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혜의 순간 - 녹초가 된 당신에게 찾아온
튤리안 차비진 지음, 최요한 옮김 / 터치북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교회가 하나님의 절대 사랑을 성도들에게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는 대외적으로 지배와 심판의 도구라는 오명을 얻었음은 물론이고 탈진과 위선이 어느새 기독교의 특징으로 굳어졌다"(260).
목회자로서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최근 몇 년간, 전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역하는 기쁨은 온데간데 없고, 만성피로에 시달리며, 이건 아니다 싶은 교회를 보며 자괴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통곡만 터져나왔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셨습니다. '복음', 그 완전한 은혜, 그 완전한 자유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 그것이 해답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경악과 충격에 가까웠습니다. 날마다 복음을 말하면서 그 완전한 은혜를 온전히 누리고 있지 못하다는 자각을 갖게 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의 <JESUS ALL(예수로 충분합니다)>이라는 책이 첫 계기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매트 챈들러 목사님의 <완전한 복음>과 <예수 중심의 교회>, 팀 켈러 목사님의 <갈라디아서 : 복음을 만나다>, 앤드류 팔리 목사님의 <복음에 더할 것은 없다>까지, 마치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처럼 책들과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책,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의 <은혜의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계속 복음의 완전한 은혜 가운데로 저를 초대해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주일마다 목회자에게 복음을 들을 권리가 있다"(105).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은 예수님이 경계하신 율법주의가 오늘날 '성과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경고합니다. 성과주의란, "업적과 성과로 사람의 정체성과 가치를 결정하는 태도이다"(17). 성과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의 모습은 참혹 그 자체입니다. "성과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성공은 곧 생명이고, 실패는 곧 죽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직을 하거나 투자에 실패하면 그 사실을 밝히는 대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17). 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성장하기 위해 더 노력하라고, 착한 행실을 위해 더 노력하라고, '땀' 흘려 쌓은 공로로 복을 누리라고 부추깁니다.
율법주의는 또 도덕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일반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교회는 성도들이 책임 있게 행동하도록 훈계하거나, 착한 행실을 위해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게 교회의 주된 임무라고 여긴다"(155).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기보다 지탄이 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며 윤리의 강화를 더 부르짖을 사람들도 많겠지만, <은혜의 순간>은 교회가 도덕주의에 빠지면 복음의 은혜는 잊혀진다고 경고합니다. "더욱이 나는 규칙에 규칙을 더하며, 규칙을 전부로 여기는 강압적인 기독교 도덕주의가 은혜의 복음을 가로채는 비극적인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19).

"하나님의 차별 없는 사랑은 '종교적인' 사람들을 노엽게 만든다. 이유가 무엇일까?"(22)
사람들은 당연히 율법을 싫어하고, 은혜를 사모할 것 같지만,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은 더크 켈리 박사의 말을 빌어 "역설적이게도 은혜를 한층 더 싫어"하는 사람의 심리를 꼬집습니다. "성도들을 화나게 만들고 싶다면 율법에 대해 설교하세요. 성도들을 정말로, 정말로 화나게 만들고 싶다면 은혜에 대해 설교하세요"(85). 왜 '종교적인' 사람들일수록 은혜를 싫어할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은혜가 우리의 기준을 모조리 뒤집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조건이 없습니다. 조건이 없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는 무모할 정도로 관대하고, 불편한 정도로 무차별적"(34)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공정해야 하고, 공평해야 하고, 주고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지배를 거부"합니다. 은혜는 열심히 한 사람, 착한 사람, 뛰어난 사람이 상(또는 복)을 받아야 마땅하고, 게으른 사람, 나쁜 사람, 못난 사람은 벌(또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인간의 기준을 뒤집어버리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하는 사람들일수록, 더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은혜에 거부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지배욕'이라고 풀이합니다(22, 61, 222). "스스로 신이 되고 싶은" 지배욕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절대 사랑입니다. "절대 사랑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합리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절대 사랑의 핵심이다"(130). 그러니 성과주의에 빠린 사람들일수록 은혜가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무조건적인 은혜를 강조하다 보면, 두 가지 저항이 생겨납니다. 하나는 "은혜가 게으른 사람을 만든다는 것"과, "은혜가 방종을 부추기고 이기적인 사람을 만든다"(228)는 주장입니다. 저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자신이 잘못을 하고도 비판을 하면 오히려 "은혜가 없다"고 역공을 하는 뻔뻔한 사람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은 이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들은 은혜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동시에 율법주의로 흐르는 사람들은 법을 보는 안목이 낮기 때문이며, 오히려 법을 보는 안목이 높을수록 은혜를 좇는다고 단언합니다(113). <은혜의 순간>은 우리에게 율법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율법의 기능을 통해 설명하며, 은혜가 게으름과 방종, 이기심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도덕주의가 결국 부도덕성을 낳는다는 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교회는 종교적 목적이 아니라 값없이 받는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278).
교회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고 믿는 것과는 반대로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싼 율법'이다"(115).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이 이웃에게 긴급히 전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은혜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조건부에 짓눌려 고통받는 사람들, "피로하고 지친 세상을 위해 예비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름답고 무한하신 은혜이며, 이 기적같은 은혜가 바로 복음"(32)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간음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 불신자는 지옥"이라고 외치는 전도자를 만납니다. 죄를 깨닫고 하고 심판을 경고하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순간>은 인간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임을 강조합니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은 "한평생 벌을 받고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그가 한 순간의 은혜로 변"(127)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혁명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은혜를 경험할 때 새 삶이 시작된다"(144).
<은혜의 순간>은 복음을 전혀 모르는 불신자보다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먼저 읽어야 할 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증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먼저 복음을 완전히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제대로 알지 못할 때, 교회 생활은 또 하나의 의무가 되며, 기쁨이 아니라 피로 자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자고 모두를 초청하고 싶습니다. 오직 복음을 선포하자고 교회에 외치고 싶습니다. 복음으로 충만한 예배, 그러한 예배를 사모합니다. 은혜에 목마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오직 복음으로만 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으며, 복음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해준 튤리안 차비진 목사님께 감사합니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발전해야 한다는, 자기계발을 해야 한다는, 자기를 증명해야 한다는 모든 압박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 복음, 그 완전한 은혜, 그 완전한 자유를 묵상하며 날마다 더 깊이 은혜 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특별히 교회 생활에 지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복음은 예수가 강하시니 당신은 얼마든지 약해도 된다는 것을 선언한다. 예수가 이기셨으니 당신은 얼마든지 져도 된다. 예수가 유명하셨으니 당신은 얼마든지 무명으로 남아도 된다. 예수가 비범하셨으니 당신은 얼마든지 평범해도 된다. 예수가 성공하셨으니 당신은 얼마든지 실패해도 된다"(38)
"이제 당신은 그 누구에게 그 어떤 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의 자존심과 자긍심은 결코 상할 일이 없다. 잘했든 못했든 당신의 행동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완전히 의롭다고 여기신다"(223).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급진적으로 규정하라. 그게 진짜 당신이다. 그 외의 모든 정체성은 환상일 뿐이다"(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