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즐기고 보련다 - 75세 도보여행가의 유쾌한 삶의 방식
황안나 지음 / 예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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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 도보여행가의 유쾌한 삶의 방식, 일단은 즐기고 보련다"

 



75세. 누군가는 삶의 정리해야 할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런 분들에게 "끊임없는 열정과 호기심으로 매일 새로운 길을 향해 걷고 있는" 75세의 도보여행가를 소개합니다. 그녀의 본격적인 여행은 산악회에 입회한 60세부터입니다. 교직생활 퇴임 후에, 동네 산을 오르다가 60세에 산악회에 입회합니다. 이후, 한 해 동안 매주 산행하다시피 하며 전국의 산을 두루 섭렵, 지리산 종주, 65세에 800km 국토종단, 68세에 4,200km 우리나라 해안일주를 혼자서 해내 화제의 인물이 됩니다. 그녀의 도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이름난 길은 물론, 산티아고, 네팔, 홍콩, 몽골, 부탄, 동티베트, 베트남, 발틱 3국, 아이슬란드, 시칠리아 등 50개국의 길을 밟았습니다. 74세에 해안 길 4,400km를 다시 걸어 완주하고, 75세가 된 올해 가을에도 지리산 화대종주에 도전해 자신만의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국토종단기 <내 나이가 어때서?>의 출간으로 66세에 작가의 꿈을 이뤘고, 72세에 쓴 <엄마, 나 또 올게>는 4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대만에서는 문학 분야 1위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젠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도전을 멈춘 인생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할머니입니다. 아니, 그런 분들에게 용기를 주는 할머니입니다. 75세의 도보여행가로 오늘도 낯선 길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할머니는 '젊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젊음은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자세에 있다"(9). <일단은 즐기고 보련다>는 그녀의 도보여행을 따라가며 기록한 일지가 아니라,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삶을 자세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나는 24시간 밤새 잠 안 자고 걷는 100킬로미터 울트라 걷기도 도전해봤고, 정기 도보여행도 여러 번 해봤다. 지리산 종주도 벌써 여덟 번이나 완주했고, 오지 여행도 숫하게 다녔다. 비록 나이는 적지 않지만 뜨겁게 갈망하는 것이 있고 그것들을 내 두 발로 해낼 수 있으니 이만하면 젊지 않은가"(9).

 

 


  


"참으로 여러 곳을 다녔고 지금도 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내게 종종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그만큼 자주, 많은 곳을 다닌다. 지금 나는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본다. 스스로에게 '내가 있는 자리가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해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건강한 두 다리로 내가 꿈꾸는 어디로나 떠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축복이다"(201).

 

 

전국의 이름난 길은 물론 전세계로 도보여행을 다니니 "팔자 좋은 할머니"라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소 엉뚱해보일 만큼 순간 순간의 유쾌함을 즐겼던 할머니는 평생 "가난했지만 서로 다독이며 사랑했던 결 고운 시간들"(115)을 보냈다고 회상합니다. 그러나 그런 인생에도 고난은 있었습니다. 남편은 사업 실패 후 집을 나가 소식이 끊기고, 채권자들이 근무하는 학교로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그렇게 버거운 삶에 지쳐 희망도 삶의 의욕도 잃었던 때가 마흔다섯 되던 해입니다. 그리고 이제 <일단은 즐기고 보련다>라는 제목의 책을 펴낸 할머니는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견디는 일"이라고 인생을 정의합니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희망을 가지고 모든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견디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다는 것"(282)입니다.


75세의 나이에도 도보여행을 멈추지 않고 지리산 종주도 해내니 사람들은 할머니가 무쇠 덩어리 철인인줄 아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도 내 나이만큼 아프다"고 고백합니다. "나이만큼 저도 아픈 곳이 많아요. 툭하면 허리가 결리고 엉치뼈도 아프죠. 그럼에도 떠나는 거예요. 느리고 무겁지만 천천히 한 걸음씩 걷다 보면 마법처럼 도착지에 와 있어요"(111). 척추 협착증, 목 디스크 등으로 고생하는 할머니는 "아프지 않아서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비명 지를 정도로는 아프지 않으니 견디면서 다니는" 거랍니다(163).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나마 나만의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할머니는 지금도 매일 새벽 5시 40분이면 어김없이 헬스장으로 향합니다. 햇수로 15년째 계속되는 할머니의 일상입니다.



뭐라 호칭해야 할지 몰라 어쩔 수 없이 '할머니'라고 불렀지만 할머니라고 부르기가 미안해지는 분입니다. 아니 '할머니'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합니다. 제게는 황안나 도보여행가와 같이 모두가 늦었다고 포기할 때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여 지금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60세 야간고등학교 등록을 시작으로 72세의 나이에 박사학위 논문을 끝내기까지 아버지는 이젠 늙었다고 자포자기하지도 않으시고, 환경을 탓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비싼 등록금 내가며 그 나이에 박사학위는 따서 무엇하려고 하느냐, 차라리 그 돈을 모두 모아 자식들에게 남겨주자" 어머니가 간곡하게 만류하셨을 때도, 아버지는 꿈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조용히 말했을 뿐입니다. 우린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아버지보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아버지가, 살았으나 죽은 듯이 사는 아버지보다 정말 사는 것처럼 사는 아버지가 더 필요하다고 응원하며 힘을 실어드렸습니다. 아버지를 보며 꿈이 있는 인생이 이렇게 힘이 세구나 느꼈습니다. 75세 황안나 선생님을 보면서는 유쾌한 삶의 자세가 얼마나 놀라운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너'도 바꿀 수 없고, '환경'도 바꿀 수 없고, 단지 '나'를 바꿀 수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 삶에 내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면, 환경을 바꾸려고 발버둥을 칠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도보여행가의 삶이 부럽다고 무작정 길 위로 따라나설 것이 아니라, 먼저 나의 삶을 자세를 점검하고 바꿀 필요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오늘의 나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선물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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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서 - 뇌과학의 살아있는 역사 에릭 캔델 자서전
에릭 R. 캔델 지음, 전대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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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를 위한 새로운 정신과학 입문서"를 목적으로​ 집필된 책

<기억을 찾아서는> 2000년 가을, 뇌의 기억 저장에 관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릭 캔델의 자서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009년에 초판되었는데 이번에 디자인을 새롭게 하여 새로운 개정판으로 독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만큼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여전히 의미 있는 독서라는 방증이 아닐까요.

<기억을 찾아서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합니다. 홀로코스트라는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건너온 생애도 극적이지만, 저자의 삶의 여정 사이로 지난 50년 동안 정신에 대한 연구에서 일어나 특별하고도 혁명적인 과학적 성취의 역사, 구체적으로 생물학의 극적인 발전이 촘촘하게 교차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노벨상 수상자들은 자서전을 쓰라는 권유를 받는다"고 합니다. 에익 캔델은 이러한 권유를 받아들이며 "과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를 위한 새로운 정신과학 입문서"(18)를 목적으로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 한 과학자가 걸어온 50여 년의 연구 여정 속에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뇌의 생물학 역사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기억이 제공하는 정신적 시간 여행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개인사를 알지 못할 것이며, 우리 삶의 찬란한 이정표로 작용하는 기쁨의 순간들을 회상할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인 것은 우리가 배우고 기억하는 것들 때문이다"(29).

치매 환자나 메멘토와 같은 영화들은 "기억"이 우리의 자아감을 형성하는 토대임을 보여줍니다. 기억은 우리 삶의 연속성을 제공하며, 공유 기억이 우리 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것처럼, 기억 상실은 우리의 자아감을 파괴합니다(29). 또한 '정신의 생물학' 분야 최고 권위자인 저자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회상하는 일을 "일종의 시간 여행"이라고 표현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일종의 시간 여행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차원들로 자유롭게 이동한다"(21). 자서전은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뇌에 기억이 저장되는 신경학적 메커니즘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통해 그렇게 전혀 다른 차원들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기억'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도 극적으로 재현합니다.

저자의 자아감을 형성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 가장 강렬한 기억은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 "이틀 후, 이른 저녁에 우리는 아파트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다. 나는 그 쾅쾅거리는 소리를 지금도 기억한다"(22). 1938년 크리스탈나흐트에 대한 기억, 저자는 "빈에서 보낸 그 마지막 한 해에 내가 경험한 당황과 궁핍과 굴육과 두려움은 그 시기를 내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나치 치하의 빈에서 벌어진 광경은 "인간 행동의 어둡고 가학적인 면을 처음으로 보여 주"었고, 저자에게 수수께끼같은 의문을 남겼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갑작스럽고 악랄한 잔인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떻게 교육 수준이 높은 사회가 한 민족 전체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행동과 가혹한 정책들을 그토록 신속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48)

 

이러한 저자의 의문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현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는 역사학자가 될 작정을 합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한 여성과의 교제를 통해 정신분석으로 옮겨지고, 정신분석에 매료된 저자는 "인간의 동기와 사고와 행동의 비합리적인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개인적인 기억의 층들을 하나씩 벗기는 데 집중하는"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합니다. 그렇게 진학한 의대에서 생물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을 접하게 되면서 "학습과 기억의 신비를 생물학을 통해 탐구할 생각을 품기 시작"합니다.

저자의 관심과 호기심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잘게 쪼개집니다.

 

정신은 세계에 대한 앎을 어떻게 얻는가?

정신은 얼마만큼 대물림되는가?

선천적인 정신 기능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정해진 방식으로 경험하게 하는가?

우리가 학습하고 기억할 때 뇌에서 어떤 물리적 변화들이 일어나는가?

몇 분 동안 지속되는 경험이 어떻게 평생 유지되는 기억으로 전환되는가?

 

그리고 정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통찰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정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실험과학인 천문학, 물리학, 화학의 놀라운 성과들에 자극을 받아 행동을 연구하기 위한 실험적 방법들을 고안하기 시작했다"(60). 그리고 저자가 왕성한 호기심으로 연구의 첫 걸음을 뗄 때에 그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을 제안을 받습니다. 그런드페스트로부터 "정신을 이해하려면 뇌를 한 번에 세포 하나씩 관찰할 필요가 있다"(77)는 조언을 들은 것입니다. "한 번에 세포 하나씩!" 이러한 연구 방법에 결국 그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주게 됩니다.

 

<기억을 찾아서>는 이렇게 시작된 저자의 연구 여정과 함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생물학의 극적인 발전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최초로 실험에 성공하여 미칠 듯이 행복해하는 과학자의 모습과 연구 방법을 놓고 동료와 갈라서고 반대에 부딪히는 등 갈등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노벨상을 목에 건 군소 사진이 인상적입니다(위의 두 번째 이미지). 이 한 장의 사진은 에릭 캔델의 연구 성과를 집약하여 보여줍니다. 저자는 "적은 수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단순한 신경 회로가 단순하지만 교정 가능한 행동을 통제하는 사례를 구현하고 있는 실험동물을 물색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아마도 환형동물이나 파리, 달팽이 따위의 무척추동물이 적당할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동물이 좋을까? 그가 선택한 실험동물은 가장 단순한 뇌를 가진 군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에서 그는 동료와 갈라섭니다. 그의 선택은 당시 조류를 거스르는 일이었고, 신경생물학 분야의 많은 선배 과학자들도 그를 말렸지만, 그는 "학습의 생물학적 토대를 우선 개별 세포의 수준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확신"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동물의 매우 단순한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 접근법이 성공을 가져올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믿었다"(165).

 

에릭 캔들은 갈등과 불안으로 얼룩진 이 위기 상황을 결혼을 통해 통해 얻은 경험적 교훈으로 이겨냅니다. "그 경험으로부터 나는 차가운 사실에만 근거해서는 결단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사실은 흔히 불충분하니까 말이다. 궁극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무의식, 본능, 창조적 충동을 신뢰해야 한다. 나는 군소를 선택하면서 또 한 번 그렇게 했다"(171).

 

이러한 뚝심으로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간 끝에, 드디어 기억과 학습 과정을 세포 단위에서 규명해 내는 데 성공합니다. "1968년 가을의 어느 오후, 나는 혼자 실험하면서 세포 하나를 자극했고, 강력한 아가미 수축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군소에서 특정한 행동 하나를 통제하는 운동뉴런 하나를 최초로 확인한 순간이었다!"(223)

 

 

곱씹을수록 <기억을 찾아서>는 어마어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 심리학, 정신분석, 뇌의 생물학이 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과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를 위해 새롱누 정신과학 입문서를 쓰고자 했지만 그렇게 녹록한 책은 아닙니다. 그의 다른 책 <통찰의 시대>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그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긴 '빈'의 생활을 읽으면 나도 빈과 사랑에 빠지는 느낌이 들고, 정신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뭔가 기계적인 느낌을 갖기 쉽지만, 철학, 심리학, 정신분석, 뇌의 생물학을 오가는 저자의 통찰과 정교한 실험 이야기에는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저자의 말처럼, 인간의 정신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는 21세기 과학의 중심적인 과제입니다. <기억을 찾아서>는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정신 생물학의 역사를 추적합니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난 기분입니다. 뇌의 생물학, 정신 생물학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독자라 해도 지적인 충족감을 충만하게 느껴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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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페루 - 신이 숨겨둔 마지막 여행지
이승호 지음 / 리스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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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숨겨둔 마지막 여행지,

언젠가는​, 페루

 

 

​자신만의 추억의 장소, 남들은 잘 모르는 나만의 아지트를 가진 사람이 참 부럽습니다. 특정 지역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더 부럽고요. 그리워하는 곳이 있고, 그곳에 가면 고갈되었던 에너지가 채워지는 그런 장소를 저도 갖고 싶은데 그렇게 풍덩 빠져드는 곳을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가 참 부럽습니다. 어려서부터 축구에 푹 빠져 지냈고, 그렇게 빠져든 축구에 대한 관심으로 스페인과 영국에서 오랜 시간 유학했고, 그 애정이 이제는 남미로 이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 열혈 청년이 페루를 직접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을 엮은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꽃보다 청춘​ 따라잡기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페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얼마 전 방영되었던 '꽃보다 청춘", 페루편 때문입니다. 저런 친구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을 만큼, 윤상, 유희열, 이적, 세 사람의 케미가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동갑친구인 걸로 알고 있는 유희열 씨의 여행이 신선한 자극이 되었습니다.

 

 

"라마를 유명 관광지인 쿠스코나 마추픽추, 또는 남미의 다른 국가로 가기 위한 관문쯤으로 여기고 허둥지둥 지나친다면 페루 여행에서 대단히 불운한 일이다"

 

페루는 여유를 가지고 떠나야 할 나라입니다. 역사의 숨결이 짙게 베어든 이색적인 라틴아메리카의 문화, 아름다운 자연 경관 등 놓치지 말아야 할 볼거리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페루>를 따라 페루 땅을 구석구석을 돌아보다 보면 오히려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열혈 청년의 여행이라 그 걸음을 내가 다 따라잡을 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차분한 여행으로 이끌어주었습니다. 도시를 가득 메운, 먼지 섞인 안개 속으로 몸을 던지기도 하고, 주말에 한가롭게 광장 벤치에 앉아 리마 사람들이 어떻게 주말을 보내는지 유심히 관찰해보기도 합니다.

 

 

 

"페루는 잉카제국의 영광, 수탈로 얼룩진 식민시대, 녹록하지 않은 현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환상이 모두 섞여 민중의 삶 속에 절묘하게 반영된 곳이다"​

 

이 책을 보기 전까지, "페루" 하면, 산 끝에 세운 태양의 도시 마추픽추나 신이 그린 우주의 도형이라는 나스카 라인이 가장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는, 페루>는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북이지만 여행의 단편적인 정보보다는 페루의 멋과 맛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페루의 속살 같은 문화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줍니다. 여행자를 위한 가이드도 잊지 않으면서, 선진국의 풍요는 라틴아메리카를 수탈한 결과라는 것, 찬란했던 잉카제국의 궁전과 신전을 부수고 침략자들이 세운 건축물이 페루의 상징이 되고, 심장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잉카 문명을 멸망시킨 침략자가 페루의 심장에 잠들어 있다는 것, 페루의 정치나 피부로 느껴지는 빈구격차의 문제 등도 차분하게 이야기해 나갑니다.

 

 

 

"나홀로 여행은 페루의 숨결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완벽한 여행이 될 수 있다"

 

<언젠가는, 페루>는 이야기가 있는 가이드북입니다. 챙겨야 할 물건, 잊지 말아야 할 에티켓, 조심해야 할 행동, 밤에만 만날 수 있는 아름다움, 여행지에서 나를 잊게 하는 광란의 질주, 미스터리로 가득한 유적, 잉카제국의 번영이 시작된 길, 강직했던 잉카인들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건축물 등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지금 페루 땅을 걷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만듭니다. 페루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며 공부한 듯한 느낌이랄까요.

 

좋은 여행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합니다. <언젠가는, 페루>를 따라 미리 떠난 페루 여행이 그런 기대감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페루 여행이 내게 터닝 포인트가 되어줄까 하고 말입니다. 나에게 줄 선물로 페루 여행을 계획한다면,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음미하듯 페루와 만나는 느린 여행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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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경영 - 상 - 상위 1%를 위한 글로벌 교섭문화 백서
신성대 지음 / 동문선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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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경영. 이 말의 의미가 우리 사회에 요즘처럼 절실할 때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땅콩리턴으로 불거진 재벌의 수퍼갑질 행태는 우리 사회 기업인들의 품격과 경영 마인드가 어느 수준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주었습니다. 더구나 이 사건은 '희대의 땅콩리턴'이라며 해외에서도 대서특필 되었는데, 외국인들이 조롱의 의미를 담아 쏟아내는 패러디를 보면 이게 웬 국제적인 망신인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두께감이 입이 떡 벌어지는 <품격경영>은 마치 땅콩리턴과 같은 사건을 미리 예견이라도 한 듯, 글로벌 매너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저자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가르쳐주는 글로벌 매너 매뉴얼입니다. 처음에 책 제목만 보았을 때는 땅콩리턴의 주인공 조현아 씨가 목소리를 높였던 '서비스 매뉴얼'처럼 우리가 몸에 익혀야 할 글로벌 매너가 백과사전식으로 매뉴얼화 되어 잇는 책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그런데 <품격경영>은 매뉴얼이기도 하면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따끔한 질책이기도 합니다. 단순히 정보를 전달해주는 건조한 어조가 아니라, 국제 사회의 '격'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에 쓴소리에 진심어린 호소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여기 재밌는 글이 있는데, 저자의 이러한 기술방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들도 많았는가 봅니다. 저자는 그런 독자들에게 또 이렇게 일갈합니다. "품격을 논하는 글이 왜 품격이 없느냐며, 또 이왕이면 쓴소리라도 조금 달게 해주지 그러느냐고 투정들을 부리는가 하면, 잘난 체한다거나 "그럼 그런 말하는 너는?" 해가며 성직자에게나 요구해야 할 법한 잣대를 들이대며 담론 자체를 훼방 놓으려 들기 일쑤다"(29).

 

 

 

 

 

 

"아직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대화만이 소통인 줄 알고 있다. 하여 어떤 경여자는 혁신의 마지막 퍼즐이 소통이라며 경청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나 경청은 수많은 소통 도구 중의 하나일 뿐, 진정한 소통은 매너에서 나온다. 매너 없인 혁신 없다"(상권, 347).

 

<품격경영>은 문화와 품격이 받쳐주지 않으면 국민소득이 4만 불을 넘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서비스 산업을 선진국 수준으로 육성하지 않으면 국민소득 4만 불은 언감생신이라는 것입니다. 글로벌 무대는 고품격 매너로 승부해야 하는 전장터라는 것입니다. 한국이 글로벌 금융 무대에 발도 못 디디고, 수많은 인재들이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도 글로벌 무대에 발도 제대로 못 디뎌 보고 국내로 쫓겨 들어오는 것도 글로벌 매너, 즉 품격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라고 단언합니다. 저자는 글로벌 비지니스 전사로서 갖추어야 할 정품격 매너의 기본기부터 철저하게 익히라고 조언합니다.

 

 

 

 

 

 

"글로벌 매너란 글로벌 마인드로 세상을 보는 시야와 상대방에 대한 인식, 그리고 당당히 대우받기 포함 전인적 소통 능력, 협상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하권, 1102).

 

상, 하권으로 이루어진 <품격경영>은 굉징히 두꺼운 책이지만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저자의 표현이 직설적인데다 국제적으로 나라 망신이다 싶으면 거의 욕설 수준으로 비난을 하는데, 그 과격함이 (이런 표현 죄송하지만) 귀엽기도 하고 때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야박하게 느껴지도 합니다. 국가 의전에서부터 TV 예능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사회 다방면 구석구석을 진단하는데, 어떤 이야기들은 정말 낯뜨겁고, 어떤 이야기들은 "글쎄~ 이런 것까지 글로벌 매너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만큼 글로벌 매너에 무지하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진단하기를 한국은 어글리 매너의 표본국이라고 하고, 이 책을 통해 자신의 글로벌 매너 점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해보라고 합니다. 자신의 글로벌 매너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이 책으로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저자의 독설에 깜짝 놀랄 수도 있으니 마음의 각오는 단단히 다져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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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 저만치 혼자서 Alone Over There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85
김훈 지음, 크리스 최 옮김, 전승희.니키 밴 노이 감수 / 도서출판 아시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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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하면서도 탐미적인 역설의 문체"

 

 

글쓰기 훈련의 한 방법으로 필사가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신경숙 작가도 그렇게 누군가의 책을 필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랐던 작가가 '김훈'이었습니다. 만일 나도 필사에 도전한다면 '김훈' 작가의 글을 베껴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홍수 문학평론가는 김훈 작가의 문체를 "건조하면서도 탐미적인 역설의 문체"(96)라고 표현합니다.

 

"김훈 소설이 건조한 기사문 투로 인간의 비루한 밥벌이와 생로병사를 산문적으로 담아낼 때, 시적 울림이 증폭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는 흔이 이 '시적 울림'을 심미적인 독서 체험으로 환산하면서 김훈 소설의 탐미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자리에서 김훈 소설의 거절하기 힘든 아름다움을 생성시키는 것은 인간 삶을 바라보는 특유의 위상학일지도 모른다"(98).

 

만일 어떤 작가의 글을 필사하며 그 작가의 문체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제일 먼저 김훈 작가가 건조한 기사문 투의 글이지만 그 사이로 시적 울림이 증폭되는 문체를 흉내내보고 싶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들입니다.

 

"여러 세기들의 저녁에 라인 강은 노을 속을 흘러서 하늘에 잠겼는데, 퉁퉁 불은 사체들과 전쟁 쓰레기들이 뒤엉켜서 물과 하늘이 닿은 그 너머로 흘러갔고 덜 죽은 말들이 떠내려가면서 울었다"(10).

 

 

 

이 책은 도서출판 '아시아'에서 한국 대표 소설을 엄선해 국내외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기획자는 "문학을 통해 아시아의 정체성과 가치를 실피는 데 주력해 온 아시아는 한국인의 삶을 넓고 깊고 이해하는 데 이 기획이 기여하기를 기대"한다고 취지를 설명합니다. 우리 문학을 알리고자 번역에도 공을 들여 한영대조판으로 출간했는데, 우리 소설을 영문으로 읽어보는 재미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저만치 혼자서>는 호스피스 수녀원에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 수녀들의 마지막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철새가 떠나고 돌아오는 충청남도 바닷가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수녀들의 삶과 죽음도 순환하는 자연의 한자락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성녀 마가레트 수녀원'이라는 정식 명칭이 있었지만, 저절로 '도라지 수녀원'이라고 이름이 바뀐 것처럼 말입니다.

 

"누군가가 죽어서 매장을 할 때 수녀들은 묘지에서 도라지꽃을 보았다. … 도라지는 삶에서 죽음으로 번지면서 건너가는 이 호스피스 수녀원의 이름으로, 저절로 그렇게 되어졌어요. 그래서 '도라지'는 이름이라기보다는 잠이나 숨 같은 것입니다, 라고 오수산나 수녀는 설명했다. 보라색 꽃도 정처 없는 색감으로 흔들리면서 보라 저 건너편의 검은색 쪽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다들 보이시지요? 그래서 보래색 꽃이나 하얀 꽃이나 차이가 없는 것이겠지요, 라고 오수산나 수녀는 말했다"(22).

 

거룩과 순결의 이름으로 한편생 남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았던 수녀들이지만, 낡고 병든 몸은 가끔씩 대소변을 지리기도 합니다. 대소변을 지린 속옷을 세탁부에게 주지 못하고, 팔목에 힘이 없어서 짜지도 못한 빨래를 손수 빨아 널지만, 빨랫줄에 널린 속옷에는 덜 빠진 오물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몸이 젊었을 때 나환자촌에서 씻겨주던 환자들의 몸처럼 느껴지는 시간들,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시간들,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수녀들의 날들이 길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시간들, 삶에서 죽음으로 번지듯이 건너가는 그 시간들. 홀로 그 마지막 시간을 다 건넜을 때, 늙고 병든 몸은 복도 바닥에 쓰러진 사체로 발견되고, 침대에는 오물이 묻어 있고, 뺄랫줄에는 속옷이 널린 채였습니다. 마지막 숨결이 빠져나간, 작고 가볍고 꼬부라져서 늙은 태아 같은 몸은 도라지동산으로 옮겨져 흙으로 돌아갑니다.

 

"김훈의 <저만치 혼자서>는 생로병사의 시간을 건너가는 개개 인간의 운명을 저만치 핀 도라지꽃의 색, 조개무덤 너머의 시공을 건너온 가창오리뗴의 울음, 빨랫줄에 널린 속옷의 얼굴 옆에 놓아두면서 그렇게, 냉혹하고 무심한 사실의 자연 앞에서 소설의 언어를 멈춘다"(104).

 

오늘 제 일정표에 의하면, 이 글을 어서 쓰고 장례식장에 다녀와야 합니다. 동료의 남편분이 간경화로 소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은 봄이 여름이 되고 여름이 가을이 되고 가을이 겨울이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자연스러움이 더 냉혹하고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저항조차 할 수 없게 하니까요. 오늘 장례식장에 가면 저도 김훈 작가처럼 덤덤할 수 있을까요. 김훈 작가는 애써 울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덤덤하게 장례식장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저만치 혼자서 오래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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