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 이어령의 첫 번째 영성문학 강의
이어령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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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의 언어를 통해서는 경험할 수 없는 영성의 세계!


 

이 책은 신학의 언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영성 세계를, 문학의 언어가 더듬어 찾은 작은 틈새로 살짝 엿보는 책입니다. 그것은 "음악의 한 토막, 함성의 짧은 폭발음, 그리고 찰나의 냄새와 같은 지극히 순간적인 체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작은 틈새로 쏟아져 나오는 "영원한 빛과 생명"에 압도되어 본 사람은 문학이 가진 힘이 무엇인지, 왜 우리가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일 것입니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이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문학이라고 합니다. "모순의 세계를 논리로 설명할 수 없고 법칙으로도 해명할 수 없기 때문에 소설과 시가 있는 것"(62)이라는 이야기지요. 신앙의 세계, 영성의 세계는 인간 이성으로 다 이해되어지고, 논리로 다 설명되어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같이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세계에서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고 기도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는 문학적 상상력이나 시인이나 예술가의 마음이 필요"(12)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어령 선생님은 소설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세상살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그 삶의 민낯을 볼 수 있습니다"(6). 거창하고 큰 이야기가 아니라, 지극히 작은 이야기, 한 집안, 한 도시, 한 가족, 한 소년의 이야기 속에서 잃어버렸던 영성의 세계와 만날 수 있는 것이 문학의 매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의 언어에는 거부감을 가진 독자라도, 소설을 읽은 뒤에 설명 불가능한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의심할 수 없는 신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다섯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영성의 세계, 신앙의 세계, 신의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문학작품 자체는 하나님도 영성도 아니지만, 이것을 통해 볼 수는 있습니다"(10).

총 다섯 편의 문학 강좌를 통해 삶과 죽음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이 책은 혼자 읽었을 때는 미치 깨닫지 못했던 깊은 통찰을 제공하기도 하고, 잘못 해석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해주기도 하고,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던져야 할 진정한 물음은 무엇인지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쉴 새 없이 밑줄을 그어댔습니다. 다섯 편의 소설별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 / 죄인들을 위한 잔치

아무리 나쁜 사람들도 파 뿌리 하나는 있습니다. 이 파 뿌리의 잔치가 열립니다. 우리는 성스러운 성찬식이 아니라 가난한 동네 가나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고, 초대받은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넉넉한 포도주를 주십시다. 서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들의 기쁨의 잔치는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부디 오늘 우리들도 파 뿌리 하나씩 가지고, 끝나지 않은 가나 혼례식에서 주님이 내리시는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77).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 도시인의 내면 풍경과 생명 찾기 ​

그러니까 오늘 <말테의 수기>를 읽는 것은, 그저 문학작품을 읽으라는 게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 굳은 살이 박여 아무리 만져도 느껴지지 않는 그 생명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손을 통해서 긁어보자는 것이지요. 릴케의 손톱으로 피가 나도록 긁어보자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굳은살 속에 말랑말랑하고 아주 여린 여러분들의 생명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108).​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 / 집을 떠난 사람만이 돌아올 수 있다

​아무리 하나님이 붙잡고 행복을 주셔도 인간이란 "이런 행복 다 버리고라도 내 인생을 찾을겁니다.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리 행복해도, 나는 그렇게는 못 살겠습니다. 내가 내 발로 걸어 나가 당신의 동산이 아닌 나의 세계를 만들겠습니다. 내가 택한 것이 비극이고 비운이라 할지라도 이 행복 버리고, 나는 가겠습니다" 하는 존재입니다. 이게 휴머니즘이거든요(190).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 혁명이냐 사랑이냐


증오심으로 뭉친 한 사내가 미리엘 주교가 보여준 사랑에 감화되어 변화하는 이야기입니다.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 없었던들 감옥에서 백번 나왔다고 해서 자유인이 될 수 없지요. 장발장을 자유인으로 만들고 쇠사슬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은촛대의, 영혼을 밝혀주는 빛이었습니다. 이렇게 <레미제라블>은 정말로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길, 로베스피에르 식의 살육과 숙청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지요(277).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  생명이란 이토록 기막힌 것

​​

먹고 먹히는 가열한 생존조건 속, 한시도 두려움과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긴장 속에서 파이는 오히려 서로를 살리고 격려하고 끝내는 사랑과 믿음으로 교감하는 영성을 발견합니다. 모든 생명체가 살고 있는 지구가 작은 구명정으로 축소되고, 그 생명이 한 명의 소년과 한 마리 호랑이라는 결정체로 발견될 때, 우리는 비로소 불신하고 버렸던 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335)​.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 일상 속에서 굳은 살이 박여 아무리 만져도 느껴지지 않는 그 생명을, 소설가의 손톱으로 피가 나도록 긁어보자"고 합니다. 이 책은 문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닙니다. 황량한 영혼, 죄 많고 썩어 냄새가 나는 인간 세상,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존재의 불안과 공포의 민낯​, 무도덕의 무의미 등을 문학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고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가를 추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깊이 와닿았던 부분은 과학과 합리주의가 신을 살해한 후, 오히려 인간은 기계적으로 전락하고 생명이 너무나 하찮게 다루어지면서 죽음마저 너무나 하찮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왜소해지고 가벼워진 우리들의 내면의 황량함,

한마디로 존재 자체가 너무나 빈약해졌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문학이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전율을 느끼고 죽음의 냄새를 맡을 줄도 아는 데라야"(129) 한다는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생에 대한 지독한 목마름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성의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생명을 그냥 소비하며 살기에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는 도구가 아니라 영혼의 갈증을 일으키는 도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을 정말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영생을 구할 수 있습니까? 생이 지겹고 죄스러운 사람이 또 무슨 생을 살아요? 생이 빛나고 아름답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지극히 아름답기 때문에 더 살고 싶고 영생을 얻고 싶은 것이지, 요즘처럼 살래도 살기 싫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부활해서 또 살아요? 그러니까 교회에서든 어디서든 생이 얼마나 멋지고 빛나는 것인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데 미치도록 해야 합니다"(199).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작품에서 나는 영혼의 악취, 죄인의 악취, 부조의 악취, 죽음의 악취를 맡았는데,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생의 환희, 은촛대의 은총, 삶의 불꽃을 더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지독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과 바람, 공기를 갈망하게 되듯 말입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불꽃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 그것을 영성이라 이름붙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영성의 불꽃은 신학의 언어만으로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설교가들이 긴장해야 할 듯합니다. 문학이 이처럼 위대한 설교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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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조정민 지음 / 두란노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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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더 알고 싶습니까? 이미 알게 된 뜻부터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하십시다"(37)​.

기독교 출판 시장에서 '설교집'은 팔리지 않는 책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설교가 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복받은 성도입니다. "이 책은 베이직교회 성도들과 함께 나눈 하나님의 뜻에 관한 아홉 차례에 걸친 주일 말씀을 옮긴 것"(9)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설교집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설교를 매주 듣는 이 교회 성도들은 또 얼마나 큰 복은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인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성도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 이 문제가 내게 닥쳤는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 이것이 궁금한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묻습니다. 조정민 목사님은 이에 대해 아주 심플하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도 분명히 우리에게 계시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기도 합니다. "영적 여정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여정"(16)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너무도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는 고개를 돌리고, 내가 믿는 신이 내 뜻을 이루어줄 의향이 있는가, 없는가만을 궁금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는 세상 종교와 기독교 신앙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의 종교는 내 뜻을 이루어줄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8).​ 내 뜻, 내 소원의 관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크리스천 삶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알려 하기 전에 우리 삶의 태도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 사자의 경고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을 알려 달라고 매달리는 사람이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때가 사실 더 위험합니다. 사탄이 슬그머니 천사로 가장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음성인 것처럼 다가와 우리 귀에 들려주기 때문입니다"(36-37).

이 책에서 밝히는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된,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은 총 9가지입니다. "​행복과 성공을 목표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나 여호와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십니다. 또 너 자신을 향해 질주하지말고 내게로 "돌이키라!"고 하십니다. 돌이키는 것이 살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알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모른 채 열심을 내는 것보다 위험한 게 없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고, 서로 하나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어느 날 하나님의 뜻으로 빨려 들어간 인생을 살았던 사람 바울이" 깨달은 하나님의 뜻 세 가지가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이고(147),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이었던 "증인 되라!"가 하나님 뜻의 완결입니다(215).

"어느 날 하나님의 뜻으로 빨려 들어간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라는 한 문장을 읽는데 제 마음속에 강한 폭발음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젖어 있었던 감정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빨려 들어간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것! 잘나가는 방송인이었으나 주님의 부르심으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조정민 목사님은 구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구원이란 영적 존재가 되어서 인간을, 세상을 죽음을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하는 삶을 말합니다"(237).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는 영적 존재로 부름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매우 선명하고 단순하게 가르쳐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특히 제1편 "거룩하라"는 설교가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내가 추구했던 거룩은 진정한 거룩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조정민 목사님의 설교는 거룩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겨내고 그 속살을 우리에게 펼쳐보여줍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귀에 "서로 사랑하라"고 들려주기 위해, "원수까지 사랑하고"고 가르치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117).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는 어렵지 않지만 깊이가 있습니다. 부정적이지 않지만 매섭습니다. 특히 거룩과 교회됨의 문제에 대해 깊은 통찰과 고민을 한국 교회에 던져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도 적어도 <하나님의 뜻 1강, 거룩하라>라는 설교 말씀은 꼭 들어보시길 권합니다. 몸속에 베리칩이 이식되고 있다며 이 땅의 크리스천들에게 마지막 때를 경고하는 목소리도 높은 이때,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그리고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드려야 할 사명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막연히 하나님의 뜻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분들은 읽지 않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약 4:17)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고 제가 계속 긴장 가운데 있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도우실 줄 확신합니다!

설교 음성 파일 다운로드 받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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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asicchurch.or.kr/%ea%b1%b0%eb%a3%a9%ed%95%98%eb%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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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공식 - 우리의 관계, 미래, 사랑까지 수량화하는 알고리즘의 세계
루크 도멜 지음, 노승영 옮김 / 반니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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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지금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범죄예방국"이라는 기구가 세 예지자의 예지 능력을 활용하여 잠재적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체포하여 범죄를 예방한다는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습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묘사하는 세계에서 범죄자는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도 체포되어 기소될 수"(152) 있습니다. 물론 세 예지자의 예측에 오류의 가능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베경인 위싱턴 DC에서 최근 6년 동안 살인 사건이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152-153) 설정이 범죄예방국의 존재 의의를 보여줍니다. <만물의 법칙>은 '알고리즘'에 의해 영화 속 설정이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알고리즘"이란 컴퓨터 용어이면서 수학용어이기도 한데, IT 용어사전에 의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해진 일련의 절차.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며, 컴퓨터를 동작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입력하고 입력된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며, 얻어진 테이터를 어떠한 형으로 출력, 표시하는가 등의 알고리즘을 프로그램으로 완전히 기술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책의 표지 사진을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알고리즘은 컴퓨터에서 단계별로 진행되는 일련의 명령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 곳곳에 숨겨져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알고리즘이 우리의 정체성은 물론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까지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폭노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언제부터인가 쇼핑몰에서 오는 광고 메일이나, 인터넷 창에 제 실명이 등장하며 "OOO님이 관심을 가질만한 상품입니다"라는 광고가 나타나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컴퓨터 검색 이력이나 페이스북 '좋아요'를 통해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여 제가 좋아할 만한 상품을 예측해낸 것입니다. 2013년 케임브리지 대학 연구진의 연구에 의하면, "미국의 페미스북 이용자 데이터에 알고리즘을 적용하여 인종, 나이, 지능지수, 성적 선호, 성격, 약물 사용, 정치적 성향 등의 특질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51)고 합니다.

 

단순하게 설명하면, 알고리즘을 활용한 만물의 공식이란, 창조성이나 사랑 같이 수량화할 수 없는 것을 수량화해서 "나는 누구인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 "결혼이 깨질 확률은 얼마인가?"와 같은 질문에 답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알고리즘은 매일같이 접하는 정보는 줄 세우고 솎아내고 가려낸다. 구글이 보여주는 검색 결과, 페이스북에서 강조되는 친구 정보,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아마존이 보여주는 제품 뒤에는 모든 알고리즘이 숨어 있다. 영화, 음악, 그 밖의 오락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가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것으로 예측되는지, 심지어 어떤 법이 집행되고 어떻게 치안이 유지되는지도 알고리즘과 관계가 있다. 범죄자가 될지, 운전면허를 발급해도 될지 결정할 수도 있다"(12).

 

만물의 공식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렇게 수량화되고 분석된 예측 결과가 상당히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가게에 안면인식카메라를 설치하면 고객의 얼굴을 스캔하여 페이스북 프로필에서 찾아내, 이들이 누른 '좋아요'를 토대로 맞춤형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어디에서 데이트를 해야 할지, 누구와 결혼해야 할지에 답을 내놓기도 하고, 알고리즘으로 문서 처리를 하면 초급 변호사들이 하던 업무를 더 정확하게 처리할 수도 있고(만물의 공식으로 쓸모 없는 변호사들이 점차 늘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증언이기도 함), 심지어 예술 분야에도 관여를 해 시나리오의 어느 부분을 보완하면 영과가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도 조언해줍니다. 만물의 공식 때문에 대량으로 일자리를 잃을 사람들이 늘어갈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상당히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만물의 공식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세상을 알고리즘화 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도 많다는 것이 책의 설명입니다. 우선, 수량화를 하려면 사용자 데이터와 개인 정보가 무지막지하게 수집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빅브라더, 그러니까 지속적인 형태의 통제 시스템으로 악용될 우려가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데이터베이스 어딘가에서 우리의 활동이 식별되고 기록"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싹합니다. 감시사회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또 다른 문제점은 분석된 데이터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VIP으로 분류된 고객의 전화는 최우선적으로 처리되는 것처럼, 상위 계층 이용자를 위해 특정 계층의 이용자에게 고의로 불편을 끼치는 행위 같은 것입니다.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 기업들은 접속이 몰리는 시간대에, 돈은 많은데 시간이 없는 고객의 편의를 위해 돈은 없는데 시간은 많은 고객의 접근을 차단함으로서 매출 증대를 노리고자 합니다. 알고리즘을 통해 소비자를 여러 범주로 분류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도로에도 이런 차별을 둘 것이라고 하니 미래 사회가 우울한 잿빛으로 덧칠해지는 기분입니다.

 

알고리즘 세계에서 개인은 분할자(dividual)로 바뀝니다. "알고리즘 정령을 실행하려면 개인을 우선 세분화 과정에 종속시켜야 한다. 분석하기에 알맞은 개별 성분으로 분해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은 비분할자에서 분할자로 바뀐다. (...)  분할자 개념은 물리적으로 구체화된 인간이되, 알고리즘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끊임없이 분할되고 데이터 표상으로 환원되는 존재를 일컫는다"(68). 인터넷 검색 이력, 페이스북을 통해 누른 '좋아요', 자주 가는 장소, 즐겨 읽는 독서 분야, 블로그에 자주 쓰는 말, 하루 평균 운동량, 즐겨 먹는 음식과 같은 정보를 한데 모으면 완전히 디지털적인, 알고리리즘적 정체성을 말해줄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데이터가 답을 말해줄 터인데, 컴퓨터 코드가 실제 삶을 이해하는 통찰력을 어느 정도까지 제공해줄 수 있을까요?

 

알고리즘은 아직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적 전망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기술의 발전을 신봉하지요. 컴퓨터에 지배되는 인간 세계가 곧 영화에서만 등장하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싫든 좋든 알고리즘적 절차의 범위가 나날이 커져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는 책을 마치며 "만물의 공식 세상에서 인간성을 지켜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291). 기술의 시대에 더 깊은 윤리적 성찰이 필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만물의 공식>은 이미 시작된 미래 사회의 구체적인 실상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예언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뒷표지에 인용되어 있는) 켄 올레타의 말처럼 "디지털 기술에 의해 변형된 세계와 씨름하며 이를 즐기거나, 혹은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이 읽어야만" 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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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달라지는 아이디어 100 - DSLR & 미러리스 좋은 사진 찍는 포토북 사진 아이디어 시리즈
문철진 지음 / 미디어샘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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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LR & 미러리스 좋은 사진 찍는 포토북

 

 

사진을 잘 찍는 비법 따위는 없다고 믿고 싶은 귀차니스트입니다. 사진을 잘 찍고 싶은 욕심은 있는데 이론을 배우는 것은 귀찮은 것이지요. 이 책은 그런 귀차니스트들이 속성으로 사진 이론을 배우기에 좋은 책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귀차니스트들을 정조준하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아이디어 065 / 매뉴얼 첫 장도 안 펼쳐본 그대, 매뉴얼은 세 번 이상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사진은 노력이며, 끊임없는 관찰이며, 충분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 작업임을 다시 일깨워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이론 없이 타고난 감각(?)에만 기대려 하는 자, 아무리 많은 사진을 찍어도 어느 단계 이상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해봅니다.

 

문철진 작가와는 <DSLR도 부럽지 않은 똑딱이 카메라> 이후 두 번째 만남입니다. 2009년부터 네이버 사진부문 파워블로그라는 그의 명성을 이 책이 다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사진이 달라지는 아이디어 100>은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는 사진과,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는 포인트가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사진을 찍다 보면, 누구나 한 번씩 성장통을 겪는다고 합니다. "사진이 취미이기는 한데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난 정말 사진에 소질이 없는 걸까?" 스스로 의심하게 되는 시기가 바로 성장통의 때입니다. 이 책은 그런 성장통을 겪고 있는 분들에게 사진 실력을 한 단계 높이는 "참고자료" 같은 책입니다. 저자는 "사진이 잘 안 찍힐 때마다 들춰보면서 힌트를 얻"으라고 귀뜸해줍니다.

 

 

 

 

 

095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좋은 사진을 봐야 한다

 

지금 당장 이름을 말할 수 있는 사진가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한 명도 없다면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사진집부터 찾아보자.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일단 좋은 사진을 봐야 한다는 말씀에 백배 공감합니다.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인지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공부가 되니까요. 좋은 사진은 도달해야 할 목표와 나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주는 네비게이션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사진을 보고 있다 보면, 어느 순간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어설프게라도 흉내를 내다 보면 사진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 옵니다. 그래서 전 이 책의 저자 문철진 작가의 사진을 자주 감상합니다!

 

 

 


 

001

사진은 네모로 찍힌다

 

카메라는 세상을 네모로 본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세상을 네모 속에 집어넣는 일이다.

사진가는 세상을 네모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시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글입니다. 저자는 "사진은 창조가 아니라 발견이다. 사진가는 무엇인가를 발견해서 프레임 속에 가둘 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문철진 작가를 만나고 나서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네모로 세상을 보는 훈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036

선은 시선을 끄는 힘이 있다

 

프레임 속에 선이 있으면 사진을 보는 사람의 시선은 그 선을 따라 이동한다.

 

 

<사진이 달라지는 아이디어 100>은 간단하지만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유용한 팁이 가득합니다.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아 더 눈에 쏙쏙 들어오고, 머리에 쏙쏙 박힙니다. 따로 챙겨둔 팁은 이렇습니다.

 

021 눈높이가 달라지면 사진도 달라진다

025 원색은 무조건 찍어라

026 관절은 자르지 마라

027 프레임을 가득 채워라

031 비 내리는 날에는 초록을 찾아라

044 골든타임에는 무조건 카메라를 들어라 (해가 지기 한 시간 전부터 해가 질 때까지가 골든타임이다.)

064 자동모드도 괜찮다

069 야경은 어두워지기 전에 찍어야 한다

 

 

몇 가지 아이디어만 잘 기억해도 지루함을 좀 탈피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책을 보고 있으니 좋은 사진을 찍는다는 건, 세상을 다르게 보는 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은 앉아서 세상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때로는 높은 곳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기도 하고, 세상이 온통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간에 주목하기도 하고, 1분 후면 사라지고 말 "지금 이 순간의 빛, 톤, 질감, 느낌"에 마음을 흠뻑 쏟기도 하고, 빛이 하는 말, 색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 숲을 볼 것인지 나무를 볼 것인지, 즉 크게 볼 것인지 꼼꼼하게 볼 것인지 결정하기도 하면서 사진에 무엇인가를 담아내다 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풍경이, 시간들이, 사람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 듯합니다.

 

문철진 작가의 사진 이야기는 쉽고, 아름답고, 시적이고, 감각적이면서, 또 굉장히 날카롭기도 합니다. 제 후배는 삶의 질을 높여 보겠다고 DSLR 카메라를 구입하도고 사진을 많이 찍지 않습니다. 중고로 팔 때, 셔터 수가 적어야 더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중고로 팔 생각부터 할 거면 뭐하러 샀나 싶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100가지 아이디어 중에 한 가지는 "018 / 카메라는 귀중품이 아니다"입니다. "카메라를 너무 아낀 나머지 장롱 속에 고이 보관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음을 꼬집습니다. 이 책은 정말 사진을 많이 찍는 분들, 그런데 실력이 늘지 않아 고민이신 분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추천합니다. 사진이 확 달라질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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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꿈결 클래식 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민수 옮김, 김정진 그림 / 꿈결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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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vs. 젊은 베르터의 고뇌! 

 

"일단 'wERTHER'의 발음은 '베르테르'보다는 '베르터'에 가깝다. 우리나라에 베르테르란 표기가 정착된 데는 아마도 이 작품이 최초로 들어올 때 일역본으로 소개되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음으로, 'Leiden'이란 독일어 단어를 '슬픔'으로 번역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이 단어의 뜻은 심리적인 측면 뿐 아니라 때로 신체적 측면도 포괄하는 '고통'에 가깝다. 심리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경우에도, 이 단어는 단순히 슬픔보다는 다소 복잡한 - 슬픔의 감정도 포함하는 - 고뇌나 번민의 상태를 뜻한다. 이런 이유에서 이 번역본에서는 원제목을 '젊은 베르터의 고뇌'라 옮겼다.

 

 

"진정일세! 잠자리에 들 때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이 소원이 제발 실현되길 기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네"(165).

 

 

이대로 잠이 들면 제발 내일 아침 눈 뜨지 않기를, 매일 이렇게 기도하면 잠들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천구의 죽음도, 아버지의 부도도, 진로에 대한 고민도, 모두 나를 삶의 벼랑 끝으로 몰아갔지만, 가장 지독했던 절망은 잃고 난 뒤에 소중함을 깨달은 사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시절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서 사납게 날뛰고 있던 불안과 초조, 공허를 그대로 읽어내고 있었습니다. 모방 자살 때문에 이 작품을 위험하게 보는 시선도 있었고, 유부녀를 향한 한때의 치정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만 주인공을 비하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시절 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고뇌를 함께 슬퍼하며 어서 이 청춘의 폭풍이 지나기를 바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납던 폭풍이 지나고 세월이 주는 체념의 고요가 찾아오고 나니, 그 시절 열병 처럼 뜨거웠던 사랑도, 들끓었던 분노도, 어지러웠던 불안도, 갈피를 잡지 못했던 초조도 돌아보면 그저 헛웃음만 나옵니다. "희망에 속고 기대에 배반당하며" 절망했던 순간들마저 아련한 추억으로 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유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놓쳐야 하는 사랑 때문에, 그 하나만 얻으면 다 잃어도 좋을 것 같은 한 사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기 삶을, 더구나 목숨을 포기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비로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청춘이 지나 다시 읽은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잃어버린 폭풍 속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 주기도 했지만, 폭풍의 중심은 고요하다고 했던가요. 그 중심에 들어선 듯 광기처럼 몰아치던 베르터의 고뇌가 오히려 고요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광기의 정체가 비로서 보다 분명히 보였습니다. 베르터의 내면에서 들끓는 열정은 자기 중심성에 갇힌 집착일 뿐이라는 것. 어쩌면 로테의 말처럼 그녀를 소유할 수 없는 현실이 그의 욕망을 더 자극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입니다(286).

 

어릴 때는 전적으로 베르터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 이번엔 로테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했습니다. 베르터의 광기어린 사랑에 절대 흔들리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인기걸(?)이었던 친구들의 공통된 증언에 의하면, 남자들에게는 보복 심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생각했던 남자지만 열렬한 구애에 그만 마음을 열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남자는 차갑게 돌아선다는 것이 우리가 경험으로 얻은 교훈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자기가 경험한 것이 아니면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괴테의 여성편력도 그 한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들러싼 200년 동안의 수수께끼란 무엇인가?

 

 

첫 독서가 격정적이었다면, 꿈결 클래식으로 만난 두 번째 독서는 보다 학구적이었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부록으로 실린 '해제' 때문인데 <젊은 베르터의 고뇌> 뿐 아니라, 괴테와 그의 작품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멋진 강의가 되어 주었습니다.

 

- 먼저, <젊은 베르터의 고뇌>도 괴테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

- 이 소설은 "사건의 전개 및 이와 관련된 베르터의 내면 풍경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상승 국면과 하강 국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상승과 하강의 운동은 또 자연의 순환과도 결부가 되어 있다는 것. "첫 번째 국면이 전개되는 계절은 봄과 여름이며, 두 번째 국면이 전개되는 계절은 가을과 겨울이다. 소설 전반부는 자연 예찬으로 일관하고 있으나, 알베르트의 등장 이후 자연은 점점 더 위협적인 무엇으로 변해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269-270).

- 그가 참여했던 한 운동은 계몽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성향이 이 작품에도 두드러진다는 것. "슈투름 운트 드랑의 젊은 지식인들은 루소의 사상을 수용하여 규칙과 규범, 제도 등을 혐오했으며, 자연을 최대의 이상으로 삼으려 했다. 감성 예찬은 과대평가된 지성을 축소해 자연 상태의 인간상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으며"(265).

 

이상도 신선하고 재미있는 강의였지만, 충격적이면서도 가장 새로웠던 주제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이 작품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했습니다.

 

첫 번째는, 베르터가 고뇌를 껶는 원인은 "사랑", 한 가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어왔지만 가장 그럴 듯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베르터가 고뇌를 겪는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다. 로테와의 실현될 수 없는 사랑만이 그가 느끼는 고통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사회와의 불화 또한 그 고통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고뇌의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성격과 사고방식에 있다. 그는 지나칠 만큼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집착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고자 하는 인물이다"(273). / "베르터는 처음 사랑에 좌절했을 때 자살까지 결심할 상태에 있지는 않았다. 그는 어머니와 친구의 조언대로 사회 활동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의 후진적인 정치 상황은 시민계급 출신의 지식인 청년에게 그런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사랑에 좌절하고 사회에서도 설 자리를 찾지 못한 이 젊은이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자살의 원인은 실연에 있기보다 계급적으로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282). 

 

두번째는, 이 작품을 둘러싸고 200년 동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작품에 "나폴레옹이 지적하고 괴테도 인정한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290)는 것입니다. 괴테는 나폴레옹의 지적을 순수히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어디에도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폴레옹이 알아차리고, 괴테는 은폐하려한 그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은 무엇일까요? 또 그것을 은폐하려한 괴테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며 여러 가지 대답이 시도되어 왔지만 만족할 만한 것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좀 더 설득력이 있는 답안이 제시되었는데, 독일의 독문학자 베른트 자일러가 2009년에 어느 학술지에 발표한 글이 그것입니다. 이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그가 제시한 답변이 무엇인지는 비밀로 남겨두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그의 누이동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200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는 "괴테 생애의 숨겨진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게는 사람들이 공연히 서로를 괴롭히는 것보다 더 불쾌하게 느껴지는 일은 없네. 특히나 꽃다운 청춘을 맞아 온갖 즐거움에 마음을 열 수 있는 젊은이들이 서로 인상을 찌푸리면서 길지 않은 좋은 시절을 망쳐 버릴 때면 더욱 그렇다네. 이들은 뒤늦게야 그렇게 낭비한 시간은 다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지"(59).

 

청춘을 지나 다시 읽은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사랑과 충직이라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 폭력과 살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열병처럼 뜨거웠던 청춘의 시기에 영혼을 잠식해 들어갔던 불안과 초조가 오히려 삶아 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에너지였다는 것, 무엇보다 버거운 옷처럼 무겁게 나를 내리눌렀던 청춘의 때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없는 축복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다시 성찰하게 해주었습니다. 격정이 지나고 난 뒷맛이 꽤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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