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드걸 미미양의 모험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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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틴 호프먼의 영화《졸업》을 봤을 때, 나는 결혼식장에서 도망쳐 나와 버스에 올라탄 연인의 뒷얘기가 몹시 궁금했다. 마찬가지로 드라마《불꽃》의 마지막 장면, 두 남녀가 각자 자동차를 몰고 와서 해후한 뒤의 얘기 역시 진심으로 궁금했다. 순전히, '그들은 과연 그 후 행복했을까? 아마 아닐 것 같은데...', 라는 이유에서 그들의 후일담이 궁금했던 것이다.
갑자기 웬 영화 타령인고 하니, 이 소설『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이 007과 본드걸의 후일담'격' 소설인 까닭이다.

일단 먼저, 본드걸의 이름은 '미미'다. (성은 끝내 안 나온다. 혹시 양?)
그럼 007의 이름은? 당근 제임스 본드다.
007의 무수한 본드걸중 하나가 되지 않기 위해 스파이가 되기로 결심한 미미양. 미미는 테스트를 통과하고 신입연수도 무사히 마친 뒤 013을 부여받는다. 왠지 재수 없을 것 같은 번호 '13'은 다들 거부해서 남아 있던 번호.
그럼 미미양이 사랑해마지 않는 007은 어떤 남자인가.
우선 007은 만둣국, 청국장, 라면, 감자탕을 먹는다. 그리고 TV로 축구와 코메디 시청하는 것을 좋아하고, 섹스할 때 애무하는 걸 귀찮아 한다. 잘 때는 코도 골고 입가에 침도 묻힌다. 참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만 한국적 남성형인 찌질한 007이다. 

주인공들의 면면에서도 보여지듯『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본격소설도 장르소설도 아닌 굳이 장르속으로 밀어넣자면 로맨스판타지액션어드벤처쯤 되겠다. 임무를 마친 007의 품에 안겨 오렌지색 열기구를 타는(p.8) 시작이 그러하고 내부 스파이를 잡기 위해 성냥팔이 처녀로 위장하고 성냥갑 모서리에 성냥을 그으면서 주문을 외는(p.205) 소설의 말미가 그러하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의 암호같은 구절을 종종 발견한다. 이를 테면, 미미양이 스파이 테스트를 받기 위해 찾아간 술집의 주인 이름은 강내휘인데 미미양이 술집에서 공짜로 계속 주워먹었던 것이 강냉이다. 또 미미양은 1.5리터 사이다를 한 번에 마시는데 미미양이 첫번째 임무에서 부여받은 가명은 '오란실'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오란C를 연상했는데 오버인가? 어쨌든 이런 식의 언어 유희가 소설 여기저기에 심심찮게 포석처럼 깔려있다. 미미양이 스파이가 되려고 열심히 탐독하는 저서들의 제목들도 마찬가지.『스파이는 페루에 가서 죽다』『너희가 스파이를 믿느냐』『암호 읽어주는 여자』『간첩이 있던 자리』『스파이와의 인터뷰』『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전』... 참고로 나는 이러한 제목들을 작가의 농담으로 그냥 유쾌하게 읽었다. 사실 소설에서 발견하게 되는 몇 가지 이유로 작가가 소설을 가볍게 썼으리라 짐작되는 혐의가 있긴 하다.

나는 작가 후기나 소설의 말미에 있는(이를 테면 비평에 해당하는) 해설 읽기를 좋아하는데 말하자면 본 메뉴를 잘 먹고 나서 후식을 먹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재미있게 읽고 난 이 소설의 해설은 좀...
해설의 제목은 '남근이여 안녕'인데 최근 몇 년간 출판되는 본격문학의 경향을 '남근(남성성)의 붕괴' '아버지의 부재' '가부장주의 해체'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유행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소설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냥 순수하게 '재미있는 소설'로 읽으면 그만이지 않나 싶다.

다음은 영어 55단어로 쓰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중 하나다.

<침실에서>

"조심해. 그 총 장전되어 있어." 그는 침실로 다시 들어서면서 말했다.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이 총으로 부인을?"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해. 청부업자를 고용해야지."
"나는 어때요?"
그는 씩 웃었다. "순진하긴. 어떤 바보가 여자를 고용하겠나?"
그녀는 총구를 겨누며 입술을 적셨다.
"당신 부인."
  

이 짧은 소설을 읽고 현대 가족사회의 붕괴,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부부의 소통의 단절, 총기소유 허가가 낳은 비극, 남근의 아이러니... 등등을 떠올려야 한다면 즐거워야 할 독서가 얼마나 피곤해지겠는가. 이렇듯 원작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과잉해석은 늘 넘쳐난다.

결론은『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은 재미있고 가벼운 소설이다. 재미있는 소설은 그냥 재미있게 읽으면 된다. 나는 이 소설을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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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아내 1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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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있습니다 

한때 내겐, 유학 시절에 만난 일본인 친구, 말하자면 '베스트 프렌드'가 있었다.
언어가 통하는 것과 정서의 뿌리가 통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탓에 그 친구와 나는 매우 친한 것 같기도 하고, 좀 친한 것 같기도 한 그런 애매모호한 사이였는데 녀석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어느 날 저녁, 진지한 얼굴로 나한테 말했다. 자기와 Best friend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 funny 하거나 smart 하거나, 중 적어도 하나는 만족시켜야 하는데 내가 그 조건을 만족시킨다는 거다. 즉 내가 녀석의 Best friend인데 이유는 내가 매우 'funny'해서라는 것이다. (이왕이면 smart로 해주지-)

사실 '영리하거나 재미있거나'는 친구보다는 책을 고르는데 더 유용한 사항이다.
그리고『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이 두 조건의 중간쯤에 있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이 소설의 제목이 왜『시간 여행자의 아내』인가 알게 되는데 소설의 주인공은 헨리와 클레어 두 사람이지만 어떤 면에서 클레어가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보여진다. 다음은 책을 읽다가 콧날이 시큰해지더니 기어이 눈물이 나와 버린 장면이다.

아이가 선생을 돌아보며 미소를 짓는 바람에 나도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나는 내 딸의 얼굴을 보고 있다. 바로 옆 전시관에 서 있던 나는 아이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고, 아이도 나를 보더니 얼굴이 환해지면서 작은 접이식 의자를 쓰러뜨리며 일어나 나에게 달려온다. 영문도 알아차리기 전에 나는 무릎을 꿇고 앨바를 내 품에 꼭 안고 있고 아이는 몇 번이고 나에게 '아빠'라고 속삭인다.
- p.144, 같은 제목 2권 

이후 눈물은 시시때때로 나왔는데 즐겁고 재미있었던 1권에 비해 작가의 묘사와 서술이 두드러지는 2권은 클레어에게 감정이 제대로 몰입이 되게 한다. 아이는 참으로 경이로운 존재다. 새롭게 생성된 삶과 그 속에 깃든 새로운 미래의 희망만으로도 아이란 그 자체로 축복이 가득한 존재다. 그러니 평생을 서로 사랑하고, 기적에 다름아닌 아름다운 아이를 가진 헨리와 클레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다. 

삶의 시계가 43년이면 긴 걸까, 짧은 걸까.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와 헨리의 하루는 같지 않다. 그러나 ('시간일탈장애'로 불리는)시간여행을 해야 하는 헨리에게 43년은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야'라던 그의 말처럼 짧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 속에 잠깐 등장하는 '원숭이 손' 일화가 주는 교훈처럼 삶은 우리에게 공짜로 뭔가를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헨리와 클레어가 행복한 연인이었으며 그들 앞에 어김없이 찾아온 이별이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를 향한 조그만 투정은 있다. 헨리는 왜 미래의 클레어 앞에 좀 더 자주 나타나 주지 않았을까. 클레어라면 행복한 기억을 좀 더 많이 가질 자격이 있는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운명이 왜 헨리를 클레어 앞에 데려다 놓은 것인지 수긍하게 된다. 클레어야말로 시간 여행자의 아내가 될 자격이 있는 용감하고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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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 - 서머싯 몸이 뽑은 최고의 작가 10명과 그 작품들
서머셋 모옴 지음, 권정관 옮김 / 개마고원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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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M군이 "네 책장에서 책 세 권을 꼽는다면?" 질문을 던졌을 때 한참 고민하다 세 권을 고르고 그러고도 또 한참을 더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M군이 다시 "책 한 권을 추천한다면?" 물었을 때는 별 고민 없이 금방 한 권을 골라내었다. 세 권과 한 권의 차이는 과연 뭐였을까...

사실 열 권이든 세 권이든, 누군가 고심 끝에 꼽은 그 몇 권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가장 재미있는 소설은 아닐 것이다. 흔히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는 꼬리표를 단 추천 목록은 거기에 언급된 작품이 가장 뛰어나다라는 절대 우위의 개념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우연적 요소가 포함된 비교 우위의 목록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불멸의 작가, 위대한 상상력』(이하 『불멸의...』)에서 10인의 작가와 작가의 대표 소설을 소개하면서 서머셋 몸 역시 이 부분을 염려하고 있다.
『불멸의...』는 서머셋 몸이 직접 꼽은 열 권의 소설에 관한 비평집(평론집)이다. 몸은 어느 날 기자의 청에 별 생각 없이 열 권의 책을 추천했다가 이후 출판사로부터 그 내용을 엮어 출간하자는 제안을 받고 고민에 빠졌던 과정을 책의 서두에 밝히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불멸의...』출판 과정을 밝히는 의미 외에도 세상의 수많은 책 중에 열 권의 책을 고르는 고민이 담겨 있다.

작가의 독서일기 또는 비평집은 재미면에서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 한식당에서 비빔밥을 고르는 것과 비슷하달까, 이미 검증된 작가의 필력은 소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어서 소설만큼 혹은 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비평집도 많다. 그러니까 장정일의 경우처럼 소설이 아닌 독서일기 때문에 장정일의 팬이 된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서머셋 몸은 소설이란 무릇 첫째도 둘째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 그 자신의 경우는 어떠한가. 소설이야 이미 검증되었으니 말할 것도 없겠고, 거기에 비평까지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게 잘 쓰니 한마디로 '쓰는 재기'를 타고난 작가가 아닌가 싶다. 

『불멸의...』의 목차는 10인의 작가로 나뉘어져 있는데 작가의 출생과 성장배경, 작가를 둘러싼 해프닝, 작가의 소설과 관련된 일화들로 꽉꽉 채워진 내용은,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다음 얘기로 유기적으로 이어져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책에서 한 눈을 팔지 못하게 만든다. 특히 작가의 사생활을 얘기할 때 몸의 어조는 어찌나 수다스럽고 유창한지 천일야화로 왕의 분노를 가라앉힌 세헤라자드가 이랬을까 싶다.

『불멸의...』에서, 몸은 '작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라는 명제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입장을 취한다. 물론 몸이 고른 10인의 작가들은 모두 그 범주에 포함되는 인물들이다. 

오늘날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18,19세기만 해도 작가가 글의 소재나 자료를 얻는 경로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어 세상의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사생활까지도 몽땅 소재로 끌어다 썼다고 한다. 샐린저처럼 철저하게 은둔하는 작가도 있지만 근대에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들에게 사생활의 비밀을 지키기란 거의 불가능했던 걸로 보인다. 그리하여 지인들과 주고 받은 편지뿐만 아니라 작가 스스로 작품 속에 자신의 얘기를 대놓고 하니 작품을 통해 작가를 읽는 것이 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작품 자체가 작가를 연구하는 자료인 경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목차중 내가 특히 재미있게 읽은 건 발자크와 스탕달 편. 이 두 사람은 A.뒤마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그들 특유의 기질만으로도 배꼽을 쥐게 하는데 거기에 몸의 맛깔나는 서술이 더해지니 재미가 배가 된다. 몸은 그들에게 '위대한 작가' 호칭을 붙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얄미울 정도로 신랄하게 '까'는데 왠지 그런 모습이 밉지 않고 정겹다. 동네아줌마들한테 남편의 치부를 흉보는 중년의 아내 같다고나 할까, 얼핏 '우리 남편은 무식하고, 교양 없고, 파렴치한 놈이에요' 라고 고자질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호흡 사이사이 '그래도 내 남편이 최고지' 하는 것 같은 애정이 느껴진다.
인상 깊었던 대목은 발자크나 스탕달은 물론 디킨스에 이르기까지 '원고 노동자'라는 표현. 실제 그들의 집필력은 이러한 표현이 가히 부족하지 않게 양적으로 대단하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연재'에 해당하는 방식을 고수했던 당시의 출판 관행이 작가들로 하여금 원고 노동자로 전락하도록 했다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이들 작가 스스로도 글 쓰기를 돈버는 수단으로만 봤다고 하니 그 시대의 풍속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책 넘김이 느려졌던 목차는 허먼 멜빌과『모비딕』편인데『모비딕』은 미드 시리즈 CSI에서 그리섬 반장이 즐겨 인용하던 소설이기도 하다. 유명세에 비해 국내에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의 설명에 의하면 멜빌의 문장이 꽤 난해한데다 다층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니, 타국의 번역자에겐 상당히 어려운 도전이겠구나 싶다.
(몸에 의하면)멜빌은『모비딕』이 알고리즘 소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지만 멜빌의 소설은 실제로 그렇게 읽히고 있고 또한 그 덕에 오늘날까지 각종 '읽어야 할 리스트'에 빠지지 않는 소설이 되었다 하니 일견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같은 언어권인 몸조차도 난해하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번역자의 어려움이 능히 짐작가고도 남는다. 일간 모 출판사에서 출간 예정이라니 기대를 해봐도 좋을 듯.

도스토예프스키 편은 다른 의미에서 인상적이었는데 최근 읽은 이병주의『허망과 진실 1 - 서양편』에 등장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듯 사뭇 달라서였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사람, 같은 에피소드를 다루면서도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해석은 판이하게 달라지는 점이다. 그러니까 몸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린 소녀와 강제적으로 맺은 성관계를 자랑처럼 떠벌리고 다니는)파렴치한에 한심한 도박꾼에 열등감 가득한 찌질이 작가지만 이병주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요절한 형의 가족들을 평생 부양하고, 부정한 부인이지만 그녀가 죽을 때까지 헌신적이었던 순정파 로맨티스트이며, 사형을 사면받고 복역했던 감옥에서의 경험에 빗대어 소설의 사회적 기능에 고민이 많았던 작가다.
사실 누구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실제에 가까운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작가의 사생활이 작가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독자인 우리는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덧. 역자의 공은 웬만하면 드러나기 힘든데《불멸의...》는 정성을 들인 역자의 주석이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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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3-23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는 발자크 평전 한 권 읽는데도 엄청 오랜 시간을 소비했는데요. 이런 책이 있었군요. 리뷰당선 축하드립니다.

인삼밭에그아낙네 2010-03-24 14:00   좋아요 0 | URL
발자크평전이면 혹 츠바이크의 책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책장 좋은 위치에 꽂아두고 늘 읽어야지 읽어야지 노려보는 책 중 한 권인데 벌써 읽으셨다니 부럽습니다.
'불멸의 작가...'의 장점은 목록 중 관심 가는 작가만 골라 읽어도 된다는 거 아닐까 합니다. 취향이 다르실 수도 있어 조심스럽습니다만, '발자크 편'은 소리 내어 웃어가면서 정말 재미있게 읽은 목록이에요.
(앗, 감사합니다. 리뷰에 당선되었군요!)
 
왑샷 가문 연대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2
존 치버 지음, 김승욱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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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치버는 기성 작가들이 '책을 말하는 책'에서 언급하는 걸 가끔 본 적은 있으나 그때마다 아, 이런 작가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을 뿐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작가였다.
프랑스를 제외하면 작가의 국적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지만 그래도 굳이 분류를 하자면 미국 작가의 소설은 '틈이 나면 읽어야지' 쪽이다. 그러니까 '틈을 내서 읽어야지'는 아닌 것인데 덧붙이면 나는 대체로 영국이나 독일, 동구권 출신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그리고 읽고 났을 때 깊은 감흥을 받는다. 그러니 그동안 치버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그가 미국 작가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거리의 문학'이라고도 하는 미국 문학은 읽다 보면 활동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곧잘 받는데 이런 느낌은 20세기 초-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한 작가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고 물론 치버도 그렇다. 거기다 존 치버의 소설은 거의 풍속소설에 가깝다.
'교외의 체호프'라고 불리운다는 존 치버는 수십 편의 단편소설을 썼지만 장편소설은 겨우 다섯 편에 불과하다.
치버의 최초 장편소설『왑샷가문 연대기』를 읽은 감상은 체호프보다는 피츠제럴드에 더 가깝지 않은가 싶다. 구체적으로 풍경 등의 묘사가 두드러지는 1, 2부는 피츠제럴드를, 내용의 어조와 상관없이 블랙코미디를 보는 듯 순간 순간 피식- 웃게 만드는 장면이 많았던 3부는 나보코프를 읽는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

소설 초반은 눈으로 문장 사이 사이에 '/'를 그어 가며 읽어야 할 정도로 겹치고 겹치는 복문이 성가시기도 했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니 그럭저럭 읽을만 하다.
『왑샷가문 연대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풍경 묘사인데 말 그대로 사진 한 장을 앞에 놓고 보는 듯 하다. 읽는 것이 아니라 본다는 것이 더 제격인 치버의 묘사는 시간과 공간, 사물을 하나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그려넣는 식인데 이를테면 이렇다.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트래버틴에서부터 이미 그 기차에 올라타 화장실에 숨어 있던 코벌리가 나와서 형과 함께 은 식기 공장을 지나고, "동물드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라는 전설적인 문구가 쓰여 있는 라킨 씨의 낡은 헛간을 지나고, 렘센스의 밭과 '선원의 집'을 지나고, 얼음 연못과 양모제 공장을 지나고, 틀림블 부인의 세탁소를 지나고, 9시 18분 기차가 덜컹거리며 창가를 지나갈 때 민스파이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을 먹는 브라운 씨의 집을 지나고, 하워드의 집과 타운센드의 집과 건널목과 공동묘지와 줄로 톱날을 세우던 노인의 집을 지나갔다. 노인의 집이 마을의 맨 마지막 집이었다. - p.142 

'연대기'라는 거창한 제목에 자칫 겁을 먹을만도 하나 가계도가 필수였던 마르께스의『백년동안의 고독』에 비하면 왑샷 가문의 가계는 아주 단촐하다. 게다가 전체 등장인물의 수는 수적으로는 많지만 모두 주변인물일 뿐, 실제 이야기는 리앤더의 두 아들 모지스와 코벌리를 쫓아가기 때문에 내용도 복잡하지 않다.
형인 모지스는 의지나 노력에 비해 일이 잘 풀리는, 운이 좋은 인물인 반면 치버 자신이 모델이기도 한 둘째 코벌리는 뭘 해도 일이 잘 안 풀리는, 결국 풀리긴 하나 쉽게 갈 길도 어렵게 가는, 인물이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로 나간 두 형제의 족적을 따라가는 중간 중간에 아버지 리앤더의 일기가 삽입되는 구성을 하고 있는 소설은 사건보다는 일상이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한다. 즉 사건을 통해 인물이 드러나고 구체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통해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데 이런 양식이 익숙하지 않으면 시종일관 건조하고 객관적인 작가의 어조가 자칫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약간의 인내심만 유지한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두꺼운 페이지 수가 얇게 느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다음은 소설을 읽던 중에 웃고 말았던 한 대목.

모지스는 역까지 그녀의 가방들을 들고 가서 클리블랜드행 기차에 실어 주었다. 비어트리스가 그에게 우아하게 작별 키스를 하더니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 모지스, 내가 끔찍한 짓을 했어. 당신한테 꼭 말해야 할 것 같아. 그 사람들이 항상 사람들을 조사한다는 거 알지? 그러니까 누구한테나 당신에 대해 아느냐고 묻는 것 말이야. 어느 날 오후에 어떤 남자가 나를 찾아왔는데, 내가 그 사람한테 한참 동안 얘기를 늘어놓았어. 당신이 날 이용했고, 결혼하겠다고 약속하고는 내 돈을 전부 가져가 버렸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들이 날 부도덕한 여자로 생각했을 테니까. 미안해. 당신한테 나쁜 일이 안 생겼으면 좋겠어." 이윽고 차장이 모두 승차했다고 외치자 기차가 클리블랜드를 향해 출발했다. - p.261 

내용의 뒷부분을 부연하면,
불쌍한 모지스는 비어트리스의 깜찍한 거짓말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된다. 하지만 얼마 뒤 더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니 모지스로서는 이 해프닝이 그리 비극도 그렇다고 그리 희극도 아니게 된 셈이다. 이러한 관조적 태도는 소설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작가의 배경을 알고 나면 이 소설이 작가의 자서전이겠거니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현실과 많이 겹치는데 소설이 현실보다 덜 세속적인 것은 아마도 그의 심성 일면이 그러해서가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읽으면서 재미있는 소설이 있고, 읽고 나서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 어떤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도 재미를 못 느끼다 한참이나 지나서 문득 "그 소설 재미있었는데" 하기도 한다.『왑샷가문 연대기』는 페이지가 줄어들수록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다 읽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정말 재미있는 소설이었어' 만족했던 소설이었다.

- 덧. 이 소설을 읽고난 후 그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 그대로 '교외의 체호프'가 딱 어울린다고 공감하게 되었다. 한편,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 뒤로 펼쳐진 모든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은 치버의 서술을 읽으면서 장편이 딱인 것 같은 이 작가가 왜 대표적인 단편 작가가 된 것일까, 들었던 의문도 해소되었다. 단편소설로 퓰리처상을 받은 그의 이력이 충분히 수긍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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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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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몰란드 양, 당신이 품어온 의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생각해보세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린 겁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와 이 시대를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영국 사람입니다. 게다가 기독교인이지요. 제발 당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똑바로 보고 이해하고 판단해주세요. 그런 잔혹 행위를 해도 된다고 교육받은 적이 있습니까? 법이 그런 것을 묵인해 주고 있나요? 사람들간에 직접적인 왕래와 서신 교환이 잦은 이 나라에서, 남의 눈을 피할 길 없는 이 나라에서, 도로와 신문 덕분에 세상에 비밀이란 남아 있지 않게 된 이 나라에서 그런 잔혹 행위가 비밀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몰란드 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그들은 어느새 복도 끝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는 수치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기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 제인 오스틴,『노생거 수도원』중에서


위 문장은 소설『속죄』의 첫 머리에 작가가 인용한 제인 오스틴 소설의 한 대목이다.
책 읽는 걸 싫어하는 M군이 영화《어톤먼트:Atonement》를 본 직후 원작소설에 관한 것 그러니까 "실화인가" 등을 물어왔다. 영화의 결말이 아마 열린 구조였던 듯...
얘기를 듣다 보니 호기심이 생기고 영화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소설을 각색한 영화는 가능한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순서를 선호하기 때문에 읽고 있던 책을 놔두고 소설『속죄』를 주문했다.

띠지의 포스터가 오드리 토투 주연의 영화《인게이지먼트 : A very long engagement》를 떠올리게 하는『속죄』는 어린 소녀 브리오니의 사소한 오해로 세실리아, 로비, 브리오니의 인생이 뒤틀려버리는 1부, 1부에서 인생이 꼬여버린 로비가 전쟁에서 겪는 심리적/육체적 고통을 좇아가는 2부,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속죄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입학을 포기하고 세실리아의 뒤를 이어 간호사의 길을 선택한 브리오니의 3부, 마지막으로 59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인「1999년 런던」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를테면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다. 에필로그는 브리오니의 1인칭 서술로 시점이 바뀐다.
소설의 제목『속죄』는 어린 시절 자신이 한 거짓 증언 때문에 인생이 뒤틀려버린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브리오니가 속죄하고자 하는 내용에서 기인한다.

읽는 동안 아마 서너 번쯤 소설을 팽개쳤던 것 같다.『속죄』는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그것이 픽션인 걸 알면서도, 지면을 벗어나 읽는 사람의 정서를 움켜쥐고 뒤흔드는 불편한 소설이었다.
책을 받아들기 전에 M군과 나눈 몇 마디 대화와 책을 주문할 때 잠깐 읽어 본 서평으로 소설의 방향을 미리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세실리아, 로비, 브리오니 세 사람의 인생이 뒤틀리는 것을 담담하게 지켜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내 안의 감정선이 픽션을 픽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소설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은 정말이지 고역이다. 결국 중반까지 읽었을 때, 책을 내려놓았다. 소설을 끝까지 무사히 완독하려면 아무래도 '브리오니' 이 멍청하고 바보같은 여자애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브리오니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열정에 빠져있는 13세의 소녀다. 아직은 삶에 이면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모르는 어린 브리오니는 눈에 보이는 것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에 더 익숙하고, 선악의 경계는 완벽하게 분명해야 하며, 자신이 쓴 동화 속 질서가 그러한 것처럼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권선징악적 구조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그런 브리오니가 어느 날 어떤 장면을 목격한다.
소리가 사라진 영상은 어떤 의미일까. 예전에 모 통신사 광고가 소리를 제거한 영상을 먼저 보여준 다음, 다시 소리를 입힌 영상을 보여주는 CF를 내보낸 적이 있었다. 브리오니가 듣지는 못하고 보기만 한 장면들은 이렇다.

장면 1. 분수대 옆에 사랑하는 언니 세실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후원하고 있는 파출부의 아들 로비가 서 있다. 세실리아는 속옷만 남긴 채 옷을 모두 벗고 분수대 안으로 들어갔다가 젖은 모습으로 나오고 이 광경을 로비가 처음부터 끝까지 파렴치하게 지켜보고 있다. 물론 브리오니는 로비가 세실리아를 모욕했다고 믿는다.
장면 2. 로비가 실수로 잘못 보낸, 세실리아에게 사과하는 편지에는 음란한 단어와 음란한 내용이 적혀있다. 이 편지를 훔쳐 본 직후 브리오니는 어두운 서재에서 로비에게 붙잡혀 신음하고 있는 세실리아를 목격한다. 물론 브리오니는 로비가 세실리아를 추행하는 것이라 믿는다.
장면 3. 경찰에게 연행되는 로비에게 달려가는 세실리아. 세실리아는 수갑에 채워진 로비의 손을 만지기도 하고, 로비의 옷깃을 잡고 흔들기도 한다. 물론 브리오니는 세실리아가 로비를 용서하려는 것이라 생각하고 의연한 세실리아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브리오니가 지켜본 위의 장면은 모두 소리는 거세되고 영상만 남은 장면이다. 하지만 영상에 소리가 입혀지면 진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브리오니는 그녀가 본 것만 믿을 뿐 그 이면을 들여다 볼만큼의 통찰력은 없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의 세계는 주어와 동사만 존재하는 직선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린애가 보는 세상의 질서는 그렇듯 간단하다. 잘못하면 나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브리오니의 눈에 로비는 악당이고 그래서 브리오니의 주변에 벌어진 흉악한 범죄의 죄인은 악당인 로비여야 한다. 이것이 13세 소녀의 논리다.
어른이 아이와 다른 점은 어른은 어떤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 세계의 축소판인 집, 인간, 자동차 등의 장난감으로 어른들의 흉내를 내지만 그것은 언제든 재생산이 가능한, 불행이 없는 모방의 세계다. 이러한 모방의 세계에 익숙한 아이는 어른과 달리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브리오니는 자신이 썼던 동화 속에서 주인공이 역경과 고난을 딛고 마침내 행복해지고, 악당은 벌을 받은 것처럼 그녀의 현실 세계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속죄』는 소설 본연으로서의 재미도 재미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가 바라보는 '작가'에 대한 시선이 흥미롭다.
브리오니가 그들 세 사람에게 일어난 상황을 실제와 다르게 구성해서 출판사에 투고했을 때, 출판사 편집장이 원고를 되돌려 보내면서 밝히는 거절 사유가 무척 인상적이다.

소녀가 자기 앞에 펼쳐진 이 이상한 장면을 완전히 오해하거나 화를 낸다면, 그것이 젊은 남녀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그들을 맺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예를 들어 여자의 부모님에게 폭로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부모는 분명 맏딸이 파출부의 아들과 사귀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테고, 그러면 젊은 남녀가 소녀를 연락원으로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p.438, 3부

누구나 원하는 행복한 결말을 원한다면 3부까지만 읽기를 권함.
5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도 소설은 스토리 텔링이 뛰어나고 흡인력이 강해서 쉽게, 잘 읽힌다.
작가의 사실주의를 느낀 부분은 3부의 뒷 부분. 이전까지의 끈질기고 집요한 문체 대신 서두르는 듯 호흡이 들쑥날쑥한 문체가 등장한다. - 이러한 문체의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중간 중간, 전혀 졸음이 올 내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금씩 졸았는데 거의 100여 페이지나 읽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내가 졸았던 문단은 여지없이 내가 뜨악해하는 의식 흐름의 기법이 쓰였다.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이러한 문체는 버니지아 울프나 프로스트처럼 작가 자신의 고유한 문체라기 보다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차용한 느낌이 있다. 물론 읽는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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