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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터의 고뇌 ㅣ 꿈결 클래식 3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민수 옮김, 김정진 그림 / 꿈결 / 2014년 10월
평점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vs. 젊은 베르터의 고뇌!
"일단 'wERTHER'의 발음은 '베르테르'보다는 '베르터'에 가깝다. 우리나라에 베르테르란 표기가 정착된 데는 아마도 이 작품이 최초로 들어올 때 일역본으로 소개되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다음으로, 'Leiden'이란 독일어 단어를 '슬픔'으로 번역하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이 단어의 뜻은 심리적인 측면 뿐 아니라 때로 신체적 측면도 포괄하는 '고통'에 가깝다. 심리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경우에도, 이 단어는 단순히 슬픔보다는 다소 복잡한 - 슬픔의 감정도 포함하는 - 고뇌나 번민의 상태를 뜻한다. 이런 이유에서 이 번역본에서는 원제목을 '젊은 베르터의 고뇌'라 옮겼다.
"진정일세! 잠자리에 들 때면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이 소원이 제발 실현되길 기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네"(165).
이대로 잠이 들면 제발 내일 아침 눈 뜨지 않기를, 매일 이렇게 기도하면 잠들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천구의 죽음도, 아버지의 부도도, 진로에 대한 고민도, 모두 나를 삶의 벼랑 끝으로 몰아갔지만, 가장 지독했던 절망은 잃고 난 뒤에 소중함을 깨달은 사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시절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서 사납게 날뛰고 있던 불안과 초조, 공허를 그대로 읽어내고 있었습니다. 모방 자살 때문에 이 작품을 위험하게 보는 시선도 있었고, 유부녀를 향한 한때의 치정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만 주인공을 비하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 시절 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고뇌를 함께 슬퍼하며 어서 이 청춘의 폭풍이 지나기를 바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납던 폭풍이 지나고 세월이 주는 체념의 고요가 찾아오고 나니, 그 시절 열병 처럼 뜨거웠던 사랑도, 들끓었던 분노도, 어지러웠던 불안도, 갈피를 잡지 못했던 초조도 돌아보면 그저 헛웃음만 나옵니다. "희망에 속고 기대에 배반당하며" 절망했던 순간들마저 아련한 추억으로 남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유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놓쳐야 하는 사랑 때문에, 그 하나만 얻으면 다 잃어도 좋을 것 같은 한 사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기 삶을, 더구나 목숨을 포기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비로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청춘이 지나 다시 읽은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잃어버린 폭풍 속으로 나를 다시 데려다 주기도 했지만, 폭풍의 중심은 고요하다고 했던가요. 그 중심에 들어선 듯 광기처럼 몰아치던 베르터의 고뇌가 오히려 고요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광기의 정체가 비로서 보다 분명히 보였습니다. 베르터의 내면에서 들끓는 열정은 자기 중심성에 갇힌 집착일 뿐이라는 것. 어쩌면 로테의 말처럼 그녀를 소유할 수 없는 현실이 그의 욕망을 더 자극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입니다(286).
어릴 때는 전적으로 베르터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 이번엔 로테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했습니다. 베르터의 광기어린 사랑에 절대 흔들리지 말라는 충고를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때 인기걸(?)이었던 친구들의 공통된 증언에 의하면, 남자들에게는 보복 심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라고 생각했던 남자지만 열렬한 구애에 그만 마음을 열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순간, 남자는 차갑게 돌아선다는 것이 우리가 경험으로 얻은 교훈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자기가 경험한 것이 아니면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괴테의 여성편력도 그 한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들러싼 200년 동안의 수수께끼란 무엇인가?
첫 독서가 격정적이었다면, 꿈결 클래식으로 만난 두 번째 독서는 보다 학구적이었다고 자평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부록으로 실린 '해제' 때문인데 <젊은 베르터의 고뇌> 뿐 아니라, 괴테와 그의 작품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멋진 강의가 되어 주었습니다.
- 먼저, <젊은 베르터의 고뇌>도 괴테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
- 이 소설은 "사건의 전개 및 이와 관련된 베르터의 내면 풍경에 초점을 맞추어 볼 때 상승 국면과 하강 국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상승과 하강의 운동은 또 자연의 순환과도 결부가 되어 있다는 것. "첫 번째 국면이 전개되는 계절은 봄과 여름이며, 두 번째 국면이 전개되는 계절은 가을과 겨울이다. 소설 전반부는 자연 예찬으로 일관하고 있으나, 알베르트의 등장 이후 자연은 점점 더 위협적인 무엇으로 변해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269-270).
- 그가 참여했던 한 운동은 계몽주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성향이 이 작품에도 두드러진다는 것. "슈투름 운트 드랑의 젊은 지식인들은 루소의 사상을 수용하여 규칙과 규범, 제도 등을 혐오했으며, 자연을 최대의 이상으로 삼으려 했다. 감성 예찬은 과대평가된 지성을 축소해 자연 상태의 인간상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으며"(265).
이상도 신선하고 재미있는 강의였지만, 충격적이면서도 가장 새로웠던 주제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이 작품을 보는 눈이 달라지게 했습니다.
첫 번째는, 베르터가 고뇌를 껶는 원인은 "사랑", 한 가지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작품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어왔지만 가장 그럴 듯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베르터가 고뇌를 겪는 원인은 한 가지가 아니다. 로테와의 실현될 수 없는 사랑만이 그가 느끼는 고통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사회와의 불화 또한 그 고통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의 고뇌의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성격과 사고방식에 있다. 그는 지나칠 만큼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집착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머물고자 하는 인물이다"(273). / "베르터는 처음 사랑에 좌절했을 때 자살까지 결심할 상태에 있지는 않았다. 그는 어머니와 친구의 조언대로 사회 활동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의 후진적인 정치 상황은 시민계급 출신의 지식인 청년에게 그런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 사랑에 좌절하고 사회에서도 설 자리를 찾지 못한 이 젊은이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자살의 원인은 실연에 있기보다 계급적으로 불평등한 현실에 있다"(282).
두번째는, 이 작품을 둘러싸고 200년 동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작품에 "나폴레옹이 지적하고 괴테도 인정한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290)는 것입니다. 괴테는 나폴레옹의 지적을 순수히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어디에도 밝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폴레옹이 알아차리고, 괴테는 은폐하려한 그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은 무엇일까요? 또 그것을 은폐하려한 괴테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하며 여러 가지 대답이 시도되어 왔지만 만족할 만한 것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좀 더 설득력이 있는 답안이 제시되었는데, 독일의 독문학자 베른트 자일러가 2009년에 어느 학술지에 발표한 글이 그것입니다. 이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 그가 제시한 답변이 무엇인지는 비밀로 남겨두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그의 누이동생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200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는 "괴테 생애의 숨겨진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내게는 사람들이 공연히 서로를 괴롭히는 것보다 더 불쾌하게 느껴지는 일은 없네. 특히나 꽃다운 청춘을 맞아 온갖 즐거움에 마음을 열 수 있는 젊은이들이 서로 인상을 찌푸리면서 길지 않은 좋은 시절을 망쳐 버릴 때면 더욱 그렇다네. 이들은 뒤늦게야 그렇게 낭비한 시간은 다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지"(59).
청춘을 지나 다시 읽은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사랑과 충직이라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 폭력과 살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열병처럼 뜨거웠던 청춘의 시기에 영혼을 잠식해 들어갔던 불안과 초조가 오히려 삶아 있음에 생기를 불어넣는 에너지였다는 것, 무엇보다 버거운 옷처럼 무겁게 나를 내리눌렀던 청춘의 때가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없는 축복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다시 성찰하게 해주었습니다. 격정이 지나고 난 뒷맛이 꽤 씁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