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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 - 직장인의 어깨를 다독인 51편의 시 배달
김기택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시는 일과 밥에 붙들려 꽃 지는 줄도 모르는 나에게 다른 세계로 향하는 출구를 열어주었다"(10).
시인도 일과 밥에 붙들려 꽃 지는 줄도 몰랐다는데 저 같이 평범한 소시민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늘 속으로 되내였지요. 이 일만 끝나면 나도 꽃보러 가야지. 그렇게 봄, 여름 보내고 어느 새 또 가을입니다. 이 가난한 소시민은 여전히 '지금 하고 있는 바쁜 일만 끝나면 나도 가을 속으로 들어가야지' 공허한 결심만 해대고 있습니다. 가을이 가버릴까 조바심치며 말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그랬습니다. <다시, 쉬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라는 책 제목을 보고, 시인이 나를 찾는구나 싶으면서도 망설였지요. 하루 종일 앉아서 보내는 책상, 그 달력 안에 더 들어갈 여백도 없이 해야 할 일이 빼곡하게 들어앉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숨은 쉬고 살자, 그래도 숨통은 트이게 해주어야지 하는 오기로 할 일 위에 이 책 읽기를 보탰습니다.
"현실에서 나는 여전히 돈과 일과 힘 있는 손이 쥐고 흔드는 대로 휘둘렸으며, 순하게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다가 어수룩 하게 당했으며, 아무리 달려도 생활은 거기서 거기였으며, 꽤 달려다고 생각해도 여전히 힘 있는 손아귀에 뒷덜미가 잡혀 있었다"(10).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는 시집이면서 동시에 산문집이기도 합니다. 시인이 시를 읽어주는 산문집이라 시도 있고, 감상도 있고, 시론도 있고, 생각도 있고, 이야기도 있습니다. 시를 들고, 이야기를 들고 나선 시인이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밥에 붙들린 사람들, 밥을 위해 삶과 현실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한 단어로 '직장인'이라고 해도 되는 것을, '직장인'이라고 발음을 하려니 외계어처럼 어색하고 생소해지는 이유는 또 뭔지 모르겠습니다. 시의 세계에 잠겨 있다 현실계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시인은 이들을 찾아 시로 숨 쉬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저는 '시 호흡법'이라고 부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출근하는 전철에서 이 책을 읽었지요. 퇴근 후 읽으면 폭식을 하듯 한꺼번에 다 읽어버릴까봐 머리를 좀 쓴 것입니다. 시를 읽는 동안 참 행복했다고 고백하고 싶어졌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다 보면 무례한 몸짓 하나에도 확 짜증이 솟구치고, 버릇 없이 밀치고 가는 학생 뒤통수에 대고 조용히 욕을 한 적도 많았는데, 시를 읽는 동안에는 안 그랬다지요. 시를 읽어서일까요? 어느샌가 마음이 순해졌더라고요. 짜증대신 혼자 가만히 미소 지으며 이렇게 계속 넉넉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답니다.
이것은 살육과 잔혹 행위가 없는 전쟁.
땀방울과 질주, 우연들의 날뜀,
궁극의 평화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 축구, 장석주
세상 모든 전쟁도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총칼이 없는 싸움. "땀방울과 질주"가 무기인 싸움(130).
이런 시를 읽은 마음이 어떻게 순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시로 숨 쉬고 싶은 그대에게>를 읽으며 처음으로 해본 생각은 시를 읽는 건 세월을 읽는 시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이들어가는 것이 좋은 딱 한 가지 이유를 찾았습니다. 세월은 시를 담는 시간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지요.
그녀는 소리 없이 산소 호스를 뽑고 침대를 내려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 쪽으로 갔다 인기척에 놀란 내가 억지로 그녀를 데려와 다시 침대에 뉘며 물었다
- 엄마 어디 가시는 거예요?
- 어딜 가긴, 부엌에 가지. 빨리 밥을 지어야지
- 아이구 엄마두 여긴 병원이에요 부엌은 없어요
- 무슨 소리냐 부엌이 없다니 그럼 넌 뭘로 도시락을 싸가고 너희 아버진 어떻게 아침을 드시니?
- 엄만 지금 아파요. 이젠 밥 따윈 안 해도 된다구요!
- 큰일날 소리! 아버지 깨시기 전에 서둘러야지
- 엄마! 여긴 병원이라구요 부엌은 없어요!
- 얘야, 세상에! 부엌이 없는 곳이 어디 있니? 어디나 부엌은 있지 저기 보렴 부엌으로 나가는 문이 비스듬히 열렸잖니
...
엄마는 입술이 점점 파래지더니 까무러쳐서 오래 깨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는 그녀가 기어이 그 긴 복도를 걸어 나가 엄청나게 큰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 부엌(상자들), 이경림
세상 한복판에 걸린 큰 밥솥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은, 아침마다 전철과 버스와 도로는 출근 전쟁이다. 세상은 큰 밥그릇 싸움터다. 그러니 어서 부엌으로 가 밥을 해야지 병원에 누워 있거나 죽을 틈이 어디 있겠는가. ... 어머니이기도 한 이경림 시인은 마지막까지 밥을 하려다 순교한 어머니 잎에서 망연자실한다. 밥의 역설 어머니의 역설 앞에서 말을 잃는다(135-136).
굴욕적일지라도 내가 살아온 세월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 시를 마음에 담을 수 있었겠어요. 아이들은 아마 모를거에요.
잠깐의 짬이었지만 다시, 시로 숨을 쉬며 생각했습니다. 시를 짓기 좋은 터가 있다면, 내 마음이 그런 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나, 지금, 여기, 너 밥 먹는 일, 바람 소리, 나를 보는 강아지의 궁금한 눈빛. 이 모든 평범한 것들이 감추고 있는 참을 수 없는 경이로움"(141). 이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시의 신비입니다. 내 비록 시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비루한 삶일망정, 이 신비를 잃지 않는 그런 마음이고 싶습니다. 정체를 숨긴 외계인처럼 나는 쉬로 숨 쉬는 사람이라는, 그런 비밀을 가슴에 몰래 품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