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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사랑이야 - 드라마 에세이
노희경 극본, 김규태 연출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9월
평점 :

당신은 괜찮습니까?
"드라마 에세이"라는 장르가 낯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노희경 작가의 대본을 구해 읽던 저에게는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또 없네요. 노희경 작가의 대본은 방송국에서도 인기가 많아 가장 먼저 동이 난다고 합니다. 그녀의 작품에선 문학의 향기가 나기 때문이 아닐까요.
<괜찮아, 사랑이야>는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는, 눈에 보이는 상처에는 집착적으로 호들갑을 떨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에는 무심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또, 정신분열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미친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거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우리에게 조용히 물어옵니다. "당신은 괜찮습니까?"


반드시 지금은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장애가 발현될 거야.
숨겨둔 마음의 상처는 언제든 반드시 사람을 병들게 하지.
그래서 무서운 거고(35).
인기 작가 장재열. 그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훈훈한 외모에, 인기 작가에게 따라오는 명성과 부, 모든 것을 거머쥔 채 끝날 것 같지 않은 성공가도를 달리는 남자.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은 화려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상처투성이 아이가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말입니다. 폭력은 이미 지난 일이었지만, 폭력이 남긴 상처는 여전히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런 장재열이 자신의 상처를 인식하게 되고, 멀쩡해 보였던 자신이 실은 굉징히 아팠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그동안 남에게는 "괜찮으냐?" 안부도 묻고 잘 자라는 굿나잇 인사를 수없이 했지만, 정작 저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거든요. 여러분들도 오늘 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너 정말 괜찮으냐?" 안부를 물어주고 따뜻한 굿나잇 인사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 밤, 굿나잇, 장재열"(47).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는 안으로 꼭꼭 숨어듭니다.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은 그것과 마주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일을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혹시 누군가의 상처를 눈치 챘다 해도, 그래서 아는 척 하기가 어렵습니다. 치유를 권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문학작품이, 예술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괜찮아, 사랑이야> 안에 내 이야기가 있고, 내 상처가 있으니까요. 상처를 치유해가는 주인공을 통해 나도 내 마음을 보듬어볼 수 있으니까요. 주인공을 따라 나도 나에게 "너 정말 괜찮으냐?" 안부를 물어보며, "괜찮아"라고 토닥여줄 수 있으니까요.


나는 아주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 수도 있었는데,
왜 이렇게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가야 하나.
언제까지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 하나.
내 머릿속에 든 건 오직 하나였다.
어떡해야 정상적인 인생을 살 수 있을까. (67, 권기태, <일 분후 의 삶> 재인용)
이 작품에서 제 마음에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장면은 형 재범이 엄마와 등목을 하는 씬이었습니다. 형 재범은 어느 날, 강가에서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엄마와 동생을 우연히 목격합니다. 그리고 지독한 소외감을 느끼지요. 사실 그는 동생의 살인을 대신 뒤집어 써주고 싶을 만큼 그들을 사랑했으니까요. 그런데 죄의 형량이 예상했던 것보다 무거워 겁이 났고, 그런 자신에게 엄마와 동생이 거짓 누명을 씌워 억울했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새버릴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재범의 오해였습니다. 재범이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던 날, 엄마와 재범은 물놀이를 한 것이 아니라 똥두깐에서 뒤집어 쓴 똥물을, 서로의 마음에 새겨진 상채기를 닦아내고 있는 중이었거든요. 그 많은 시간을 지독한 외로움 속에, 지독한 미움 속에, 지독한 고통 속에 갇혀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아주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 수도 있었는데 말입니다.
재범의 마음 속을 꽉 틀어막고 있던 응어리가 풀려나갈 때, 제 마음의 응어리도 함께 풀리는 듯했습니다. 한발자욱만 더 다가서면, 조금만 더 마음을 열면, 내가 먼저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속삭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너 참 많이 외로웠겠다? 이제 외롭지 마라, 재범아. 내가 니 맘 다 아니까"(197).


서로의 초라함이 묻어나던 장면들(226)
노희경 작가는 "내 마음 속 명장면"으로 "서로의 초라함이 묻어나던 장면들"을 꼽습니다. 초라함을 낱낱이 들키며, 서로에게 마냥 무너져내리고 매딜리고 안아주던 재열과 해수가, 참으로 이쁘고 대견했다고 합니다(226).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사랑에 관한 노희경 작가의 정의가 내 마음 속 명대사로 남았습니다. "늘 강하고, 독하고, 이기적인 내가 너한테만은 무너져도 될 거 같거든. 나한테 사랑은 그런 거니까. 철저히 그 사람 앞에선 맘 놓고 초라해져도 되는 거. 잘난 척 않고, 의지해도 되는 거. 많이 사랑해"(147). 저에게도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미치도록 간절한데, 더 늙기 전에, 아니 살아 생전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의 전부가 될 수 있을까?"
<괜찮아, 사랑이야>를 만든 이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사랑이 전부가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의 전부가 될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세계적인 대문호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고 했다지만,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닐까요?
이 책은 북테라피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습니다. 노희경 작가의 팬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드라마를 시청하지 않은 독자에게도 큰 울림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조인성과 공효진이라는 두 배우가 연출한 아름다운 장면들이 모아진 화보이기도 해서, 저에게는 소장가치 100%의 책이기도 합니다.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 마음까지 시리기 전에 이 책 한 권 옆에 두고 "너 정말 괜찮으냐?" 자신에게 안부를 물어봐주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