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 아는 만큼 자유로워진다
이무석 지음 / 두란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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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이해가 곧 치료이다."

 

 

나이가 들수록 아프게 깨달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도 불행도 인간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꿈과 성취가 모든 것이었고, 그것에 제 행복이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꿈을 이루는 인생이 행복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살아보니 아니었습니다. 삶의 순간순간에 맞닥드리게 되는 깊은 행복감도, 심장이 너덜너덜 해질 정도로 아픈 상처도 모두 인간 관계가 좌우했습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친구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저는 오히려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 하나님 앞에 울부짖을 때가 더 많습니다.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중에 EBS에서 방영되는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주로 가족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들이 나와 함께 치료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놀라운 사실은 절대 화해할 수 없고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가족들이 "아주 작은 이해"를 통해 그토록 오래 힘들어 했던 갈등을 해소하고 다시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저렇게 작은 이해 하나만 있어도 되는 것을 우리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서로 미워하고 아파하며 삶을 낭비하고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성격, 아는 만큼 자유로워진다>와 같은 같은 읽는 일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책을 통해 자신을 관찰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을 넓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격, 아는 만큼 자유로워진다>를 읽는 시간은 그렇게 나와 너를 이해하는 시간이었고, 그 자체로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었고. 또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성격, 아는 만큼 자유로워진다>는 성격 이해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똑같은 스트레스를 받아도 어떤 사람은 심한 정신병에 걸리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 일 없이 잘 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스트레스에 대한 취약성"이 개인차가 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9). 그런데 "이 개인차는 성격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신(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격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적인 고통은 스트레스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성격 문제 때문이다. 환자가 자신이 성격 문제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다"(11).

 




 

 

"특히 유년기의 경험들은 대부분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 숨어서 우리의 행동을 조종한다. 무의식에 숨어서 우리 행동을 지배하는 이 부분을 정신 분석에서는 '무의식적 갈등'이라고 한다. 이 부분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이 성격을 치료하는 방법이다"(10).

 

 

성격 이해가 곧 치료"라고 말하는 이 책은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1부에서는 성경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 기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2부에서는 성격 장애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11가지 유형을 설명하고, 3부에서는 성경 인물을 중심으로 그 사람의 성격과 행동 패턴을 살펴봅니다.

 

책은 저자 이무석 선생님의 강의를 녹취한 것이라 현장에서 직접 강의를 듣는 것과 같은 생생함이 있고, 실제 강의에서 사용하는 그림 자료로 보이는 여러 가지 이미지 컷이 내용의 이해를 돕습니다. 여러 사례를 바탕으로 정신 분석 이론들이 아주 쉽고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하나님과 나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성격 인자를 발견"하여 제거함으로써 영적 성장을 돕는 고마운 책입니다. 특히 현장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로 목회를 하는 사역자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정보가 많습니다.

 

이무석 선생님은 "교회에서 하는 내적 치유가 굉장히 위험하다고"(97) 진단합니다. 억압 되어 있는 분노가 분위기에 밀려 올라오면 자아가 압도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심한 정신 이상 증상이 나올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격 장애 11가지 유형" 중에서는 "경계선 장애 성격"에 많은 관심이 생겼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 쫓아내는 데 선봉장 노릇하는 사람들이 대개 이런 사람들"(169)이라는 설명 때문입니다. 목사님을 쫓아내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처음에는 목사님을 이상화시켜 놓고 굉장히 좋아하며 충성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혼자 마음에서 이상적인 인물로 만들었다가 사소한 오해라고 한순간 그 목회자를 배신자로 여기며 증오하게 되고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격, 아는 만큼 자유로워진다>는 성격 장애 유형을 설명하며 그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고 도울 수 있는지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혹시 성도들 간에 갈등을 겪고 있는 교회라면 꼭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유하고 싶습니다.

 



 

 

"결국 성격은 가정에서 만들어져요. 어릴 때 어떤 가정에서 자랐느냐 하는 것이 결정적이에요"(213-214).

 

 

이 책을 읽어보면 결국 성격 문제는 '자존감'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존감이란 '자기 가치감'을 말하는 건데, 사람들은 남의 점수만 매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점수를 매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점수를 높게 주는 사람이 있고 형편없이 낮게 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27). 성격 치료의 한 방편은 자존감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에 대한 자기 평가를 현실화"(198)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과 함께 이무석의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을 함께 읽으면 더 좋을 듯합니다.

 

다른 책에서 정체감은 아버지가, 자존감은 어머니가 준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부모도 일부러 자녀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의도치 않게 자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완변한 사람이 없듯이 완변한 부모도 없는 것입니다.

 

낮은 자존감은 "초자아가 자기 점수를 사정없이 깎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복된 소식은 이 초자아의 자리에 냉정하고 엄격했던 부모님이나, 학대하고 방치했던 부모님을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모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시는,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는 것이 완변한 치유의 길이요, 온전한 회복의 길임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귀신 들렸다고 평가하기 전에 정신과 의사와 상의하는 것이 필요해요"(309).

 

 

<성격, 아는 만큼 자유로워진다>는 3부에서 성경 인물의 성격을 중심으로 그 사람의 성격이 어떤 행동 패턴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를 밝힙니다. 설교를 통해서는 잘 들을 수 없는 내용이기에 더 흥미롭기도 했고, 또 이렇게 성경 인물을 이해하는 과정이 신선했습니다. 책을 읽으며 성격을 통해 가장 깊이 이해하게 된 인물은 바로 "이삭"입니다. 화낼 줄 모르는 이삭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또 그런 성격이 이삭의 가정과 자녀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중 무엇보다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것은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를 통해 정신 질환자와 귀신 들린 자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배운 것입니다. 이것은 현장 목회에서 가장 위험하고 또 조심해야 할 부분이기도 하기에 새기고 또 새겨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보다 깊이 있는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때로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은 회피하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기도 하고 인정하기 어려울 만큼 아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를 더 잘 알수록, 또 다른 사람을 더 잘 이해할수록 불필요한 고통은 덜어지고 더 깊은 행복감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무석 선생님이 서문에서 하신 말씀 중에 마음에 깊은 위로를 준 한마디가 있습니다. "자기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에게 좀 더 너그러워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서로를 대해 더 깊이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서로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더 너그러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이 서로를 이해하는 일에, 특히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는 이유겠지요.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

작가
이무석
출판
비전과리더십
발매
2009.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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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쾌한 반격의 기술, 오자서병법 Wisdom Classic 11
공원국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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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가 싸움을 할 때 우리는 정의롭다는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22).

 

 

싸움의 기본 상식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전쟁터에서 뿐 아니라, 생활 곳곳에서 발견되고 확인됩니다. 동생은 힘 쎈 형을 이길 수 없고, 거대 자본을 가진 대기업의 문어발 경영에 동네 구멍가게들은 속수무책으로 집어 삼켜집니다. 그러나 역사는 또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이기는 것이 절대 법칙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기도 합니다. 약한 것도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는 신화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 대표적인 이야기가 다윗와 골리앗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소년 다윗을 깔보았던 장수 골리앗은 다윗의 한 방에 나가떨어지고 맙니다. 다윗은 약자였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옳다는 믿음이 있었고,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은 몸에 익숙하지 않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평소 가장 자신 있는 장돌 던지기로 거인 골리앗을 한방에 제압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약자가 자신의 강점으로 강자의 약점을 파고들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자서병법>의 전제는 "나는 약하고 상대는 강하다"는 것입니다(29). 나는 약하고 상대는 강하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싸움을 해야 하는가, 싸움을 해야 한다면 이길 수는 있는가, 이길 수 있다면 과연 그 방법은 무엇인가를 논한 책입니다. "오자서"는 초나라에서 충의로 이름을 떨치던 가문 출신"으로 간신의 모함을 받아 아버지와 형이 살해당하자 망명객 신세가 된 뒤, 복수를 위해 오나라 왕 합려를 도와 강국 초나라를 쓰러뜨린 인물입니다. <오자서병법>은 신생 오나라가 강국 초나라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승리의 비결을 담은 병법서입니다. 그 비결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반격"의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 <오자서병법>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가 <오자서병법>의 이론이라면, 2부는 <오자서병법>의 실제라 할 수 있습니다. 1부에서는 <오자서병법> 원문을 중심으로 반격의 조건을 논하고, 2부에서는 <오자서병법>의 핵심을 이해하고 있던 4명의 인물들을 다룹니다. 저자는 <오자서병법>의 핵심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응용했는가에 따라 하수, 중수, 상수, 고수로 나누고 있는데, 먼저 초한의 건국자 유비는 "근본은 알았지만 정밀한 부분은 모르는 하수"로, 명나라의 건국자 주원장은 '오자서병법'에 따라 천하를 평정했으나 천하를 얻고 나서 '오자서병법'의 기본을 무시한 중수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승리 후 내부를 다스리는 면에서는 그가 주원장보다 월등했기 때문"에 상수로, 내전을 승리로 이끌로 현대 중국의 모습을 설계한 모택동은 <오자서병법>을 완전히 이해한 최고수로 평가하며 소개합니다.

 

<오자서병법>은 먼저 우리는 약하고 상대는 강한데 그래도 싸움을 해야 한다면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강한 상대가 나의 영역을 침범하고 해하고자 할 때, 반격을 하려면 가장 먼저 우리에게 "정의롭다는 자부심"이 있는지를 살피라고 합니다. 이는 "당신의 울타리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정을 베풀고, 그들에게 이익을 주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반격하고자 할 때는 한몸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단결할 수 있는 힘이 중요합니다. 오자서는 도의와 덕정이 있어야 "정의로운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당당하게 싸움에 임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약한 자가 싸움을 할 때 우리는 정의롭다는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보호받고 있으며 행복하다. 그럼에도 상대방이 우리를 기어이 치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다"(22-23). 다음 단계를 싸우기 전에 내부의 적을 먼저 다스리는 것입니다. 오자서는 특권을 누리려 하는 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싸움에서는 아래 위의 단합이 제일 중요"한데(34), 여러 가지 특권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하는 자들은 그 단합을 헤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자서병법>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전략 중 하나는 "절대로 배수의 진을 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부하들(병사, 백성)을 사지로 내몰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오자서는 부하들에게 위험을 무릅쓰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아군은 가장 안전한 곳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41). "싸움의 목적은 아군이 아니라 적을 죽이는 것이기에 아군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움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약할 때, 우리는 정신력을 강조하며 죽기를 각오하면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자서는 마음은 그런 각오로 싸우되 부하들을 실제로 사지로 내몰지는 말라고 강조합니다. 대의를 위해 '고통 분담'이라는 명목으로 백성(부하)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리더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반격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면 드디어 싸움에 나설 차례입니다. 작은 세력이 큰 세력을 이기는 오자서의 전략은 바로 "유격전"(223)입니다. 유격전은 "빠른 것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전략의 핵심입니다. 더불어 <오자서병법>이 중시하는 것은 "반격의 적기, 즉 타이밍"(58)입니다. 강한 적을 공격할 때는 반드시 적이 준비를 갖추기 전에 기습적으로 쳐야 합니다. 통쾌한 반격의 기술은 적을 공격할 시점을 잘 포착하는 것에 승패가 걸려 있습니다. <오자서병법>은 그 적기가 언제인지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알아야 할 것은 반격의 필살기, 즉 싸움을 완전히 끝내는 전술입니다. 이는 최후의 승부로 "적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것이 목적"입니다. 적을 깊숙이 끌어들인 후, 적의 힘을 뺀 다음 적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를 노려 지체 없이 반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오자서의 전술은 "적이 완전히 승리를 자신할 때까지 끝까지 기다렸다가 일거에 달려드는 것"(63)입니다. 최후의 승리를 위해서는 패배까지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오자서병법>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65).

 

<오자서병법>은 <손자병법>처럼 복수의 전략을 논하지 않습니다. <오자서병법>은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는 "반격의 기술" 하나입니다. <오자서병법>을 읽으며 가장 크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정의롭다는 자부심"의 힘입니다. 전쟁의 강함은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에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오자서병법>에서 약한 자가 강한 자와 싸워야 할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은 "상대보다 명분의 우위를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절대열세였던 모택동이 장개석을 상대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던 것은 명분, 즉 대의를 선점하여 "애국주의 세력들에게 커다른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194) 때문입니다. 

 

싸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적이 얼마나 강한 가가 아니라, 적이 얼마나 부당한가일 것입니다. 부당한 세력에 맞서 싸운다는 인식, 이것이 약자가 가진 가장 강한 힘이며, 싸울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병법서이지만 다양한 응용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약자를 위한 병법서여서 그런지 <오자서병법>은 싸움을 부추기지 않습니다. 승리할 수 없는 싸움은 하지 말며,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라고 당부합니다. 그러나 적기를 노린 날카로운 한 방이 강자를 쓰러뜨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 번 싸워서 많이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방으로 전쟁을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적이 강자라고 미리 겁먹지 말고, 약자의 운명을 탓하며 좌절하지 말고, 그 최후의 한방을 위해 적기를 노리며 실력을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요. 또 누가 알겠습니까? 부당한 세력을 상대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신화의 주인공이 내가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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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 신화 - 부조리에 관한 시론
알베르 카뮈 지음, 오영민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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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바로 자살이다"(17).

 

 

막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연이은 두 친구의 죽음이 삶과 죽음의 거센 혼란 속으로 저를 밀어넣었습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릴 인생이라면 왜 살아야 하는지, 그때만큼 치열하게 묻고 또 물었던 적이 없었던 듯합니다. '결국 우리는 죽음을 향해 그토록 열심히 달려가고 있구나" 하는, 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그 무엇에도 열정을 느낄 수 없었고, 그 어떤 목표도 세울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토록 열망하는 미래가 결국 죽음으로 치닫는 길이라면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이 돌연한 각성, 어느 날 문득 솟아오른 "왜"라는 의문, 낯선 세계에 대한 공포, 알베르 카뮈 식으로 말한다면 아마도 이것이 "부조리의 감정"이며, 그가 말한 "부조리의 첫 징후"(32)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같이 조금씩 죽음 쪽으로 우리를 몰아넣는 이 질주 속에서 육체는 돌이킬 수 없는 전진을 계속해 나아가고 있다"(24). "내일, 자신의 전존재가 거부했어야 마땅한 그 내일을, 그는 내내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육체의 반항,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33).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 신화>는 인간이 삶이 이렇게 부조리한 것일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를 묻는 책입니다. 카뮈의 관심은 "허다한 부조리를 발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가장 절박한 질문은 바로 "삶의 의미"입니다. 그는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바로 자살이다"(17)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목격하는 순간, 우리는 "자의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품어야만 하는 것일까?"(37) 하는 고뇌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카뮈의 이러한 철학적 성찰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사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라는 역설 속에서, '하루하루를 죽어갈 것이냐 살아갈 것이냐', 만일 산다면 '그냥 살 것이냐 기꺼이 살아낼 것이냐'라는 실존적 결단을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7).

 

 

"이렇듯 부조리의 인간은 불타오르면서도 얼어붙어 있는, 투명하면서도 한정된 세계,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주어지는, 혹여 그곳을 넘어서기라도 한다면 오직 와해와 허무뿐인 그런 세계를 언뜻 목격한다. 그때 비로소 부조리의 인간은 이런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을 받아들이기로, 그리하여 이 세계로부터 힘을, 희망의 거부를, 그리고 위안 없는 일생의 고집스러운 증언을 이끌어내기로 결심할 수 있게 된다"(105).

 

그렇다면 카뮈가 내린 결론은 무엇일까요? "사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라는 역설 속에서, 하루하루 죽어갈 것이냐 살아갈 것이냐, 만일 산다면 그냥 살 것이냐 기꺼이 살아낼 것이냐"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카뮈가 우리를 이끌어간 철학적 결론은 무엇일까요? 그가 내린 결론이 궁금했지만 마음만 성급할 뿐, <시시포스 신화>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너무 난해한" 책이었습니다.

 

그가 자살을 거부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111). 그런데 그 이유가 선명하게 잡히지 않습니다. 일단,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의식"을 강조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해석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것 또한 역설적이게도) 부조리를 의식하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데 자살은 그 의식을 삭제하는 것이기에 자살을 반대하는 듯합니다.

 

카뮈는 삶을 포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받아들이거나 화해하지도 않습니다. "이 부조리의 세계를 분명하게 사유하되 더 이상 희망을 구걸"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포기도 화해도 아닌, "반항"을 선택합니다. "그러니 숱한 철학적 입장들 중에서도 유일하게 일관된 철학적 입장이라면, 곧 반항이겠다. 반항은 인간과 인간 자신의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96). "의식과 반항, 이러한 태도들은 포기의 정반대다.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환원 불가능하고 열정으로 가득한 모든 것은 그의 삶과는 반대로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의 태도들을 고무시킨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맞더라도 화해하지 않는 데 있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98).

 

"반항"의 태도는 '시시포스 신화'를 통해 더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시시포스는 신들에게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시포스가 산꼭대기로 바위를 밀어 올리면 바윈느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시시포스는 어차피 굴러 떨어질 바위를 매일 다시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합니다. 결국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아무것도 성취해낼 수 없는 일에 온 존재를 다 받쳐야만 하는"(203) 것이었습니다. "쓸모없고 희망 없는 일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201).

 

그런데 이 형벌(신화)가 시시포스에게 비극적인 것은 그가 자신의 운명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의식의 순간은 다시 돌을 밀어 올리기 위해 산꼭대기에서 들판으로 되돌아 내려가는 순간입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습니다. 카뮈는 "멸시를 통해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205)고 말합니다.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시시포스는 고뇌를 가졌을 테지만, 바로 그 통찰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하며 기쁨 속에서 그의 바위를 기꺼이 들어올린다면 그것은 그의 승리이고, 이것이 "반항"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만 한다"(208)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불행하라고 내린 형벌을 시시포스가 행복하게 수행하는 것, 그것이 곧 반항이고, 그의 승리라는 말일까요?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의를 좀 들어야 할 듯합니다)

 

 

역자는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가 "철학적 전문용어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 체득하고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를 묘사하기 위한 일상적 개인어의 차원에서 이해될 때, 공감의 폭은 넓어지고 그 울림은 깊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5). 세계대전을 전후로 실존주의가 확대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 조선족 관광 가이드에게 대지진 이후 중국인들의 삶이 많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전까지는 돈을 모으기에만 급급했는데, 대지진 이후 삶을 즐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가까이 공존하는 인도에 가면 모두 철학자가 된다는 말을 합니다. 현대 사회가 자살률이 높은 것은,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일상에서 멀리 떼어놓고 추상화 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오히려 삶의 의미가 더 간절해지는 듯합니다. 카뮈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 앞에서 "우리가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알아보는 일, 이것이 내 관심의 전부다"(105)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허무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저는 구원을 호소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절망이 자연스럽게 나를 신에게 인도했습니다. 절박하게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카뮈는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만 같았던 과학은 가설로 끝나 버리고, 명철함은 비유 속에서 빛을 잃고, 불확실성은 예술 작품으로 귀착된다"(43)고 토로합니다. "확실하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묘사와 가르쳐 주겠다고는 하지만 실은 조금도 확실할 게 없는" 합리적 이성은 제게 어떤 답도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통해 생명의 빛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보면 부조리의 감정이 제 삶을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과 사의 근원적 물음 앞에 우리를 세워 놓고" 그냥 살 것인지, 기꺼이 살아낼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게 하는 <시시포스의 신화>, 읽어봐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을까요. 단, 읽기가 쉽지 않다는 장벽이 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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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사는 즐거움 - 자존감, 외모, 과거의 문제에서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도우심 크리스천우먼 멘토링 시리즈 1
스테이시 엘드리지 지음, 김진선 옮김 / 아드폰테스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많은 여성이 자신은 여자로서 전성기는 다 끝났다고 생각한다"(18).

 

 

우리 할머니는 늘 저를 보면, "좋은 시절에 태어나서 호강하며 산다"고 부러워 하셨습니다. 딸이라고 공부도 시켜주지 않고 어린 나이에 시집을 보내버린 '아버지'에 대한 깊고 깊은 원망을, 할머니는 아흔을 넘기는 세월 동안에도 씻어내지 못하셨습니다. 시대가 많이 좋아지고 여권이 신장되었다고 하지만, 인류 역사에 뿌리 깊은 여성 혐오증은 지금도 세계 도처에,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내면 속에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차별 받아야 할 때면, 여자로 태어나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또 다른 투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로 사는 즐거움>은 여자로 태어나서 여자로 사는 일에 지친 여성들에게 필요한 책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베로 수족을 꽁꽁 동여맨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로 사는 즐거움>을 읽으며 그 장면이 떠올랐던 것은, 여성의 삶을 꽁꽁 묶어놓고 있는 "공격, 압제, 차별, 비하, 두려움"의 속박을 이 책이 풀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들리는 듯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외부의 압박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23).

 

 

<나로 사는 즐거움>이 여성을 위한 여느 자기계발서와 다른 점은, 변화를 위한 지침이나 실천 사항을 늘어놓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라는 십계명도 아니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언니의 독설도 아니고, 여성성을 뽐내도록 응원하는 치어리더도 아닙니다. 여성을 위한 많은 자기계발서들이 "온갖 요구로 여성을 압박"하는 "행동교정의 또 다른 버전"일 때가 많은데, 이 책은 단언합니다. "진정한 변화는 외부의 압박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어머니에게 건강한 자존감을 물려받지 못한 저자는 오랜 세월 비만과 수치심의 문제를 안고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45킬로그램이나 체중감량에 성공한 적도 있지만 다시 40킬로그램이나 불어나기를 반복하며 이런 의문에 시달려 왔다고 합니다. "왜 나는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지 못하지? 왜 지속적으로 변화를 유지하는 게 이토록 어렵지?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15)

 

그 자신이 산 증인이기도 한 저자는 "수치심"이나 "자기 훈련"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자기혐오로 변화의 욕구를 자극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처럼 아무 변화가 없다. (...) 자신을 채찍질하고 발을 동동거리며 더 열심히 노력하면 몇 주일은 반짝 성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수십 년간 지속될 수 있는 변화로 이어지기는 어렵다"(22).

 

 


 

 

"우리의 변화는 우리가 사랑받고 있다고 믿을 때 시작된다"(28).

 

 

지속적이고 진정한 변화를 갈망하던  저자는 예수 신앙 안에서 그 길을 찾았습니다. 자신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시도를 그치고, 하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맡겼을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어느 날 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는 내 힘으로 삶을 추스르려는 고된 노력을 포기하고 날 기다리고 계시던 주님의 품에 무너져 안겼다"(16). 아마 이 지점에서 이 책을 읽는 독자층이 갈릴 것입니다. 예수 신앙이 없는 여성들은 나와 상관 없는 책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한 여인이 신앙(사랑)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삶을 바꾸어갈 수 있었는지 귀 기울여보라고 초대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저자와 같은 간증을 가진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여성으로 태어난 한 사람으로서 예수 신앙 안에서 나를 바꿔갈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사랑을 통해서만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여성을 둘러싼 여성 혐오증의 정체를 폭로하는데, 예수님이야말로 그 여성 혐오증과 정면대결을 벌이신 최초의 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런 여성 혐오를 정면으로 배격"하셨습니다(74). 사람들은 교회가 가부장주의를 견고히 하고 여성 차별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의 과오입니다. 교회로부터 여성 혐오증이 세상으로 번진 것이 아니라, 세상에 가득한 여성 혐오증이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접촉하고 가르치시고 존중하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여성이 잘 이해할 만한 비유로 진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저마다 변화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는 수치심, 자기 훈련,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수치심의 목소리는 "난 정말 내가 싫어. 가능하면 이런 내 모습과 이별하고 싶어"라고 말한다.

자기 훈련의 목소리는 "넌 문제가 있으니 확실하게 손을 봐서 정상으로 고쳐놔야 돼"라고 꾸짖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회복시켜주겠다"고 속삭이신다.

나는 주님의 그 음성이 제일 좋다.

 

 


 

 

"당신의 인생에 대해 새 이름을 붙여주라"(305).

 

 

<나로 사는 즐거움>은 그 비결이 "하나님이 작정하신 여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어머니는 자존감을 부여한다"(91)는 저자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아무리 자녀를 사랑하고 헌신된 부모라도 이 세상에 완벽한 부모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과 자존감은 크고 작은 상처로 얼룩져 있습니다. 저자는 <나로 사는 즐거움>을 회복하기 위해 상처를 치유하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과거의 기억(아픈 기억뿐만 아니라 사랑 받았던 아름다운 기억도)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치유가 시작됩니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사랑하며 미래를 꿈꾸는 치유와 회복의 과정 가운데서 자신의 인생에 다시 이름을 붙여주라는 저자의 말이 마음에 깊이 남았습니다. 그 작업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지,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 하나님의 비전을 보는 일이기도 합니다(315). 하나님은 "아름다움과 위험으로 가득한 이야기"에서 우리 각자에게 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나로 사는 즐거움>은 바로 그 이야기 안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를 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무엇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내가 되기를 갈망하게 해줍니다. 그 안에는 이런 약속이 덧붙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면 세상에 불을 붙일 수 있다"(311).

 

그러니 저자는 그레이엄 쿠커의 말을 빌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빛나는 그림과 우리에 대해 더 아름다운 그림을 갖게 해달라고 주님께 구해야 한다"고 일러줍니다. <나로 사는 즐거움>을 읽으며 가장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배운 것입니다. 때로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기도의 방향과 내용이 올바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었는데, <나로 사는 즐거움>은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구해야 할 것인지 기도의 모범을 제시합니다. 그 기도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로 사는 즐거움>가 특별히 재밌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좋아하는 힐송 중에 한 여성 싱어가 애드리브로 "I'm free, I'm free"라고 고백하는 노래(Jesus Won It All)가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I'm free, I'm free"라고 노래하는 저자의 음성을 들은 듯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과거의 상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여성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개입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크리스천 여성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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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기 4200단어 문답식 단어연상 기억 (고교필수) 2 - 특허출원 국내최초 고등 문단기 2
이재환 지음 / 한교연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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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단어 암기를 위한 특수 기억법"

 

 

문.단.기는 "문답식 단어연상 기억"의 줄임말입니다. 외국어를 마스터하려면 단어 암기는 기본인데 문제는 우리의 뇌가 '망각'의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외워도 시간이 지나면 외운 것의 태반은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꾸준히 사용하는 것이 관건이며, '반복'밖에 정도가 없다고 하기도 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하기 위한 여러 노하우가 계발되기도 합니다. <문.단.기>는 문답식으로 구성된 문장과 그림을 통해 영단어를 연상하여 한 번 암기한 단어가 기억 속에 오래 남도록 고안된 기억법입니다.

 

문단기는 <고교 필수단어 4,200>를 총 6가지 책으로 분권했는데, 이 책은 그중 제2권입니다. "commerce"부터 "erupt"까지 총 58개의 단어를 "문답식 단어연상 기억법"으로 암기할 수 있도록 구성해 놓았습니다.

 



 

 

<문.단.기>는 교재는 총 3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영어는 생각하지 않고 우리말만 생각하며 그림을 보면서 연상문장을 머리에 기억"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면, "무슨 죄를 법했니? 코를 때려 코밑에 피가 나게 한 죄"라는 문답식 연상 문장을 그림과 함께 기억합니다. "무슨 죄를 범했니?"라는 질문은 "범하다"라는 단어를, "코를 때려 코밑에 나게 한 죄"라는 대답은 "커미트"라는 영단어를 떠올리도록 고안된 문장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이제 그림만을 보고 연상문장을 떠올려서 큰소리로 말"하는 훈련입니다. 한 사람이 무슨 잘못을 하고 떨고 있는 그림을 보면서 "무슨 죄를 범했니? 코를 때려 코밑에 피가 나게 한 죄"라는 문장을 연상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범하다"의 영단어는 "커미트"라는 것이 생각나겠지요?

 



 

 

세 번째 단계는 기억을 확인하는 단계입니다. 한글로 기억된 연상문장을 말한 뒤, 발음기호를 보고 정확히 큰 소리로 영어발음을 3번씩 해보라고 권합니다. 종이 등을 이용하여 그림만 보고 영어단어 말하기, 또는 영단어를 보며 뜻을 말해봄으로 정확하게 암기하고 있는지 테스트해 볼 수 있습니다.

 

 

일단 4,200개의 단어를 '문답식 연상문장'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 대단해보입니다. 암기를 돕기 위해 참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창 공부를 할 때, 이런 저런 암기법을 많이 써보았지만 연상법이 그래도 효과가 좋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4,200개의 단어를 모두 이런 식으로 외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 교재만으로는 문답식 문장을 외우는 것이 그냥 영어단어를 외우는 것보다 더 피로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자도 말하고 있듯이 "문단기는 영상과 함께 학습해야 그 학습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교재를 앞에 두고 문장을 외우려하기 보다 영상을 보며 소리를 듣고 따라하는 식으로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문단기 영상 체험판이 있다면 어떤지 한 번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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