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시절
안드레아스 알트만 지음, 박여명 옮김 / 박하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영화를 보는 두 시간 동안 나는 그저 불쌍한 자식, 불쌍한 개자식일 뿐이다. 심장이 산산조각난 개자식. 스크린 속 영웅 같은 존재를 갈망하는 개자식. 아들을 깨안고 보호해주는 아버지를 갈망하는 개자식"(320).

 

 

아이들이 입원한 정신병원에 가면 엄마(양육자)들에게서 공통점이 보인다고 합니다. 입으로는 "난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는데, 얼굴(표정)과 온 몸으로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부모(양육자)의 이런 태도가 아이의 정신에 (지독한) 혼란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어느 심리학과 교수님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개 같은 시절>은 부모의 사랑을 갈망했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잔혹한 폭력과 학대에 시달려온 한 남자의 울부짖음입니다. 어쩌면 그의 아버지는 그것이 사랑이었고, 교육(가르침)이고, 관심이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내면에 깊이 새겨진 끔찍한 구타와 경멸과 멸시는 아이가 성인이 된 뒤에도 그의 삶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나는 내가 만든 감옥 안에서 수치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 수치는 과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84).

 

그런데 이 아이는 "본능적으로 글을 쓴다는 쓴다는 것이 (서투르고 형식적일지라도)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삶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것"(112)을 느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를 패배자로 낙인 찍으며 쓸모 없는 인생으로 추락하던 그를 구원해준 것은 바로 '글쓰기'입니다. <개 같은 시절>은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행기자"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그는 자신의 증언이 '틀림 없는 사실'이라고 고백하지만, 이 책의 장르(소설)을 감안해서 읽어야 합니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구타와 학대에 시달린 그의 어린 시절은 '역겨움' 그 자체이지만, 그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멈췄다면 이 책은 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자신을 향한 "모든 멸시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의 어린 시절의 상처와 작별하기 위해 이 글을 썼을 것입니다. "심지어 나는 여전히 소아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과거의 문제들을 내려놓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기대하며 바라보는 다섯 살짜리였다"(282).

 

이 아이는 아버지를 '개자식'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아버지는 주변 사람을 짓밟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겼던 '개자식'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꼬리를 내린 개 같은 삶을 산 여인으로 기억됩니다. "어머니는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 같았다. (...) 어머니는 나약한 모든 이가 저지르는 죄를 지었다. 스스로 환경을 바꾸려 하지 않고 희망하기만 하는 죄"(250). (어느 한 쪽의 부모가 무조건 참기만 하며 사는 것이 자녀의 인생에 어떻게 또다른 독이 되고 고문이 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하는 불쌍한 개자식"일 뿐이었다고. "자식도 살고 싶다는 것,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 자식을 구속하고 쉴 새 없이 의심하기보다 격려해줘야 한다는 것, 죽었다 깨어나도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할 것들이었다"(240).

 

'사랑 받지 못한 아이'이라는 정체감은 평생을 따라 다닙니다. '개 같은 시절'을 보낸 아이의 어릴 적 기억은 무엇으로도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그 기억과 화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매일 아버지를 죽이는 꿈을 꾸었던 이 아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 참 후, 어쩌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있는 빛을 발견합니다. '전쟁터'의 경험이 아버지를 어떻게 파괴했는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건강하고 매력적인 청년이었다는 것, 아버지의 아버지가 건넨 불행에서 도망칠 힘이 없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 속에 자리잡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아는 중에 가장 외로운 인간이었다. 어머니보다, 나보다 외로운 사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할 사람이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259).

 

"내 인생은 도둑맞았다. 모험도, 기쁨도 없었다.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부모도 없었다. 잔뜩 지저분해진 모습으로, 콧물 흘리며 집으로 돌아와 놀이터에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에 흥분할 때, 그 호기심과 순수함, 경험에 대한 갈망을 칭찬받는, 아이다운 인생이 없었다. 나는 어린 군인이었다"(95).

 

혹시 당신이 '사랑 받지 못한 아이였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개 같은 시절>은 자신의 아버지를 개자식이라고 부르며 절규하면서도 결코 희망을 멈추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잔혹한 폭력 앞에서는 나를 굽힐지라도 그 밖의 상황에서는 무너지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나의 존엄은 누가 나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켜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하며 우는 한 아이와 함께 울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세 번째 배심원
아시베 다쿠 지음, 김수현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4년 1월
평점 :
품절


 

 

"어째서 그들은 그토록 배심제를 꺼렸던 걸까?"(411)

 

 

법은 정의의 편이라고 배웠지만, 살아 보니 법은 확실히 강자의 편입니다. 강자의 편에 선 법과 대면, 사회적 약자에게는 가장 큰 절망의 벽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절망은 저항의식과 분노마저 삼켜버리는 무력감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열세 번째 배심원>은 그런 무력감을 걷어치웁니다. 약자이지만, '시민'으로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이었습니다. <열세 번째 배심원>은 '법정 미스터리'입니다. 법정 스릴러의 흥미진진한 대결과 추리소설의 묘미가 잘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게다가 재밌는 소설을 읽으면서 사회적 문제까지 깊이 성찰해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 지망생인 '다카미 료이치'에게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선배 '후나이 신'이 괴상한 제안을 해옵니다. "... 자네, 누명 사건의 히어로가 되어볼 생각은 없나?"(21)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의 범인이 되어보라는 제안이었습니다. 자진해서 누명을 쓴 뒤, 수사 기관이나 매스컴을 의도적으로 함정에 빠뜨리자는 것입니다(37). "경찰과 매스컴이 판결은커녕 재판조차 시작되기 전에 '범인'을 단정"짓는 행태를 고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책으로 펴내 일약 스타 작가로 데뷔하라는 유혹.

 

그는 누명 계획의 주인공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계획대로(!)  범인이라는 누명을 쓴 뒤. 법정에 선 다카미 료이치. 그런데 계획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계획한 범죄가 아닌, 실제 강간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다카미 료이치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지만, 뒤늦은 깨달음이었습니다. 반박 불가능한 결정적 증거들이 그를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꼼짝없이 유죄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는 다카미 료이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변호사 '모리에'입니다. 모리에는 다카미 료이치 사건 뒤에 도사리고 있는 거대한 음모의 실체를 감지합니다. 모리에는 다카미를 구하기 위해 세 개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습니다. 첫째는 강간 살인죄의 진범을 밝혀내는 것, 둘째는 다카미에게 죄를 덮어씌운 계략의 진상을 폭로하는 것, 셋째는 배심 재판에 사악한 의도를 가진 자들을 백일하에 끌어내는 것입니다(310). 이 싸움의 성패는 한 가지 질문에 달렸습니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연출한 (보이지 않는) 적이 이 재판의 종막에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359)

 

(스포일러가 될까 직접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열세 번째 배심원>은 법정 스릴러라는 장르를 빌어 '배심제'에 대한 중요한 사회적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배심제란 "열두 명의 일반 시민이 심리에 참여해 직업 재판관을 대신해서 사실 인정을 하는 제도"(112)입니다. "사실 인정"이란 한 마디로 유죄, 무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재판관은 그 결과에 따라 형을 결정합니다. 작가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 중 유일하게 일본에만 배심제가 없다는 사실을 꼬집습니다(초판 당시). '정상적인(!) 국가"라면 필요불가결한 이 제도가 일본에서만 왜 도입되지 않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들은 그토록 배심제를 꺼렸던 걸까?"(411)

 

한때 일본에서는 배심 재판이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이 횡행했다고 합니다. 저널리즘도 "일반인의 사법 참가는 말도 안 된다", "일반인에게 맡겨둬서는 제대로 된 재판이 불가능하다", "일본인의 문화수준으로는 시기상조다", "국민성에 맞지 않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쏟아내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검은 목적이 숨겨져 있습니다. '시민의 사법 참가를 저지하려는'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배심제가 도입되면 고란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배심제가 왜 이토록 중요한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고, 사실 우리에게는 던져진 적도 없는 질문입니다. 작가가 폭로한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면, "일본의 재판은 서면이 우선되고 법정에서의 변론은 중요시되지 않는다"(303)고 합니다. 오히려 주장이나 논쟁을 저속하다고 생각하는 풍조 때문에 '범인의 자백'을 결정적 근거로 해서 수사가 종결되는 결함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배심제를 도입하면 변호사는 물론 검사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상식을 가진 열두 명의 일반 시민을 납득"시켜야 합니다. 용의자의 자백 외에, 납득할 만한 증거가 수집되고 보존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작가는 "경찰이나 검찰이 고생해서 법정에 끌어낸 피고인을 무죄로 하는 것은 곧 '한 식구'의 체면을 구기는 짓이며 그것이 그대로 출세에도 영향을 끼치는"(241) 현실을 고발합니다. 그런데 배심제, 즉'사법 업계인'과는 무연한 일반 시민의 눈이 더해지는 것만으로 이런 풍조가 상당히 나아진다는 것입니다(303).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그들만'의 재판을, 시민이 감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포일러 주의) <열세 번째 배심원>이 폭로하는 검은 세력(배심제를 반대하는)의 목적은 이것입니다. "엘리트와 그 피를 잇는 자는 설령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벌해서는 안 된다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언제까지고 계속 이 나라를 지배하게 하기 위해!"(398) 다른 말로 하면, 법 권력을 시민과 나누지 않겠다는 맹렬한(!) 의지인 것입니다!

 

<열세 번째 배심원>은 반전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기막하게 정교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제법 흥미진진하고 끝나는 순간까지 섣부른 예측을 거부하는 묘미가 있습니다. 혹시 법정 미스터리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 하더라도 '배심제'에 담긴 사회적 함의를 함께 읽어보자는 의미에서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기도 합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희망을 함께 품어보고 싶습니다. 함께 품어야 더 커지는 희망이고, 약자 편이 아닌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 할테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다면 앞으로 무엇에 마음을 쏟아야 할까? 어디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찾아야 할까?"(런어웨이, 54)

 

 

미치도록 이해받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말로는 설명이 잘 안 되지만 누군가 소리없이 끓어넘치는 내 마음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해받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것 같은 그런 순간말입니다. 단편 소설의 거장이자, 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제게는 딱 그런 소설입니다.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에서, 이해받고 싶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순간들과 불현듯 마주쳤습니다. 얼마나 정밀하게 포착해냈는지, 꼭 꽁꽁 숨켜두었던 것을 들킨 기분입니다. 그때마다 마음에서 쩍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얼음판이 쩍하고 갈라지듯이 말합니다.

 

1931년에 태어나 이제 80대 할머니가 된 앨리스 먼로는 누구보다 여자를, 여자의 삶을 잘 이해하는 작가입니다. 그래서인지 나와는 시대적 환경도 다르고 문화적 배경이 다른데도, 주인공들의 삶이 낯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실로 가 남편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다. 샤워의 열기 때문에 눈물샘이 터진 게 틀림없었다. 클라크에게 기댄 칼라는 그대로 무너지며 엉엉 흐느껴 울었다.

클라크가 기보드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한테 화내지 말아줘." 칼라가 울면서 말했다.

"화난 거 아니야. 당신 이러는 거 너무 지긋지긋해, 그뿐이야."

"당신이 화를 내니까 내가 이러지."

"내 핑계 대지 마. 난 당신 때문에 숨이 막할 지경이라고. 저녁준비나 해"(런어웨이, 21).

남편과의 가벼운 외출을 준비하며 빨래방에도 가고 카페에도 가려고 생각했던 아내의 (다소) 돌발적인 행동과 남편의 반응입니다. 여자와 남자의 차이, 그리고 미묘한 감정선의 묘사가 정말 세밀하다고 감탄했던 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순전히 <런어웨이>라는 제목 때문이겠지만, 8편의 단편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읽었습니다. 남편으로부터(런어웨이), 현실로부터(우연), 가족으로부터(머리않아, 침묵), 따분한 일상으로부터(열정), 과거의 허물로부터(허물), (어쩌면) 나로부터(반전), (어쩌면) 불확실함으로부터(힘) 말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도망치려 하는구나. 젊은이들은 오늘과 다른 내일로, 그렇게 기대했던 '내일'에 도달한 늙은이들은 도망쳐온 과거로. "하지만 낸시 자신이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일, 시간만 나면 하고 싶은 일은 과거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기보다 과거를 끄집어내 자세히 살피는 것이다"(493).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속에 살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다시 과거로 여행을 떠나는 인생. 참 아이러니합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인데 말입니다. 만일 '미래'나 '과거'가 없다면 우리의 시간(현재)은 무엇으로 채워질까요.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을 2권 읽은 것이 다이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푹우처럼 몰아치지도 않고 흡착기처럼 강하게 빨아들이는 느낌도 없습니다. 자극을 좋아하는 청춘들에게는 다소 지루할 수 있고, 강렬한 것을 찾는 독자에게는 다소 심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폭풍처럼 휘몰아치기보다 느릿느릿 산책하듯 책을 읽는 독자라면, 잔디밭에 한가롭게 앉아 깊은 사색 속에 잠겨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삶은 온통 뒤흔들어놓는 혼란, 기쁨, 열정, 사랑, 환희, 파국, 오해와 같은 거창한 것들이 모두 우리가 사소하게 흘려보내는 일상 속에서 튀어나온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지금을 이겨낼 수 있다 - 인생의 고비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은혜
맥스 루케이도 지음, 최요한 옮김 / 아드폰테스 / 2014년 1월
평점 :
절판


 

 

 

 

"인생이 밑으로 내려가는 것만 같을 때"

 

 

"당신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최고입니까?" 이 책은 제게 이런 질문을 던져주었습니다. "목표했던 대학, 원하던 직장, 기대했던 승진, 바라던 집, 간절한 기도, 꿈꾸었던 소원이 응답되었을 때말고, 인생이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것만 같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내게 선하신 분이며, 최고이신 분인가?" 

 

이 질문에 확고하게 "Yes"라고 대답하기까지 저도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 앞에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이러실 수 있느냐고 따지기도 했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 앞에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시냐고 의심하기도 했고, 끝날 것 같지 않은 고통 앞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절규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어떤 절망이, 상처와 실패가 당신을 주저 앉히려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뿌리채 흔들어버리려 한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시련의 한 가운데서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최고라고 고백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수 있는 기적을 선물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지금을 이겨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요셉이 오늘의 요셉에게 보내는 메시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구약의 요셉 이야기를 통해 <너는 지금을 이겨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형들에 의해 절망과 두려움의 굴 속에 던져지고, 노예로 팔려가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요셉의 이야기가 왜 성경에 기록되어야 했을까? 멕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악을 이기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 바로 이것이 성경에 요셉 이야기 기록된 이유라고 말합니다(31).

 

고난에 처한 사람에게 성급하고 어설픈 위로는 오히려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고난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입니다. 가족에게 버림받는다는 것, 낯선 땅에 내던져진다는 것, 얽매여 산다는 것, 억울한 누명을 쓴다는 것, 배신 당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괴로움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요셉이 절망의 한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합니다. "힘을 내. 고난은 고통스러울 테고 금방 끝나지도 않을 거야. 하지만 하나님이 고난을 선하게 바꾸실 거야. 그동안 어리석게도 순진하게도 있지 마.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마. 하나님의 도움으로 고난을 이겨낼 거야"(20). 

 

창세기에서 (상대적으로) 꽤 많은 장을 할애하고 있지만 사실 요셉 이야기는 몇 장 되지 않습니다. 마음 먹고 읽으면 1시간도 걸리지 않을 분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고난에 처해지기는 했지만 애굽의 총리로 고속승진을 한 요셉의 인생을 쉽게 부러워합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렇게 조언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십 년에 걸쳐 읽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91). 이 한마디가 요셉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무게를 실감하게 해주었습니다.

 





"기다림의 반전"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직조의 달인, 건축의 달인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이를 위해 요셉을 증인으로 내세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요셉의 찢어진 겉옷을 관복으로 바꾸시고, 그를 가두었던 굴(감옥)을 궁으로 변화시켰는지 생생하게 재현합니다. 여기에 또다른 증인들이 소환되어 한결같은 증언을 합니다. "하나님은 악을 결국 선으로 바꾸신다"고 말입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는 "몇 분 몇 초가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일어난다"(30)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죽을 힘을 다해 약속을 붙들었던 요셉처럼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때로 기다림에 지쳐 상한 감정이 생긴다면,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야단"(54)도 쳐야 합니다. 기다림의 시간 동안 기도와 믿음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며 "그때에도"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많은 사람이 불행이 닥치면 자신의 정체성을 재규정한다고 꼬집습니다. "나는 이혼녀야, 나는 중독자야, 나는 파산자야, 우리 애는 장애인이야, 나는 상처를 받았어"(41).  그러나 하나님이 선하심을 믿는 자라면, 환경이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우리의 제1 정체성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이 책은 위기에 처한 사람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분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가족, 징그럽게 변하지 않는 가족, 평생 짐만 되는 가족 때문에 상처와 원한의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요셉은 또다른 위로와 회복의 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아기처럼 엉엉 우는 요셉을 따라 울다 보면, 우리도 요셉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으니"(창 50:20).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저술가를 알지 못합니다. <너는 지금을 이겨낼 수 있다>는 고난을 가볍게 보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라고 우격다짐을 하지도 않습니다. 금방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큰소리 치지도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에서 시선을 돌려 위를 바라보게 이끌어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생하게 알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아는 것, 여기에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 고물상 - 개정판
이철환 지음, 유기훈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또로록 눈물 한 방울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만 눈물 한 방울이 또로록 떨어졌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눈물을 훔치는데, 참으려고 하니까 더 걷잡을 수 없어졌습니다.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는 사이로 지금의 내 나이만큼이었을 아빠의 젊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거대한 산처럼 보였던 아빠가 그때 얼마나 어렸었는지, 내가 나이를 먹어보니 이제야 알겠습니다. 집에 경매 딱지가 붙고 대가족이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전부 아빠 책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욕심이 너무 컸다고 하고, 누군가는 정보가 없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사람을 너무 믿었다고 하며 아빠 탓을 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아빠에 대한 원망이 날로 커졌습니다. 아빠는 왜 그렇게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을까. 아빠가 가족에게 안겨준 가난이 원망스러웠습니다. 3년만 참으라고 약속해놓고선, 5년이 가고, 7년이 가도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가 끝이겠지 했는데 더 바닥이 있었고, 여기가 정말 끝이겠지 했는데 더 바닥이 있었습니다.

 

<행복한 고물상>에서 그때 그 시절 아빠와 마주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아빠도 얼마나 두려웠을지.



 

 

"그날 밤 아버지는 천둥치는 지붕 위에 앉아 우리들의 가난을 아슬아슬하게 받쳐 들고 계셨다. 우리 가족의 든든한 지붕이 되기 위하여 비가 그치고 하얗게 새벽이 올 때까지……"(60).

 

 

사람들 많은 데서 나를 울린 이야기는, "우리들의 지붕, 아버지"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더 높은 산동네로 이사를 간 뒤 마른 꽃잎처럼 시들어가며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아버지. 가난 때문에 우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곰팡이 핀 벽을 향해 돌아앉아 말없이 술만 삼키시는 아버지.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천장에서 물이 새는 데도 때마침 팔에 깁스를 하고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 그 아버지가 조용히 집을 나가셨습니다. 밤 12시가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청둥소리는 더욱 요란해지고 가족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온 가족이 아버지를 찾아나섰지만 찾지 못합니다. 포기하고 돌아오다 아버지를 발견합니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지붕 위에 앉아 계셨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지붕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검은 그림자는 분명 아버지였다"((58)

 

"천둥치는 지붕 위에서 온몸으로 사나운 비를 맞으며 앉아" 계신 아버지. 아버지는  "깨어진 기와 위에 앉아 우산을 받치고 계셨던 거였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부르지 못하게 하십니다. 가족을 위해 그것마저도 할 수 없다면 더 슬퍼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고물상>. 고물상으로 먹고사는 가난한 형편이었지만, 이들은 행복했습니다. 서로의 마음을,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날의 행복

 

 

<행복한 고물상>은 행복을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첫 발간은 2005년이고 이 책은 개정판입니다. 이 책에 대한 입소문을 들었던 터라 개정판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행복한 고물상>은 작가의 유년시절에 대한 기억입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기억들이 따뜻한 동화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작가의 행복한 기억이 제 유년시절도 다시 돌아보게 해주었습니다. 행복한 기억으로 말입니다.

 

세련된 아파트에서 문을 굳게 잠그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쩌면 이 책은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제 우리 삶엔 소용없는 '연탄재' 같은 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 육성회비를 내지 못한 친구가 부끄러울까 자신도 내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주는 친구, 냄새가 싫다며 아들에게만 순댓국 한 그릇을 사주셨지만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순댓국이었다는 것, 취객에게 맞고 있는 피에로를 우연히 보았는데 알고보니 가족 몰래 알바를 하는 아버지였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진부할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울어보고, 내 아픔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도 돌볼줄 알게 되었다면 이 책이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갈 것이라 확신합니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이 작가가 <눈물은 힘이 세다>라는 작품을 쓸 수 있었구나 혼자 고개를 끄덕여보기도 했습니다.

 

이철환 작가의 <연탄길>이라는 작품 때문인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안도현 시인의 시가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제는 하얗게 타버린 연탄재와 같이 흘러간 세월의 이야기이지만, 가슴 속에 뜨거운 불을 지펴주는, 꽁꽁언 마음을 녹여주는, 눈물의 힘을 알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내 마음의 거리에 자리를 내어주고 싶은 <행복한 고물상>입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바이러스 2017-03-12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반갑습니다.
요즘 걱정이 있어서 인지, 물론 삶의 순간들이 선택의 연속으로 고민이지 않은 날이 없겠지만요.
행복한 고물상, 연탄길 등은 다 서민들의 삶에 묻어나는 사랑이 꽃피는 이야기죠.
현대인들은 욕심, 더 많은 탐욕에 마음이 아파지는 것 같아요.
님의 글을 읽고 보니 마음 한켠이 따뜻해 짐을 느끼고 갑니다.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