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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 - 임동확 시인의 시 읽기, 희망 읽기
임동확 지음 / 연암서가 / 2013년 3월
평점 :
인류는 어쩌다가 시를 노래하게 되었을까요? 하늘의 신을 찬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그 기원이라고도 하고, 전쟁 영웅을 높이기 위해 만들진 것이 기원이라고도 하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언어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된 시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드려지는 하나의 제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말'인데도 시인의 언어는 어찌 그리 청량한지 가락이 없어도 향기로운 노래가 됩니다.
봄꽃이 화사한 봄날 봄볕 드는 창가에 앉아 시리도록 눈부신 시 하나 가슴에 담아보고 싶어 이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시를 읽어주는 책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마음을 간지르는 시 한 편 감상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 든다면, 아마 많은 독자분들이 당황하시리라 짐작됩니다.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시에 대한 진지한 담론입니다.
시는 무엇일까요? 저자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모든 시들은 자신의 주변과 세계를 신화화하는 신화적 세계를 지향한다. 신화의 이야기들처럼 인간의 삶의 세계를 바로잡고 바꾸는 것이 시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4-5). 시가 이렇게 야심찬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가 그 궁극적인 지향점에 도달하는 길은 멀고 험해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시작은 마주치는 낯선 풍경이나 사물들을 장악하고 소유하려는 개념적 동일화를 포기하면서 시작된다"(5). 제게는 시보다 더 어려운 설명입니다.
시는 아름다운 노래이지만 그 시의 심장부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는 그 아름다운 언어 속에 많은 뜻을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시어 속에 은폐 되어 있는 시의는 그래서 저마다 해석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시의 의미체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생명체처럼 유동하면서 다른 세계의 출현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그 어떤 것일 뿐이다"(6). 그래서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가능한 한 미리 주어진 이해방식, 그러니까 특정한 이론이나 문학주의에 입각한 교과서적인 시이해 및 해석을 배제하도록 최대한 노력"(7)하며 시 읽기를 시도했습니다. 저자는 "다소 난해하고 복잡한 내용의 시라도 우리에게 절실하고 간절한 인생 문제들을 깊이 있게 다룬 시들을 나의 시 읽기의 텍스트로 삼"(9)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에서 만난 시 중에 가장 인상적이면서 독특했던 시로 고형렬 시인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를 꼽고 싶습니다. '언어'라는 주제어를 가진 이 시는 무슨 비밀스러운 암호같기도 하고, 풀기 힘든 수수께기같기도 합니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고형렬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이 문장은 성립되지 않고 시상이 전개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은
상상할 수 없는 걸 상상하므로 항상 제기되는 문제다
그러나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증명할 길이 없지만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에르덴조 사원에서 생각하거나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생각하려다가 생각을 못하고 놓친다
그들은 먼 나의 생각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문장 성립은 둘째치고 나는 늘 이렇다
나는 이 사유 자체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이 꼭 성립해야 하는가
길을 가면서, 나는 혼자, 그 생각에 골몰한다
분명하게 말해서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는 것처럼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
그래 에르덴조 사원에 내가 있다는 것은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진배없다
나에게 에르덴조 사원이 있다는 것은 에르덴조 사원이
없다는 것과 동급의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문제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문제가 발생한다
허나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내가 너무나 고독하다
음률을 맞추며 고통스러워하는 자의 행보
왜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나를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이 문장을 떠올리며 슬퍼한다
에르덴조 사원에 없는 나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그런데 그대여 왜 그대는 에르덴조 사원엔 없는 건가
나는 지금, 그때, 에르덴조 사원에 머물고 있어라
나는 정처가 없어서 나무처럼 외로워 보인다
나 없는 사막 입구의 산처럼 나는 하늘을 쳐다본다
에르덴조 사원의 하늘에 나타난 눈부신 구름처럼
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설명을 읽기 전까지, 이 시는 저에게 하나의 난해한 기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설명을 읽고 나니, 시인만이 할 수 있는 고뇌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시를 이해하려면 우선 '언어'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언어의 성격과 기능을 논리적이고 의미론적인 차원에 한정시키는 것은, 복잡다기한 삶의 실감과 깊이를 느끼고 이해하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139). 그러니까 이 시는 논리적으로, 의미론적 차원에서 읽을 수 없는 시입니다. "근본적으로 부재하는 '에르덴조 사원"과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나"는 양립할 수 없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때닫는다"(139).
에르덴조 사원은 어디이며,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러니까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는 명제는 시인인 "나"에게 의미가 있을 수 있으나, 논리적이거나 언어를 사물과의 대응관계에서 보려는 지시론적 의미론으로 볼 때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 '상상"할 수는 있지만 "증명할 길이 없"다고 해서, "나는 지금 에르덴조 사원에 있다"는 "말"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일반 언어와 달리 시적 언어는 "증명"할 수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세계에 관계하기에 논리적 검증이나 반증의 차원에서 다룰 수 없다"(140).
이 시를 노래한 "시인인 "나"에게 언어는 사건의 인과적인 설명의 도구가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체험이나 실감의 표현에 다가가는 수단일 뿐이다"(142-143). "무엇보다 "나"는 지금 말할 수 있는 것 가운데 말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과감하게 불러내는 자이며, 그래서 "나"는 구체적인 형상과 무형의 절대성 사이의 참다운 통일을 꿈꾸며 기꺼이 "에르덴조 사원의 하늘에 나타난 눈부신 구름처럼" 부재하는 동시에 현존하는 것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144). 어떻습니까? 논리와 의미를 초월하는 시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세계이며, 고차원의 세계인 것만 같습니다.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제한된 해석의 감옥"에 갇힌 독자들을 풀어주고자 의도한 책입니다. 그런데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자의 해설이 어찌나 확신에 차 있고 박력이 넘치는지, 너무 힘차서 오히려 '정답' 같은, 그리하여 그 정답의 감옥에 다시 독자를 가두는 모순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읽는 저자는 이 시를 이렇게 읽어냅니다. "그러니까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타자 또는 타문명이 부여한 가치와 이념을 내면화하고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를 부인하거나 "부끄러"워 하는 "나"의 자아를 뜻한다"(163).
<우린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읽기 어려운 난해한 시, 고정관념으로 읽고 있는 시의 의미를 해체합니다. "이미 주어진 이해나 선입관"을 걷어내고, 그 시 속에 숨쉬고 있는 어떤 실재에 가까이 다가서려 합니다. 그런데 시를 읽는 데 방해가 되는 선입견을 제거하려는 '전문성'이 오히려 너무 탁월하여 초보자들을 다시 그 해설 안에 가두어버리는 이율배반적인 현상이 일어납니다. 또다른 문제는 시를 읽어주는 목소리가 시보다 더 읽기 힘든 문장이라는 것입니다. 수강신청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제겐 너무 어려운 강의였습니다! 시어 속에 은폐된 속뜻을 찾고, 난해한 시를 좀 더 전문적으로 읽고자 하는 독자(만)에게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