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 태양과 청춘의 찬가
김영래 엮음 / 토담미디어(빵봉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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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받은 충격,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을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문학의 첫 충격은 카프카의 <변신>이다. 카프카의 <변신>이,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고 있을 때 느닺없이 얼굴로 날아든 공이었다면, 그래서 너무 놀라 무엇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면, 두 번째 문학적 충격을 안겨주었던 카뮈의 <이방인>은 얼굴을 정통으로 강타하는, 그래서 얻어맞은 자리에 그만 주저앉게 만들었던 강한 고통이었다. 그것은 지독한 것이었다. <시지프의 신화>에서 카뮈는 "이 운명은 의식을 하게 되는 드문 순간에 있어서만 비극적이다"라고 했다.  내게는 <이방인>을 만났던 그 시간이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의식하게 된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조리한 세상이 아니라, 세상의 부조리함에 처음 눈 뜬 순간, 겨우 뜬 눈을 다시 질끔 감아버릴 만큼 그 거대한 정체에 질려버렸다고나 할까. 카뮈가 보여준 세상(부조리)은 내 힘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제대로 덤벼보기도 전에 압사 당해버린 꼴이다.

 

그래서 그건 아마도 카뮈의 <이방인> 때문이었을 것이다. 십대의 내 친구들은 자주 울었다. 성적이 떨어져도 울고, 친구와 싸우고도 울고,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 울고, 좋아하는 영화배우나 가수 때문에도 울었다. 난 그런 일로 울어본 적이 없다. 그저 웃기만 하는 내게 친구들은 '지나치게 낙천적'이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그런 모습을 장점으로 받아들였다. '염세주의', '비관주의'라는 말을 처음 배우기 시작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지나치게 낙천적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 지나치게 비관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카뮈의 <이방인>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베르 카뮈>는 카뮈와 사랑에 빠진 한 작가가 카뮈 탄생 100주년을 기념으로 엮어낸 책이다.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는 카뮈의 문장들을 모은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열 개의 단어를 묻는 질문"에 카뮈는 "세계, 고통, 대지, 어머니, 사람들, 사막, 명예, 비참, 여름, 바다"를 말했다고 한다. 이 책을 엮어낸 이는 이 열 개의 단어를 테마로 카뮈의 문장들을 모으고 '열 개의 거울에 비춰본 카뮈'라는 제목을 달아놓았다. 제2부는 카뮈의 대표작을 (부분적으로) 읽으며 그의 작품을 음미해보는 시간이었다. <이방인>, <페스트>, <시지프의 신화> 中 '시시포스의 신화'를 다루며, '카뮈를 읽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제3부는 '카뮈를 만나다'는 강연, 편지, 인터뷰, 연대기, 여러 증언들을 통해 카뮈의 삶과 시대를 돌아보는 시간이다.

 

<알베르 카뮈>에서 내가 건져낸 의미 있는 발견이라고 한다면, <이방인>에 대한 작가 자신의 견해를 처음 접해보았다는 것이다. 카뮈는 <이방인>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어떠한 영웅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한 인간을 <이방인> 속에서 읽는다면 크게 틀린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좀 역설적인 뜻에서이지만, 나는 내 인물을 통해서 우리들의 분수에 맞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리스도를 그려보려고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211). 읽은지 오래인 내 기억 속의 뫼르소는 그저 눈부신 태양 빛 때문에 방아쇠를 당긴, 그러고도 자신을 변호하기를 귀찮아 하는, 반항하지 않는 반항아로 저장되어 있었는데, 뫼르소가 카뮈에게는 그리스도였는가! 이 한마디 말이 '뫼르소'라는 인물을, <이방인>이라는 책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카뮈는 뫼르소를 한마디 말로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209). 유대인과 로마인의 법정에서 극악무도한 죄인이었던 그리스도처럼,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바로 다음 날 해수욕을 하고 코미디 영화를 보고 여자와의 정사에 골몰하는 이 남자는 법과 종교의 논리 안에서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편명된다. 카뮈는 그의 유죄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기가 사는 사회에서 이방인이며, 사생활의 변두리에서 주변적인 인물로서 외롭고 관능적으로 살아간다"(209-210).

 

사실 카뮈의 것이 "문학적 충격"으로 기억될 만큼 강렬했다고 고백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동안 카뮈를 잊고 살았다. 이 책은 카뮈와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의 것이다. (순전히 주관적인 견해이겠지만)  카뮈를 사랑하고, 그래서 "더"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겠지만, 카뮈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문장들이 오히려 지루할 수도 있겠다. 전체적으로 글들이 조각나 있다는 인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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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불만 영문법 - 초보의 심정을 모르는 기존 영문법 책들에 대한 불만 46가지
장지현 지음 / 성안당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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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고 나서 원작을 원서로 읽어보고 싶어졌을 때도, 여행 가는 비행기 안에서 외국인과 유창하게 영어로 대화하는 청년을 보고 다시 회화 공부에 도전하기 시작했을 때도, 제 영어 공부는 항상 '문법'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단어를 많이 외워 사전 없이 원서를 읽어내려가는 것이 목표였지만 단어의 뜻을 모두 알아도 구조가 어려운 문장을 만나면 독해가 되지 않았고, 외국인을 만나면 머릿속에서 단어만 떠다닐 뿐 문장으로 꿰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저의 영어 공부가 늘 제자리걸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문장을 외우다가도, 단어를 외우다가도, 미드를 열심히 보다가도 꼭 다시 '문법'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현상말입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야심차게 영어 완전 정복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단 '기초' 문법을 완전히 마스터할 것, 그리고 예문을 입으로, 귀로, 손으로 통째로 외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문법책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제대로 공부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공식을 외워도 응용이 잘 되지 않습니다. '문제'(문법 퀴즈)는 풀겠는데, '말' 하고는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 이거다 싶어 집어든 것이 바로 이 <불평불만 영문법>입니다.

 

<불평불만 영문법>을 보고 놀란 것은 그동안 제가 느껴왔던 '불만'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소연할 수 없었던 답답함을 이해받는 심정이란! 그것만으로도 이미 영문법에 한걸음 다가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불평불만 영문법>을 보며 우리나라 영어 교육 정말 반성해야겠다고 격하게 공감하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저자는 오랫만에 서점에 가서 기초 영문법 책을 몇 권 훑어보다 "20년 전과 달리진 게 형형색색의 화려한 디자인과 반들반들한 종이 질과 물가를 꼬박꼬박 반영한 책값뿐임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설명하는 방식에서 좀 더 다양한 시도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진 저자를 보며, "맞다!" 하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습니다! 제대로 시작도 해보기 전에 영어 공부를 질리게 만들었던 그 '지루한 설명' 방식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에 왜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저자는 그래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담은 영문법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불평불만 영문법> 책은 일단 볼펜 들고 노트 펼치고 '공부'하는 문법책이 아니라, 독서하듯 읽어나가를 문법책입니다. 전 일단 그렇게 읽었습니다. 저자에게 직접 강의(설명)을 듣는 것처럼 손에 책을 들고 쭉 읽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동안 나의 문법 공부가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 영문법은 말을 하기 위한 하나의 뼈대(공식)라는 이미지가 있었고, 공식 안에 숫자를 집어넣듯 영어 단어를 문법 안에 끼워맞추는데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평불만 영문법>은 "문법은 곧 말을 하기 위한 공식"이라는 저의 고정관념을 깨뜨려주었습니다. 문법은 말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설명방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문법은 외워야 하는 공식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는 원리였던 것입니다. 5형식 문장, to 부정사, 가주어-진주어가 '말'과 연결되니 심봉사가 눈을 뜨는 기분입니다.

 

<불평불만 영문법>은 문법 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보다, 영문법 공부에 지친 사람들에게 더 깊은 공감을 끌어내리라 생각됩니다. 한자로 이름 붙여진 문법 용어의 개념을 다시 쉽게 설명해주고, 예문을 통해 '감'을 잡게 도와줍니다. 공부한 문법 이론을 말을 하는 데가 아니라, 문제 풀이에밖에 사용하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권합니다. 어느 정도 이론적 기반이 있는 독자들은 훨씬 빨리 영문법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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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케이도에게 배우는 복음 맥스 루케이도 스토리 바이블 시리즈 1
맥스 루케이도 지음, 오현미 옮김 / 아드폰테스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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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많은 크리스천들이 암송하고 있는 성경구절입니다. 저는 어릴 때, 노래로 배웠습니다. 이 짧은 성경 한 구절의 말씀 속에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가 집약되어 있고, 성경 전체의 내용이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교인이 아니라)을 사랑하신다는 것,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셨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최고의 지식으로 대접받는 시대에,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우주 만물과 인간 역사를 다스리고 있다는 말을 하면 구시대의 신화로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죄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어떻게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의아해하기도 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실재한다고 하면 이 우주 공간 어디에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 보여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에 비해, 아직도 과학이 설명할 수 없는 사실, 증명할 수 없는 현상들, 풀어내지 못한 수수께끼가 많다는 것은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 시대 기독교 최고의 작가로 인정받는 인물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현대인의 언어로 풀어내는 솜씨가 탁월합니다. 성경이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이야기, 바로 나와 관계된 이야기라는 것을 생생하게 깨닫게 해줍니다. 그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 16절을 뼈대로 복음의 진리를 풀어낸 것이 바로 이 책, <루케이도에게 배우는 복음>입니다.

 

 

"성경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 말씀에서부터 시작하라. 성경을 통달한 사람이라면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오라"(30).

 

<루케이도에게 배우는 복음>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이,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짚어줍니다. 한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올 만큼 인생의 갈증을 느꼈던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주신 이 말씀 속에 "인간의 문제를 치료하는 하나님의 처방"이 다 들어 있다.

 

과학은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가장 그럴 듯한 가설로 받아들여지는 '진화론'이 있지만, 진화론에서 인생의 가치와 목적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진화론처럼 우리 생명을 하찮게 만드는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우연'라면 그 우연 안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입니다! 나의 존재 가치와 의미는 오직 이 사실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보다 더 생생하게, 더 풍성하게, 더 완전하게 설명하는 분을 알지 못할 정도로,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그 사랑을 받아들일 권리도, 저항할 권리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권리를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한량 없는 은혜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위험한 선택을 하신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 "기쁜 소식"(good news)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지옥을 경험하고 삽니다. 인간이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반어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였음을 알려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또 문제는 그 구원을 얻는 길이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그것이 "너무 간단해서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 길이 너무 쉬워서 오히려 경멸합니다. 인간의 노력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하면 더 받아들이기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 쉬워보일지 모르지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께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음을 알지 못합니다.

 

 

 

 

누군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미쳤거나, 진짜 하나님이거나. 예수님를 직접 보고 만난 사람들의 딜레마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예수, 말씀 한마디로 풍랑을 잔잔케 하고, 병자를 치료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 예수, 자신들과 함께 걷고 말하고 밥을 먹는 이 예수는 도대체 누구인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루케이도에게 배우는 복음>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야 했는지, 그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우리와 어떻게 상관이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을 많이 읽었지만, <복음>처럼 천국와 지옥에 대해 이렇게 생생하게 설명하는 책은 없었습니다. '고상한' 신앙생활에 도취되어 천국와 지옥이라는 생생한 실체를 잊고 살았구나 하는 날카로운 찔림이 있었습니다. 특히 지옥의 실체는 제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께 꼭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루케이도에게 배우는 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장 16절을 중심으로 복음의 핵심을 풀어내고, 후반부에는 40일간 예수님의 탄생부터 부활까지 성경을 묵상하며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얼마나 복받은 사람들인지, 여기저기서 '복음' 넘치도록 들려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풍성하게 넘쳐나는지 교인들조차도 감사를 잊을 정도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배우려고만 한다면, 어디서든 쉽게, 자유롭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만큼 그것을 잘 설명할 수 있는 탁월한 분도 드뭅니다. 책을 통해 이 분의 가르침에 직접 귀 기울여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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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인데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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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유부녀라고 해서 뭘 느껴선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나"(187)

 

 

한 번 짝을 맺으면 그 짝과 평생을 지낸다는 동물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감동한 인간은 그들의 습성(?)을 사랑이라 부르며, '고귀한'이라는 찬사를 아낌없이 선사합니다. (순전히 인간의 입장이지만) 한낱 미물도 그렇게 평생 제 짝에 대한 의리와 사랑을 지키며 사는데, "하물며"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짓거리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불륜', '간통', '부도덕'이라는 말로 주홍글씨를 새깁니다. '고귀한' 동물들처럼 평생 한 사람의 짝만 사랑할 수 있는 본능(?)을 타고 나지도 못했으면서, 인간은 왜 한 사람의 배우자만을 사랑하겠다는 신성한(!) 약속을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가, 아니 사회가 금기하는 일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반역을 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낮인데 어두운 방>도 그런 반역의 냄새가 다분합니다.

 

"떨려서는 안 될 상대"인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낮인데 어두운 방>의 이야기를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착실한 주부가 어느 날 마음에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한 한 외간 남자에게 빠져들다 결국 집까지 뛰쳐 나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 듣고 순간 거부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잠깐 판단유보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저자가 <냉정과 열정 사이>의 에쿠니 가오리니까! 막상 소설책을 펼쳐 들면, "뭐야, 이런 이야기에 이렇게 설레여도 되는거야" 스스로도 의아할 만큼 콩닥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며, "미국에 있는 아내와는 이미 15년 넘게 별거 상태"에 있는 존스 씨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중년의 신사(!)입니다. 배우자가 아니어도, 꼭 사랑하는 감정이 아니어도 여자와의 잠자리에 거칠 것이 없지만, 여기에는 '상대가 원할 때'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에 대한 예의이고, 배려입니다. 미야코 씨는 수다를 떨 때조차 손에서 일감을 놓지 않는 착실하고 부지런한 주부입니다. 아직 아이는 없지만 남편 히로시 씨와 함께 사는 자신만의 공간(집)에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가꾸어가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지만 그녀에는 활기가 넘칩니다. 존스 씨에게 미야코 씨는 새장 안에서 종종 거리며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작은 새처럼 귀엽습니다.

 

존스 씨와 미야코 씨가 가까워지고, 점점 상대방에게 빠져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슬아슬 위태위태 하면서도 어쩐지 이 두 사람을 응원하게 됩니다. 미야코 씨는 "원래"(!) 착실한 주부였다는 것, 존스 씨를 향해 가슴이 콩닥거리기까지 그들의 만남에는 어떠한 불손한(?) 의도도 없었다는 것, 계속해서 남편에게 손을 내밀지만 남편 히로시 씨는 무심하기 그지 없었다는 것, 이 모든 이유들이 남편이 아닌 남자에게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하는 이 여자를 변호하게 만듭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어찌나 무심한지 이 남자는 이 여자에게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자격이 없어 보일 지경입니다.

 

미야코 씨는 '필드 워크'라는 이름으로 존스 씨의 손에 이끌려 "집 밖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익숙한 동네이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거리인데도, 존스 씨와 함께 마주한 세상은 미야코 씨에게 "모든 것이 낯설고, 신선하고, 무섭도록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야코 씨는 "아주 잠깐 밖에 나가는 것이 이토록 즐거운 일이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존스 씨와 함께 있으면, 하루하루가 새롭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 색이 넘치고 소리가 넘치고 냄새가 넘쳐난다는 것, 모든 것이 변화하며 모든 순간이 유일무이하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애석해할 필요는 없다는 것, 따위가 무섭도록 선명하고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존스 씨와 함께 있으면 그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 하나하나가 갑자기 특별해집니다." 그 새로운 경험과 흥분 속에서 미야코 씨가 이제까지 발 디디고 있던 "확고한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져" 버립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모두가 예상했던 것일 수도 있고, 뜻밖일 수도 있겠습니다. 미야코 씨와 존스 씨의 사랑이 어떻게 결말 지어지든, 미야코 씨는 이미 발칙한 도발을 선택했습니다. 임자 있는 여자(유부녀)니까, 그 임자 외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몸이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본디 사랑이라는 '감정'이 마음대로 되는 것이던가요. 그 흔들림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지, 그것이 점점 개인의 '선택'의 문제가 된다는 것이 의미심장할 뿐이지요. (주인공이 유부녀라는 점에서 더욱) 미야코 씨의 선택을 해방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성적인 해방이라기보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한 사람과의 영원한, 적어도 평생 사랑' 아닌가요? (제가 아직도 갇혀 있는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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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지음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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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현실을 향한 인문학적 성찰." 더 정확히 말하면 "교회를 향한 쓴소리"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고, 읽는 내내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를 향한 어떤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제도권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바로 '교회'라는 믿음 위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은 다소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문학자의 책입니다. 둘째 누나가 수녀님이고, 셋째 형이 목사님이며,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가톨릭대학교(인간학교육원)에서 인간학과 영성 과정을 맡아 가르쳤다 합니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은 인문학자의 눈으로 복음서를 읽어가며, 한국 교회를 진단하고 현 한국 교회가 잃어버리고 있는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성찰한 책입니다.

 

(제가 가진) 저자의 성경 해석에 관한 몇몇 문제점과 지적하고 싶은 어떤 신학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을 사는 교회가 어디 있느냐는 그의 반박과 복음의 핵심은 '실천'에 있다는 그의 외침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이 '전부'를 말하지는 않지만, 교회가 놓치고 있는 것,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높게 이야기합니다. 마음속에 시뻘건 불덩이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부정하고 불의한 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교회가 없고, 방향을 잃어버린 세상에 푯대가 되는 교회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인식하고 마음을 찢어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 예언자는 없고 제사장만 있는 듯하다"는 저자의 말이 회초리처럼 다가와 정신을 번쩍 들게 합니다.

 

구약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이야기했다면, 신약은 예수를 좇는 삶에 대한 메시지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옳음을 외치는 설교는 무수히 행해지고 있지만, 본이 되는 교회, 존경받는 교회, 사회가 귀를 기울이는 교회가 없다는 사실은 통탄할 일입니다. 저자의 말처럼, 아주 쉬운 언어로 복음을 전하고, 사랑과 정의의 힘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한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 그러한 삶에 '교회'가 얼마나 게을렀고, 무관심했고, 외면했는지 (더 늦기 전에) 벌거벗는 심정으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도 그런 고민 속에서, 몸부림 속에서 탄생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 책이 교회와 상관없는 사람이 교회 밖에서 던지는 돌멩이가 아니라, 교회 속한 사람으로 회복을 위한 쓴소리가 목적이었다면, 자기 반성으로 쓰인 책이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저는 이 책을 쓰신 저자도 분명 예수의 삶을 표준으로 삼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 책임에서 완전히 발을 빼고 교회를 타자화 하여 비난하는 것은 마음에 걸립니다. (1부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을 전부 무뇌아로 싸잡고, 한국 땅에는 천박한 목회자만 있는 것처럼 비난하는 말투는, 자신의 의로움에 사로잡힌 또 다른 '바리새인'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들어야 할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안에서 어떤 사랑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미 우리에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랑'(희생)임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교회를 아프게 하는 돌멩이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참된 변화의 동력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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