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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는 "세 자매의 솔직한 연애, 결혼, 사랑 이야기"를 그린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소설입니다. 한국 독자층도 이제 제법 두터울 듯한데, 아직 '에쿠니 가오리'라는 이름이 낯선 독자들도 <냉정과 열정 사이> 작가라고 하면 반가워할 분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에쿠니 가오리라고 하면, 제게는 여성 심리 묘사에 뛰어나고 소소한 가족의 일상을 참 유쾌하게 그려낼줄 아는 작가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이 책이 딱 그렇습니다.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의 주인공은 이누야마 집안의 세 딸입니다. 한 어머니의 배에서 나왔지만 세 자매는 서로 다른 개성을 뽐내며 살아갑니다. 세 자매의 달라도 너무 다른 성격을 잘 보여주는 한 문장이 있습니다. "그해 가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아사코 인상에는 '음울한', 하루코 인상에는 '그런대로 쾌적한', 그리고 이쿠코 인상에는 '마음에 드는 장화를 여러 번 신을 수 있어서 좋았던' 가을이었다"(173).
가정주부인 첫째 아사코는
남편의 폭력성과 열등감을 아슬아슬하게 견뎌내고 있고,
남자에게 원하는 건 오직 사랑뿐인 커리어 우먼 하루코는
오늘도 열렬한 연애 중이다.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데 거리낌 없는 막내 이쿠코는
이웃집의 단정한 가정주부를 동정하며 훔쳐본다.
- 뒤표지 中에서
세 자매가 떠안고 있는 각기 다른 불안과 희망은 한마디로 '연애 문제'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의 이혼도, 첫째 딸 아사코의 자유 없는 결혼생활도, 둘째 딸 하루코의 계속되는 분방한 실연도, 셋째 딸 이쿠코의 알맹이 없는 남자관계도 모두 '연애'가 원흉입니다(284). 성격도 다르고, 인생관도 다르고, 연애관도 다른 세 자매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열심히 헤쳐가는 중이지만, 세 자매에게는 삶을 이끌어가는 공통된 신조가 있습니다. "이누야마 집안에는 가훈이 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그때를 모르니 전전긍긍하지 말고 마음껏 즐겁게 살자"(11). 세 자매는 각각의 방식으로 이 신조를 삶에 적용 중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율리히 벡은 <사랑은 지독한 혼란>이라는 책에서, 현대사회의 혼란상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더욱 소중해질 것'이라 예측한 바 있습니다. "사회적 약속과 구속이 약해지고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는 사회일수록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애착은 더욱 커진다"는 것입니다. 몇 번의 연애 경험은 당연해지고, 한 번도 이혼하지 않고 함께 오래 사는 일은 희귀해질수록 진정한 사랑에 목마르게 되고, 사랑에 대한 집착이 강할수록 결혼의 구속력은 더욱 약해집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랑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면 가차 없이 헤어지고 다른 사랑을 찾아야 하니까요.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에서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열렬한 연애 중이면서도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는 둘째 하루코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보람 있는 일과 사랑하고 사랑받는 남자. 인생에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184). 서로 사랑하면서도 결혼은 싫다는 하루코를 보며 그녀와 동거하는 남자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루코는 '약속이나 제도가 아니라' 오직 애정만을 믿고 싶은 것일까"(127). 그리고 아무 의미 없이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데 거리낌이 없으나 소박한 가정을 꿈꾸는 셋째 이쿠코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요즘 세상에서 연애가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 나는"(283).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애착과 불안 속에서 에쿠니 가오리가 던지는 또 다른 메시지는 그럼에도 가족의 사랑은 여전히 힘이 세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사랑이 있으면, 사람은 강해지나 봐"(272). 가족과 함께했던 생활과 습관과 기억들이 멀고도 그리운 무엇이 되어버린 각자의 삶과 공간 속에서도, 가족과 함께했던 날들과 습관과 기억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어주며, 그런 기억 속에서 각자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가 보여주는 또 다른 메시지는 바로 제목입니다. 하나의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시대, 인생에 정답이란 없다는 태도, 세 자매가 각기 다른 살므이 방식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듯이, 저자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는 첫째 아사코를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정도의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신 쾌락주의라고나 할까요. '당위'나 '진리'가 아니라,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고자 하는 세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즐겁게 살자, 고민하지 말고>는 고민 없이 즐겁게 잘 읽히는 책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에쿠니 가오리가 탁월한 이야기꾼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인생은 진지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사는 거야"(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