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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
이병욱 지음 / 학지사 / 2014년 5월
평점 :
"그러나 토머스 울프도 말한 것처럼 모든 소설은 반자전적이라는 사실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하겠다"(378).
오래 전, 소설 속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연결시켜 독후감을 말했다가, 작가와 등장인물을 연결시키는 것은 초보적인 책읽기라는 공개적인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그때의 경험이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아마도 그 일이 제게 작은 트라우마(?)를 남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는 문학작품 안에는, 그것도 세계적인 거장의 문학작품 안에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문학작품은 작가들의 삶의 체험이 반영된, 삶의 반응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영국 문학, 독일 문학, 라틴유럽 문학, 러시아 문학, 미국 문학으로 나누어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를 떠나는데, 저자와 함께 살펴본 대부분의 작품들 속에서 만나게 되는 등장인물들과 내용이 작가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과거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으며, 과거의 불행을 재연한 투사된 공간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는 어린 왕자가 고아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생텍쥐페리가 "부모에게 버림받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257). 카프카, 카뮈, 도스토예프스키, 헤밍웨이도 예외는 아닙니다. 카프카의 작품에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묘사된 등장인물은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카프카 자신의 거세공포, 성적 결핍 또는 억압으로 볼 수도 있다"(140)고 분석합니다. "<심판>, <성>, <실종>, <변신> 등 그가 남긴 작품들은 일관되게 자신이 처한 이율배반적 상황과 정체성 문제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142)주는데, 저자는 카프카가 "자유의 땅인 아메리카에서 그가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카프카라는 존재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141)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적인 문호들이 거장으로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불행했던 삶의 경험과 그 속에서 고통받으며 치러야 했던 내면의 투쟁을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인 삶의 경험뿐 아니라,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더 큰 굴레, 즉 민족적 실존도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저자는 "현대 부조극을 대표하는 양대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베케트와 이오네스코가 각기 아일랜드인과 유대인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부조리한 현실로 고통받은 민족이 아니고서는 그런 발상 자체가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116)고 분석합니다.
저자는 작품 속에 투영된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과 내면(심리)의 분석을 통해 "소설은 새롭게 창조된 가공의 인물들이 엮어가는 허구적인 내용이지만 완전한 허구는 아니"며, "그 모든 이야기의 흐름 속에는 작가 자신의 삶과 성격의 일부가 녹아 흐리기 마련"(378)이라고 결론 짓습니다. 특히 헤밍웨이의 작품을 분석하며, "그런 점에서 작가 헤밍웨이의 실제 삶의 모습과 작품 속 인물의 모습 간에는 서로 연결 통로가 있기 마련이며, 그런 이유로 작가의 생애와 그 심리 세계를 이해하면 그가 남긴 작품을 더욱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378)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실제 생애는 물론, 다양한 인간 군상과 인간 내면 세계가 정밀하게 묘사된 세계적인 문학작품이야말로 프로이트 이론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터전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시대와 문화와 공간을 초월하여 오랜 세월 읽히고 사랑받는 문학작품들이 "인간 심리의 근저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반도덕적 욕망과 환상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함 생생한 묘사로 증언"(288)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를 읽으며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된 작가와 작품은 20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영구의 지성 "T. S. 엘리엇"과 그의 작품입니다. T. S. 엘리엇은 주지주의를 대표하며, 미국 태생이지만 영국으로 귀화해 한평생 영예로운 삶을 누린 복받은 작가입니다. 저자는 주지주의를 대표하는 T. S. 엘리엇이 성직자나 수도승의 금욕적인 태도와 비슷한 정도로 성에 대하여 상당히 강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는 성이야말로 인간을 타락시키는 원흉이라고 간주하면서, 마치 타락한 인류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호천사와 같이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질타했다"(78)고 합니다. 그런데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그의 이러한 성향은 강박적인 성격으로 분석됩니다. "전통적으로 서구 사회는 '아는 것이 힘'이라는 모토 아래 자식을 인간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간주해 왔다. 그런데 정신분석에서는 지식이나 지성조차도 자아를 방어하는 기제의 일부로 이용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소위 지성화의 방어기제는 특히 강박적 성격에서 흔히 동원되는 방어 수단으로, 그 주된 목적은 한마디로 감정을 회피하는 데 있다. 실제로 매우 강박적인 사람들은 강렬한 흥분이나 불안, 분노 등의 감정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데, 이러한 감정을 회피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오로지 합리적인 사고의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다"(73).
문학사에서는 최고의 지성으로 통하는 그이지만 강박적인 성격에 "실제로 그는 차갑고 냉소적이며 농담을 할 줄 모르는 신경질적인 사람으로서 그 자신이 정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인물"(78)이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그런 점에서 엘리엇의 작품들은 자전적인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자신의 불완전한 삶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그의 완벽주의는 오히려 자신의 불완전한 내면세계에 대한 반동형성이었을지도 모른다"(78-79)고 진단합니다.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세계적인 문호들에게 글쓰기는 자신의 불행한 삶에 대한 일종의 도피와 외면이기도 하고, 대리만족이기도 하며, 또 불행한 삶과 정신적 결함을 글쓰기라는 창작 활동을 통해 승화해나가는 자기 치유의 과정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작가 자신의 은밀한 무의식적 욕망을 형상화한 창작 활동이 그들을 구원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작품 안에서 직접적인 해답과 구원의 길은 발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을 세계 대문호의 반열에 올려놓고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명성을 안겨주었으니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프로이트는 성을 찬미한 게 아니라, 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프로이드는 오로지 이성과 지성만을 내세우며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억압하기만 하면 노이로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으며, 반대로 욕망에 사로잡혀 이성이 마비된 경우도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가 요구한 가장 바람직한 상태는 자아가 건전하고도 탄력적인 가능을 하는 것이다"(73-74). 글을 쓰고 읽는 행위는 (어찌 보면) 최고의 지성을 요하는 일이겠지만, 작품 안에서 은밀하고 내밀한 무의식적 욕망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인 문학작품을 읽는 일이야말로 자아의 적절한 심리적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을 기를 수 좋은 도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프로이트와 함께하는 세계문학일주>를 읽다 보면,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투영된 내용들 사이에 일종의 패턴이 보입니다. 불행했던 경험과 내면적 욕망이 어떻게 작품 속에 투영되고 승화되었는지를 보면, 불행이야말로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이며, 제거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구도의 도구로 삼아야 할 신의 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