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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세트 - 전2권 -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남경태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역사는 지배층 단독으로만 이끌어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인 평가에서는
부패한 지배층을 응징하지 못하고 한 차례의 혁명조차 시도하지 못한
민중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2권, 516).
"맑은 거울을 보는 것은 모양을 살피기 위해서요,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는 것은 지금을 알기 위해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대한민국은 지금의 본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찌끄러진 자화상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교육과 국정교과서에 문제가 많다는 건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왜 우리 역사 안의 식민사관을 바로잡자는 요구는 계속해서 묵살 당하고 제대로 된 검정 회의조차 이루지지 않는 것일까요? 학계의 기득권, 그리고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까요?
공교육이 이렇다 보니 우리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학교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학교 '밖'으로 눈 돌리는 독자들에게 역사공부를 시작하는 책으로 "남경태의 가장 독창적 역사 읽기" <종횡무진 한국사>를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종횡무진 한국사>는 "인문학자의 역사 읽기"라고 이름붙이고 싶습니다. 역사를 거꾸로 읽거나 뒤집어 보려는 시도는 그래도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 역사를 이처럼 종횡무진 읽어낸 것은 첫 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은 "역사 교과서의 지루함과 엄숙주의를 거부"하고 "좌충우돌하며 자유분방하게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데, 어쩌면 그가 통사에 익숙한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을 지닌 인문학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이 "한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에 중점을 두었다고 경계를 분명히 합니다(18).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땅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분명한 선 긋기는 한국의 "민족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고 어떤 담론을 형성해왔는지를 알면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장정일은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 민족, 섹슈얼리티, 병리학>을 서평하며 민족주의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는지 폭노합니다. "이 땅의 민족주의가 갖는 특징은 "민족의 핵심적 지표로 인종적 순수함"을 내세우는 것이다. 바로 그 인종적 순수함이라는 근대화 이데올리기 속에 개혁되고 시정되어야 할 정치적, 경제적 차이와 대립은 번번이 무화되고 통합과 화합이라는 두루뭉술한 상투어 속에 실종한다"(장정일의 공부 中에서). 일제하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신화화한 민족 담론은 단군이라는 이름을 유발나게 칭소하기도 하는데, <종횡무진 한국사>는 우리가 시조로 숭상하는 '단군'이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주하여 한반도 원주민을 복속시킨 중국인일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종횡무진 한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역사 상식을 뒤흔듭니다. 아마도 불편함과 거부감을 느낄 독자가 많을 것입니다. 바로 어제가 6.25한국전쟁의 65주년이었는데, 우리나라 보수 우익이 국부로 떠받드는 '이승만'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계신가요? 재평가받는 인물 중에 이승만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종횡무진 한국사>가 밝히는 역사의 진실은 충격을 넘어 경악의 수준입니다. 이승만이 정권을 정악한 것이 한반도 전체로 볼 때 얼마나 크나큰 불운이었는지 폭로하는데, 한반도의 통일을 더 집요하게 반대한 인물이 바로 권력욕에 물든 이승만이었다는 사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분단을 바랄 수밖에 인물이 우리 정치를 이끌었다는 사실은 분노를 넘어 깊은 좌절감에 빠져 들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두 집권 세력이 '정권 수호의 차원에서' 전 국민을 볼모로 잡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남한과 북한은 아무런 전통성도 없는데다가 자질에서도 문제가 많은 자를 지도자로 선택함으로써 결국 파멸을 자초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 책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질 없는 지도자를 향한 분노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아프게 가슴에 새겨진 한마디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역사는 숱한 고통을 겪고 무수한 고비를 넘겼으면서도 혁명의 진통이 없었다.
혁명의 본질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혁명은 세계 어디서나 구체제를 무너뜨리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우리 역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단절의 계기가 여러 차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구체제와의 단절을 경험한 적이 없다.
한마디로 혁명이 부재한 역사다.
그렇게 보면 우리 민중처럼 지배층의 잘못에 너그러운 경우도 보기 드물다.
다른 나라라면 얼마든지 쿠테타나 민중의 반란으로 지배층이 교체되어야 마땅했을 상황에서도
우리 역사에서는 좀처럼 그런 현상을 찾아볼 수 없으니까(2권, 515).
"민중은 무능한 지배층을 언제나 그대로 놔두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읽어도 참 기가막힙니다.
고려의 현종과 조선의 선조가 북쪽(거란)과 남쪽(일본)의 외침을 맞아 각기 남쪽(나주)과 북쭉(의주)으로 도망쳤을 때도 왕조는 바뀌지 않았다. 고려의 무신정권과 조선 인조 정권이 백성들을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갔을 때도 왕실은 다시 나와 멀쩡히 권력을 이어갔다. 대한제국의 고종이 을사보호조약을 나 몰라라 하고, 순종이 한일합병조약을 물리치지 못했을 때도 우리 민중은 복종하고 나중에는 그 못난 왕들이 죽었을 때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모여 애도해주었다. 해방 후에 친일파를 단죄해야 할 때도, 이승만이 한국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약속을 팽개치고 한강 인도교를 끊으며 도망쳤을 때도, 박정희 유신독재가 끝난 뒤 신군부의 군부독재가 계속 되었을 때도 민중은 무능한 지배층을 언제나 그대로 놔두었다(2권, 515-516).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한마디로 역사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원리는 반복된다는 걸 알면서도, 역사를 통해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바로잡는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혁명도 있을 수 없었고 혁명이 부재했기 때문에 지배층의 그런 작태를 우매하게도 계속 용납해 왔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혁명이 부재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역사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종횡무진 한국사>는 10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책입니다. 무거워서 들고다니며 읽기도 불편한 책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지루하기만 했던 역사는 잊어도 좋습니다. 역사가 이렇게 재밌을 수도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단, 우리가 가진 일반적인 역사 상식을 뒤흔들기 때문에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거부감으로 얼마든지 이 책을 비판하라고 오히려 촉구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의심하고, 재검토하고, 비판하는 과정 가운데 우리 역사가 바로 세워지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100% 동의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다면 더욱 비판적인 시각으로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역사가 재밌습니다. 그것만은 확실히 보증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