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저도 고치실 수 있나요? - 맥스 루케이도의
맥스 루케이도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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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만큼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러니 온 세상이 그분을 구주라 부를 수밖에 없다"(49).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을 꼽겠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단연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절절한 것인지,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무엇까지 하셨는지, 그리하여 우리는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인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보다 더 아름답게, 더 생생하게, 더 탁월하게 가르쳐줄 수 있는 분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가치는 예수님이 정하신다"라는 소제목의 이야기는, "시대의 이야기꾼'이라는 저자의 명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목사님은 누가복음의 기록에서 '십자가에 달린 악한(우편 강도)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악한이 천국을 얻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이 악한만큼 무가치한 인간도 드물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죽어 마땅한 이 인간 쓰레기를 구원해주셨을까?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는 것일까? 이해를 돕기 위한 예화의 탁월함이 놀랍습니다. 어떤 백화점에 밤손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밤손님은 물건을 훔치는 대신 가격표를 모조리 바꿔 놓았"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우리 인생에도 이와 같은 일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푼돈에 팔리고 싸구려는 수백만 달러를 호가하는 진풍경이 매일같이 펼쳐지고 있다."

 

다시 '십자가에 달린 악한(우편 강도)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 남자가 예수님께 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기신다. 잘생길 필요도, 능력이 뛰어날 필요도 없다. 당신의 가치는 타고난 것이다. (...) 당신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있다"(41-49).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밤낮 없이 일하고 또 일합니다. 경쟁하고 또 경쟁합니다. 쉴 때조차 힘이 듭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그렇게 지쳐가는 우리에게 이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가치는 내장형이다. 우리는 가치를 타고났다. 사람은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가치가 있다"(47).

 

 

  

"이 병자의 육체를 고치기 위해서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보혈이 필요했다. 육체의 치유는 편안한 집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죄의 용서는 언덕 위의 강도들 틈에서 이루어졌다. 육체의 치유는 말 한마디면 충분했지만 죄의 용서를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으셔야 했다. 무엇이 더 쉬울까?"(218)

 

 

<하나님, 저도 고치실 수 있나요?>는 특별히 우리에게 치료자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책은 총 4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파에 상한 우리 마음'을 고치신다", "하나님은 '세습에 물든 우리 생각'을 고치신다", "하나님은 '아는 대로 살지 않는 우리 행동'을 고치신다", "하나님은 고침받은 우리를 통해 '아픈 세상'을 고치신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어차피 망한 인생이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선 사람에게, 스스로가 부끄러워 움츠려든 사람에게, 수치스러운 기억 때문에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사람에게, 아무런 희망 없이 버려진 사람에게, 다른 사람과 벽을 쌓고 있는 사람에게, 열심히 살아도 기쁨이 없는 사람에게, 가족이 무거운 짐인 사람에게, 집안이 창피한 사람에게, 예수를 만나면 그 인생이 어떻게 역전될 수 있는지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천하의 사기꾼을 믿음의 사람으로 바꾸는 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지만 우리 하나님께는 하룻밤 일거리에 불과하다"(29).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해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도, 폭풍을 잠잠케 하실 때도, 나병환자를 치유하실 때도 말 한마디면 충분하셨던 분이, 왜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을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선포합니다(로마서 5:8).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높은 보좌에 가만히 앉아서 하는 사랑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일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저도 고치실 수 있나요?>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우리가 당하는 고통 때문에 더 고통받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치유와 회복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만남은 단순히 두 종교인의 만남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두 철학의 충돌이었다. 서로 다른 두 구원관의 충돌이었다"(117).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메시지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반으로 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율법주의와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로부터 시작하여 사도 바울이 평생에 걸쳐 싸웠던 싸움이기도 합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줄로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니고데모는 거래로 생각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냥 선물이라고 말씀하신다. 니고데모는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쟁취해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구원이란 선물을 그냥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신다"(117).

 

<하나님, 저도 고치실 수 있나요?>는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 메시지의 '종합판'과 같은 책입니다. 몇몇 예화들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독자에게는 낯익는 것입니다. 여러 책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사랑)에 대해 전파해온 그분만의 독특하고 깊이 있는 메시지가 여기에 완결되어 있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째서 은혜인지, 그 은혜가 어째서 사랑인지를 말입니다.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어찌나 풍성한지, 아무리 넓고 큰 것을 생각해도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 책은 우리의 영혼이 그 풍성한 은혜에 완전히 푹 잠기게 만듭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바로 옆에서, 때로는 영혼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가르쳐주는 책은 많지만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만큼 전적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도 드뭅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 안의 '율법주의'가 자꾸만 그 사랑을 축소시키고 한계를 정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도,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들도, 신앙생활에 힘쓰는 성도들도 때로는 그 사랑에 완전히 잠기는 일에 실패합니다. 이 책은 풍성하고 풍성하여, 흘러 넘치고 또 흘러 넘쳐도, 채워지고 또 채워지는 사랑, 그 사랑에로의 초대입니다. 염치 없어 하지도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좌절하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 움츠려들지도 말고 어서 나아오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고통을 치유하는 것은 힘든 일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고통 속에서 그냥 사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치유의 길, 회복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 같은 자도 고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그 완전하신 사랑 안에!

 

 

세상의 모든 구원관이 이 두 구원관 중 하나로 귀결된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두 진영으로 나뉜다. 율법주의 혹은 은혜. 인간 스스로 구원하든가 하나님이 구원하시든가. 행위에 따른 보상으로 구원을 획득하든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따른 선물로 구원을 받든가(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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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 - 임동확 시인의 시 읽기, 희망 읽기
임동확 지음 / 연암서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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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어쩌다가 시를 노래하게 되었을까요? 하늘의 신을 찬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그 기원이라고도 하고, 전쟁 영웅을 높이기 위해 만들진 것이 기원이라고도 하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언어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된 시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드려지는 하나의 제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말'인데도 시인의 언어는 어찌 그리 청량한지 가락이 없어도 향기로운 노래가 됩니다.

 

봄꽃이 화사한 봄날 봄볕 드는 창가에 앉아 시리도록 눈부신 시 하나 가슴에 담아보고 싶어 이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시를 읽어주는 책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마음을 간지르는 시 한 편 감상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 든다면, 아마 많은 독자분들이 당황하시리라 짐작됩니다.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시에 대한 진지한 담론입니다.

 

시는 무엇일까요? 저자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모든 시들은 자신의 주변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신화적 세계를 지향한다. 신화의 이야기들처럼 인간의 삶의 세계를 바로잡고 바꾸는 것이 시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4-5). 시가 이렇게 야심찬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가 그 궁극적인 지향점에 도달하는 길은 멀고 험해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시작은 마주치는 낯선 풍경이나 사물들을 장악하고 소유하려는 개념적 동일화를 포기하면서 시작된다"(5). 제게는 시보다 더 어려운 설명입니다.

 

시는 아름다운 노래이지만 그 시의 심장부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는 그 아름다운 언어 속에 많은 뜻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시어 속에 은폐 되어 있는 시의는 그래서 저마다 해석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시의 의미체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생명체처럼 유동하면서 다른 세계의 출현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그 어떤 것일 뿐이다"(6). 그래서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가능한 한 미리 주어진 이해방식, 그러니까 특정한 이론이나 문학주의에 입각한 교과서적인 시이해 및 해석을 배제하도록 최대한 노력"(7)하며 시 읽기를 시도했습니다. 저자는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내용의 시라도 우리에게 절실하고 간절한 인생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룬 시들을 나의 시 읽기의 텍스트로 삼"(9)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에서 만난 시 중에 가장 인상적이면서 독특했던 시로 고형렬 시인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를 꼽고 싶습니다. '언어'라는 주제어를 가진 이 시는 무슨 비밀스러운 암호같기도 하고, 풀기 힘든 수수께기같기도 합니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고형렬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이 문장은 성립되지 않고 시상이 전개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은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상하므로 항상 제기되는 문제다

그러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증명할 길이 없지만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에르덴조 사원에서 생각하거나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하려다가 생각을 못하고 놓친다

그들은 먼 나의 생각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문장 성립은 둘째치고 나는 늘 이렇다

나는 이 사유 자체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이 꼭 성립해야 하는가

길을 가면서, 나는 혼자, 그 생각에 골몰한다

분명하게 말해서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는 것처럼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그래 에르덴조 사원에 내가 있다는 것은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진배없다

나에게 에르덴조 사원이 있다는 것은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동급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문제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문제가 발생한다

허나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내가 너무나 고독하다

음률을 맞추며 고통스러워하는 자의 행보

왜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나를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이 문장을 떠올리며 슬퍼한다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나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그런데 그대여 왜 그대는 에르덴조 사원엔 없는 건가

나는 지금, 그때, 에르덴조 사원에 머물고 있어라

나는 정처가 없어서 나무처럼 외로워 보인다

나 없는 사막 입구의 산처럼 나는 하늘을 쳐다본다

에르덴조 사원의 하늘에 나타난 눈부신 구름처럼

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설명을 읽기 전까지, 이 시는 저에게 하나의 난해한 기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을 읽고 나니, 시인만이 할 수 있는 고뇌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시를 이해하려면 우선 '언어'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언어의 성격과 기능을 논리적이고 의미론적인 차원에 한정시키는 것은, 복잡다기한 삶의 실감과 깊이를 느끼고 이해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139). 그러니까 이 시는 논리적으로, 의미론적 차원에서 읽을 수 없는 시입니다. "근본적으로 부재하는 '에르덴조 사원"과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나"는 양립할 수 없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때닫는다"(139).

 

에르덴조 사원은 어디이며,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러니까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명제는 시인인 "나"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논리적이거나 언어를 사물과의 대응관계에서 보려는 지시론적 의미론으로 볼 때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 '상상"할 수는 있지만 "증명할 길이 없"다고 해서,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는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일반 언어와 달리 시적 언어는 "증명"할 수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세계에 관계하기에 논리적 검증이나 반증의 차원에서 다룰 수 없다"(140).

 

이 시를 노래한 "시인인 "나"에게 언어는 사건의 인과적인 설명의 도구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체험이나 실감의 표현에 다가가는 수단일 뿐이다"(142-143). "무엇보다 "나"는 지금 말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과감하게 불러내는 자이며, 그래서 "나"는 구체적인 형상과 무형의 절대성 사이의 참다운 통일을 꿈꾸며 기꺼이 "에르덴조 사원의 하늘에 나타난 눈부신 구름처럼" 부재하는 동시에 현존하는 것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144). 어떻습니까? 논리와 의미를 초월하는 시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세계이며, 고차원의 세계인 것만 같습니다.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제한된 해석의 감옥"에 갇힌 독자들을 풀어주고자 의도한 책입니다. 그런데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자의 해설이 어찌나 확신에 차 있고 박력이 넘치는지, 너무 힘차서 오히려 '정답' 같은, 그리하여 그 정답의 감옥에 다시 독자를 가두는 모순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읽는 저자는 이 시를 이렇게 읽어냅니다. "그러니까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타자 또는 타문명이 부여한 가치와 이념을 내면화하고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를 부인하거나 "부끄러"워 하는 "나"의 자아를 뜻한다"(163).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읽기 어려운 난해한 시, 고정관념으로 읽고 있는 시의 의미를 해체합니다. "이미 주어진 이해나 선입관"을 걷어내고, 그 시 속에 숨쉬고 있는 어떤 실재에 가까이 다가서려 합니다. 그런데 시를 읽는 데 방해가 되는 선입견을 제거하려는 '전문성'이 오히려 너무 탁월하여 초보자들을 다시 그 해설 안에 가두어버리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일어납니다. 또다른 문제는 시를 읽어주는 목소리가 시보다 더 읽기 힘든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수강신청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제겐 너무 어려운 강의였습니다! 시어 속에 은폐된 속뜻을 찾고, 난해한 시를 좀 더 전문적으로 읽고자 하는 독자(만)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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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화학자 1 - 이성과 감성으로 과학과 예술을 통섭하다, 개정증보판 미술관에 간 지식인
전창림 지음 / 어바웃어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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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나타나는 명화의 대부분은 읽어야 합니다"(7).

 

클래식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백화점 폐점 시간을 알릴 때 나왔던 음악도, 뉴스의 시작을 알리는 오픈닝 음악도, 분뇨차에서 나오는 음악도 모두 클래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가치가 수 억, 수천 억 원으로 환산되는 명화도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자수나 퍼즐의 도안으로도 쓰이고, 사우나나 카페를 장식하기도 하고, 요즘은 우산이나 삼푸 용기의 도안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림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감상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오랫 동안 천재적인 작품으로 사랑받아온 '명화'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특별함'이 숨어있습니다. 제게 이런 명화의 '특별함'은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놀이처럼 즐겁고,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듯한 쾌감이 있습니다. "미술사에 나타나는 명화의 대부분은 읽어야 한다"(7)는 말의 의미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명화를 읽어주는 책"들이 참 많습니다. 구도, 등장인물, 색채, 소품에 담겨 있는 메시지를 읽어주기도 하고, 화가의 삶과 비극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미술재료와 사조를 설명하기도 하고, 명화와 관련된 스캔들을 폭로하기도 합니다. <미술관에 간 화학자>도 명화를 읽어주는 책입니다. 화학자의 눈은 명화를 어떻게 읽어낼지 사뭇 궁금했습니다.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한 천재 다 빈치도 화학만은 정복하지 못한 것 같다"(57).

 

이럴수가! 화학자의 날카로운 눈이 천재 과학자이기도 한 다 빈치의 '의외'의 빈틈을 포착해냅니다. 위대한 화가이기도 하면서, "헬리콥터를 설계하고 해부학 도감을 그릴 만큼 뛰어난 과학자"(10)이기도 했던 다 빈치가 화학에는 상당히 무지했음이 그의 작품에서 드러납니다. <최후의 만찬>은 유화와 템페라 기법을 혼합하여 그린 것으로, 다 빈치는 이런 혼합 기법을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화학에 관한 그의 무지가 드러납니다. "템페라에 사용하는 달걀노른자는 수분을 거의 50% 이상 함유한 에멀션인데 유화는 기름이므로 수지 균형이 깨어져 상분리(물과 기름이 층으로 분리되듯이 두 상이 섞이지 않고 분리되는 현상)가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 빈치가 미술 재료에 관한 화학적 지식이 상당히 취약했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 "그는 납이나  구리를 함유한 색(흰색, 녹색 등)과 황을 함유한 색(버멀리온, 울트라마린 등)을 자주 함께 사용하였는데 이들은 서로 반응하면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한다. 또한 나무판에 석회를 발라서 평편하게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는데, 석회는 탄산화하여 울트라마린 등과 반응하면 탈색한다.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이미 그의 생전에 심한 박락(채색층이 균열되어 떨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색채도 전체적으로 갈색이나 어두운 색으로 바뀌었다"(57).

 

 

 

"물체가 자체의 색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에 닿는 색채의 분할에 의해 나타나는 스펙트럼의 물리적 현상이라는 자각은 그림의 역사에서 격변을 일으켰다"(346).

 

이 책에 의하면, "역사상 미술사조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고 높이 평가받는 인상주의"는 과학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뉴턴의 색채 이론은 표현의 한계를 탈피하고자 몸부림치던 화가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었"(346)기 때문입니다. 인상파 화가들은 스펙트럼의 과학을 예술에 끌어들였습니다. "인상주의는 빛을 그리는 미술이다. 물체 고유의 색을 부정하고 그 물체의 표면에 반사한 빛이 만드는 순간적 인상을 표현한다. 빛을 그려야 하는 화가의 도구는 물감이다. 자연에서 보는 빛은 생각보다 훨씬 더 밝았고 물감으로는 그 빛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과학자들은 프리즘에 의한 스펙트럼 분광에 관한 연구를 통해 색을 섞어도 어두워지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즉 분광분석법이다. 최종적으로 나타날 색을 분석하여 각각의 원색을 팔레트 위에서 섞지 않고 화면 위에 병치하면 우리 눈의 망막에서 혼합된 중간색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병치혼합기법이다"(258-259).

 

햇빛을 받아 찬란한 자연의 신비를 표현하기 위해 인상주의 화가들은 팔레트에서 물감을 섞지 않고 밝은 색 조각들을 병치하여 어두어지지 않는 혼색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모네는 짧게 끊어지는 터치를 병치하였고, 르누아르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터치의 색면을 병치하였으며, 고흐는 속선의 긴 선을 병치하였다. 쇠라나 시냐크 같은 신인상주의자들은 일정한 크기의 작은 색점들을 과학적인 비율로 병치하여 혼합의 효과를 극대화하였다"(269).

 

이러한 색채의 본질에 관한 연구는 추상화의 발전에도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화가들은 형태를 직접적으로 그리지 않고 색채만을 사용하여 형태와 입체적 공간성을 모두 표현할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입체파, 야수파 등과 함께 들로네와 쿠프카에 의해 오르피즘이 탄생하였다. 이는 추상화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346).

 

이 책을 보니 가구가 과학이 아니라, 미술이 과학입니다! 미술은 항상 과학에 앞서는 분야라고 생각했는데, 미술의 발전은 과학의 발전을 이끌고, 과학의 발전은 미술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습니다. 미술과 과학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커플 같은 느낌입니다.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는 이브의 사과요, 둘째는 뉴턴의 사과요, 셋째는 세잔의 사과다"(338).

 

"프랑스 상징주의의 거장 드니의 말"이라고 합니다. 드니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스티브 잡스의 '애플'을 하나 더 첨가했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역사상 유명한 사과 중 하나가 예술가의 사과라는 사실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브의 사과로부터 기독교가 시작되었으며, 뉴턴의 사과로부터 근대과학이 시작되었고, 세잔의 사과로부터 현대미술이 꽃을 피웠다. 세 사과가 각각 자연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과학에서 인간 감성으로의 전환을 이끈 것이다"(338).

 

<미술관에 간 화학자>는 무엇보다 재미있습니다. 명화보다 그 속에 담긴 '화학'이론이 더 궁금하다면, 다소 싱거울 수도 있겠습니다. <미술관에 간 화학자>는 화학에 관한 지식은 물론 명화에 관한 지식을 총 동원하여 명화를 읽어줍니다. 화학이론을 위해 명화를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명화 자체가 주인공인 것입니다.

 

봄날이면 친구들과 함께 자주 동물원을 찾았고, 동물원 옆 미술관도 들러보곤 했습니다. 그 시절엔 고흐처럼 비극적인 인생을 살다간 예술가의 삶과 작품이 우리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미술관에 간 화학자>를 따라 미술관을 걷다 보니, 새삼 '르누아르'라는 화가가 '인상'적입니다. 60여 년 동안 약 6,000점의 그림을 남길 만큼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렸던 화가, 심각한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손이 변형되어 붓을 손에 묶고 계속 그림을 그렸던 화가, 그러면서도 아름답고 유쾌한 그림을 그렸던 화가. <미술관에 간 화학자>는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르누아르는 그림 자체를 매우 즐거워했으며 보는 관람자도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르누아르의 그림에는 메시지나 철학이 없다.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는 매우 통속적인 사람이며, 그의 그림도 통속적이다. 르누아르는 '인생은 끊임없는 유희'라고 했다. 낙천적인 르누아르는 늘 즐거운 장면만을 그렸다. 그는 불쾌한 것이 많은 세상에 또 불쾌한 것을 창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화가였다"(290). "그의 작품들은 매우 대중적이어서, 도서관에는 <독서하는 여인>, 목욕탕에는 <목욕하는 여인>, 무도장에는 <부지발의 무도회>가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291)고 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천개 화가의 명작을 '통속적'이라고 표현하니 느낌이 새롭습니다. "통속적"인 관람객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화학자를 따라 미술관을 걷는 내내 즐겁고 유쾌했습니다. 책 속으로 떠나는 미술관 나들이,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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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 개정판
이도우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을 두 번 읽는 일이 없는 내가,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고나서, 어디서라도 'unchained melody'가 들려오면 나는 한동안 자동정지가 되었다. 길을 걷다가도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노래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 전면 개정되어 다시 나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이건'의 시집처럼, 자꾸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이 책이.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사랑 노래, 사랑 이야기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10년째 읽히고 있는 연애소설이다. 2004년에 초판되어 2007년, 2013년 두 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다시 독자를 찾아왔다. 서서히 사랑이 지겨워질 법도 한 30대 초중반, 그 나이에 새로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가 계속해서 독자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조화인지 갑자기 가슴이 두근, 했다"(48).

 

9년 차 라디오 작가 공진솔은 새로이 함께 일하게 된 이건 피디를 볼 때마다 어느 순간 자꾸 가슴이 두근, 거린다. 우연히 만난 수영장에서, 또 방송국 직원들과 함께 간 야유회에서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서서히 붉은 노을에 물들어가는 하늘처럼, 어색하고 낯설기만 한 그였지만, 그와 함께 일하고,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 진솔의 마음과 일상은 어느새 그 남자로 물들어간다.

 

건의 짓궃은 웃음이 진솔은 좋았다. 때로는 심술부리듯, 때로는 부드럽고 따스하게 말하는 그가, 무심한 척 잘난 척도 하지만 선한 느낌을 주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불현듯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랑...스러워?(134)

자신의 감정이 당혹스러웠지만, 진솔은 자꾸만 건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한다.

 

 

  

"그래서 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진솔 씨는, 나한테 일기장 같은 사람이에요"(160).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두 가지 증상을 나는 알고 있다. 하나는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초조한 마음과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기는지 자꾸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지는 충동이다. 진솔도 이건의 마음이 궁금했다. 자꾸만 자신의 삶을 파고드는 이 남자의 마음이 궁금할 즈음, 진솔은 이건 때문에 심장이 따끔거리기 시작한다.

 

그 후로 애리는 선우 앞에선 안 울어요. 나한테 와서 울지."

그래. 차라리 울고 싶은 마음이란 이런 걸까?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이 아려서 견디기가 힘들었다(158).

진솔의 마음에는 새로운 사랑이 싹트고 있었는데, 이건의 마음은 사랑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이건의 오랜 친구인 선우와 애리. 진솔은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사이 이건의 마음이 애리를 향해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이건은 진솔이 자신에게 일기장 같은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진솔은 그것이 이건이 긋는 선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떤 미련을 거두지 못한다.

 

일방통행이라고 해도 한번 시작된 사랑은 쉽게 멈출 수 없는 법이다. 아픈 마음도 사랑이니까. 늦은 밤, 불쑥 찾아와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 남자, 자료를 핑계로 자신의 집에 데려가 가족을 소개하는 이 남자, 그의 다정한 문자만 봐도 조용히 미소가 번지게 만드는 이 남자에게 진솔은 사랑을 고백하고 만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찾아오는 사랑처럼, 예기치 못한 순간에 불쑥 고백하고 만 사랑이었지만, 진솔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기다려보기로 한다.

 

 

  

 

"갑자기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었어요. 그럴 땐, 미치겠어. 꼭 사랑이 전부 같잖아"(408).

 

모든 사랑이 무사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사랑이라고 확신하고, 무엇이 사랑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  

여자는 "나 아니면 안 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그저 편해서 좋은 거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오래 들여다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감정이라면, 번번이 그 사람이 아플 때마다 당신 마음도 같이 아파서 미치겠는 거라면... 그건 아니거든요... 나 아니면 안 되는 꼭 내가 필요한, 그런 절박한 감정은 아니거든요(318).

마음에서 지워야 하는 사람이 있어 빨리 달려가지 못했지만, 남자는 상처받기 싫어서 물러나겠다고 하는 여자에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난 정말 당신이 날 사랑하는 줄 알았죠. 이 정도 선에서 상처받기 싫어 물러나겠다고 한다면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도 엉터리야. 그 만한 자격이 있는 감정이 아니에요, 당신 그 마음은(333).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리 읽어버렸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자주 책장을 덮고 멈추었다. 울렁이는 가슴이 뻐근했기 때문이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두근거리지만 현실성은 없는 드라마처럼 오글거리게 로맨틱하지도, 유별나게 달달하지도 않다. 내 옆의 누군가의 이야기이면서 또 나의 이야기이기도 싶게 자연스럽고, 또 사랑이란 것이 이런 맛이었지 싶게 전형적이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더 마음이 풍덩 빠져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무엇보다 문장이 예쁘다. 문장의 리듬이 부드럽게 마음을 건드린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돌려가며 <하이딘 로맨스> 시리즈를 책상 밑에 숨겨 두고 읽는 일에 몰두한 적이 있다. 이야기의 패턴은 대부분 비슷했다. 서로 사랑하게 되는 여자와 남자가 있고, 서로의 마음을 숨긴 채 갈등하며 애를 태우다, 마지막 다섯 장쯤 남겨두고 남자와 여자는 극적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달콤한 사랑에 빠져든다. 그때는 그런 뻔한 사랑 싸움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뻔한 줄다리기가 곧 사랑이라 여겼으니까. 그러나 정작 사랑 앞에 서니 가장 두려우면서도 또 귀찮은 것이 바로 그 "뻔한 사랑 싸움"이었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은 밀어내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는 그 뻔한 사랑의 줄다리기가 싸움이 아니라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 상기시킨다. 미소가 만국공통어라고 하는데, 사랑 공식도 만국이 공통인 것 같다. 시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말이다. 심장이 먼저 사랑을 알아보고 두근거리기 시작하면 그의 마음에도 내가 있나 궁금해지고, 그의 사소한 몸짓 하나에도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면 그가 다른 사람(이성)에게 보내는 의미 없는 웃음에도 괜히 토라져버리고, 서로 사랑한다 싶어 행복했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모든 것을 끝장내버릴 듯이 사랑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혼자서 사랑을 끝냈다가 다시 시작했다가를 수없이 반복하는, 사랑의 열병. 어느 순간 설레이는 것도 귀찮고, 유효기간 뻔한 사랑에 목숨 걸일 있나 싶어 심드렁해진지 오래인데, 미치겠다. 누군가를 향해 다시 한 번 심장이 두근, 뛰어주기를, 나도 모르게 기도하게 된다.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에서 내가 꼽는 최고의 명대사는 백발이 성성한 (이건의) 할아버지가 사랑앓이를 하는 청춘(진솔)에게 들려주는 따뜻한 한마디이다. 

  

사람은 말이디... 제 나이 서른을 넘으면, 고쳐서 쓸 수가 없는 거이다. 고쳐지디 않아요."

진솔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보태서 써야 한다. 내래, 저 사람을 보태서 쓴다... 이렇게 생각하라우. 저눔이 못 갖고 있는 부분을 내래 보태줘서리 쓴다... 이렇게 말이디"(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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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사람 - 제142회 나오키상 수상작
시라이시 가즈후미 지음, 김해용 옮김 / 레드박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만나야 할 사람은 언젠가 꼭 만나게 된다고 들었어요."

- 영화 <접속> 중에서 -

 

사랑이라는 걸 처음 꿈꾸기 시작했을 때, "이 사람이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운명의 짝이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그 사람이 운명의 짝인지 어떻게 알아 볼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어떻게든 알게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드라마에서는 심장이 먼저 그를 알아보고 뛰었습니다. 어떤 소설에서는 그 사람 뒤로 후광이 비쳤다는 고백이 있었습니다. 어떤 영화에서는 그를 본 순간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정지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만약 세상에 이런 일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이런 이야기들이 만들어질리가 없다고 혼자 이론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것인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버릴 수 있는 것인지 몰랐어."

-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중에서 -

 

그러다 알았습니다. 첫 눈에 알아보는 운명의 짝도 있지만, 옆에 있어도 그 운명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부터 풍덩 빠지는 사랑만이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제게 이것은 뼈아픈 교훈이었습니다. 사랑에 풍덩 빠져들려고만 했지, 만들어갈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뛰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두를 보내버린 뒤, 나타나지도 않는 인연을 기다리느라 어느새 풋풋한 사랑을 할 나이가 훌쩍 지나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게 아니야. 모두 철저하게 찾지 않았을 뿐이야.

가장 좋은 상대를 발견한 사람은 모두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니까."

- <운명의 사람>, 153 -

 

그런데 사랑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 것은 운명의 짝을 못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운명인줄 착각하고 빠져들다 그 운명에 된통 걷어차이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만화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사랑이 영원하다고 믿는 것은 사람들이 100년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래- 살다보면 운명 같은 사랑도 빛이 바래고, 열병 같은 사랑도 식어진다는 것, 그것은 이미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의 최대 천적은 '시간'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시라이시 가즈후미의 <운명의 사람>은 제목이 다소 클래식(?)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다분히 '현실적'입니다. 나오키상 수상작인 <운명의 사람>은 평단으로부터 "남녀 간의 문제를 정면으로 잘 다룬 작품이다. 남녀 관계에 도사리고 있는 역학의 문제를 본인만의 독특한 설정과 참신한 문장으로 제대로 표현해낸 수작"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남성 작가도 이런 사랑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습니다.

 

이 책에는 2편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이고, 두 번째 사랑은 <그 누구보다 소중한 너>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는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잘난 가족들 틈에서 열등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한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아키오는 우연히 들어간 술집에서 운명 같이 찾아온 여인을 만납니다. 술집에서 일하는 나즈나는 아키오를 보고 감이 딱 왔다고 말합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 아버지가 그 모양이라서 난 정식으로 남자를 사귀면 절대 바람피우지 않는 사람과 사귀겠다고 다짐했어요. 또 내가 일하는 곳이 그런 곳이라서 남자들 생리를 잘 알거든요. 그런데 아키오 짱을 보는 순간 '앗, 찾았다' 하고 감이 딱 왔어요." 둘은 그렇게 만나 결혼까지 합니다. 아키오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집안과의 인연도 끊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랑이 삐끄덕거리기 시작합니다. 아키오를 보고 감이 딱 왔다고 했던 나즈나에게 사실 다른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 연인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나즈나, 어느새 나즈나가 자신에게 가장 좋은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아키오. 불행히도 그들은 서로에게 운명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부부로 인연을 맺었지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는 서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키오는 나즈나와의 문제로 골치를 앓느라 운명의 사람을 옆에 두고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즈나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풍덩 빠져들지는 않았지만, 그 운명의 사랑에 서서히 물들어갑니다.

 

<그 누구보다 소중한 너>는 약혼자가 있지만, 몇 년 전 인연을 맺었던 유부남 구로키와 다시 만남을 갖고 있는 한 여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미하루의 사랑은 무덤덤하기만 합니다. 미하루는 어떤 소설가의 글을 떠올립니다. "이 세상엔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게 두 가지 있다. 그 중 하나는 정의, 다른 하나는 바로 드라마이다"(224).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드라마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약혼한 후 구로키와 다시 만난 것은 분명 큰 이유가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두 남자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미하루는 결혼식 전날, 구로키의 집을 찾아갑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다소 변태적인 형태의 섹스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일날이면 구로키가 "습관"처럼 케이크를 산다는 것을 알았을 때 미하루는 온몸이 떨릴 만큼 놀랍니다(291). 열병처럼 들떠 사랑을 고백하지도 않고, 자신을 흔들지도 않는 그 남자가 줄곧 자신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있을 때는 절대로 모른다. 헤어져봐야 아는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 영화 <사랑을 놓치다> 중에서 -
 

<운명의 사람>은 두 편의 결말이 독특합니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작가는 독자에게 "운명의 사랑은 반드시 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지 말고, 그 상대를 열심히 찾으라"는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그런데 왜 두 편의 사랑 이야기 모두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라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끝냈을까요? 정말 소중한 것은 잃어버렸을 때 비로서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열심히 증거를 찾지 않으면 결국 사랑을 놓친 후에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평범한 일상을 함께하면서도 그 사람이 운명인줄 몰랐던 아키오도, 온몸을 전율시키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면서도 그 사람이 운명인줄 몰랐던 미하루도 그것이 운명이라는 '증거'를 이미 가지고 있었습니다. 몰랐을 뿐입니다. 뒤늦게 서로가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키오는 또다른 운명으로 사랑을 잃어야 했고, 미하루의 사랑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인생은, 죽기 직전 마지막 하루라도 좋으니까, 그런 가장 좋은 상대를 발견하면 성공한 거야.

말하고 보니 보물찾기랑 비슷하네."

- <운명의 사람>, 153 -

 

운명의 짝은 분명히 있을까요? 그 사람이 운명의 짝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운명의 사람>은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것은 보물찾기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보물찾기를 하는 것처럼 그 '증거'를 열심히 찾으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찾는다면 확실한 증거를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운명적인 사랑은 환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른들은 찾아봐야 별 사람 없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상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터무니 없는 욕심 때문에, 이기심 때문에, 헛된 꿈 때문에, 상처받지 않으려는 보호본능 때문에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있을 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아직 사랑을 꿈꾸고 있다면,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믿고 있다면, 먼 곳만 쳐다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너무 늦은 깨달음으로 사랑을 잃은 후에 아파하는 일이 없도록, 주변부터 샅샅이 살펴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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