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기독교 - 위기에 처한 현대 기독교 영성의 실체 보고서
박태양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대의 사람들은 지금 "내가 신이다"라는 뉴에이지 사상과 "하나님은 신이다"라는 진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종용받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261)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순결을 지키며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책입니다. 시대 정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성경을 오염시키고 복음을 오도하는 사상들이 교묘하게 섞여 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아예 대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가장하여, '기독교'를 가장하여 복음을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오역하는 것 자체가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지만, 보기에는 마치 하나님을 충실히 따르는 듯 가장하고 있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위험한 존재입니다. 복음을 그대로 따르지도 않으면서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본뜻이다"라는 식으로 복음을 훼손하는 행위는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진짜와 거짓을 분별해내기 힘들게 만들며, 모두에게 기독교 자체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특히 역사적으로 존경을 받는 슈바이처, 마더 테레사에서부터 오프라 윈프리나 우리나라의 한비야처럼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박애주의, 종교다원주의, 합리주의 등으로 무장하여 복음을 공격하는 힘이 얼마나 센지 모릅니다. <눈먼 기독교>는 이러한 위험을 경고하며 교회로 하여금 진리로 단단히 무장하도록 돕는 책입니다.

 

"복음주의 선교사이자 철학자인 프랜시스 쉐퍼"는 "오늘날의 모든 병리 현상이, 진리는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라고 믿는 거짓 영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진리는 상대적이며 스스로가 절대자 이기 때문에 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뉴에지이다"(261)라고 통찰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자신의 해석, 자신의 이성에 맞는 해석,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무엇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죄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성의 잣대로는 미련해보이는 복음이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임은 다시 한 번 겸손히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미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318).

 

그런데 <눈먼 기독교>를 읽으며 두려움마저 느낀 것은 복음을 훼손하는 이러한 공격이 교회 밖에서 안으로 향한 것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눈먼 기독교>는 근본주의 신앙의 토대 위에서 교회 안에 자리잡은 혼잡한 '비기독교'적 사상을 지적합니다. C.S. 루이스, 마틴 루터 킹의 사상에 충격을 받을 기독교인들도 꽤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밖에도 교회 안에 한창 논쟁이 되고 있는 WCC의 문제점과 신사도운동의 실체에 대해서 깨어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추천사를 쓰신 분들이 말한 것처럼 이 책은 "편협한 시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는(송태근 목사), "논쟁적" 책입니다(이찬수 목사). 예를 들면, 복음의 근본 진리는 다섯 가지인데 이 범주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사상, 가르침도 모두 거짓이다, 틀렸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습니다. 저자가 책을 마무리하며 남긴 말처럼,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성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제대로 믿고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478). <눈먼 기독교>의 후속으로, 거짓과 왜곡된 교리에 맞서 우리가 수오해야 할 복음의 진수를 보다 깊이 있게 성찰한 책이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처한 영적 상황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는데, 마음에 오랜 잔상을 남기는 한마디는 프랜시스 쉐퍼의 다음의 말입니다. "21세기가 가까이 오면, 사람들은 목적 없이 돈을 벌고, 진리가 없는 교육을 하고, 의미가 없는 사랑을 나누며,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이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260).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길수 2015-08-07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필독서 임니다
 
현대미술 100점의 숨겨진 이야기 - 다섯 살짜리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현대미술
수지 하지 지음, 하지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다섯 살짜리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현대미술(?)

 

 

요즘 "댄싱 9"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보고 있습니다. "국내 최초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임을 표방하는 "댄싱 9"은 두 팀으로 나눠 대결을 펼치고 춤의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9인의 심판관이 점수를 주는 방식으로 승자를 가립니다. 그런데 심판관들의 점수가 흥미롭습니다. (거의 매번) 최저점과 최고점의 차이가 30점 이상이 납니다. 같은 무대를 본 전문가들의 평가가 30점 이상의 점수 차이가 생긴다는 것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전문가 '취향'의 문제일까요?   

 

그런데 현대미술에도 이렇게 엇갈린 평가가 존재합니다. 아케데믹한 미술에 대한 반항, 급속도로 발전한 기술, 세계대전 같은 사건들의 충격 속에 나타나기 시작한 현대미술의 저항적(?) 작품들이 "다섯 살 짜리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현대미술 100점의 숨겨진 이야기>는 아이들 장난 같은 작품이라고 평단과 대중의 강한 반감을 샀던 현대미술 100점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왜 이 작품들이 "다섯 살짜리 아이는 만들 수 없는" 작품인지 이유를 설명합니다.

 

<현대미술 100점의 숨겨진 이야기>는 "수많은 평론가들이 기교의 부재를 예술적 기량과 정교함의 부재로 간주"하고 있다고 일침합니다. 오랫동안 "미술가의 기교에 감탄하기만" 했던 눈으로는 잘 읽어낼 수 없는 현대 미술가의 대담함, 사회 탐구, 내재적 갈등 등을 읽어냅니다.

 

 

  

작품과 장난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테크닉? 규칙? 진지함? 의미? 위의 작품은 '마크 로스코'라는 미술가의 작품(무제)입니다. 이 작품이 단순한 색칠 놀이가 아니라 미술사적 맥락 속에서 영감 가득한 작품으로 평가받게 해주는 경계(?)는 어디일까요? 이 책의 저자는 이 작품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로스코의 구성과 엷은 색채는 강력하고, 심지어 영적인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신중히 계획된 것이다"(81).

 

단순히 마음에 드는 색을 아무렇게나 칠한 것이 아니라, "계획"된 작품이라는 것이 그 경계라는 말일까요? "로스코는 평온하게 하거나 감정을 교양시키거나 기운을 북돋는 등의 다양한 분위기의 효과를 불러오기 위해 광범위한 색과 색조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정말 다섯 살 짜리도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는 소리를 듣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색감이 끌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작업 No.227:꺼졌다 켜졌다 하는 전등"입니다. 2001년 터너 상을 수상한 설치작품입니다. 빈방에서 매초 전등이 켜졌다 꺼지는 것이 작품의 컨셉입니다. 이 황당한(?) 설치작품이 담고 있는 "의미"가 어마어마합니다. 이 작품은 "삶에 대한 보편적인 은유, 즉 탄생(켜진 불)과 죽음(꺼진 불)으로 간주될 수 있다. (...) 전시장을 실제 작품으로 만든 "작업 No.227:꺼졌다 켜졌다 하는 전등"은 미니멀리즘과 개념주의를 재치있게 비틀고 현대미술의 오만함을 비판한다. 우쭐댈 권리를 제거하기 위해 크리드는 작품을 숫자로 분류하고 거의 상업적인 가치가 없는 재료를 활용한다. 이를 통해 의도적으로 우리의 낭비적인 문화에 도전한다"(95).

 

미술가의 "의도"를 눈치챌을 관람자가 몇이나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이 작품의 주인 마틴 크리드는 "무엇이 작품인지 결정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관람자"라고 하는데 현대미술의 이와 같이 "우스꽝스럽고 때로 불편한 방식"의 유머를 눈치채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현대미술 100점의 숨겨진 이야기>가 뽑은 100점의 작품 중 가장 장난 같으면서 도발적이면서 난해한 작품으로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을 꼽고 싶다. 저자는 마르셀 뒤샹이 뉴욕의 철물점에서 구입했다는 이 평범한 소변기를 전시함으로 "아름다움, 독창성, 취향 같은 전통개념에 도전했다"고 해석한다. 미국독립미술가협회는 "표절과 상스러움을 이유로" 이 작품을 거절했다는데, 저자는 이 작품에서 이러한 질문들을 읽어낸다. "사물을 미술작품으로 정의하는 특징과 조건은 무엇인가? 미술은 주로 눈(정신이 아니라)에 호소해야 하는가, 재료의 변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기성품도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103)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의 작품이니 할 말은 없지만, 미술가의 이러한 도발이 "아이들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판단 하에 "그 자체로 미술의 혁신을 이뤘다"는 작가의 해석이 그리 마음에 와닿지는 않습니다.

 

 

  

 

"미술은 항상 당대의 의미를 반영한다"(7)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개념 '기다림'"이라는 작품입니다. 표면을 베는 기법을 처음으로 사용했다는데, "캔버스를 단 한 번 단호하게 베는 행위"를 처음 시도했다는데 이 작품의 의의가 있어 보입니다. 폰타나는 "공간주의는 과학기술로 모든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에 미술가들도 비슷한 에너지와 역동성을 창조해야 한다는 원칙에 토대를 두었다"(114)고 합니다. "베는 행위는 현실세계를 재현 혹은 장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초월하고 무한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현대미술이 사물을 "진짜"처럼 그리는 것을 중단한 것은 사진의 발명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보는 듯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서 자유로워진 미술가들의 작품은 훨씬 더 다양해지고 기법도 다채로워졌습니다. 어떤 현대미술은 "다섯 살짜리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작품이라는 조롱을 받았지만, 오히려 미술가들은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작품으로 고고한(?) 미술계를 조롱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입니다. 관람자의 눈에 장난 같아 보이는 작품도 신중하고 철저하게 "계획"된 미술가의 의도(!)를 읽어내는 순간 독창적인 예술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현대미술은 오히려 더욱 난해하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현대미술 100점의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서 한발짝 다가설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해석이 더 그럴 듯하게 들리는 작품들이 많지만, 현대미술가들의 즐거운 농담 같은 작품들 속에 그렇게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재밌는 관람이었습니다! 이 책이 호언장담을 한 번 믿어보시면 어떨런지요. "이 책을 통해 당신은 현대미술이 과거 수백 년의 사실적인 미술과 어떻게 다른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다가올 몇 년간 당신의 미술관 방문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다"(앞 날개 中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끝나지 않은 복음 -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라
리처드 스턴스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드폰테스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파악하고 거기서 우리가 할 일을 찾아야 한다"(18).

 

 

열심히 살지만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느낌에 시달리는가?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생을 돌아볼 때, 이게 다가 아닌 것 같은, 뭔가 더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가? <끝나지 않은 복음>은 바로 그런 느낌과 하나님의 나라의 "끝나지 않은" 사역이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신자들 중에서도, 좋은 직장에 다니며 탄탄하게 경력을 쌓아가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는 신자들이 많다. 졸업을 앞둔 학생들이 진로를 고민하듯,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기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싶은데,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주신 거룩하고 위대한 사명이 있다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신자들이 많다. <끝나지 않는 복음>은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책이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하고 계시는 일 속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각자 개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려면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세상에 해오신 일, 그리고 지금 하고 계신 일이 무엇인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한다. <끝나지 않는 복음>은 창조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해오신 일, 써 내려오신 이야기가 무엇인지 큰 그림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큰 그림 위에 우리의 위치가 어디쯤인지 찾아준다. 오늘 내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깨우쳐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이야기에서 매우 특별한 역할을 맡기시려는 의도로 당신을 창조하셨다." <끝나지 않는 복음>은 우주의 저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우리를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각자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서 맡겨진 역할이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 역할이 무엇인지 찾지 못하고 있다면, 불완전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만일 불완전한 느낌에 시달린다면 걱정하지 말자.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그것도 주인공으로)이 있다는 뜻이니까.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그 줄거리를 놓쳐버리고 있다는 데 있다. 그 큰 이야기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이 있다." 예수님은 부활하고 하늘로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중요한 과제를 맡기셨다. 그것은 온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는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완수해야 끝이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 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맡기신 이 과제는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끝나지 않은 복음>이다.

 

바통은 이제 우리 손에 있다. 그런데 <끝나지 않은 복음>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놓치고 있는 21세기 교회의 충격적인 실상을 폭노한다. "부유하고 편안해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불같은 마음을 다 잃어버린 것 같다." 처음 제자들의 마음은 불타올랐고,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으며, 300년이 지나지 않아 복음 혁명은 로마제국을 정복했고 전 세계를 뒤바꿔놓았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 나라 사역은 아직 미완성이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의 목적의식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예수님은 지옥문에 쳐들어가 악한 세력들에 사로잡힌 영혼을 구출하라고, 가서 이 세상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는데, (특히 북반구의) 21세기 교회들은 세상의 안락함에 취해 세상에 자리잡고 살기에 여념이 없다. 천국행 티켓을 손에 쥐고 주일에 한 시간 예배 드리는 것으로 영혼의 안위를 얻으며 하나님의 명령 따위는 잊어버리고 산다. 한쪽 다리로 서서 한쪽 팔로 하나님의 찬양하는 아이티 교회의 예배 모습과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서 드려지는 화려한 예배를 목격한 저자는 고백은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와 봉사를 부끄럽게 한다.

 

예수님은 "온 세상에 나가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신, 전혀 다른 세계 질서를 세우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끝나지 않는 복음>은 오늘 우리가 그 명령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는지. 어떻게 행동으로 동참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조율하는 방법을 일러준다. 참된 헌신의 의미를 설명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라." <끝나지 않은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꿈을 꾸게 해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 얼마나 위대하고 긴박한 것인지 다시 인식하게 해준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멋진 이야기를 써나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목격하며 아름다운 전율에 몸에 떨렸다. 예수님의 이 명령을 놓치고 엉뚱한 싸움을 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안타까워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내 가슴을 뛰게 할 일을 찾고 싶은가. 단언컨대, 이 책에서 그 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수는 있다"(칼 바르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칭의와 성화
김세윤 지음 / 두란노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칭의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윤리와 분리된 신앙을 가르치고 믿는 한국 교회의 비극"을 낳았다.

 

 

한국 교회에 한참 유행하던(?)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정말 구원을 받았는지 다시 점검해야 한다고 겁을 주기도 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개발되기도 했습니다. <칭의와 성화>를 쓰신 김세윤 박사님은 바로 이와 같은 한국 교회의 신앙 양태에 일침을 가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믿음으로 이미 의인이라 칭함 받았고, 그것은 최후 심판 때 확인되게 되어 있다. 그러니 그냥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면 된다"(80)는 식의 가르침은 구원파적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믿음(구원의 확신)과 생활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았고, 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삶의 문제는 소홀히 여기게 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밖에 나가서 전도를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싫지 않지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꼴보기 싫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복음을 증거할 사명을 가진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도리어 복음이 거절 당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어쩌다 교회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김세윤 박사님은 그 원인이 칭의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있다고 말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칭의론은 "의인으로서의 삶이 없으면서도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교리, 심지어 의인으로서의 삶을 방해하는 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94).

 

 

 

 

"성화를 칭의와 분리해서 사고하는 데서부터 '칭의론'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칭의론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형법적 범주로 이해하며, 대신적 속죄 행위로 해석한 것"(15)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가 선언되어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는 신분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요, 그 선물은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개신교인들은 믿음을 윤리와 분리해서 이해하고, 윤리는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 자신들이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91). 김세윤 박사님은 칭의론에 대한 이러한 왜곡과 편향된 가르침이 "의로운 삶을 낳기는 커녕 도리에 방해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문제는 한국 교회가 칭의와 성화를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칭의' 된 자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서 '영화'(구원의 완성)에 이른다는, "구원의 서정의 틀" 안에서 칭의론을 설명해 왔습니다. 이 책은 본래 2012년 "두란노 바이블칼리지에서 주최한 종교개혁 기념 강의"를 책으로 펴낸 것입니다. 강좌의 원래 제목은 "성화란 무엇인가"였지만, 김세윤 박사님은 "성화를 칭의와 분리해서 사고하는 데서부터 '칭의론'이 왜곡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따라서 '성화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칭의론'의 구조부터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는 취지 아래서 강의(책)의 제목을 <칭의와 성화>로 바꾸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10).

 

 

  

성화는 칭의의 "현재 단계"이다.

 

 

<칭의와 성화>의 가장 주된 논지는 칭의와 성화는 분리될 수 없는 같은 개념이며,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칭의론을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새 관점 학파의 전제"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새 관점 학파는 "유대교가 근본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의 관계에로 '진입'했으니,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그 관계에 '머무름'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구조를 가지고"(82)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그런데 바울도 "은혜로 주어진 칭의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된(즉, 올바른 관계에 '진입한') 신자들에게 종말의 완성 때까지 그 관계에 계속 '서 있음'의 중요성을 강조"(82)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하는 "칭의, 성화, 입양" 등은 인간이 죄 용서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을 나타내는 언어들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로/믿음으로 의인 된다는 말은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음도 포함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사람임을 뜻하는 것입니다"(163). "그 관계에 계속 서 있음"의 요구는 "우리가 사탄의 나라에서 옮겨져 하나님 나라로 들어왔으니 마땅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117)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의 구도에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의의 열매'/'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칭의'에 뒤따르는 '성화'의 단계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김세윤 박사님은 성화는 "칭의의 현재 단계"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삶은 칭의 다음에 오는 성화의 단계가 아니라, "의인으로 칭함 받은, 즉 죄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회복된 우리가 '그 관계에 서 있음'의 단계"이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회복됨의 의미에 있어서 칭의와 동의어인 성화의 현재 단계"(173)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종교개혁적 전통에서는 칭의론의 법정적 의미가 강조되어 왔지만, <칭의와 성화>는 바울의 칭의론에는 관계적 의미도 있음을 설명합니다. 또한 바울의 칭의론을 "구원의 서정의 틀"이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틀"로 이해해야 왜곡함 없이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칭의의 과정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성화'의 삶의 동기가 강화된다.

 

 

<칭의와 성화>를 읽기 전까지, 칭의, 성화, 영화를 각각의 "단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친다는 일이 얼마나 긴장된 일인지 새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또한  아무리 전통적인 권위를 가진 교리라 해도 화석처럼 굳어진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빛 안에서 끊임없이 검토되고 재해석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구원은 분명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인간 편에서)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려는 사람들은 <칭의와 성화>에 여전히 신학적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분명 윤리 그 이상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백성에게 요구되는 삶은 세상의 윤리보다 훨씬 고급한 것이며, 그 목표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해지는 최고의 수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성도는 <칭의와 성화>에서 전적인 은혜에 거룩한 삶으로 응답해야 할 성도(하나님께 드려진 사람) 된 자의 긴장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김세윤 박사님의 명쾌한 강의가 신학하는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해주었고, 신학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석학들의 생생한 논쟁들을 접할 수 있어 좋았고, 동시에 신학의 날카로움이 목회 현장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칭의와 성화>는 세상에서는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저희끼리는 '의인'되었다고 기뻐하는 천박한 신앙에 일격을 가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구원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구원의 핵심이 바로 칭의론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우선적으로 모든 목회자들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 칭의론을 어떻게 가르치느냐에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詩 치료 - 한 번도 소리 내어 울지 못한 그대에게
존 폭스 지음, 최소영 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의 풀꽃이라는 시입니다. '학교 2013'라는 드라마에서 남자주인공이 강제 전학을 가야 하는 친구에게 이별의 말 대신, 위로의 말 대신, 격려의 말 대신 이 시를 들려주었습니다. 조금 '부족하다'는 이유로,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친구에게 들려준 이 시가 그 어떤 명대사보다 더 마음을 울렸습니다. 백마디 말보다 더 진실했고, 절실했으며, 드라마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너무도 선명하게 와닿았습니다. 제게는 시가 가진 치료의 힘을 경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술치료, 독서치료, 음악치료, 웃음치료, 연극치료 등 다양한 심리치료가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많은 현대인들이 상처난 마음, 깨어진 관계를 안고 살아간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詩 치료>는 제목 그대로 시를 읽고, 짓고, 나눔으로써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누군가와 시를 읽고 쓰며 서로 소통하고, 알므다운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시치료다"(10). 이 책은 실제로 저자 존 폭스가 "시치료 워크숍을 진행한 내용을 중심으로 실제 사례를 엮은 치유 에세이"입니다. 워크숍에 참가한 사람들이 시를 통해 내면의 고통을 쏟아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그것을 나누는 과정에서 어떻게 치유를 경험했는지를 읽을 수 있으며, 또 독자들도 직접 그들과 함께 시를 써보도록 돕고 있습니다.


 

  

 

시 한 줄 쓴다고 뭐가 달라지나

 

역시 "학교 2013"이라는 드라마에서 한 문제 학생이 쓴 시의 첫줄입니다. 선생님은 시를 쓰기 어려워 하는 학생들에게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말, 마음에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한 줄 적어보라고 요청합니다. 선생의 요구에 '오정호'라는 학생이 마지 못해 제출한 시가 이것입니다. 그는 "시 한 줄 쓴다고 뭐가 달라지나"라고 반항적인 마음을 표현했지만, 시청자들은 이 한 줄의 시에서 이미 그 학생 안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시詩 치료>는 "시는 그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그저 진실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만으로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5). "시의 본진적인 소리, 은유, 이미지, 감정, 리듬 등이 치료제로 작용해 신체적, 정신적, 영적 시스템을 강하게 만든다"(23). 가끔 마음이 울적하거나 이유 없이 가라 앉는다고 느낄 때, 무엇인가 끄적이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뭔가를 적어내려가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비워지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시詩 치료>를 읽다 보니 시를 쓴다는 것은 마음을 토해놓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시의 언어로 표현하는 과정이 상처가 주는 고통에 함몰되지 않고, 마음에 공명을 주는 "소리"로 바꾸어 내면서 그것을 극복할 힘을 주는 듯합니다. 혼자만 느끼는 내면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해내기 위해 시의 언어를 찾는 그 과정이 상처를 객관해주고, 두려움 없이 마주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지 않나 싶습니다. "어떤 방식의 치료든 당신의 체질에 맞아야 하고, 종이 위에 당신의 경험을 창조적으로 표현하여 구체화하며 거기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면 오랜 상처를 풀어낼 수 있다. 과거의 파괴적 행위나 경험을 오직 과거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68).

 

<시詩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하게 시를 쓰는 것만큼이나 진실하게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과정입니다. <시詩 치료>에서 만난 시 중에 조디라는 한 남자가 쓴 "당신의 눈물을 닦아내지 마세요"라는 시가 마음에 남았습니다.

 

당신의 눈물을 닦아내지 마세요.

볼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세요.

얼굴에 자국을 남기도록 내버려 두세요.

치유의 눈물이 흐르도록 말이죠.

 

...

 

조심스러워 하지 마세요.

억제하지 마세요.

에의 바르지도, 공손하지도 마세요.

당신의 눈물을 닦아내지 마세요.

입술 위 눈물의 맛을 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오늘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시를 읽으며 슬퍼하지 말도록 억압받아 온 한 사람의 내면과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해받을 수 없고, 그래서 스스로도 억제할 수밖에 없었던 내면의 슬픔이 견고한 둑을 깨뜨리고 터져나오는 순간을 마주했습니다. 조디는 "울음으로써 치료의 강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생각한다"(80)고 고백합니다. 눈물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디는 이렇게 시를 통해 억압된 감정을 분출할 수 있었고, 그의 시가 주는 감동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그들은 함께 시를 읽고 함께 눈물을 흘림으로써 치료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시에 감동하거나 타인의 시에 감동하는 바로 그 순간이 치료제로서 시의 본질이다"(24).

 

<시詩 치료>는 다양한 각도와 관계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그것을 시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는지 고민하는 창조적 과정을 통해 이해와 수용과 용서와 성찰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꼭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를 쓰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우리의 경험과 상상을 함께 엮어 아름다운 시의 언어로 표현해내는 훈련 교재로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