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
카린 랑베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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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선택했어. 우리 인생에 남자는 없어!"(51)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 얼마전 종용한 드라마 <청춘시대>의 셰어하우스와 닮았다. 우아한 여왕 벌 같은 집주인 할머니, 셰어하우스 벨 에포크에 모여사는 여자들, 그리고 금남이라는 금기사항. 다른 점이 있다면,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에 사는 여자들은 청춘이 아니는 것(그래도 줄리엣은 예외라고 치자)과 집주인이 부여한 '금남' 조항이 조금 더 엄격하다는 것. 이 건물에 사는 유일한 수컷은 고양이 장-피에르뿐이며, 배관공도 전기공도 오직 여자들만 출입이 가능하다. "그곳 여자들은 다 매력적이야. 서로 아주 다르지. 우릴 하나로 묶어주는 건 같은 선택을 했다는 점이야. 우리 인생에 남자는 없어, 바로 그거야. 그게 우리한테 적절해"(21).


시몬, 주세피나, 로잘리, 그리고 인도로 여행을 떠난 카를라의 소개로 새로 입주하게 된 줄리엣. 남자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사랑을 포기한다는 것이고, 사랑을 포기한 삶을 상상할 수 없는 줄리엣은 이들의 선택에 계속 의문을 갖는다. 그녀들도 이 집에 입주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남자들을 그리워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디에고 없이 입주해야 하는 것은 가슴이 옥죄어 오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늘 같이 하던 모든 것을 보내고, 하루를 이야기해줄 사람이 더는 없고, 요리를 해줄 사람도, 애지중지할 사람도, 사랑해줄 사람도 더는 없게 되는 일이었다"(57). 그러나 시몬, 주세피나, 로잘리에게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은 사랑의 슬픔을 위로하는 안식처였다.




"사랑을 포기한 건 아냐. 사랑 없이는 못 사는, 그런 미친 희망을 포기한 거지(67).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행복해죽겠는데, 사랑에 겨워죽겠는데, 스스로 행복을 걷어차버리고,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에 숨겨진 사연이 드러날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학대와 배신과 결핍, 어쩌면,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에 산다는 건, 호기롭게 사랑(남자)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잔인한 사실은 아프게 인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난 사랑을 포지하지 않았어! 사랑이 날 원하지 않아, 제기랄"(135).




"하지만 사랑을 뭘로 대체하죠?"(69)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이 사는 집>은 프랑스 아마존 베스트셀러, 벨기에 신인 소설상 수상에 빛나는 통통 튀는 소설이다. 진열된 상품에서 물건을 고르듯 클릭으로 사랑을 찾는 리얼리티까지 신인 작가의 톡톡 튀는 감각이 신선하다. 벨기에 출신의 낯선 작가이지만, 화와 언어와 지역을 초월하여 이토록 적날하게 정서와 감각과 고민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놀라움이다.


그러나 그런 신선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통속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결국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늘 통속적이라 쳐도, 이 책의 결말은 더욱 통속적이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을 마신다는 혼밥, 혼술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 시대이지만, 남자를 포기한 여자들도 모여 살며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 주었던 것처럼, 결국 혼자 서는 살 수 없다는 것. 127년마다 한 번 핀다는 대나무꽃을 기다려온 여왕 벌(집주인 할머니)처럼, 결국 우리는 계속 사랑을 꿈꿀 수밖에 없다는 것. "127년마다, 몇몇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아주 유일한 순간이지. 세계 곳곳의 모든 대나무들이 동시에 꽃을 피워. 어디 있든, 언제 심어졌든 상관없이. 그리고 얼마 있으면, 지쳐 죽지. 모두가 동시에. 만일 그날 바람이 불면, 대나무들이 우는 소리를 듣게 될 거야"(32-33).


127년을 기다려 핀 대나무꽃처럼 결국 시들어버릴지라도, 그 덧없음을 깨닫게 되더라도, 거짓에 속아 울게 되더라도, 하루아침에 확 변해버린 내 마음에 그가 아니라 내가 더 놀라게 될지라도, 사랑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는 없다. 사랑은 여전히 설레여야 한다. 


결국 우리는 다시 사랑을 꿈꿀 수밖에 없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위대한 인생은 살지 못하더라도 위대한 사랑은 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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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
셀레스트 응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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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디아는 죽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9).


먼저 확실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깨물면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 분명히. 아들 둘, 딸 둘, 4남매를 키우신 우리 부모님은 왜 오빠 편만 드냐고 항의할 때마다, 왜 동생이 잘못해도 무조건 내게만 양보를 강요하느냐고 불평할 때마다, 우리 집안에 내 편은 없다고 서럽게 울 때마다,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다는 말로 나를 다독이셨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나의 믿음이 깨끗이 배신당했다는 걸. 깨물면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는 걸, 아프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런데 가족들 몰래 집을 빠져 나가고, 며칠 뒤 호수에서 시체로 발견된 '리디아'는 가장 관심을 덜 받는 아이가 아니라, 숨이 막힐 정도로 지나치게 사랑받는 아이였다. 이민자 가정의 중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리디아는 엄마의 푸른 눈을 물려받았고, 그 때문에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는 리디아라는 걸, 나머지 두 아이(오빠 네스와 동생 한나)는 잘 알았다. 물론,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도, 리디아였다"(12). 그러니까 리디아는 티나게 편애받는 아이였던 거다. "리디아는 지나칠 정도로 엄마 아빠의 관심을 많이 받는 아이였다. 우승 상품으로 받은 꽃처럼 언제나 조심스럽게 대했던 아이였다. 언제나 엄마의 마음속에 있어서, 엄마가 책을 읽을 때도 리디아가 좋아할 만한 내용이 있으면 늘 책 귀퉁이를 접게 만드는 아이였다. 매일 밤, 아빠가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입을 맞추는 아이였다"(161-162).


가족들은 리디아가 왜 죽었는지 모르고,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더 기막힌 사실은 리디아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리디아에게 일어난 일을 알아낼 거라고, 무엇이 잘못됐던 건지 꼭 밝히 거라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자신들이 알던 리디아의 삶은 거짓이었다는 사실과 충돌하며 가족들은 각자 길을 잃고 만다.




이 모든 일은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43)


서로 말하지 않는 것들,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들, 그러나 알아야만 했던 것들, 이제야 알게 되는 것들. 작가는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쏟아놓으며, 리디아의 죽음에 읽힌 비밀에 '서서히' 다가간다. 빠른 속도로 쏟아놓는데 서서히 다가가게 되는 것은, 그만큼 (리디아) 가족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이고, 한 사람의 내면 안에, 가족 안에 또아리를 트는 갈등은 다층적이라는 말일 것이다. 


리디아 가족의 허약한 행복과 이상하고 불안정한 균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리디아가 죽은 해가 1977년이라는 것, 그리고 그보다 먼저 이민자 가정의 중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가 만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시대가 1950년대라는 걸 염두에 두러야 할 필요가 있다. 리디아와 오빠 네스는 학교에서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 제임스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알았다. "새하얀 얼굴들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이 어떤지 잘 알았다"(156).


중국인 남자와 백인 여자의 결혼.

미국에서 태어났고, 다른 곳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도 한 번도 이곳에 속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남자와 

절대로 엄마와 같은 보잘것없는 인생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여자.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남자와 눈에 띄고 싶은 여자.

"칭, 외국놈, 네 나라고 돌아가라"는 귓속을 잔인하게 후벼파는 소리와 싸워왔던 남자와 

"네가 할 수 없는 직업이 있다는 말, 네가 살 수 없는 인생이 인생이 있다는 말, 네가 들어갈 수 없는 세상이 있다는 말"과 싸워온 여자.

'다르다'는 제임스의 이마에 언제나 찍혀 있는 상표였고, 제임스의 두 눈 사이에 박혀 있는 문장이었다. '다르다'라는 단어는 제임스의 인생 전체를 물들였다. '다르다'는 말은 제임스의 모든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지문처럼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메릴린에게 '다르다'는 말은 제임스와 달랐다(357).


그리고 이런 부모를 둔 자식들. 그리고 그들이 서로 말하지 않는 것들. 




"아주 오랫동안 네스는 리디아의 마음속 소리를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229).


자신을 사람들 속으로 숨겨버리려 하는 아빠와 자신을 사람들 밖으로 드러내려 하는 엄마의 '기대'는 오직 한 사람, '리디아'를 향했다. 리디아는 아빠가 원하는 대로 인기가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의사가 되기를 꿈꾸어야 했다. 그 사이 아버지를 쏙 빼닮은 아들 네스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막내딸 한나는 아예 존재감 밖으로 밀려났다. 


엄마와 아빠는 아들을 보지 못했고, 아들의 마음을 보지 못했고, 아들 마음의 상처를 보지 못했지만, 네스는 "자기 쪽으로 기운 무게"를 동생이 너무나도 버거워한다는 걸 알았다. "리디아가 그 모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오직 네스 때문이었다"(232). "그 오랜 세월 동안, 부모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네스는 리디아의 불행을 그대로 흡수해 말없이 동정해줬고, 가만히 어깨를 꼭 잡아줬고, 어색하게 웃어줬"고, "네스는 리디아가 가라앉지 않고 떠 있을 수 있도록, 지나치게 사랑받는 것이 지나치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일임을 계속해서 상기시켜줬다"(235).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네스는 그 누구보다도 리 가족만의 언어를, 외부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것은 - 마치 하늘에서 내려는 폭설처럼 - 묵직한 추가 되어 한 사람을 뒤흔들고 가라앉히고 으깨버린다는 것을"(368-369). 




이해해주는 한 사람만 있었어도. 


요즘 네티즌들은 세상에서 제일 쓸데 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고 말한다. 부모가 아이를 굶겨 죽이고, 때려 죽이고, 던져 죽이고, 밟아 죽이는 흉포한 일이 바로 이웃에서 벌어지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부모에게 지나치게 사랑받는 아이 걱정은 배부른 걱정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바로 우리의 그러한 태도가 대화의 단절을 불러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마. 속 편한 소리 하지 마. 그 고통이 더 크겠어, 이 고통이 더 크겠어? 어렵게 마음을 열었는데 이런 반응이 온다면 우리는 속으로 다짐할 것이다. 이젠 너에겐 아무말도 하지 않겠어. 


리디아가 마음의 무게를 부모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왜 아빠 제임스와 엄마 메릴린은 서로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말하지 않았을까? 백인으로 사는 아내는 말해도 자신의 기분을 모를 거라고, 남자이자 교수로 사는 남편은 말해도 자신의 고통을 모를 거라고 지레 짐작한 것일까? 


(★스포일러 주의) 네스가 집안을 떠난다는 게, 자신을 떠난다는 게, 더이상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게, 리디아의 그토록 큰 절망이고, 그토록 큰 고통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디아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버지, 어머니의 지나친 사랑이 아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마음의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줄 수 있는 구원자는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제임스가 남모르게 어떤 고통을 겪어왔는지, 메릴린이 가진 고민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는 순간, 위태로웠던 그들의 갈등이 풀어지는 것을 봐도. 가족 안에서 아무런 존재감을 갖지 못했던 '한나'가 서로를 이해하는 단초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말하지 않는 것들, 그래서 알지 못했던 것들, 그러나 알아야만 했던 것들, 이제야 알게 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촤르르 풀어지며 가족 모두 앞으로 한 발 내딛을 수 있었던 것만 봐도 말이다.


<내가 너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 것들>은 매혹적인 소설이다. 속도감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문장들, 낯익은 설정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피부에 와닿는 묘사들, 그리고 내 것처럼 밀고 들어오는 타인의 상처들. 번역자를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한 문장 한 문장이 깊이 박힌다. 지금은 다문화가정이 보편적인 일상(?)이 되었다지만 여전히 편견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편견을 가진 사람이든, 편견의 대상자이든)을 위하여, 지금은 여권이 많이 신장되었다지만 여전히 차별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차별을 하는 사람이든, 차별을 당하는 사람이든)을 위하여, 지금은 각자 살기 바쁘다지만 여전히 가족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상처를 주는 쪽이든, 상처를 받는 쪽이든)을 위하여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작품이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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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죽이기 - 엘러리 퀸 앤솔러지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외 지음, 엘러리 퀸 엮음, 정연주 옮김, 김용언 해제 / 책읽는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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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이야기를 조금 들려준다는 점에서 모든 소설은 미스터리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러디어드 키플링, 아서 밀러, 윌리엄 포크너, 버트런드 러셀 등

최고의 작가들이 하나쯤 추리소설을 썼다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 소설가 김연수

"이런 작가들도 미스터리 소설을 썼다고?" 12인의 작가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런 질문이 절로 생겨납니다. 그들이 미스터리 작품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그런 작품을 읽어본 기억도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노벨상문학상, 퓰리처상 수상에 빛나는 걸출한 작가들의 범죄, 탐정, 미스터리, 서스펜스 소설을 한 권에 담았다고 하니, 자극적인 이 책의 제목(헤밍웨이 죽이기)만큼이나 호기심이 발동하는 단편 앤솔러지입니다(이 헤밍웨이는 우리가 아는 그 헤밍웨이가 아니라는 걸 미리 밝혀둡니다).




12편의 단편 중 좁은 의미에서 정석적인 미스터리라 할 수 있는 작품은 몇 편 되지 않는다. 

- <미스테리아> 편집장, 김용언

독 후, '감'을 말하기 전에, 먼저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의 권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할 듯 합니다. 노벨문학상의 권위야 다 아는 사실이니 퓰리처상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자면, "2016년 100년째를 맞이하는 퓰리처상은 '언론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며, 미국 언론의 가장 권위 있는 상"(표지 뒷날개 中에서)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 유독 미국인 작가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퓰리처상이 "수상자를 미국인으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의 권위를 되새김질 하는 이유는, 작가들의 어마어마한 명성에 비해, 처음 품었던 기대에 비해, 제목이 주는 자극에 비해, 걸출한 작가들의 범죄, 탐정, 미스터리, 서스펜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싱겁기 때문입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첫 작품이 너무 재미없어서 끝까지 읽어야 하나 몇 초 고민했습니다. 해제를 쓴 김용언 편집장님도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이 전혀 놀랍지 않고, 범행의 이유 역시 호기심을 자아낼 정도는 아니다"(402)고 평합니다. 아마도 독자들이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추리소설에 익숙한 패턴, 즉 '트릭'이나 '알리바이 헛점 찾기','반전 범인'과 같은 '추리의 재미'에 이 작품들이 초점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재미를 목적으로 쓰여진 소설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12편의 단편은 범죄라는 행위에 기초하되 주목하는 방향은 다르다"(402).




각 작품에는 그들만의 문체와 세계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소설가 김연수 

풍선 바람 빠지듯 호기심이 사그라들며 재미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실망스러운 선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일독을 권하는 이유는 "변심한 애인 같은 날씨, 딱 요즘 같은 날에 읽기 좋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식어버리는 사랑처럼 하루아침에 돌변하는 날씨를 보며,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책에서 음미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여운입니다. 사소한 말, 사소한 행동, 사소한 습관, 사소한 호기심 하나에서 시작된 작은 소용돌이가 얼마나 큰 고통과 절망과 분노로 번져 한 인생과 주변을 집어삼켜버리는지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맹신, 오해, 욕심, 오만, 폭력, 배신, 술수, 악의, 절망과 분노가 뒤섞여 있고, 목숨까지 빼앗고 빼앗기는,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있는 인생사가 녹아 있습니다. 소설이 갖는 가장 큰 미덕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겠지요. 우리 삶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다는 것. 미스터리 소설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인생의 교훈이 담겨 있으며, 단순히 재미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뭔가 독자에게 가르침을 준다는 의미에서 '계몽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용언 편집장님의 한마디가 긴 여운을 남깁니다. "삶의 근원을 파고들려는 작가의 욕망은 언제나 옳다"(399).


(개인차가 있겠지만) 가장 재밌었던 작품은 제임스 굴드 커즌스의 <기밀 고백>과 마크 코널리의 <사인 심문>,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낚시하는 고양이 레스토랑>, 가장 난해했던 작품은 버트런드 러셀의 <미스 X의 시련>, 음미하게 되는 작품은 싱클레어 루이스의 <버드나무 길>과 수전 클래스펠의 <여성 배심원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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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해도 안되는 일상영어회화 첫걸음 끝장내기 2 10년 해도 안되는 일상영어회화 첫걸음 끝장내기 2
Gina Kim 엮음 / 베이직북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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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관련 전문가들이 말하기를 (약) 하루 30분씩 100일 동안만 집중하면 말문이 터지고 귀가 뚫린다고 한다"(4). 

 

 

 

쌓아둔 영어교재만 보면 진짜 영어의 달인이라고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학교 졸업과 함께 영어에서의 해방을 외쳤으나, 필리핀으로 단기선교를 다녀온 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했던 굴욕을 가슴에 새기고, 영어회화 완전정복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세워두고, 좋다는 교재, 좋다는 학습 방법은 다 뒤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여태 일상영어회화 첫걸음도 제대로 끝장내지 못했다는 더 굴욕적이고 처참한 성적표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자체 분석 결과, "꾸준함"과 "집중력"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도달했습니다. 교재를 받아들면 처음엔 씹어먹을 것처럼 파고들다가도, 일에 치이고, 우선순위에 밀리다 보면, 어느새 교재와 멀어지는 저를 발견합니다. 이런 패턴을 극복하고 꾸준함과 집중력으로 영어회화를 끝장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10년 해도 안 되는 일상 영어회화 첫걸음 끝장내기2>를 다시 손에 잡고 제가 세운 새로운 계획은 이렇습니다. 첫째, 욕심내지 말 것. 하루에 공부할 양을 많이 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이 공부하는 것보다 한 문장이라도 제대로 끝내는 걸 목표로 잡았습니다. 총 4페이지(2장)로 구성한 Unit 하나를 하루의 공부 분량으로 삼았습니다. 둘째, 영어 문장을 국어처럼 읽고 암기하기입니다. 영어회화 끝장내기에 다시 도전하며 주저 없이 이 교재를 선택한 이유도 이것입니다. <일상영어회화 첫걸음 끝장내기>는 영문장 위에 원어민의 발음에 가깝게 한글로 발음표기가 적혀 있습니다. 국어처럼 읽고 암기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셋째, 단순히 발음을 따라하기보다, 듣기 능력까지 향상 시킬 수 있도록 MP3를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스마트폰 <콜롬북스어플>에서 mp3용 파일을 다운로드할 수 있고, 베이지북스 웹하드에서 mp3용 소리파일을 다운받을 수도 있습니다. 앱을 이용하며 편리하기는 하나, 데이터 걱정없이 마음껏 활용하기를 원한다면 웹하드에서 다운로드를 받는 것이 더 유용하기는 합니다. 


저자는 "영어회화가 간절한 환경일 때, 어학실력은 저절로 향상 된다"고 조언합니다. 영어를 말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되는 것이 가장 좋은 학습법이라는 말이겠지요. 사실 시험에 필요한 것도 아니고, 외국인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닌데, 이제라도 영어회화를 끝장내보려 하는 것은 '여행' 때문입니다. 가고 싶은 곳이 많은데 영어에 대한 두려움과 울렁증 때문에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 여행지에만 가도 외국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간혹 무엇인가를 물어보는 외국인들에게 간단하지만 유창한 일상회화로 답변을 해주는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부럽고 멋져 보일 수가 없습니다. 외국인 회사에서 근무하는 제 후배는 갈고 닦은 영어 실력으로 재능기부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후원하는 외국 어린이들에게 한글로 작성된 편지를 영문으로 번역해서 보내주는 일입니다. 스마트폰 덕분에 좋은 번역기가 계속 계발되고 있다고 해도 친밀한 의사소통에 있어서 직접 대화를 하며 말을 주고받는 것만은 못할 것입니다. 


<10년 해도 안 되는 일상영어회화 첫걸음 끝장내기>는 일단 굉징히 쉽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어체 표현으로 문장도 길지 않으며, 한글표기 발음과 원어민 MP3를 동시에 제공하고, 한 권으로 충분한 독학이 가능하도록 구어체에서 요구되는 영어회화 영문법도 가르쳐주며, 무엇보다 핵심패턴을 익혀 '응용'이 가능하도록 인도합니다. 출판사의 비장한 외침처럼, "이렇게 쉬운 책으로도 안 되면 차라리 영어회화 그만두자"는 마음으로 계속 열공할 것을 (이 글을 통한) 온라인 이웃들에게 엄숙히 약속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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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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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삼십 대의 청청한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은 당신을 주님이라고 영접하게 됐을까?"(81)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믿음이 아니라 이성으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사실 그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것은 보이는 것만이 확실하다는, 이성이 가장 믿을만 하다는 '믿음'입니다. 누구나 어떤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같은 나라에서 나고 자라며 비슷한 환경, 비슷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끼리도 서로 다른 믿음, 정반대의 믿음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무엇일까요? 그중에서도 하필 2천 년 전에 지구의 변방 한 점에 불과한 땅에서, 그것도 "삼십 대의 청청한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은" 예수라는 인물을 신으로 믿는 믿음은 어떻게 가지게 되는 걸까요?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여류 작가로 이름이 높은 박완서 작가님도 그런 물음을 가지고 있었던가 봅니다. 누군가는 벼락이 친 것처럼 순간적으로, 도망갈 도리 없이 예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는데, 박완서 작가님은 스스로를 돌아보며 의심과 탐구 속에서, 저항과 번민 속에서, 따름과 실패 속에서 서서히 물들어갔다고 고백합니다.


<빈방>은 "1996년부터 1998년 말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다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을 모은 것"입니다(7). 2006년도에 초판되었고, 2016년 3판으로 재출간되었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은 자신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믿게 된 동기"를 여러 모양으로 고백하는데, 자신은 성경 말씀 중 한 구절에 "뭐 이런 소리가 다 있나 싶은 저항감 때문에 예수의 언동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게 서서히 신앙으로 발전한 경우"(43)랍니다. 예수를 본받을 만한 분이라 생각은 했으나 신앙으로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주님을 영접할 용기를 낸 것은 "암울한 시대상을 향해 거침없이 외친 정의 구현 사제단의 참다운 용기에서 영향"(183-184)을 받은 때문입니다.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우리 시대의 대표 지성이라 할 수 있는 한 분을 예수께 이끌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정의에 이끌렸고, 사랑에 매혹당했다고 할 수 있는데, 정의와 사랑은 박완서 작가님의 성품과 삶의 지향점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특히 권력과 부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관심과, 먹을 것을 나누는 일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분이 한평생 짊어진 고민, 뜨거운 기도가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줍니다.


<빈방>은 그렇게 자의식 강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매혹 당하는 과정, 우레와 같은 충격이라기보다 갈증을 적셔주는 단비처럼 서서히 깊어지는 묵상, 영혼의 심지에 불을 당기는 불꽃 같은 갈등과 깨달음의 열매가 아름답게 녹아 있습니다. "예수의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서 성서를 통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22)라고 고백하는 박완서 작가님은, 그래서인지 유독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에 날카롭게 반응합니다. 사실 그것은 박완서 작가 개인의 위선이 아니라, 종교인의 위선이며,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한 위선입니다. 그래서 <빈방>은 세례 요한의 설교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찔러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탄식을 쏟게 만듭니다.



"좋은 교인이란 자신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진리에 이르는 길의 일부가 되는 게 아닐까"(184).


<빈방>은 분명 같은 믿음을 가진 독자들에게 더 쉽게, 더 깊게 와닿는 묵상집입니다. 그러나 구도자적 물음 안에서 고통하고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이 진리에 이르는 길의 일부가 되어줄 것입니다. 성경을 묵상하는 것 만큼이나 사회를 꿰뚫는 통찰도 날카롭습니다. 성경적 깨달음이 사회적 통찰을 더욱 날카롭게 하고, 날카로운 사회적 통찰이 성경을 읽어내는 깊이를 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역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는 다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이 영혼을 힘차게 힘들어 깨우는 힘이 있습니다. 진실되고 따뜻한 고민, 통렬하면서도 겸손한 고백이 삶과, 신앙과, 이웃과, 오늘과, 나와, 나눔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책입니다. 기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도, 부정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자비심 없는 종교란 나쁜 정치 못지않게 사람을 억압할 따름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오류도 해방의 소식을 도리어 억압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 아닐까요"(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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