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데미안 ㅣ 꿈결 클래식 1
헤르만 헤세 지음, 박민수 옮김, 김정진 그림 / 꿈결 / 2014년 6월
평점 :
"새는 투쟁하며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144).
내 기억 속의 <데미안>은 질풍노도의 청소년이 친구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다소 공감하기 힘들었던 고전문학 중 하나입니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됐을 무렵에 읽었기 때문인지, 알을 깨고 나오듯 내면의 폭풍을 겪은 뒤 드디어 자신을 찾아낸 주인공의 이야기에 나를 투영하지 못했고, 오히려 <데미안>은 가까이 하면 안 될 나쁜 친구처럼 불편했을 뿐입니다. 내가 목격한 싱클레어의 방황과 성장은, 일종의 공포였습니다.
꿈결에서 발간한 <데미안>은 "책을 열고 번역을 비교하라!"는 자신만만한 띠지 문구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공감하지 못했던 고전이지만, 잘 된 번역으로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감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했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 다시 찾았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내 기억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알고 쓸쓸한 웃음과 함께 당황스러운 가슴을 쓸어내렸던 것처럼, <데미안>을 다시 읽는다면 내 기억 속에 왜곡된 채 남아 있는 불편한 공포를 지울 수 있을 듯했습니다.
꿈결의 <데미안>은 자신만만했던 띠지의 약속 그대로 잘 읽힙니다. 번역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중간 중간 삽입된 컬러 일러스트도 상상력을 자극해주어 좋았습니다. 책의 부록에 실린 박민수 교수님의 해제를 읽지 않았거나, 이 책과 함께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이병욱, 학지사)를 읽지 않았다면, <데미안>은 순수한 성장소설, 또는 청춘소설로 남았을 듯합니다. 부모님의 보호 속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바깥 세계와 맞닥뜨린 뒤, 눈이 먼 것처럼 헤매 다니며 피폐해져가는 싱클레어의 모습이나,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지만 그 안에서 들끓고 있는 거센 내면의 폭풍이나, 알을 깨고 나오 듯 불현듯 찾아든 불꽃 같은 깨달음의 순간에, 지나온 내 시간들이 겹쳐졌습니다. 이해받지 못했던 내 불안과 고통이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듯하여 어쩐지 새삼 서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박민수 교수님의 해제와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를 통해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진짜 이야기하고자 했던 실체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데미안>은 방황하는 삶을 그린 전형적인 청춘소설이 아니라 검은(?) 속셈을 가진 아주 사적인(?) 프로젝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주목해야 할 것은 <데미안>은 정신분석(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책이라는 것과, 헤르만 헤세가 융의 영향으로 아프락사스라는 이교도의 신을 신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보면, 아버지를 경멸하며 죽이는 꿈을 꾸고, 데미안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싱클레어는 오이디푸스의 소망을 설명하는 정신분석의 교본 같이 읽힙니다. "이런 꿈 중 가장 끔찍했던 꿈, 내가 거의 미쳐버릴 듯한 상태에서 깨어났던 꿈은 내가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는 내용이었다"(54).
그리고 <데미안>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에 수수께끼처럼 등장하는 신의 이름. "새는 투쟁하며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144).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아브락사스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내가 소년 시절 내내 가슴속에 품고 있었으면서도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던 수수께끼와 맞닿아 있었다. 하나님과 악마, 공인된 신의 세계와 묵살된 악마의 세계에 관한 데미안의 이야기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있던 신화였다"(98).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이 결합된 신성으로, 기독교의 신이 절대 선이라면, <데미안>은 절대 선이기만 한 신은 반쪽짜리 신이라고 말합니다. 선과 악을 동시에 지녀야 비로서 완전한 세계, 완전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락사스는 훨씬 더 많은 의미를 지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신성을 가리키는 이름쯤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이라는 상징적 사명을 지닌 신성 말입니다"(146). <데미안>을 통해 다시 보게된 헤르만 헤세는 아브락사스 숭배를 전파하는 이교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전체를 숭배할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신을 모시거나 신에 대한 예배 외에 악마에 대한 예배도 함께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아브락사스가 그처럼 신인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신성이었다"(147).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에서 저자는 싱클레어는 "헤르만 헤세" 자신을, 아브락사스의 존재를 알려 준 데미안은 "융"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융과 헤세는 기독교 문명이라는 단단한 알을 깨뜨리기 위해서 은밀한 성전을 벌였던 장본인들이었다"(149,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고 말합니다. 그러나 결국 기독교로 다시 선회했던 헤르만 헤세의 생애를 생각하면, "헤세는 평생 구도의 길을 걸었지만 어느 세계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영원한 방랑자로 머문 셈"(156, 위의 책)이라고 평합니다.
이 책의 부록에 실린 해제 "데미안을 찾아가는 싱클레어의 여정"을 읽어보면, 유럽의 정신, 즉 기독교 가치관 속에 단죄되고 금기시 되었던 것들과 지배적 가치관, 그리고 그에 반하여 나타났던 시대적 징후들과 분위기가 <데미안>이라는 소설 속에 정밀하게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누군가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건, 그가 어떤 속셈(?)을 가졌던, 우리에게 고전으로 남겨진 <데미안>은 "온전히 자신을 찾아가는 길"(269) 위로 독자를 인도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이미 오래 전에 지났지만, 내 안에 일었던 내면의 폭풍은 아직 계속 되고 있습니다. 몸은 어른처럼 자랐지만 이렇다 할 방향 없이 아무런 목표에도 이르지 못하고 흥겨워하다 이내 시들해지는 꿈, 사납고 광포한 욕망의 불꽃에 흔들리는 싱클레어의 독백에 마음을 들킨 것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내가 찾아야 할 '데미안'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나는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던지?"(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