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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품격 - 박종인의 땅의 역사
박종인 글.사진 / 상상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25년 차 여행기자 박종인의 고품격 인문 기행
김재준 박사는 누군가 한자리에서 10년을 일했다면 그분 앞에서 모자를 벗고, 20년을 일했다면 허리를 굽히고, 30년을 일했다면 무릎을 꿇어라 했다 한다. 25년 차 여행기자가 말하는 여행의 품격은 무엇일까? 이 책은 '박종인의 땅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25년차 여행기자에게 여행은 땅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고,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죽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다. 이 책은 여행에 목마른 자들을 땅의 역사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우리는 땅에서 산다. 그 땅에서 우리는 여행을 한다. 모든 사람이 사학자일 필요는 없지만, 여행길을 떠난 사람이라면 그 땅에 얽힌 이야기를 눈곱만 치라고 알고 떠났으면 좋겠다"(서문 中에서).

봄이 오면 농부는 씨를 뿌린다.
나는 여행을 한다.
여름이 오면 농부는 비를 맞는다.
나는 여행을 한다.
가을이 오면 농부는 들판을 거닌다.
나는 여행을 한다.
겨울이 오면 농부는 숲으로 간다.
나는 여행을 한다.
첫인상이 참 좋은 책이다. 나는 이 책의 인트로(intro)에서부터 이 책에 반하고 말았다. 봄이 오면 농부가 씨를 뿌리듯, 여름이 오면 농부가 비를 맞듯, 가을이 오면 농부가 들판을 거닐듯, 겨울이 오면 농부가 숲으로 가듯, 그렇게 여행을 한다는 것은, 여행이라는 것이 뭐 그리 거창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자연스럽게 끌려 들어가게 되는,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매혹이라는 뜻일까.

"이 책이 바로 그 기록이다. 이 땅에 흔적을 남긴 모든 역사에 대한 기록이다. 모든 여행에 대한 기록이다"(서문 中에서)
여행은 '경청'하는 일이었다. <여행의 품격>은 우리 땅이 들려주는 이야기,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문화유산 이야기, 여행에서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 인문 기행이야' 하고 뽐내지 않으면서도 알차고, 과거와 현재의 삶이 교차하는 지점이 여행하는 재미를 더한다.
"왕실에 아들이 태어나면, 조선 왕조는 전국 길지를 골라 그 태를 묻었다. 왕실 뿌리를 굳건히 하고 대대손손 발복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길지를 선점해 다른 가문의 발복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도 다분했다. 자식 복이 많은 성군 세종대왕은 18남 4녀를 두었다. 세종은 그 아들들 태를 모아 한곳에 묻었으니 그곳이 경북 성주 세종대왕자태실이다. 송림 한가운데 있는 이 터는 본래 성주 이씨 중시조인 이장경이 묻힌 명당이었으나 왕명으로 묘를 이장시키고 태실을 썼다. 이장을 반대한 후손 이정녕은 관직을 박탈당했다. 사적 제444호다. 고려 때부터 성주 이씨와 전주 이씨는 불원지간이었다"(80).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이면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가볼 생각도 못한 땅이었던 우리 땅 중 하나가 '성주'였다. <여행의 품격>을 읽고 있다 보면, 도대체 이 여행기자는 이런 이야기들은 다 어디서 들었을까 싶은 '역사'를 들려준다.
"성주는 큰 고장이었다. 김천, 고령, 칠곡, 무주, 구미에 이르는 거대한 땅이 성주였다. 40개 고을마다 성씨가 생겨났다. 이씨 가운데 성주에 본을 둔 성씨가 여섯 개다. 임진왜란 때 왕조실록 성주사고가 불타면서 성주는 세가 약화됐다. 급기야 숙종 대에 와서 왕이 짜증스런 명을 내렸다. "이 좁은 땅에 무슨 이씨가 그리 많은가. 성주 이씨로 통합하라." 이후 여섯 개 이씨들이 성주 이씨를 성씨로 삼고 살았다"(83).
<여행의 품격>은 경청이 필요한 느린 여행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라고 했지만, 그 안에 녹아 있는 역사는 피처럼 끈적하면서도 진하다. '티'나게 부각시키지는 않았지만, <여행의 품격>은 역사의 일면을 돌아보며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 잘못된 역사를 조용히 꾸짖은 힘이 있다.
"많은 건축가가 그를 무명 집장사로 깍아내리고 그가 남긴 작품들을 평가하지 않는다. 한옥 마을로 사람들을 북촌으로 끌어들이는 서울과 종로구는 아예 정세권이라는, 건양사라는 이름을 그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지금도 조선 시대라는 환상 속 향기를 맡으며 북촌을 걷고 있다. 반드시 수정돼야 할 역사다"(197).

"이 땅을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조금은 더 풍부한 여행을 했으면 좋겠다"(서문 中에서).
단순히 가볼만한 곳을 찾고 있는 독자에게 <여행의 품격>은 너무 수다스러운 책일지도 모르겠다. 듣는 일보다 보는 여행에 익숙한 우리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급히 발도장을 찍으며 돌아다니는 여행을 몇 번 하고보니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함이 있다. 여행에 지쳐간다고 할까. 아니 의미없는 여행에 지쳐간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여행의 품격>은 여행 정보도 담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보통'의 여행하고는 좀 거리가 있다.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 듣지 않으면 보아도 볼 수 없는 것들을 담았다. 책으로만 만나도 충분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인문 기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