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구를 타고 5주간 ㅣ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2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쥘베른 걸작선
<기구를 타고 5주간>은 모험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전설적인 이름으로 기억될 쥘 베른의 첫 번째 소설입니다. 수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80일간의 세계일주>가 바로 이 작가의 작품입니다. <기구를 타고 5주간>은 출판되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고, 덕분에 당시 35세였던 작가는 재정적으로 독립하여 소설 집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436).
그런데 이런 문학사적(?) 의미를 걷어내고 1863년에 출판된 모험소설을 2015년에 다시 읽으니 솔직히 재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우선 스릴러 영화광들에게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작품만큼이나 중요한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해설을 맡은 빅터 코헨은 "쥘 베른은 이 세상에 'SF'(Science Fiction)를 가져다주었다"고 평가합니다(426). SF의 효시이며 전설적인 SF 걸작은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인줄 알았는데, <기구를 타고 5주간>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할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험소설 작가들도 모두 베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평합니다(426).
"나는 내 길을 가는 게 아니다. 내 뒤에 생기는 것이 나의 길이다"(19).
<기구를 타고 5주간>은 세 영국인의 아프리카 탐험 여행입니다.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새뮤얼 퍼거슨 박사, 그의 친구이자 사냥꾼인 딕 케네디, 퍼거슨 박사의 하인인 조 윌슨이 그 주인공으로, 함께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 중앙부를 횡단하는 탐험 여행에 나선다는 것이 줄거리입니다(436).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횡단하는 목적은 2가지입니다. 아프리카 탐험에 나선 선구자들의 성과를 연결하여 하나의 커다란 성과로 정리하는 것, 아프리카 대륙의 심장부라고 알려진 나일 강의 발원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24).
기구 여행을 계획한 퍼거슨 박사의 대담한 계획에 기대와 환호가 쏟아지기도 하지만, 무모한 시도라며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딕 케네디만 해도 (결국 그와 함께 여행에 나서기는 하지만) 퍼거슨 박사의 탐험 여행을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나일 강의 발원지를 발견하는 일이 과연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아프리카 탐험이 인류의 행복에 얼마나 도움이 된단 말인가... 아프리카 원주민이 문명인의 대열에 들어오면 행복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유럽에 비해 아프리카에 문명에 없다는 것은 확실한가.. (...) 물론 아프리카 횡단이 언젠가는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성공은 훨씬 덜 위험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49).
기구를 타고 아프리카 중앙부를 횡단하겠다는 계획은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해도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습니다. 바람이 원하는 방향대로 불어주느냐, 식량과 물이 제대로 공급될 수 있느냐 뿐 아니라, 아프리카 원주민의 공격과 야생동물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내느냐 등 그들 앞에 버티고 있는 통제할 수 없는 문제들이 이 여행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구를 타고 5주간" 동안 벌어지는 아프리카 탐험 여행, 독자들은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과 박진감을 기대하겠지만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듯합니다. 우리는 그보다 쎈 모험을 많이 경험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문학적 상상력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학이 막 태동하기 시작한 1863년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적대적이고 공포에 사로잡힌 원주민들의 습격이 계속되고, 열병에 걸리기도 하고, 기구를 타고 날며 폭풍우를 견뎌내기도 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바람이 순조롭게 불기를 기다려야 하고, 코끼리 상아에 닻이 걸려 끌려가기도 하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 퓨마, 승냥이를 경계해야 하고, 공격을 피해 날아오르기 위해 기구에 있는 식량과 무기를 모두 버려야 하기도 하고, 기구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누군가 몸을 던지는 희생도 감행해야 하는 등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숱하게 넘기며 기구가 너덜너덜해지도록 계속되는 그들의 위험천만한 탐험과 도전이 좀더 입체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나일 강의 발원지는 바다처럼 호수 안에 있었어. 거기서 나일 강이 태어나지. 이것으로 나일 강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도 사라질 거야. 강의 왕인 이 나일 강의 발원지는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많았으니까. 옛날 사람들은 이 강을 바다라고 불렀고, 태양에서 직접 흘러온다고 믿었지"(191).
쥘 베른이 이 세상에 'SF'를 가져다 주었다고 평가되는 것은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계몽적 과학주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탐험여행이라고 하면 신비가 모험이 가득한 세계를 '상상'하게 되는데, 쥘 베른의 기이한 여행들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토대 위에 미래 사회에 대한 예측이 숨어 있습니다. 과학의 시대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하는 시대에 계몽적 과학주의 색채가 짙게 배어 있는 이 작품에서 탐험가이면서도 과학자이기도 한 퍼거슨 박사와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만나는 장면은 참 의미심장합니다. 둘 다 목숨을 걸고 아프리카 땅으로 걸어들어간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사는 선교사와 눈에 보이는 세계 안에 사는 과학자, 이 책은 이 둘이 서로를 의지하고 있지만 이 둘에게 닥칠 운명을 미리 내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문학사적 의미를 걷어내면 2015년의 독자가 읽기에는 재미 없는 책입니다. 그러나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작품을 보지 않고서는 스러물의 역사를 논할 수 없듯이,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SF적 탐험소설을 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