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의 뇌 - 뇌는 승리의 쾌감을 기억한다
이안 로버트슨 지음, 이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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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승자를 만들고 또 권력이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인류 전체의 미래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서도 중요하다. (...) 권력과 성공의 이 물리적인 근원을 올바르게 인식할 때 우리는 권력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과 우리 주변의 권력을 보다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15).

 

 

평소 제 생활신조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다운 자질이나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자리를 탐하여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앉는 순간,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는지를 생각하면 아찔해집니다. 그리하여 스스로에게도 자주 묻곤 합니다. "지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조직생활을 하며 꼴불견으로 보이는 사람 중 하나가 '높은 자리'에 앉는 순간 돌변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 승진을 하고 나면 "사람이 변했다"는 수근거림이 많이 들려옵니다. 어줍잖은 권력(지위)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거만해지는 사람을 보고 실망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평가들이 우리의 선입견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승자의 뇌>는 권력을 쥐게 되면 사람이 변한다는 속설(?)을 실험으로 증명해냈습니다. 일명 "쿠키 실험"이라고 하는 관찰 실험입니다(275-278). 쿠키 실험은 세 사람을 한 조로 만들어서 사회적 논쟁거리를 놓고 서로 토론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무작위로 뽑아 '조장'으로 세웁니다. 조장은 조원들이 토론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점수를 매기는 역할을 합니다. 조장은 조원들을 판단하는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토론이 끝난 다음 실행 진행자는 다섯 개의 쿠키가 담긴 접시를 가지고 와서 조원들 앞에 내려놓습니다. 세 사람이 각자 하나씩 쿠키를 먹고 나면 두 개의 쿠기가 남습니다. 여기서 "누가 네 번째 쿠기를 먹을까?"가 이 실험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상할 수 있는대로) 대부분의 경우에는 무작위로 선정된 조장이 그 네 번째 쿠키를 먹습니다. 그런데 이 쿠키 실험은 몇가지 흥미로운 결과를 더 보여줍니다.

 

조장으로 선택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쿠키를 더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뻔뻔해진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예절을 제대로 받지 않았거나, 성격이 칠칠치 못해서 나타나는 평소 습관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권력은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을 쓰지 않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아주 잠깐 동안 권력의 맛만 살짝 봤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보다 이기적으로 바뀌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 무심해진다"(277).

 

 

 

"우리가 정말 바라지 않는 것은 지도자가 권력을 원하지 않는 상황이다. 우리는 승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위하는 것만큼이나 '우리'를 위해서 승리하고자 하는 승자를 필요로 한다"(344).

 

 

<승자의 뇌>는 독자에게 미스터리한 질문을 던져주고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승자의 뇌>가 답을 찾고자 하는 질문은 이런 것들입니다.

 

승자를 만드는 것은 것은 무엇일까? 승자는 태어날 때부터 성공을 보장받았을까, 행운과 환경 덕분에 성공했을까?

왜 어떤 사람들은 승리하려고 엄청난 노력과 열정을 쏟고 또 어떤 사람은 성공과 권력을 일부러 피하려 할까?

권력 혹은 권력 없음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왜 우리는 이처럼 간절하게 혹은 지독하게 승리를 원할까? 그리고 과연 무엇이 승자를 만들까?

 

<승자의 뇌>는 무엇이 승자를 만들고, 또 승자가 얻어낸 권력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힙니다. 옮긴이는 이 책이 "심리학 및 뇌 과학 분야에서 그동안 진행되었던 수많은 실험 사례들을 동원해서 때로는 논문처럼 자세하게, 때로는 이야기꾼처럼 흥미진진하게, 또 때로는 유쾌한 대중강연자처럼 재미있게 조곤조곤 설명한다"(378)고 평가하는데,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실험사례들이 자세하게 설명되는 데도 지루하지 않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가득하여 어려운 줄 모르고 읽었습니다.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이었던 내용은 1장 '피카소 아들의 미스터리'입니다. 이 장에서 던지는 질문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승자 혹은 패자가 결정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피카소의 아들이 어째서 평생을 술주정뱅이로 살았는지 추적합니다. 이 질문은 신을 아버지로 둔 자녀의 끔찍한 저주, 다시 말해 "태양이나 신과 같은 아버지를 둔 자식"이 어째서 심리적 불구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는 답이기도 합니다. "성공을 힘들게 쟁취한 게 아니라 승자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믿음"이 사람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저자의 설명은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승자의 뇌>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승자를 만드는가 하는 것보다, 권력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있습니다. '승자 효과'(권력)가 사람들의 뇌를 훼손하고 망가뜨릴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권력이 사람의 뇌에 미치는 효과가 지구온난화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권력은 "우리를 더 똑똑하게, 더 야망에 불타게, 더 공격적으로 그리고 더 집중하도록 만"들어 계속해서 승자가 될 수 있는 선순환을 가져옵니다(178). 그러나 자아 지향적인 P 권력욕이 통제되지 않으면, 독재자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권력은 무서운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녀에게 (부정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부모가, 더 좋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상대를 경멸하는 배우자가 서로를 불행에 빠뜨릴 수 있듯이 말입니다.

 

<승자의 뇌>는 "인간의 뇌가 권력 때문에 손상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권력은 다른 사람을 목적의 수단,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을 사람이 아닌 사물로 바라보게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는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서 본인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원칙을 무시하는 위선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을 생생한 사례를 통해 보여줍니다.

 

<승자의 뇌>는 '권력'이 인간 관계의 중심 요소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서 휘두르며 삽니다. 부모-자녀 간에도 그렇고, 의사와 환자의 사이에서도, 상사와 부하 사이에서도, 정부와 국민 사이에서도 권력 관계가 성립됩니다. <승자의 뇌>가 밝히는 권력의 속성은 사회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성찰을 위한 중요한 틀을 제공합니다. 모두에게 1독을 권합니다.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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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을 가꾸다
헤르만 헤세 지음, 두행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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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감스럽게도 쉽고 편안하게 사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아름답게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218-219).

이 문장이 일으키는 격렬한 소용돌이 속으로 마음이 빨려 들어간다. 도대체 어떻게 살면 이런 자기 선언을 할 수 있을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서 한 가지만은 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름답게 사는 것이었다는! 대문호 헤르만 헤세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정원"에 있다. 그는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꼭 정원을 만들고 가꿀 만큼" 평생 정원사의 일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헤르만 헤세는 직접 채소나 꽃들을 심고 화단에 비료를 주고 물을 주는 일을 사랑했다. 그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고상한 취미도, 한가로운 놀음도 아니었다. 정원을 가꾼다는 행위는 고된 노동이었지만, 헤르만 헤세에게는 엄숙한 아름다움과 품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는 정원을 가꾸는데 열심을 내었지만 한가로이 즐길 줄 알았고, 식물을 지배하기 보다는 "가을의 타는 장작불의 푸른 연기 곁에서 꿈꾸는"(141) 일을 더욱 소망하는 정원사로 살았다.

 

헤르만 헤서는 자연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 "그 선율은 신들에게 감사하며 땅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맛이 떫은 사과, 단맛 나는 포도, 속이 여문 밤송이를 노래하며, 골짜기에 감도는 파란색이나 붉은색, 황금색, 그리고 호숫가 계곡의 화창함, 멀고 높은 산들의 고요함을 찬미한다"(146). 그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경건한 예배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것이야말로 가장 오래 존속해온 가장 소박하고 경건한 인간생활이기 때문이다.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근면과 노고로 가득 차 있으나 성급함이 없고 걱정 때위도 없는 생활이다. 그런 생활의 밑바탕에는 경건함이 있다. 대지, 물, 공기, 사계의 신성함에 대해 믿음이 있고 식물과 동물들이 지닌 생명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다"(146).

 

 

  

 

"매일 아침 나는 아틀리에의 창 아래로 양손을 뻗어 두세 개의 무화과나무 열매를 따서 먹는다"(142).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읽고 있으면 눈앞에 아름다운 수채화가 그려지는 듯하다. 대문호가 그려내는 자연의 경치가 "고요한 영원으로 빛나고" 있다.

 

봄은 그에게 찬사와 경탄의 계절이다. 달콤한 겨울잠에 빠져 있던 정원사에게 봄은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고, 피로에 젖어 등이 아파 오도록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계절이지만, "길고 어두운 다섯 당 동안이나" 정원 없이 지내야 했던 정원사에게는 잡아 없애야 하는 애벌레, 풍뎅이, 거미줄 따위도 반갑기만 한가 보다. 정원사는 "즐거우면서도 수줍은 듯 풀숲에 빼꼼이 모습을 드러낸" 노란 꽃들을 보며 "생명에 대한 용기를 가진 꽃"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이 때가 되면 싹이 트며, 꽃이 피어나는 것"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바라본다(11-12). 즐거운 강낭콩, 발랄한 딸기를 기대하며 부지런히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정원사는 마치 에덴을 가꾸는 창조주가 된 기분에 젖는다. 물망초와 레세다 꽃으로 화려하게 가장자리를 다듬으며 꿈을 꾼다. "햇빛이 반짝이는 여름이 되면 그곳에 탁자를 갖다 놓고 앉아 우유가 조금 들어간 커피를 아끼지 않고 마셔야지"(17).

 

흥분과 기대로 한껏 들떴던 봄과 달리, 정원사에게 여름과 가을은 "생의 짧은 순환"을 깨닫게 해주는 사색의 계절이기도 하다. 그는 "정원에서의 여름이 너무도 빠른 속도로 조급히 왔다가 지나가 버리는 것이 놀랍고 염려스럽다"(19). 생명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여름이지만 "겨우 몇 달밖에 주어지지 않은 여름의 짧은 시간 동안 화단 안에서는 여러 식물들의 삶이 지나가"는 것을 목도한다. 두세 달 새에 작고 어렸던 식물들이 늙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고요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이 질서정연한 자연의 순환"을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런 정원사에게, 순응하는 자연과 달리 덧없음을 깨닫지 못하고 소유의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의 삶은 기이할 뿐이다.

 

정원사인 헤르만 헤세가 가장 사랑했던 계절은 딱 지금의 시기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의 모습. 늦여름의 "달콤한 성숙함이 돌연 갑자기 시들고 죽어버릴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정원사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으로 돌변한다.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느끼고, 모든 것을 냄새 맡고 싶다. 이 풍요로운 여름이 내 감각에 부여하는 모든 것을 맛보고 싶다"(105).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감수정으로 가득 채워진 휴식을 선사"하는 책이다. 헤르만 헤세는 "하루 중 한 한 번이라도 하늘을 쳐다보지 않거나 활기에 찬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156)고 말한다. 여행에세이로 유명한 일본의 후지와라 신야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외부라든가 풍경에 관심이 없다"고 통찰한 바 있다. 젊은 세대들도 외형적으로는 눈에 보이는 바다, 혹은 산을 찾지만, 그것은 삶의 터전이 아닌 일시적인 유희의 대상일 뿐이라고 일침했다. 자연이 거세된 터전에서 살아가면서 일부러 돈을 들이고 시간을 들여 잠시의 눈요기로 자연을 즐기는 것을 자랑 삼는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건조하고 가난한 것인가. 너무 많은 일에 너무 많이 혹사 당하고 있는 나의 눈에게, 자연과 교감하는 기쁨을 선물해주어야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계몽하고 세상을 가르치고

이념으로부터 역사를 만들어 내려는 그 열정, 저 격렬한 쾌락을 사람들은 자제해야 한다.

 

(...)

 

그러므로 우리는 겸허해지자.

될 수 있으면 충동으로 가득 찬 시대의 흐름에

저 영혼의 고요함으로 맞서자(204).

 

헤르만 헤세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단순한 유희가 아니었다. 전쟁과 공업에 대한 환멸, 값싼 낙관주의에 대한 거부이자, 온몸으로 보여준 저항이기도 했다. 헤세는 발전이라고 믿는 인간의 문명이 온갖 쓰레기 더미를 생산해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근사한 자동차 전시장 뒤에 "창백한 얼굴에 보잘것없는 임금을 받는 수많은 광부와 질병, 그리고 황폐함"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았다. 끊임없이 새 것을 열망하게 하여 인간을 물건의 노예로 만드는 공업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요즘 사람들은 칼이나 포크, 커프스단추나 모자, 산책용 지팡이, 우산 등을 시시때때로 바꾼다. 공업은 이 모든 물건을 유행의 노예로 만들어놓는 데 성공한 셈이다. 한때만을 생각하고 계산된 이런 유행 형태에서 태곳적 이래로 고수되어 온 도구들의 아름답고 생명력있고 정연한 진짜 형태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27).

 

헤세가 묘사하는 도시인들의 미친 삶에 지금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다. "이곳 사람들은 놀랍게도 아침에 믿지기 않는 이른 시각에 일어나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으며,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켜고, 자주 목욕을 하고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사업가이거나 그들에게 고용된 직원이었으며, 모두가 미쳐버릴 정도로 할 일이 많았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들은 사실 사업이 잘 안 되어서 할 일이 많았으며, 형편이 나아지게 하려고 지나치게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혹사당하면서도 거의 모두가 물건들을 만들어내거나 그 물건들을 판매하였다. 그 물건들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 않은데도, 오직 생산자와 상인에게 돌을 벌게 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85).

 

돈과 기계에 매달린 인간, 일그러진 표정, 쇠약해진 영혼. 헤세는 이런 삶을 견딜 수 없었다. "무의미한 자원 전쟁, 무수한 동식물을 멸종시키고, 도시와 시골의 아름다움과 쾌적함을 사라지게 하고, 또한 공장들이 악취를 풍기고 물을 오염시키고, 그뿐만 아니라 언어와 가치, 사고 체계와 신앙의 체계가 병들어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119-120).

 

그런 헤세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악취 나는 세상에서 아름답게 살 수 있는, 깨지기 쉬운 영혼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정원이 없었다면 이 대문호는 시들어 죽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이 땅은 식물이 자라는 땅이어야 한다는 것, 이 땅에 화려한 궁전 대신 눙부의 헛간을 세우는 것이 진정 인류의 축복이고 행복임을 말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진정한 기쁨을 잃어버린 채 쾌락에 노예로 사는 우리들을 자연으로 초대한다. 결국 쓰레기가 될 물건들을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유하느라 혹사 당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자연이 주는 휴식을 선물한다.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 속에서 영혼의 고요함을 되찾자고 속삭인다. 한때 그의 시 때문에 독일어를 공부하고 싶은 열망으로 불탔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가 남긴 어떤 대작보다 더 깊은 울림과 치유를 이 책에서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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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 - 내 삶을 지배하는 모든 가치관의 혁명적 무너짐
제프 고인스 지음, 이지혜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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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위대한 목적을 위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큰 뜻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안다"(33).

 

 

우리는 대학입시라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등떠밀려 스타트라인에 세워졌고 대학입시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뛰어야 한다. 대학입시의 또다른 이름은 직업경쟁일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부모가 자기 자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를 그렇게 염원하고 염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남보다 좋은 직업을 가지고 대우 받으며 살라는 것 아닌가.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기회를 박탈 당하고, 한계 안에 갇혀버린다. 대입에 성공했다 해도 성적에 따라 학교가 정해지고, 전공이 정해지기 때문에 졸업과 함께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또다른 고민이 시작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꿈을 꾸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현실(한계)에 맞추어져가는 무기력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교회에서 가장 많이 받는 상담 중에 하나가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싶다"는 간절함이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지만 '이건 아닌데' 하는 공허함에 시달리고, "뭔가 더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초조해지고, '인생이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떤다. 세상의 모든 자기계발서들은 꿈을 꾸라고, 꿈은 자기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외치지만, 교회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부르신,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당신은 크게든, 작게든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태어났다"(254). 그런데 우리를 부르신 위대한 목적,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사명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명을 따라 살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답답해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많다. <난파>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져주는 책이다. "진짜 소명을 발견하고 싶다면 무너져야 한다"고 말이다.

 

 

 

 


"이 책은 당신을 무너진 삶으로 초대한다"(22).

 

 

살다 보면, 하루아침에 삶이 무너지는 사람들이 있다. 사업에 실패하기도 하고, 직장을 잃기도 하고, 사람에게 버려지기도 하고, 건강이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런데 <난파>에서 말하는 무너진 삶이란 이런 물리적인 무너짐이 아니다. 진짜 무너져야 할 것은 우리의 세계관(가치관)이라고 말한다. 저자 '제프 고인스'는 불로거이자 강연가로 유명한데,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알리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는 선교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또 자신의 소명을 발견한 사람들의 고백 속에서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해 냈다. 자신들의 경험을 고백하며 "모두가 한결같이 흥미로운 한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무너졌다"는 말이었다(37).

 

"무너졌다"는 말의 뜻은 "현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한다(40). 저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을 무너뜨린 것은 무엇인가요?"라고 묻기 시작했고, 하나의 답을 얻었다. 인생이 무어지는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았고, 그것을 자기의 고통으로 느꼈으며, 자신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을 도움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에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깨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만을 위하고,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계관이 무너지고, 남을 위해 내 것을 희생(나눔)하는 기쁨과 행복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난파>에서 말하는 무너짐은 "변화"를 뜻한다. 세계관이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알게 되었다는 뜻"(40)이다.

 

 

 

 

"네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싶으면, 상처가 있는 곳을 찾아 거기서 시간을 보내야 해"(82).

 

 

세상은 우리에게 나를 주장하라고 가르친다. 나의 욕구, 나의 욕망, 나의 가치, 나의 만족에 집중하게 한다. 그러나 <난파>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할 때 우리의 소명을 발견할 수 있다"(82)고 단언한다. 나의 소명은 "나"에게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너"(다른 사람)에게서 찾아지는 것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너의 고통"에서 찾아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명을 찾고 싶다면 상처가 있는 곳,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빈곤과 필요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50). 다른 사람들의 고통, 그 고통을 바라보는 나의 불편함이 바로 우리의 갈망에 대한 해답이요, 열쇠이다!

 

<난파>는 무너짐의 체험을 위해 여행을 권한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세상의 고통과 마주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강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며, 나의 안락을 위해 쌓아왔던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라고 외친다. 세상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행복이라고 말하지만, <난파>는 세상의 고통을 내 것으로 껴안는 불편함이 소명임을 일깨운다. "소명은 어떤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내 느낌과 상관없이 옳은 일을 하는 불편함을 뜻했다"(121).

 

 

 

 

"진정한 소명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힘든 점은, 소명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 그러다 보면 계속 미루는 습관이 생긴다 -이 아니라 헌신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다"(213).

 

 

<난파>는 달란트를 찾아주고, 달란트에 맞는 직업 찾는 법을 가르쳐주는 그런 책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큰 원리를 말하고 있다. <난파>는 안전지대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안락한 삶의 거품을 제거한다. 잠깐의 헌신으로 값싼 자기 만족 속에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며 사는 크리스천이 아니라, 한 번 무너지면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장기적인 변화의 길로 우리를 이끈다. 저자는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이다. 그의 말은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고,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있다. 교회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물리적으로) 삶이 완전히 무너진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난파>는 "무너짐"이라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통해, 세상의 원리와 반대로 사는 삶, 나눔과 불편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집을 다시 짓도록 만든다.

 

특별히 이 책은 "열심 있는" 청년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저자는 무너짐의 경험을 위해 '단기 선교'를 권하면서도, "단기 헌신에 중독된 하위문화"를 경계한다(201). 현재 한국교회의 단기 선교의 주체는 주로 청년들이며, 선교 단체 등에서 훈련받으며 헌신을 다짐하는 청년들도 많다. 그런데 그런 청년들 중에는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생활 태도로 어른들의 걱정을 사는 경우도 종종 있음을 본다. 현실도피적인 열정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며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난파>는 우리의 무너짐이 어떻게 현실의 삶으로 이어지며, 그 속에서 헌신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난파>는 부록으로 <액션 가이드>북을 제공한다 <액션 가이드>는 우리가 읽고 깨달은 진리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마련되었다. 청년부 소그룹 모임 교재로 적극 추천하고 싶다.

 

처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는 말씀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교회 조직 안에서 일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 원하시는 자리에 있기 위해 매일 기도하며, 매순간 '구체적인' 모양을 알기 위해 씨름했다. 그런데 <난파>를 통해 두 번째 부르심의 음성을 들었다. <난파>를 읽으며 이 세상에 길들여지고 어느새 그것에 맞춰져 있는 나의 세계관이 다시 무너져 내림을 경험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나와 동일하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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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를 지배하는 통계의 힘 : 입문 편 - 통계학이 최강의 학문이다 빅데이터를 지배하는 통계의 힘 시리즈
니시우치 히로무 지음, 신현호 옮김 / 비전비엔피(비전코리아,애플북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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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해석이 중요해졌다!

"통계학은 '최선'을 향해 가는 길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알려주는 학문이다"(291).

 

 

'통계'라고 하면 설문조사 결과를 백분율로 정리해놓은 것 정도로 알고 있었던 제게 '통계학'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습니다. 정복할 수 없는 산처럼 버티고 선 통계학 때문에 논문을 포기해버렸을 정도입니다. 논문을 쓰기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했다가 큰코 다친 셈입니다. 통계학을 붙잡고 씨름하면 할수록 정말 정교한 논리의 학문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감동처럼 차오릅니다.

 

<빅데이터를 지배하는 통계의 힘>은 통계학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책입니다. 이 책은 한 사람의 예언으로 시작합니다. "1903년, H. G. 웰스는 읽기, 쓰기 능력과 마찬가지로 통계학적 사고 역시 장차 사회인이 갖춰야 할 기본교양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16). H. G. 웰스는 SF소설의 아버지이며, 폭넓은 과학지식으로 핵무기와 국제연명, 백과사전의 등장까지 예언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통계학의 중요성을 간파하는 사람은 또 있습니다. 구글의 수석 경제학자 할 베리언은 2009년 "10년 이내에 통계가는 가장 섹시한 직업이 될 것이다"(48)고 말했습니다.

 

<빅데이터를 지배하는 통계의 힘>은 어떤 분야에서든 통계학이야말로 "최강의 무기"라고 단언합니다. "읽고 쓰는 능력을 리터러시(Literacy)라고 하는데 통계학적 리터러시, 즉 '통계 리터러시'가 없으면 사업적으로, 개인적으로 제대로 큰 결정을 내리지 못할 위험이 크다. 읽고 쓰기를 못하면 계약서나 법률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통계 리터러시가 없으면 확률이나 테이터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17).

 

급변하는 생활환경, 불확실성이 증가는 사회환경에서 (특히 비지니스 세계에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통계학은 "데이터를 모아 분석해 가장 올바르고 빠른 답을 제시"해 준다고 강조합니다. "통계학은 지금 IT라는 강력한 동반자를 만나 모든 학문 분야를 통틀어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인간의 삶이 미치는 모든 영역에서 최선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48). 선거에서 승리한 오바마는 통계학이 왜 최강의 무기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구글 출신의 청년 댄 시로커를 선거참모로 한 오바마 캠프가 "버락 오바마닷컴을 방문한 유권자를 대상으로 어떤 그림이나 메시지를 노출하느냐에 따라 선호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측정해 유권자를 타겟팅(목표)별로 나눠 새로운 선거 전략을 짰고 이는 결과적으로 오바마를 재당선시켰다"(91-92)고 평가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대공황에서 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루스벨트의 뉴딜정책과 젊은 통계가들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도 밝힙니다.

 

"바라든 바라지 않든 어떤 학문에 종사하는 학자라도 통계학을 사용해야 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으며 통계 리터러시만 갖추고 있으면 경험과 감 이상의 실제적인 무기를 손에 넣는 것이다"(38). 우리가 통계(학)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통계학을 배워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최선의 답은 이미 우리 주변에 있는 방대한 데이터 속에 잠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정보를 단순히 기록하고 보관만 해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문조사 결과를 백분율로 표시하는 정도의 단순집계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행동 전략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앞으로 어떤 분야이든 의사결정권을 가진 책임자라면 적어도 통계의 결과를 해석하고 그것으로부터 행동 전략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통계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할 때 가치 있고 의미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계학의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통계적 인과추론의 기초" 정도는 몸에 익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입니다. "충분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적절한 비교를 하는 통계적 인과추론의 기초만 몸에 배어 있으면 경험이나 감을 뛰어넘어 비즈니스를 단숨에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비결을 손쉽게 찾아낼 수 있다"(83).

 

옮긴이는 이 책의 성격과 가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번역하는 내내 가졌던 생각입니다만 이 책을 결코 통계확의 입문서가 아니며 전문서적은 더더욱 아닙니다. '정보의 홍수' 시대를 거쳐 '빅데이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통계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유용성을 발휘하는지 깨우쳐주는 역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295). 옮긴이가 이런 설명을 덧붙인 것은 이 책을 전문서적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문서적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난이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계학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완전히 소화하기 다소 어려운 전문지식입니다. 이 책을 통해 통계학의 기법을 습득하는 데 목적을 두지 말고, 통계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통계학이란 무엇인지 그 정교한 이론을 맛보기 정도로 읽으면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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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첼로 - 이응준 연작소설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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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조롱하다.

 

 

성경에 보면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사랑의 시샘)는 지옥처럼 잔혹하며, 사랑은 아무도 끌 수 없는 타오르는 불길"이라는 표현이 나온다(아가서 8:6). 그리고 그 기세가 신의 불과 같다고 말한다. 사랑은 분명 매혹적이고 행복한 감정이지만, 동시에 지옥불처럼 잔혹한 고통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랑을 느끼는 것은 신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체험일지도 모른다. 독일의 한 철학자(신학자)는 인간이 신을 경험하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누미노제'라는 철학 용어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소름이 끼쳐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과 같은 "전율하지 않을 수 없는 신비"이며 동시에 "마음을 끌어들이는 매혹적인 신비"라는 두 면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압도적 절대 타자(신)와 마주했을 때 경외감(공포)에 전율하지만, 동시에 매우 매혹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다. 두렵지만 끌리는 마음. 그런 맥락에서 신은 사랑이 맞는 것 같다. 사랑 또한 두렵지만 끌리는 마음이니까.

 

<밤의 첼로>는 "멀쩡하던 한 인간의 삶이 치정으로 인해 얼마나 끝없이 추락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여섯 편의 이야기이다. 음악은 잘 모르지만 <밤의 첼로>라는 제목을 힌트로 주관적인 감상을 적어보자면, 첫 번째 이야기 '밤의 첼로'는 주제부에 해당하고, 이어지는 4편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듯 닮은 4개의 변주곡이며, 마지막 여섯 번째 이야기는 그 4개 변주부가 하나로 합쳐져 다시 주제부를 형성하듯 읽힌다.

 

<밤의 첼로>는 사랑을 조롱한다. 오래된 농담처럼 새로울 것 없지만, 그 건조함 속에 광적이고 격렬한 불꽃이 튄다. <밤의 첼로>에서 연주되는 사랑은 혼돈이며, 환각이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상처의 집이며, 모순이다. 사랑은 변덕스럽다. 명식과 인경은 사랑했지만, 인경은 명식을 버렸고, 전신 근육의 대부분이 마비된 인경은 죽기 전에 명식을 한 번 보고 싶어 한다. 사랑은 혼란이다. 명식은 자신을 버렸던 옛 애인의 죽음 앞에 혼란스러워한다. 사랑은 상처의 집이다. 명식의 상처의 집은 인경의 죽음으로 다시 들쑤셔졌다. "이제 그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명식을 "제 생애에서 가장 혹독한 밤 한가운데"로 몰아넣었고, 명식은 "인간의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 첼로를 연주한다"는 신의 첼로 소리를 듣는다(밤의 첼로).

 

'밤의 첼로'에 이어지는 나머지 다섯 편의 이야기에서는 "사랑하지 않았다면 죽이지 않았을", 그러니까 사랑하기에 죽일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상대를 죽여버렸기 때문에 그 사랑을 끝낼 수가 없는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야기들 속에 서로 연결되어 등장한다. 치정 살인. "그 치정도 처음에는 아름다운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랑의 이중주가 죽음의 광시곡으로 변질되는가. <밤의 첼로>가 찾아낸 원인은 '변심'이다. "멀어지는 사랑을 분노 안에 가두려다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들. '물고기 그림자'의 은희는 사람이 정말 절망스러우면 미쳐 버린다고 말한다. 변심한 사랑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미쳐버리면, 사랑은 폭력이 된다. "몽골에서 늑대는 숭배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사냥의 대상이기도 하다. 가죽도 가죽이려니와 가축들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이는 신에게 인간이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징벌의 대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죄도 죄려니와 세계를 망치니 이런 치정 같은 모순에 매우 적합한 것이다"(버드나무군락지, 217).

 

<밤의 첼로>에서 연주되는 변주곡이 '버드나무군락지'라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서로 연결될 때, 그 연결의 접점에 서 있는 두 인물이 있다. "이예훈"과 "권진규". 이예훈은 애인이 그의 둘도 없는 친구와 바람이 나 버림 당했지만, 체념했다. "나는 사랑을 잃고 고통 때문에 고지식해졌다. 깊은 병을 앓았고 값진 체념을 배웠으며 누가 뭐라든지 홀로 화가가 되었다"(버드나무군락지, 246). 체념을 배운 이 남자는 한쪽 눈을 도려내고 살아 남았다. 이런 맥락에서 권진규는 이예훈과 대칭점에 존재하는 듯한 인물이다. 우스운 농담처럼 던진 악마같은 한마디에 장해인이 스스로 목을 매 숨진 뒤, 그는 몸에 달라붙어 도망갈 수도 없는 진짜 지옥 불 속에서 산다. 휘청거리는 영혼, 그의 통곡소리마저 삼켜버리는 지옥불 속에서.

 

작가는 왜 마지막 이야기 속에서 "사랑했기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들을 서로 연결지었을까. "문득 그는 사랑했기 때문에 상처 입은 어떤 이들과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간절히 연결돼 있는 것만 같았다"(버드나무군락지, 250). 태연하게 지나는 사람들 속에 감추어진 사랑의 상처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일까. 누구가의 옛 사랑이 누군가에는 현재의 사랑이고, 누군가에게 버려진 사람이 누군가에는 짝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사랑했기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사랑에 상처 입은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자신의 상처를 객관화하고 상처로 연결된 사람들을 통해 치유를 경험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작가는 끝까지 사랑을 조롱한다. 잃어버린 사랑에 집착하는 고재만은 그의 옛 연인과 그녀의 새로운 연인을 찾아간다. 그녀의 새로운 연인인 목남은 시각장애인이지만, 은희에게 집착하는 재만의 고통을 본다.

 

"은희를 사랑하지 마세요.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을 하지 마세요."

(목남의 충고에 재만은 반격을 시도한다.)

 

".......네가 사랑을 알아?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알아?"

"당신의 두 눈을 내게 주십시오. 그럼 내가 당신 대신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그 여자를 증오해 드리겠소."

"......."

고재만은 완벽히 패배했다(버드나무군락지, 230-231).

 

 

<밤의 첼로>에서 나는 환멸을 보았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고, 사람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고, 신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다. "병운은 어떠한 법칙으로도 장담할 수 없는, 어떠한 진심으로도 설득할 수 없는, 어떠한 겸손으로도 평화로울 수 없는 이 세상이 끔찍했다"(40). 그런데 사랑이라는 감정이 없다면 환멸이라는 감정도 존재할 수가 없으니, 작가가 사랑을 조롱하는 것은 신 존재 증명의 한 방식이기도 하다. 소설가 김원일 선생님은 "이 책은 시적인 문체와 모더니즘으로 불교의 연기론과 기독교의신학적 해석 안에서 슬픈 사랑을 이응준 특유의 관점으로 재해석한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신과 씨름하듯 사랑의 환멸과 씨름한다. 그것은 오래된 주제이고, 더 이상 웃기지 않는 농담이지만, 내가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은 신이 아니기에, 우리는 여전히 사랑이 주는 절망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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