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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저리 클럽
최인호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평점 :
우리는 떠나는 모든 이들에게 제단을 차려주어야 한다.
가을에 축제가 흔하듯,
그리하여 추수감사절이 있듯
우리는 풍요로운 종말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좋은 책을 읽으면 책장을 덮어야 하듯
우리의 계절을 덮어야 한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자.
눈을 감으면 우리는 볼 수 있다.
사라져가는 여름이 내게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지난 가을에 주웠던 낙엽 한 장이 안녕히 계세요, 또 만나요, 인사하는 것을(403).
내게 청춘(고교시절)은 다 읽고 덮어버린 좋은 책 같은 계절이라는 걸,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남기고 떠나왔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그 시절의 순수함은 우리 인생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걸, 그리고 절대 잊혀지지 않으리라는 걸, 이 책이 다시 가르쳐주었습니다. "지나고 나면 이 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는 어른들의 잔소리가 제일 듣기 싫었는데, 어느 새 그때 그 시절 어른들만큼 나이를 먹었고, 그때가 얼마나 좋았는지 사무쳐올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납니다. 그리워서인지, 억울해서인지, 슬퍼서인지, 아름다워서인지 모를 그런 눈물이 말입니다.
<머저리 클럽>은 70년 중반 까까머리 교복세대의 고교시절을 그린, 최인호 작가의 "최초이자 마지막 성장소설"입니다. 악동이라 하기에는 유머러스한 순수함이 넘쳐나고, 범생이라 하기에는 뜨겁게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는 평범한 여섯 명의 남학생들이 주인공입니다. 건방진 전학생을 손봐주려다 그와 친구가 되기도 하고, 메밀국수집에서 먹튀를 하다 붙잡혀 정학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기도 하고, 첫눈에 반한 사랑 때문에 어질어질하기도 하고, 짝사랑을 가로챈(?) 친구의 배신에 쓰라인 패배감을 맛보기도 하고, 차가울 겨울바다와 마주하며 한 뼘 성장해 돌아오기도 하고, "10원짜리 동전 2개를 들고 어두운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찾아 헤매는" 친구의 외로움을 생각하며 눈물 짓기도 하고, '샛별'이라는 예쁜 이름의 클럽 여학생들과 교류하며 두근두근 남모르는 썸도 타고, 그렇게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만남을 반복하며 가쁘게 성장하는 이 친구들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하고, 언니 오빠의 모습이기도 하고,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바다는, 겨울의 바다는 싱싱하게 그곳에 누워 있었다. 물보라가 덤벼들고 눈발이, 밤이 부서지는 파도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펴고 우뚝 서서 기묘한 새해 아침, 열일곱 살이라는 새로운 나이가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가를 알았다. ... 그 소리는 내 젊은 가슴을 쥐어흔들고, 나를 설레게 했다. 나는 나의 작은 실연쯤은 이 거창한 자연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 그러자 나는 유쾌해졌다"(137).
구속도 많고, 지켜야 할 의무도 많고, 외로움이라는 낯선 감정이 불쑥불쑥 공격해오기도 하고, 대입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짊어진 채 책가방을 어깨에 메고 등교와 학교를 반복하지만 뚜렷한 목표는 없는, 그렇게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가는 사이 많이 웃고, 많이 슬퍼하고, 많이 울었지만, 무엇에 웃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을 보며 울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이 그들은, 그리고 우리는 커버렸습니다. "밤중에 호박덩굴이 움썩움썩 크듯 그리하여 우리가 잠든 새에 호박덩굴이 수수깡 울타리를 타고 넘듯 우리의 성장은 우리가 모르는 새에 이루어져서 우리의 키를 넘고 있을지도 모른다. ... 시계의 시침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도 그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369).
졸업을 앞두고 열아홉 생일 파티를 하던 머저리클럽 남학생들과 샛별클럽 여학생들은 "빛나는 열아홉 개의 촛불", "빛나게 타오르는 열아홉 개의 나이", "열아홉 개의 지난 세월이 한꺼번에 명멸"하는 촛불 앞에서 가만히 서로의 눈들을 쳐다보며 감사를 드립니다(411-412).
우리를 키웠던 부모님께 감사를.
우리를 가르쳐준 선생님께 감사를.
우리에게 옛날얘기 해주던,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께 감사를.
우리를 잠재웠던 무더운 여름날의 나무 그늘에 감사를.
우리의 머리를 적시던 비에 감사를.
우리를 기쁘게 혹은 슬프게 했던 모든 지나간 사람들에게 감사를.
이렇게 모여 있는 기쁨에 대해 감사를.
저는 여기에 한 가지 감사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잃어버렸던 소중한 일기장 속 순수의 기억을 다시 찾아준 최인호 선생님께 감사를!
이렇게 뜨겁고 순수했던 시절이 벌써 오래 전 나를 지나갔다는 사실만큼이나, 최인호 선생님이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는 사실이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머저리 클럽>은 아주 유쾌한 성장소설입니다. 긴 문장의 시를 줄줄 외우는 우리의 주인공 '동순'이가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만큼 시끄럽고 요란스럽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에는 충분히 가능했을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시를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했던 그 시절의 꿈과 다시 만나게 하는 책. 학교 안에 갇혀 있던 그 시절에는 생생하게 피어오르는 거리를 동경했는데, 지나고 보니 생생하게 피어오르던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