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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 - 아버지 ㅣ 한국대표시인 49인의 테마시집
고두현 외 지음 / 나무옆의자 / 2016년 10월
평점 :
따뜻한 봄날
김종해
대티고개 너머 구덕산에서
아버지가 지게로 지고 오신 나뭇단 꼭대기에
진달래꽃이 꽂혀 있다
젊은 아버지가 장난삼아 지게 위에 쓴 시(詩)는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진달래꽃만 곁에 두고
솔가지를 꺾어 아궁이에 넣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어머니의 얼굴 위에
황홀하고 발그레한 무늬를 수놓았다
시보다 아름다운 무늬가
젊은 어머니를 뜨겁게 했다
물은 설설 끓고 가마솥 위에 떡시루
김은 하얗게 장지문을 적시는데
떡은 다 익었다, 떡은 다 익었다,
절구통에 떡 칠 일 빼놓고도
젊은 아버지는 할 일이 많으시다
따뜻한 봄날
부엌강아지 같은 어린 아들이
할 일 많은 아버지 옷깃에
자꾸 걸치적거린다
출근길에 가끔, 이른 아침부터 편의점 앞에 삼삼오오 앉아 있는 청년들을 봅니다.
아침부터 나아온 것인지, 밤새도록 앉아 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그들이 건네는 말을 토막토막 들어보면 대리운전 일을 하며 무리를 지은 듯합니다.
세상에 의지할 것은 친구밖에 없다는 듯,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그들이지만,
또 무엇에 수틀리면 서로를 죽일 듯이 주먹질을 하고, 쌍욕을 해댑니다.
그 청춘들의 아침이 고단해 보이는 건, 내 마음 탓일 겁니다.
나이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고단한 청춘들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아버지'가 아닐까 혼자 생각해보는 날이 많습니다.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것이 가난밖에 없을지라도
세상 가장 값진 보물처럼 자신을 귀하게 여겨주는 아버지를 가졌다면.
어느 생이든 아버지라는 이름은 참으로 간절한 것이기에,
그만큼 미움도 크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없이 세상에 태어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데도,
세상에 아버지의 자리가 비어 있는 인생은 왜 그리 또 많은지.
세상에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들이 생각보다 많은 건,
늙어버린 아버지에게도 여전히 아버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걸,
나이가 들어서야 알았습니다.
늙은 아버지도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아들이었다는 걸 말입니다.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는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이름 "아버지"를 불러보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49인의 노래입니다.
대부분의 시인에게 아버지는
""그대들은 이제 고아(孤兒)네"를 읊조리며 / 하늘 가는 길" 이별한지 오래이고.
"사라진 별똥별처럼 / 몇 줄 언어의 그물에 걸린 그 아득한 기억"이 되었지만,
"내 몸 마디마디 뿌리내린 흔적을 지울 수가 없으니 그곳이 내가 쉴 자리"로 남아 계십니다.
그러나 아버지라는 이름에 그리움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아버지와 함께한 나날은 그야말로 부정교합(不正咬合의 세월이었다"고 고백하는 시인도 있고,
"사춘기 이후로 오랫동안 불화한" 아버지를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뒤에야 불러보는 시인도 있고,
"아버지를 벗어나고 싶어 많은 방황을" 한 후에야 다시 아버지에 선 시인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젊은 옛날 사람,
아버지, 아버지, 나는 자꾸 늙어요"(장석주, 33).
이제 아버지가 된 아들은, 젋은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늙은 아들은
자신의 늙어가는 얼굴 속에서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버지와 같은 종점을 향해 가면서 깨닫습니다.
아버지도 하나의 인생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느 생인들 두껍게 간이 배지 않은 게 있으랴"(정한용, 35).
성실했지만 무능한 아버지, 정확하고 재미없었던 당신이었지만,
아버지로 인해 나 지금 살고 있으며,
미워했어도, 사랑했어도, 그리워했어도, 잊었어도.
아버지는 여전히 내 안에 살고 계신다는 것을요.
<굽은 길들이 반짝이며 흘러갔다>는
그렇게 통속적인 그리움을 노래하며, 통속적인 회환을 담았습니다.
통속적일 수밖에 없지요.
통속적이어서 더 슬픈 걸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그 어떤 시어보다, 그 어떤 사연보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건,
이 한 줄 문장이었습니다.
"내 어릴 때 떠나신 내 아버지. 이 별에서 딱 열 해를 같이 지냈다"(정일근, 136).
어떤 아버지라도 그냥 곁에 있어주시는 것이 가장 감사한 일 아닐까요.
일찍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들보다 더 가엾은 생은 없기에.
세상에서 제일 아픈 이름
이재무
떠올릴 때마다 황경막 근처로
회한의 피가 몰려오는 듯
가슴 위아래가 까닭 없이 묵직해지고
답답해지는, 살았을 적엔 살붙이로
따뜻한 정 나누지 못했던,
일자무식에다가 술주정 심해
가급적 그 언저리에도 가고 싶지 않았던,
무능하고 고지식해서 오직 당신의 육체만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아야 했던,
우여곡절과 파란만장과 요철의 생
마감할 때까지 태어나 자란 곳
벗어나지 못했던,
내게 가난과 다혈을 유산으로 물려주신,
온몸을 필기도구 삼아 뜨겁게,
미완의 두꺼운 책 쓰다 가신
세상에서 제일 아픈 이름
아버지!
당신에게 진 빚 다 갚지 못한 나는
크게 병들었는데 환부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