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시, 봄 - 장영희의 열두 달 영미시 선물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샘터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장영희의 열두 달 영미시 선물"
5월부터 읽기 시작한 책입니다. 이제야 이 글을 쓰는 것은 한 장 한 장 아껴 읽은 까닭입니다. 해치워버리듯 탐욕스럽게 책을 읽어대던 눈길이 장영희 선생님의 글과 김정선 선생님의 그림을 만나니 스스로 느려졌습니다. 친구와 주고받던 편지마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유치환의 행복)를 적어 보내던 그때처럼,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로 시작되는 서정윤의 홀로서기를 열심히 외웠던 그때 이후로, 이처럼 시를 읽는 즐거움에 푹 빠져 지낸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지금 하늘나라에 계신 두 분 선생님이 어떻게 신간을 내셨는지 궁금했는데, 부록에 실린 장영희 교수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이 책에 실린 시들은 <영미시 산책>에 연재되었던 칼럼인 듯합니다. 그중에서 1월부터 12월까지 열두 달을 테마로 그 계절에 읽으면 좋을 영시가 김점선 선생님의 그림과 함께 <다시, 봄>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장영희 선생님은 모드 M. 그랜트의 "5월은…"이라는 시를 소개하며 피천득 시인의 "5월"이라는 시를 읽어줍니다. 유독 5월에 마음이 머물렀던 것은 거리마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꽃다발" 같은 5월의 나무 속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5월은 장영희 선생님이 하늘나라로 떠나신 계절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날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장영희 선생님의 위로의 말을 미리 담아놓으셨네요.
"꽃비 내리는 이 아침, 아픈 추억도 어두운 그림자도 다 뒤로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지금 5월 속에 있으니까요"(68).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꽃 들어 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합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겁니다.
새러 티즈데일의 "연금술"이라는 시입니다. 장영희 선생님은 "봄비를 함빡 머금은 노란 데이지꽃이 마치 맑은 술이 담긴 잔같이 보"인다고 설명합니다. 우리 마음도 잔과 같아서 때로는 희망과 기쁨이, 때로는 절망과 슬픔을 담게 되는데, 지금 시인의 마음속 잔에는 고통만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빗물을 금빛으로 변화시키는 데이지꽃처럼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삶의 연금술이라고 가르쳐줍니다(75).
<다시, 봄>에는 생명의 환희로 가득한 봄, 한여름 태양처럼 뜨거운 사랑으로 충만한 청춘 같은 여름, "가버린 날의 다정한 행복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가을, "혼신을 다해 경주를 끝내고 결승선"을 향해 다가서듯 맞이하게 되는 겨울을 통해 인생을 사는 지혜를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다시, 봄>을 읽다 보니 제 인생은 (남들보다 늦었지만) 이제 막 8월을 지난 듯합니다. "청춘의 야망은 이제 가슴속에 추억으로 담은 채", "삶의 무게를 업고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는 때." 내 마음, 들켜버렸습니다.
"자꾸 커지는 세상에 나는 끝없이 작아지고, 밤에 문득 눈을 뜨면 앞으로 살아 내야 할 삶이 무섭습니다"(109).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balls fly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
How many years must one man have
Before he can hear people cry (…)
가수이면서 시인이기도 했던 밥 딜런의 "바람 속에 답이 있다"(Blowing in the wind)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장영희 선생님은 "그가 다른 유명한 시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시들은 책 속에 있지 않고 우리의 삶 속에 있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90).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야
다른 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마음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마음으로 말하고 있는지, 머리로만 말하고 있는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보일 때가 있습니다. 글을 읽으면 마음이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영희 선생님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는 투명한 물처럼 글 속에 담긴 마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인생을 사는 지혜가 있고, 투쟁적이지 않아도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게 하고, 다그치지 않아도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결심하게 만드는 힘이 그 마음에서부터 뿜어져 나온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영희 선생님은 인터뷰에서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라는 것이 문학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말합니다(171). 정말로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혼자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나를 발견합니다. 어떻게 사랑하며 살까 하고 말입니다.
<다시, 봄>, 이 책이 유난히 더 반가웠던 이유는 김점선 선생님의 그림을 함께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 보아도 천진난만한 선생님의 그림은 볼 때마다 미소짓게 합니다. 명화로 재테크할 생각은 없지만 박수근 선생님의 그림과 김점선 선생님의 그림은 집에 걸어두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맑은 물처럼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씻기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장영희 선생님, 김점선 선생님. 두 분이 계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었음을 다시 생각합니다. 장영희 선생님은 "암호를 풀이하듯 분석과 이성으로 읽어야 하는 시가 있고, 그냥 읽어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시도 있다"고 설명합니다(168). 덧붙여 "너무 머미를 많이 쓰는 세상에서, 가끔은 마음을 쓰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묻습니다. <다시, 봄>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시와 그림입니다. 장영희 선생님의 약속대로 "뛰어가는 사람에게 잠깐 숨을 돌리게 하는 역할"을 하는 시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작고 얇은 책이지만 감동과 지혜와 아름다움의 무게가 가슴을 가득 채우는 책입니다. 오랫만에 시를 읽는 즐거움 속으로,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 속으로 한 번 푹 빠져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