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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서 - 뇌과학의 살아있는 역사 에릭 캔델 자서전
에릭 R. 캔델 지음, 전대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평점 :

"과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를 위한 새로운 정신과학 입문서"를 목적으로 집필된 책
<기억을 찾아서는> 2000년 가을, 뇌의 기억 저장에 관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에릭 캔델의 자서전입니다. 우리나라에는 2009년에 초판되었는데 이번에 디자인을 새롭게 하여 새로운 개정판으로 독자를 찾아왔습니다. 그만큼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고, 또 여전히 의미 있는 독서라는 방증이 아닐까요.
<기억을 찾아서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합니다. 홀로코스트라는 참혹한 역사의 현장을 건너온 생애도 극적이지만, 저자의 삶의 여정 사이로 지난 50년 동안 정신에 대한 연구에서 일어나 특별하고도 혁명적인 과학적 성취의 역사, 구체적으로 생물학의 극적인 발전이 촘촘하게 교차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노벨상 수상자들은 자서전을 쓰라는 권유를 받는다"고 합니다. 에익 캔델은 이러한 권유를 받아들이며 "과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를 위한 새로운 정신과학 입문서"(18)를 목적으로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 한 과학자가 걸어온 50여 년의 연구 여정 속에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뇌의 생물학 역사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기억이 제공하는 정신적 시간 여행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개인사를 알지 못할 것이며, 우리 삶의 찬란한 이정표로 작용하는 기쁨의 순간들을 회상할 길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인 것은 우리가 배우고 기억하는 것들 때문이다"(29).
치매 환자나 메멘토와 같은 영화들은 "기억"이 우리의 자아감을 형성하는 토대임을 보여줍니다. 기억은 우리 삶의 연속성을 제공하며, 공유 기억이 우리 개인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것처럼, 기억 상실은 우리의 자아감을 파괴합니다(29). 또한 '정신의 생물학' 분야 최고 권위자인 저자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회상하는 일을 "일종의 시간 여행"이라고 표현합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은 일종의 시간 여행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차원들로 자유롭게 이동한다"(21). 자서전은 과거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뇌에 기억이 저장되는 신경학적 메커니즘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억을 통해 그렇게 전혀 다른 차원들로 자유롭게 이동하며 '기억'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도 극적으로 재현합니다.
저자의 자아감을 형성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 가장 강렬한 기억은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시작됩니다. "이틀 후, 이른 저녁에 우리는 아파트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다. 나는 그 쾅쾅거리는 소리를 지금도 기억한다"(22). 1938년 크리스탈나흐트에 대한 기억, 저자는 "빈에서 보낸 그 마지막 한 해에 내가 경험한 당황과 궁핍과 굴육과 두려움은 그 시기를 내 생애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나치 치하의 빈에서 벌어진 광경은 "인간 행동의 어둡고 가학적인 면을 처음으로 보여 주"었고, 저자에게 수수께끼같은 의문을 남겼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의 갑작스럽고 악랄한 잔인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떻게 교육 수준이 높은 사회가 한 민족 전체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행동과 가혹한 정책들을 그토록 신속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48)
이러한 저자의 의문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현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그는 역사학자가 될 작정을 합니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한 여성과의 교제를 통해 정신분석으로 옮겨지고, 정신분석에 매료된 저자는 "인간의 동기와 사고와 행동의 비합리적인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개인적인 기억의 층들을 하나씩 벗기는 데 집중하는" 정신분석가가 되기 위해 의대에 진학합니다. 그렇게 진학한 의대에서 생물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혁명을 접하게 되면서 "학습과 기억의 신비를 생물학을 통해 탐구할 생각을 품기 시작"합니다.
저자의 관심과 호기심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잘게 쪼개집니다.
정신은 세계에 대한 앎을 어떻게 얻는가?
정신은 얼마만큼 대물림되는가?
선천적인 정신 기능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정해진 방식으로 경험하게 하는가?
우리가 학습하고 기억할 때 뇌에서 어떤 물리적 변화들이 일어나는가?
몇 분 동안 지속되는 경험이 어떻게 평생 유지되는 기억으로 전환되는가?
그리고 정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통찰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정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실험과학인 천문학, 물리학, 화학의 놀라운 성과들에 자극을 받아 행동을 연구하기 위한 실험적 방법들을 고안하기 시작했다"(60). 그리고 저자가 왕성한 호기심으로 연구의 첫 걸음을 뗄 때에 그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을 제안을 받습니다. 그런드페스트로부터 "정신을 이해하려면 뇌를 한 번에 세포 하나씩 관찰할 필요가 있다"(77)는 조언을 들은 것입니다. "한 번에 세포 하나씩!" 이러한 연구 방법에 결국 그에게 노벨 생리의학상이라는 영예를 안겨주게 됩니다.
<기억을 찾아서>는 이렇게 시작된 저자의 연구 여정과 함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신의 생물학의 극적인 발전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최초로 실험에 성공하여 미칠 듯이 행복해하는 과학자의 모습과 연구 방법을 놓고 동료와 갈라서고 반대에 부딪히는 등 갈등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던 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노벨상을 목에 건 군소 사진이 인상적입니다(위의 두 번째 이미지). 이 한 장의 사진은 에릭 캔델의 연구 성과를 집약하여 보여줍니다. 저자는 "적은 수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단순한 신경 회로가 단순하지만 교정 가능한 행동을 통제하는 사례를 구현하고 있는 실험동물을 물색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아마도 환형동물이나 파리, 달팽이 따위의 무척추동물이 적당할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동물이 좋을까? 그가 선택한 실험동물은 가장 단순한 뇌를 가진 군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에서 그는 동료와 갈라섭니다. 그의 선택은 당시 조류를 거스르는 일이었고, 신경생물학 분야의 많은 선배 과학자들도 그를 말렸지만, 그는 "학습의 생물학적 토대를 우선 개별 세포의 수준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확신"이 있었습니다. "단순한 동물의 매우 단순한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 접근법이 성공을 가져올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믿었다"(165).
에릭 캔들은 갈등과 불안으로 얼룩진 이 위기 상황을 결혼을 통해 통해 얻은 경험적 교훈으로 이겨냅니다. "그 경험으로부터 나는 차가운 사실에만 근거해서는 결단할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사실은 흔히 불충분하니까 말이다. 궁극적으로 사람은 자신의 무의식, 본능, 창조적 충동을 신뢰해야 한다. 나는 군소를 선택하면서 또 한 번 그렇게 했다"(171).
이러한 뚝심으로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간 끝에, 드디어 기억과 학습 과정을 세포 단위에서 규명해 내는 데 성공합니다. "1968년 가을의 어느 오후, 나는 혼자 실험하면서 세포 하나를 자극했고, 강력한 아가미 수축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깜짝 놀랐다. 군소에서 특정한 행동 하나를 통제하는 운동뉴런 하나를 최초로 확인한 순간이었다!"(223)
곱씹을수록 <기억을 찾아서>는 어마어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 심리학, 정신분석, 뇌의 생물학이 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과학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를 위해 새롱누 정신과학 입문서를 쓰고자 했지만 그렇게 녹록한 책은 아닙니다. 그의 다른 책 <통찰의 시대>를 읽으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그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긴 '빈'의 생활을 읽으면 나도 빈과 사랑에 빠지는 느낌이 들고, 정신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한다고 하면 뭔가 기계적인 느낌을 갖기 쉽지만, 철학, 심리학, 정신분석, 뇌의 생물학을 오가는 저자의 통찰과 정교한 실험 이야기에는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저자의 말처럼, 인간의 정신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는 21세기 과학의 중심적인 과제입니다. <기억을 찾아서>는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정신 생물학의 역사를 추적합니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난 기분입니다. 뇌의 생물학, 정신 생물학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독자라 해도 지적인 충족감을 충만하게 느껴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