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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의 날
미코 림미넨 지음, 박여명 옮김 / 리오북스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나는 누가 됐든 대화가 하고 싶었다"(365).
퇴근하는 전철 안, 모두가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을 때, 누군가 큰 소리로 통화를 한다. 별 내용도 없이 전화를 끊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별 내용도 없는 통화를 계속한다.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 통화의 소음. 친구가 많은 분이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고, 외로운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퇴근해 들어오면서, TV 앞에 앉아 있는 엄마에게 인사를 한다. 드라마가 재밌나 하는 생각보다 심심하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우리는 그렇게 외로움에 익숙해져간다. 서로의 외로움을 위로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건, 내 외로움을 들키기 싫기 때문일까, 타인의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까.
여기 흘러넘치는 외로움을 감당할 수 없어, 자기도 모르게 타인의 외로움에 뛰어들게 된 엉뚱한 여인이 있다. 누군가는 이 여인은 사기꾼, 미친년, 바보, 정신병자로 취급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단지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점잖은 그녀가 '가짜 시장 연구 조사원'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던 건, 정말이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건, 그녀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다. "전화가 갑자기 끊기거나 대화가 중단되었을 때 찾아오는 침묵. 그 침묵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바로 그 감정. 한순간 이 세상에 나만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그 고독의 감정. 오늘은 특히나 이상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366).
"정신없는 소동 후에도 나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나는 일개 침입자일 뿐인데. 최선의 경우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대를 받겠지만, 최악의 경우라도 밖으로 내쫓기면 그만인"(35-36).
이름 '이르마'. 나이 50세. 거주지 핀란드 외곽(하카니에미)에 혼자 살고 있음. 하는 일 없음. 가족관계 가끔 통화하는 아들이 한 명 있음. 그녀가 '가짜 시장 연구 조사원' 행세를 하게 된 것은 사실 작은 실수 때문이었다. 중고 시장 게시판에서 쪽지를 보고 '케라바'까지 공짜 화분을 받으러 갔을 뿐이고, 엉뚱하게도 전혀 다른 집의 초인종을 눌렀고 엉뚱한 집에 들어가 엉뚱한 사람들과 커피를 마시며 잠시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눴을 뿐이고, 무단 침입자라는 고백을 하기기 쉽지 않아 여론조사를 나온 조사원이라고 둘러댔을 뿐이다.
그렇게 시작된 거짓말. "조금만 시간을 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아주 잠깐이면 된다고", 이렇게 시작하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이르마'는 평범한 가정집을 방문하기 시작한다. 사기를 치거나 장난을 치려는 건 아니었다. "그러다 나는 내가 벌써 그 짧은 시간 안에 세 번째로 모르는 사람의 집을 방문했으며, 닫힌 문을 응시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오, 주여, 그렇다. 얼어났다. 또다시 일어났다. 내가 왜 이렇게 거짓말을 하며 낯선 사람들을 방문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단 하나, 내가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더 나은, 더 행복한, 더 편안한, 그게 무엇이 됐든, 이전의 것이 아닌 무언가를 말이다"(69).
가짜 시장 연구 조사원 행세가 즐거웠던 것도 아니었다. 자기 자신도 이런 기이한 행적을 벌이고 다니는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도감과 공포가 동시에 나를 덮쳤다. 한편으로는 앉는 순간 편안함을 느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상황을 이끌어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던 것이다. 애초에 나는 이 집 초인종을 누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집 주방에 들어와 있다. 이 꼴을 하고서. 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171). 그럼에도 무어라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망상, 고통 그런 것에 시달릴수록, 자기도 모르게 케라바에 이끌렸고, 쳐음 만나 대화를 나누었던 '이르야'가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이르야와 대화하고 싶었을 뿐이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다시 온 이유가 뭔가요?"(107)
<빨간 코의 날>은 불길하고 우울한 소동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블랙코미디 같은 소설이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다시 책의 표지로 돌아가, 이 소설이 '2004년 핀란드 '올해의 젊은 작가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며, 핀란드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라는 '핀란디아상' 최고 작품상 수상작(2010)이며, '유럽 6개국 이상 출간 베스트셀러'라는 이력을 몇 번씩이나 되새겨야 했다. 미안하게도 내겐 너무 재미 없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존재의 불안과 불확실성, 현대인의 비참하고 부조리한 일면을 날카롭게 그려냈다고 하기에는 주인공 '이르마'에게 심할 정도로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계속 되는 실수와 사건이 흥미롭기보다 짜증스러웠다고나 할까. 독자로서 나의 독서력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내겐 재미가 없었다.
"빨간 코의 날이 뭔지 아세요?"(203)
그럼에도, 이 책이 내게 남긴 강렬한 인상 가운데 하나는, 너무도 요란하고 소음 가득한 세상이지만, 누군가에게 이 세상은 너무도 조용한 세계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요하면 모든 것을 몸으로 느낄 수가 있어요"(174)라는 어느 노인의 고백처럼, 요란한 세상 한가운데서 혼자만 침묵에 둘러싸인 일상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불현듯 깨닫는다. 우리가 그토록 의미 없는 대화, 쓸데없는 대화에 매달리는 것도 어디서나 나를 덮쳐올 수 있는 조용한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 모르겠다. "의미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 하지만 함께 앉아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178-179).
감기와 사랑만 감출 수 없는 건 아니라서, 외로운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들을 알아보는데도 우리는 왜 서로의 외로움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것일까. 작은 실수와 소동으로 시작된 만남이지만, 이르마와 이르야 사이에는 편안한 자매처럼 서로의 문제를 털어놓고 공감을 나누며 우정 비슷한 감정이 싹텄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평범했고, 조용했고, 느렸고,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진심을 다해 웃을 수 있었던 이르마와 이르야처럼 우리는 왜 서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일까.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이르야처럼 '공포심'을 극복하고, '침입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은 <빨간 코의 날>이다. 작가는 '빨간 코의 날'이 어떤 날인지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침내 그날, 빨간 코의 날이 찾아왔다. 내 코는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고, 아침부터 라디오에서는 시끄럽게 빨간 코의 날을 홍보하고 있었다. ... 들어보니 빨간 코의 날은 광대 코 가면을 쓰고 일종의 선행을 하는 그런 날인 것 같았다"(208). 작가는 우리에게 '광대 코 가면'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르야처럼 낯선 집 대문에 부딪혀 고통스러운 코를 부여잡고 비틀거릴지라도, 남을 돕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외로울수록 외로움 안으로 깊이 파고드는 습성을 가진 우리이기에, 구원은 외부로부터 와야 하는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필요로 한다. 황당하지만, 다소 짜증스럽기도 하지만, 빨간 광대 코 가면을 쓴 침입자 '이르마'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인터넷을 싫어하는 것은 단순히 나 자신이 멍청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들의 말마따나, 'www'로 시작되는 인터넷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제껏 인류가 만들어낸 공간 가운데 이토록 작고 외로운 곳이 또 있을까"(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