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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 신화 - 부조리에 관한 시론
알베르 카뮈 지음, 오영민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1월
평점 :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바로 자살이다"(17).
막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연이은 두 친구의 죽음이 삶과 죽음의 거센 혼란 속으로 저를 밀어넣었습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릴 인생이라면 왜 살아야 하는지, 그때만큼 치열하게 묻고 또 물었던 적이 없었던 듯합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을 향해 그토록 열심히 달려가고 있구나" 하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 무엇에도 열정을 느낄 수 없었고, 그 어떤 목표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는 미래가 결국 죽음으로 치닫는 길이라면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 돌연한 각성, 어느 날 문득 솟아오른 "왜"라는 의문, 낯선 세계에 대한 공포, 알베르 카뮈 식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이것이 "부조리의 감정"이며, 그가 말한 "부조리의 첫 징후"(32)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같이 조금씩 죽음 쪽으로 우리를 몰아넣는 이 질주 속에서 육체는 돌이킬 수 없는 전진을 계속해 나아가고 있다"(24). "내일, 자신의 전존재가 거부했어야 마땅한 그 내일을, 그는 내내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육체의 반항,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33).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는 인간이 삶이 이렇게 부조리한 것일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는 책입니다. 카뮈의 관심은 "허다한 부조리를 발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가장 절박한 질문은 바로 "삶의 의미"입니다. 그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바로 자살이다"(17)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목격하는 순간, 우리는 "자의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어야만 하는 것일까?"(37) 하는 고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카뮈의 이러한 철학적 성찰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사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라는 역설 속에서, '하루하루를 죽어갈 것이냐 살아갈 것이냐', 만일 산다면 '그냥 살 것이냐 기꺼이 살아낼 것이냐'라는 실존적 결단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7).
"이렇듯 부조리의 인간은 불타오르면서도 얼어붙어 있는, 투명하면서도 한정된 세계,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주어지는, 혹여 그곳을 넘어서기라도 한다면 오직 와해와 허무뿐인 그런 세계를 언뜻 목격한다. 그때 비로소 부조리의 인간은 이런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을 받아들이기로, 그리하여 이 세계로부터 힘을, 희망의 거부를, 그리고 위안 없는 일생의 고집스러운 증언을 이끌어내기로 결심할 수 있게 된다"(105).
그렇다면 카뮈가 내린 결론은 무엇일까요? "사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라는 역설 속에서, 하루하루 죽어갈 것이냐 살아갈 것이냐, 만일 산다면 그냥 살 것이냐 기꺼이 살아낼 것이냐"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카뮈가 우리를 이끌어간 철학적 결론은 무엇일까요? 그가 내린 결론이 궁금했지만 마음만 성급할 뿐, <시시포스 신화>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너무 난해한" 책이었습니다.
그가 자살을 거부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111). 그런데 그 이유가 선명하게 잡히지 않습니다. 일단,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의식"을 강조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해석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것 또한 역설적이게도) 부조리를 의식하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데 자살은 그 의식을 삭제하는 것이기에 자살을 반대하는 듯합니다.
카뮈는 삶을 포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거나 화해하지도 않습니다. "이 부조리의 세계를 분명하게 사유하되 더 이상 희망을 구걸"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포기도 화해도 아닌, "반항"을 선택합니다. "그러니 숱한 철학적 입장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일관된 철학적 입장이라면, 곧 반항이겠다. 반항은 인간과 인간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96). "의식과 반항, 이러한 태도들은 포기의 정반대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환원 불가능하고 열정으로 가득한 모든 것은 그의 삶과는 반대로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의 태도들을 고무시킨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맞더라도 화해하지 않는 데 있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98).
"반항"의 태도는 '시시포스 신화'를 통해 더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시시포스는 신들에게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시포스가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 올리면 바윈느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시시포스는 어차피 굴러 떨어질 바위를 매일 다시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합니다. 결국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아무것도 성취해낼 수 없는 일에 온 존재를 다 받쳐야만 하는"(203) 것이었습니다. "쓸모없고 희망 없는 일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201).
그런데 이 형벌(신화)가 시시포스에게 비극적인 것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식의 순간은 다시 돌을 밀어 올리기 위해 산꼭대기에서 들판으로 되돌아 내려가는 순간입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습니다. 카뮈는 "멸시를 통해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205)고 말합니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시시포스는 고뇌를 가졌을 테지만, 바로 그 통찰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하며 기쁨 속에서 그의 바위를 기꺼이 들어올린다면 그것은 그의 승리이고, 이것이 "반항"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만 한다"(208)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불행하라고 내린 형벌을 시시포스가 행복하게 수행하는 것, 그것이 곧 반항이고, 그의 승리라는 말일까요?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의를 좀 들어야 할 듯합니다)
역자는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가 "철학적 전문용어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 체득하고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묘사하기 위한 일상적 개인어의 차원에서 이해될 때, 공감의 폭은 넓어지고 그 울림은 깊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5). 세계대전을 전후로 실존주의가 확대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조선족 관광 가이드에게 대지진 이후 중국인들의 삶이 많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돈을 모으기에만 급급했는데, 대지진 이후 삶을 즐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가까이 공존하는 인도에 가면 모두 철학자가 된다는 말을 합니다. 현대 사회가 자살률이 높은 것은,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일상에서 멀리 떼어놓고 추상화 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오히려 삶의 의미가 더 간절해지는 듯합니다. 카뮈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 앞에서 "우리가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알아보는 일, 이것이 내 관심의 전부다"(105)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허무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저는 구원을 호소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절망이 자연스럽게 나를 신에게 인도했습니다. 절박하게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카뮈는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만 같았던 과학은 가설로 끝나 버리고, 명철함은 비유 속에서 빛을 잃고, 불확실성은 예술 작품으로 귀착된다"(43)고 토로합니다. "확실하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묘사와 가르쳐 주겠다고는 하지만 실은 조금도 확실할 게 없는" 합리적 이성은 제게 어떤 답도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통해 생명의 빛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부조리의 감정이 제 삶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과 사의 근원적 물음 앞에 우리를 세워 놓고" 그냥 살 것인지, 기꺼이 살아낼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게 하는 <시시포스의 신화>, 읽어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요. 단, 읽기가 쉽지 않다는 장벽이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