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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평점 :

"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아름답게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218-219).
이 문장이 일으키는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마음이 빨려 들어간다. 도대체 어떻게 살면 이런 자기 선언을 할 수 있을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서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는!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정원"에 있다. 그는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꼭 정원을 만들고 가꿀 만큼" 평생 정원사의 일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헤르만 헤세는 직접 채소나 꽃들을 심고 화단에 비료를 주고 물을 주는 일을 사랑했다. 그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고상한 취미도, 한가로운 놀음도 아니었다. 정원을 가꾼다는 행위는 고된 노동이었지만, 헤르만 헤세에게는 엄숙한 아름다움과 품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정원을 가꾸는데 열심을 내었지만 한가로이 즐길 줄 알았고, 식물을 지배하기 보다는 "가을의 타는 장작불의 푸른 연기 곁에서 꿈꾸는"(141) 일을 더욱 소망하는 정원사로 살았다.
헤르만 헤서는 자연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 "그 선율은 신들에게 감사하며 땅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맛이 떫은 사과, 단맛 나는 포도, 속이 여문 밤송이를 노래하며, 골짜기에 감도는 파란색이나 붉은색, 황금색, 그리고 호숫가 계곡의 화창함, 멀고 높은 산들의 고요함을 찬미한다"(146). 그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경건한 예배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이야말로 가장 오래 존속해온 가장 소박하고 경건한 인간생활이기 때문이다.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근면과 노고로 가득 차 있으나 성급함이 없고 걱정 때위도 없는 생활이다. 그런 생활의 밑바탕에는 경건함이 있다. 대지, 물, 공기, 사계의 신성함에 대해 믿음이 있고 식물과 동물들이 지닌 생명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다"(146).

"매일 아침 나는 아틀리에의 창 아래로 양손을 뻗어 두세 개의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서 먹는다"(142).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고 있으면 눈앞에 아름다운 수채화가 그려지는 듯하다. 대문호가 그려내는 자연의 경치가 "고요한 영원으로 빛나고" 있다.
봄은 그에게 찬사와 경탄의 계절이다. 달콤한 겨울잠에 빠져 있던 정원사에게 봄은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피로에 젖어 등이 아파 오도록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계절이지만, "길고 어두운 다섯 당 동안이나" 정원 없이 지내야 했던 정원사에게는 잡아 없애야 하는 애벌레, 풍뎅이, 거미줄 따위도 반갑기만 한가 보다. 정원사는 "즐거우면서도 수줍은 듯 풀숲에 빼꼼이 모습을 드러낸" 노란 꽃들을 보며 "생명에 대한 용기를 가진 꽃"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이 때가 되면 싹이 트며, 꽃이 피어나는 것"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바라본다(11-12). 즐거운 강낭콩, 발랄한 딸기를 기대하며 부지런히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정원사는 마치 에덴을 가꾸는 창조주가 된 기분에 젖는다. 물망초와 레세다 꽃으로 화려하게 가장자리를 다듬으며 꿈을 꾼다. "햇빛이 반짝이는 여름이 되면 그곳에 탁자를 갖다 놓고 앉아 우유가 조금 들어간 커피를 아끼지 않고 마셔야지"(17).
흥분과 기대로 한껏 들떴던 봄과 달리, 정원사에게 여름과 가을은 "생의 짧은 순환"을 깨닫게 해주는 사색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는 "정원에서의 여름이 너무도 빠른 속도로 조급히 왔다가 지나가 버리는 것이 놀랍고 염려스럽다"(19). 생명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여름이지만 "겨우 몇 달밖에 주어지지 않은 여름의 짧은 시간 동안 화단 안에서는 여러 식물들의 삶이 지나가"는 것을 목도한다. 두세 달 새에 작고 어렸던 식물들이 늙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고요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이 질서정연한 자연의 순환"을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런 정원사에게, 순응하는 자연과 달리 덧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소유의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의 삶은 기이할 뿐이다.
정원사인 헤르만 헤세가 가장 사랑했던 계절은 딱 지금의 시기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모습. 늦여름의 "달콤한 성숙함이 돌연 갑자기 시들고 죽어버릴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정원사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으로 돌변한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느끼고, 모든 것을 냄새 맡고 싶다. 이 풍요로운 여름이 내 감각에 부여하는 모든 것을 맛보고 싶다"(105).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감수정으로 가득 채워진 휴식을 선사"하는 책이다. 헤르만 헤세는 "하루 중 한 한 번이라도 하늘을 쳐다보지 않거나 활기에 찬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156)고 말한다. 여행에세이로 유명한 일본의 후지와라 신야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외부라든가 풍경에 관심이 없다"고 통찰한 바 있다. 젊은 세대들도 외형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바다, 혹은 산을 찾지만, 그것은 삶의 터전이 아닌 일시적인 유희의 대상일 뿐이라고 일침했다. 자연이 거세된 터전에서 살아가면서 일부러 돈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 잠시의 눈요기로 자연을 즐기는 것을 자랑 삼는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건조하고 가난한 것인가. 너무 많은 일에 너무 많이 혹사 당하고 있는 나의 눈에게, 자연과 교감하는 기쁨을 선물해주어야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계몽하고 세상을 가르치고
이념으로부터 역사를 만들어 내려는 그 열정, 저 격렬한 쾌락을 사람들은 자제해야 한다.
(...)
그러므로 우리는 겸허해지자.
될 수 있으면 충동으로 가득 찬 시대의 흐름에
저 영혼의 고요함으로 맞서자(204).
헤르만 헤세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다. 전쟁과 공업에 대한 환멸, 값싼 낙관주의에 대한 거부이자, 온몸으로 보여준 저항이기도 했다. 헤세는 발전이라고 믿는 인간의 문명이 온갖 쓰레기 더미를 생산해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근사한 자동차 전시장 뒤에 "창백한 얼굴에 보잘것없는 임금을 받는 수많은 광부와 질병, 그리고 황폐함"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았다. 끊임없이 새 것을 열망하게 하여 인간을 물건의 노예로 만드는 공업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요즘 사람들은 칼이나 포크, 커프스단추나 모자, 산책용 지팡이, 우산 등을 시시때때로 바꾼다. 공업은 이 모든 물건을 유행의 노예로 만들어놓는 데 성공한 셈이다. 한때만을 생각하고 계산된 이런 유행 형태에서 태곳적 이래로 고수되어 온 도구들의 아름답고 생명력있고 정연한 진짜 형태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27).
헤세가 묘사하는 도시인들의 미친 삶에 지금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다. "이곳 사람들은 놀랍게도 아침에 믿지기 않는 이른 시각에 일어나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으며,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켜고, 자주 목욕을 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사업가이거나 그들에게 고용된 직원이었으며, 모두가 미쳐버릴 정도로 할 일이 많았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사실 사업이 잘 안 되어서 할 일이 많았으며, 형편이 나아지게 하려고 지나치게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혹사당하면서도 거의 모두가 물건들을 만들어내거나 그 물건들을 판매하였다. 그 물건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 않은데도, 오직 생산자와 상인에게 돌을 벌게 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85).
돈과 기계에 매달린 인간, 일그러진 표정, 쇠약해진 영혼. 헤세는 이런 삶을 견딜 수 없었다. "무의미한 자원 전쟁, 무수한 동식물을 멸종시키고, 도시와 시골의 아름다움과 쾌적함을 사라지게 하고, 또한 공장들이 악취를 풍기고 물을 오염시키고, 그뿐만 아니라 언어와 가치, 사고 체계와 신앙의 체계가 병들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119-120).
그런 헤세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악취 나는 세상에서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깨지기 쉬운 영혼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정원이 없었다면 이 대문호는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이 땅은 식물이 자라는 땅이어야 한다는 것, 이 땅에 화려한 궁전 대신 눙부의 헛간을 세우는 것이 진정 인류의 축복이고 행복임을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진정한 기쁨을 잃어버린 채 쾌락에 노예로 사는 우리들을 자연으로 초대한다. 결국 쓰레기가 될 물건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유하느라 혹사 당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자연이 주는 휴식을 선물한다.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 속에서 영혼의 고요함을 되찾자고 속삭인다. 한때 그의 시 때문에 독일어를 공부하고 싶은 열망으로 불탔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가 남긴 어떤 대작보다 더 깊은 울림과 치유를 이 책에서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