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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평점 :
"할머니가 있다는 건 아군이 있는 것과 같다. 그게 손주들의 궁극적인 특권이다. 자초지종이 어떻든 항상 내 편이 있다는 것. 내가 틀렸더라도. 사실 내가 틀렸을 때 특히"(75).
책을 읽으면서 오랫만에 펑펑 울었습니다. 아마도 엘사와 할머니라면 우라지게 재밌고, 짜증나게 슬프고, 어마무지하게 아름답다고 표현했을 것 같습니다. 살면서 가장 속상한 것은,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좋은 머리를 갖지 못한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지 못한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무조건이라는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 없는 거 말고, 유독 나만 예뻐하는 그런 사랑말입니다.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고, 내가 하는 말은 다 들어주는 '슈퍼 히어로' 같은 사람말입니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그 슈퍼 히어로를 이 책에서 만났습니다. 엘사에게 그런 할머니가 있는 것이 우라지게 부럽고, 그런 할머니와 헤어져야만 하는 것이 짜증나게 슬프고, 할머니의 마지막 선물을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어마무지하게 아름다워서 펑펑 울었답니다.
"기다리는 사람더러 편지를 전해줘. 받지 않으려고 하겠지만 이 할미가 보낸 거라고 하면 돼. 할머니가 미안하다면서 안부 전해달라 했다고"(71).
"지금 일곱 살이고 조금 있으면 여덟 살"(11)이 되는 꼬마 엘사는 할머니 말고는 친구가 없답니다. 엘사가 오지게 특이한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와 엘사가 잘 통하는 건 할머니가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초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할머니는 엘사의 엄마를 돌아버리게 하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늘 엘사를 지켜주고 언제나 엘사 편이었던 할머니가 더 이상 엘사 곁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함께 잠이든 병원 침실, 엘사는 할머니의 품 안에서 잠을 깨지만 할머니는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떠나기 전에 엘사에게 미션을 부여합니다. 성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친구들을 지키라고 말입니다. 엘사는 할머니가 보물찾기처럼 감추어놓은 편지를 이웃들에게 한 통씩 전달하며 할머니의 부탁이 무슨 뜻이었는지 깨달아갑니다. 엘사와 할머니만 아는 "깰락말락한 나라에 있는 여섯 개 왕국"의 이야기가 그 힌트였다는 것도요.
"그들은 자기 집에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그냥 존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살아가려고 노력한다"(544).
엘사에게 맡겨진 편지 배달은, 보물찾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할머니가 엘사에게 선물하는 마지막 추억이자 놀이였으며, 또 할머니가 엘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었습니다. 폭력적인 세상에 어린 손녀를 두고 떠나야 하는 할머니는 엘사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할머니가 엘사와 맺어주려 했던 친구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상처를 가진 인물'들이었고, 그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할머니는 편지 배달이라는 미션을 통해 엘사에게 그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를 보는 법말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면, 처음부터 괴물이었던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할머니를 통해 엘사는 그것을 깨달았고, 또 그런 엘사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지키는 법을 배워갔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슈퍼 히어로'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사랑의 다른 말은 '이해'라는 걸 가르쳐줍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 우리가 받고 싶은 사랑이 바로 그 '이해' 아닐까요. 저 사람이 나를 이해한다는 느낌, 그 느낌이 필요한 거지요. 할머니가 엘사에게 그토록 멋진 슈퍼 히어로일 수 있었던 건, 할머니가 고아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보다 슈퍼 히어로가 절실했기에, 슈퍼 히어로가 필요한 손녀의 마음을, 그리고 손 내밀어줄 이 없는 괴물(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요.
작가는 "세상의 모든 일곱 살짜리에겐 슈퍼 히어로가 있어야 한다"(11)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작가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건, "어릴 적 슈퍼 히어로를 갖지 못했던 어른들도 여전히 슈퍼 히어로가 필요하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젊은 부모와 어린 자식 사이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여기가 지옥인가 싶습니다. 자기 자식밖에 모르거나, 자기 자식도 모르거나, 양극단을 오갑니다. 어느 쪽도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를 읽으며 사랑하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곱 살 아이에게도, 스스로 지옥 같은 현실을 만들며 살아가는 어른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는 슈퍼 히어로가 필요하다는 것과, 이미 마음이 망가진 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 가장 멋진 슈퍼 히어로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책은 <엑스맨>이나 <해리포터>와 같은 고품격 문학작품을 알아야 내용이 더 잘 이해되지만, 이 책 자체가 현실 세계와 동화 세계를 넘나드는 고품격 문학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프레드릭 배크만'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겐 이런 작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번역자의 이름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읽을수록 감탄하며, 번역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이 책을 통해 아름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