익숙해서인가. 어쨌든 만연체도 간결체도 모두 좋다. 늘 생각하지만 읽을 거리가 있는 것만도 어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술인 최영의는 소와 싸울 때 '너 소야? 나 최영의야!' 라고 말하고 나서, 한 손으로 소의 뿔을 잡고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난타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넘버 3>에서 송강호가 한 말이다. 그런데 소는 그렇게 '잡을 수' 있을지 모르나, 책은 그렇게 '잡으면' 안 된다. '너 책이야? 나 독자야!' 하고 집히는 대로 읽는 일은 난독亂讀이요, 페티시fetish이다. 좋은 독서가 되려면 '나는 왜 이 책을 읽는가?'라는 강한 동기 부여나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읽게 된 두 권의 책은 난독이거나 페티시가 아니라면, 또 다른 독서질병讀書疾病인 관음증에 가깝다. - p.178,『장정일의 독서일기 7』

- 본문의 '두 권의 책'은 앨리노어 허먼『왕의 정부』, 마거릿 크로스랜드『권력과 욕망』
-『독서일기7』은 기존 범우사에서 랜덤하우스로 출판사가 바뀌었다.

인용한 글은 마침 책을 쇼핑하듯 읽지 말아야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좀 더 집중해야지, 반성하던 시기에 남다르게 다가왔던 문단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출간을 접하자마자 바로 주문한『장정일의 독서일기 7』은 인쇄일이 10일로 찍혀 있다. 책을 주문한 것은 12일이었으니 이 정도면 장정일의 팬이라고 해야 하나.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서평가 장정일의 팬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다시 말하면 나는 장정일의 독서 리스트를 '매우' 신뢰하는 편이다. 이를 테면 국내의 모든 번역본 중 민음사의『호밀밭의 파수꾼』이 가장 좋았다는 얘기에(독서일기 7) 안심했고, 자기네 언어로『허삼관 매혈기』를 읽을 수 있는 중국인이 부럽다고 하는(독서일기 5) 부분에선 생각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을 느꼈다. 또한 아마도 그의 독서일기 시리즈에 가장 자주 등장했을『롤리타』(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경우,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전반 30여 페이지쯤 읽었을 때 책을 구입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온라인 세상의 확장으로 타인과 만나는 것이 쉬워진 요즘, 비슷한 취향을 발견하면 우선은 반가움을 느끼게 되고 그 반가움은 내처 친밀감을 형성하는 데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다. 고작해야 같은 소설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친구가 될 수 있는(『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이른바 문화소비의 세대가 아닌가. 이건 책도 마찬가지. 
사실 새로운 책을 만나는 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과 매우 비슷한 데가 있어서 거의 대부분 첫 한 문장, 혹은 앞 몇 페이지에서 그 만남이 즐거울 것인가 악몽이 될 것인가 결판이 난다. 

언젠가 저녁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내 책 치고는, 꽤 많이 상한 이유로 눈에 띈『장정일의 독서일기』는(이 책은, 아마 출간 당시만 해도 연작 계획이 아니었던지 '1'이라는 숫자가 빠져 있다), 책이 왜 이렇게 상한 거지, 이리 저리 들추다가 공지영 작가 소설에 관한 저자의 감상에 공감을 느끼면서 정리는 이미 뒷전이고 기어이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장까지 읽게 했다. - 실제로 소설이 아닌 이런 류의 책들은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순서대로 읽기보다는 틈틈이 넘겨서 읽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공지영의《고등어》(웅진출판, 1994)를 읽다.
(중략…)일전에《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같은 작가의 소설을 두고 한 평론가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 우스운 소설을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말했고 나는 관습과 역할 그리고 더 나아가 상징과 신화에 도전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의사 페미니즘은 TV를 통해(연속극) 매일, 아침 저녁으로 쉴새 없이 반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평론가는 페미니즘적 수준 성취는 물론이고《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오문과 악문으로 가득한 책이라는 나의 불평마저 접수하길 거부했다. 자신은 그런 문장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고등어》를 읽으며 나는 불평을 넘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화가 치밀었다. 앞서의 '형편없는 수준' 운운 하는 대목은 상당 부분 작가의 오문과 악문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 한다. - 『장정일의 독서일기』

사회통념에 반하는 소설을 저작, 출판했다는 명목으로 감옥까지 갔다 온 주홍글씨가 붙은 불온한 작가 장정일과 국내 여성작가들 중 단연 베스트셀러 작가의 꼭대기에 서 있는 작가 공지영. 하지만 장정일은 그 스스로 작가인 동시에 자타가 공인하는 거대한 독서량을 비축한 한 사람의 독자 혹은 서평가가 아닌가. 좋은 글을 쓰는 것과 좋은 비평을 쓰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작가 공지영이 독자 장정일의 지적에 한 번쯤 주의를 기울여주길 바란다면 오지랖 넓은 것이 될까.
온라인 서점을 이용하면서 더 이상 자필 기록에 연연해하지 않아도 되기 전까지만 해도 책을 사면 책 표지 안쪽에 구입 날짜와 간단한 메모를 하던 때가 있었다.『장정일의 독서일기』표지 안쪽에는 '96년. 3.21. 거듭남을 위해'라고 씌어 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메모를 했는지 지금은 물론 기억에 없다.

장정일의 독서량은 알려진 것처럼 한 마디로 거대(!)하다. 한 개인이 읽을 수 있는 독서량이 과연 어디까지인가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졸 학력이라는 드문 이력을 가진 소설가 장정일은 제도권 교육의 울타리 안에서 한번도 벗어나보지 못한 아니 감히 그런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내게 교육의 허와 실을 되짚어 보게 하는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장정일의 소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다음 소설을 기다려 본 일도 없고 이미 읽은 소설도 왜 읽었을까 후회했다. 그러니 나는 소설가 장정일의 팬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입으로 평론가가 되고 싶었다던 독자 장정일은 매우 신뢰하고 있다. 그래서 서평과 평론 가운데쯤 걸쳐져 있는 그의 독서일기를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다음 독서일기를 기다리게 된다.
(여담이지만)그의 소설은『아담이 눈뜰때』『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내게 거짓말을 해봐』등을 읽었는데 단짝 친구K의 언니의 책장에 꽂혀 있던 것이 이 소설들이었다. 당시 꽤나 자극적이고 민감한 내용으로 사회적인 이슈를 몰고 다녔던 그의 소설을 K와 나는 금기를 엿보는 심리라고 할까, 다소 불온한 동기로 읽었는데 그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를 이해하기엔 우리가 너무 어렸거나, 아니면 그의 세계는 말 그대로 그 혼자만의 자아도취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 밖의 기타등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이 몇 편 안 되는 소설로 장정일이 우리들에게 그의 이름 석자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은 분명하다.
결국 작가 장정일과 독자 장정일에 대한 내 호오는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청준에게 실망한 것은 아니다. 평소에 당신을 싫어했으니까. 그런데 묻고 싶다. 당신을 4.19세대라고도 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가라고도 하는데, 잠든 어린 딸의 눈에 청강수를 찍어 넣는 애비는 마땅히 그 ㅈㄷㄱㄹ를 잘라 씹어버려야 하지 않나? - p.60,『장정일의 독서일기 5』

이처럼 영화《서편제》의 원작 소설과 원작 작가인 이청준을 싫어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독자 장정일은, 정작 자기가 쓴 소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장정일은『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내 심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고, 내가 쓴 모든 작품의 핵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소설을 읽어보신 분들은 헤아리셨을 테지만, 이걸 쓰면서 무척 괴로웠다. 사회적 통념과 작가의 상상력 사이에 가로놓인 괴리가 너무 커서 자아분열에 걸릴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두 절벽 사이에 내 몸으로 다리를 놓는 것만 같았다. 두 발은 이쪽에 두 손과 머리는 반대켠에. 하지만 그 괴로움과 찢김이 바로 작가가 져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고, 바로 그 때문에 작가가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 p. 171, 계간지『리뷰』(96. 겨울호)

요즘 국내소설을 읽다보면 작가만큼이나 자질을 제대로 갖춘 평론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너무 일찍 간 故김현의 자리가 새삼 참 아쉽다.


 

 

  


폭풍처럼 읽어야 한다. '나는 그 책을 밤새도록 읽었다'라든가 '나는 이 책을 들자마자 손에서 놓지를 못했다'는 경험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특히나 청춘은 그렇게 응축된 몇 개의 경험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어떤 책을 들고 3일 이상 뭉그적거리면 그 책은 당신 손에서 죽은 거라고 봐야 한다. '피로 쓰여진 책은 게으른 독자를 거부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던 니체의 생각에 나는 동감하고 있다. - p.176,『장정일의 독서일기5』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jy 2010-04-06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작가는 '아담이 눈뜰때'만 아주 어릴때 읽어본적이 있어서 이렇게 서평을 잘? 하시는 분인줄 몰랐네요^^ 아낙네님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4-11 10:25   좋아요 0 | URL
엄밀하게 말하면 서평이라기 보다는 말 그대로 독서감상에 가깝다고 할까요, 글에서 쏟아지는 작가의 직접적인 표현이나 주관적인 감상이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들이 있어 저는 참 재미있게 읽는 독서기예요. ^^
 
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의 주제가 보편적인 사회 윤리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를 넘나들기까지 할 때, 독자는 독서를 시작함과 동시에 작가와 공범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일찌감치 자신의 위치를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가 설치해놓은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

로 시작하는 나보코프의 소설『롤리타』는 굳이 출간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설명이 없어도, 지금은 그 의미가 명백히 상징적인 명사가 되어버린 '롤리타'라는 제목만으로도 그 논란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소설이다.
그러나 변태적인 호기심으로 책을 펼친 사람들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를 이 소설은 막상, 그다지, 외설스럽지 않다. 외설은커녕 여타 기괴하거나 파격적이고 엽기적인 일부 소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 문체나 문장이 더 없이 아름답고 목가적이다. 게다가 재미있는 상황극을 보는 것처럼 때로 웃기기까지 하다. 하지만 아름답고 유머 가득한 겉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 온 서른 일곱 살의 지적이고 잘 생기고 유머 감각이 뛰어난 학자이자 교수인 험버트는 법적으로 부녀 관계에 있는 이제 겨우 열두 살난 돌로레스(이하, 로)와 뻔뻔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관계를 맺는, 즉 님펫에 집착하는 소아성애자 변태성욕자다. 비록 그 과정에서 험버트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망설였던, 험버트의 주장처럼 로가 먼저 그를 유혹했던, 로가 얼마나 당돌하고 막무가내이며 제멋대로에 되바라진 여자애였던지 간에 그 중 어느 것도 로가 이제 겨우 열두 살이고, 막 사춘기의 문턱에 들어선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화자가 주인공인 소설은 그 주인공이 범죄자이거나 악인일 때 간혹 심정적으로 주인공에게 동화되고, 더 나아가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이는 독자를 양산한다. 하지만 독자는 나쁜 주인공과 좋은 주인공을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다. 소설속 휴머니즘을 지탱하는 관습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는 누가 주인공인가가 아니라 주인공의 절대 의지가 선한가 악한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독자는 좀 더 이성적인 독서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하필 어린 여자아이에게 성애를 느끼는 심리적, 육체적으로 성적소수자인 험버트를 동정하고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험버트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해야 한다.

험버트는 어린 로를 사랑하고 그녀가 떠났을 때는 절절하기 그지 없는 내밀한 고백으로 그녀를 붙잡으려고 하지만 로는 그런 험버트의 사랑을 오히려 이용하고 배신한다. 이런 과정에서 로가 사뭇 어린 팜므파탈로 보여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실은 로는 강하고 현명한 아이일 뿐이다. 로는, 어디를 보나 험버트보다 못한 '퀼티'는 자신의 마음을 망쳤지만 험버트는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는 걸 구분할만큼 충분히 현명하고, 열 일곱의 나이에 임산부가 되지만 돌아오라는 험버트의 유혹을 뿌리치고 장애를 가진 노동자 남편과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강한 아이다.

가끔 어떤 소설은 읽고난 후 작가가 소설 속에 심어 놓은 기호를 제대로 짚은 것인지, 혹시 과잉해석은 아닌지, 작가에게 속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낮은 이해력이 작가의 의도를 놓친 것은 아닌지 등등 독자를 작아지게 만든다. 어쨌든 나보코프의『롤리타』는 재미있지만 슬프고, 슬프지만 희극적인 그러나 결국은 서정적인 소설이다. 고전은 읽는 과정에서 느끼는 재미뿐 아니라 읽고 난 뒤의 지적 충만감에서도 그 만족도가 확실히 다르다. 아마도 이것이 고전의 힘인 듯.

- 덧.
험버트의 님펫 집착증은 정신적인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닌 다분히 육체적인 관계를 최종적인 목적으로 한다. 험버트는 파리에 있을 때 님펫의 조건에 근접하는 (아마 열 여섯쯤 되었을 나이의)매춘부를 돈으로 사서 육체적인 관계를 즐긴 전력이 있고, 로를 호텔로 유인해서 강력한 수면제를 먹이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도 그의 목적은 더 없이 분명했으니, 로가 잠들었을 때 호텔 로비를 전전하면서 갈등하고 고민한 것도 '마지막 선을 넘을 것인가'였다.
그러므로 험버트가 직접적인 성관계를 지양하는 '그저 소아애(小兒愛)'일 뿐이라고, 로를 범한 것은 여름 캠프에서 로가 동급생 남자애와 관계를 가진 것을 알고나서였다고 험버트를 옹호해서는 안 된다. 험버트가 자신이 로의 첫번째 애인이 아니라는 얘기를 로에게 듣는 것은 관계가 끝난 뒤였다.(pp.183-188)
애석하게도 험버트의 성적 욕구는 '피부 접촉이나 포옹을 통해 정서적, 신체적 만족을 얻는' 수준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험버트를 그저 소아애가 아니라 소아성욕자라고 불러야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남자여서일까. 그래서 험버트의 무죄를 믿고 싶었던 것일까. 이러한 남성적 에고는 영화『롤리타』(1997, 애드리안 라인)에선 더욱 두드러지는데 어린 로가 알고 보니 사악한 마녀였다라는 해석은 역설적으로 남성들의 원죄 의식을 더욱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렇게 해서 개인적 독서와 사회적 독서는 긴밀하게 이어지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jy 2010-04-06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라...[롤리타]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정말 유명한!
살아가기위해 영악한? 강한 롤리타와 남자들이 충분히 심정적으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결국 인생을 망치게 만든건 어른!이잖아요
요즘의 정말 영악하고 악의적인 소녀들도 사실은 어른들이, 우리가, 사회가 그들을 망가뜨리는거겠죠?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4-11 10:2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아이는 어른의 거울'은 정말 적절한 표현, 적확한 의미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