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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바라보라 - 나를 빚으신 주님이 내게 바라시는 것
켄 가이어 지음, 최요한 옮김 / 아드폰테스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_ (히브리서 3:1)
교회력으로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라>의 저자 켄 가이어는 독특한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피에타>를 그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켄 가이어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사진작가 로버트 훕카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로버트 훕카는 1964년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전시되었을 때 그 기록 사진을 찍은 작가입니다. 그는 "여러 날에 걸쳐 각도와 조명을 달리해서", "수천 장에 달하는 사진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로버트 훕카의 사진은 "각도가 다르면 주제도 다르고, 보는 이의 생각과 느낌도 달라"집니다(9). 켄 가이어는 바로 이 사진작가가 포착해낸 <피에타>의 여러 주제를 십자가의 메시지와 연결시킵니다.
켄 가이어는 "이 위대한 예술 작품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고 싶으신 것", 그것을 찾아내었습니다. <피에타>가 주는 감동을 타고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가 우리 심장까지 흘러옵니다. 그 메시지는 큰 소리를 내지 않지만 조용히 우리 삶을 바꿔놓는 힘을 가졌습니다. 켄 가이어는 이것이 바로 "영혼을 들썩이는 예술의 힘"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는 대리석에서 천사를 보았어. 그래서 그가 풀려날 때까지 조각하고 또 조각했어"(26).
켄 가이어는 미켈란젤로가 일했던 방식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봅니다. 예술가가 돌 안에 갇힌 형상을 풀어놓기 위해 정과 끌을 들고 돌을 깍아내듯이,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강의를 하신 분들의 강의안을 보면 켄 가이어의 말이 많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그의 문장은 깊은 묵상으로 독자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상황을 연장으로 사용하신다. 그분이 일하시는 방식은 미켈란젤로가 일했던 방식과 똑같다. 투박하게 잘린 자아라는 돌 안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갇혀 있다. 그 형상을 풀어놓기 위해 그분은 예수가 아닌 모든 것을 깎아내신다(60-61).
"우리는 그분이 손수 만드시는 작품이다"(67).
켄 가이어는 "조각의 본질이 돌을 버리는 것이듯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것의 본질도 자아를 버리는 것"(66)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기까지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는 수고를 쉬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그게 우리의 목적지이다"(68).
우리를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 만드는 것. 이것이 하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열정적인 예술가이시므로 마음에 그리신 모든 걸 완성하실 때까지 쉬지 않으신 것이다(빌 1:6).
"누가 우리를 괴롭히든지 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이 뭔가를 만들어내시는 원재료이다"(93).
그런데 문제는 돌에게는 그 과정이 고통이라는 데 있습니다. "과정이라는 시기는 혼란스럽다. 그 시간에는 돌이랄 수도 없고 예술품이랄 수도 없다. 채석장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술관에 있는 것도 아니다"(66).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인생에게 닥치는 '고통'의 의미를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게 해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며, 예술품이 탄생하는 과정이며,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무엇이며, 무엇보다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를 계획하셨고,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을 계획하셨다는 사실은 감동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에 대해서는 언제나 "왜?"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마치 우리의 고난을 없애주시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인생을 낭떨어지로 밀어버리는 것 같은 고난을 만나면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켄 가이어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통해 돌에게는 잔인하기만 한 망치와 서늘한 끌이 결국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그 예술가의 손길에서 동일한 하나님의 손을 봅니다. "돌덩이는 점점 조각품으로 변모한다. 돌의 내면에 뿌리박힌 저항을 깨고 영원한 뭔가가 드러나는 게 보인다. 돌은 점점 더 아름답게 변화한다"(67).

"이 사람이 정말로 왕이었다면 궁금한 게 있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123).
켄 가이어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감상하며 놀라운 통찰을 보여줍니다. <피에타>가 보여주고 있는 예수는 "가장 비참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권력자, 영웅의 조각상들은 하나 같이 모두 위엄과 권위를 가진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켄 가이어는 한 전시회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전신상을 감상한 일을 적고 있습니다.
전시장에는 클레오파트라 진신상이 여럿 있었다. 모두 당당하게 서서 한 손으로는 장수의 상징인 이집트 십자가를, 한 손으로는 풍요의 상징인 뿔을 들고 있었다. 앞머리를 장식한 것은 왕족의 상징, 즉 머리가 크게 부푼 코브라 세 마리였다. <피에타>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클레오파트라는 강해보였다. 그리스도는 약해보였다(122).
<피에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세상의 영웅과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초라하게 팔과 다리와 몸통을 잡아당기는 중력의 포로가 된 그리스도. 왕의 위엄은 고사하고 품위마저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는 당당하게 서 계시지 않고 여인의 무릎에 생기 없이 누워 계신다. 어의를 입고 계신 것도 아니다. 겨우 작은 천으로 몸을 가리고 계실 뿐이다(123).
성경은 이 분이 우리의 왕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분은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당당한 모습으로 일어나 한손으로는 생명에 대한 절대 권력을 쥐고 한 손으로 확실한 복을 쥐고 있는 권력자"의 모습도 아닙니다. 미켈란젤로의 또다른 작품 <다비드>처럼 "물매를 손에 들고 적을 노려보는 강인한 용사"도 아닙니다.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처럼 "법의 준엄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십계명 석판을 들고 재판관 자리에 앉아 있는 입법자"도 아닙니다. 우리의 왕은 "스스로를 깨끗이 비우셨던 예수님. 하늘나라에서의 지위, 즉 신성과 왕권을 포기하셨던 예수님. 명예를 포기하셨던 예수님. 종이 되기 위해 존귀한 자리를 포기하셨던 예수님"(123-124)이십니다.

"십자가는 '자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태양계에 일대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을 일으킨다"(125).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왜 우리의 왕이 이처럼 연약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그분의 모습은 "스스로의 욕심을 채우고, 자신을 의지하고, 제멋대로 행하고, 자기를 방어하고 보존하고 자랑하는 모든 자아에 대해 죽은 자의 형상"입니다.
공전하고 있는 '내 인생'이라는 작은 별은 지난날 내가 상상했고 지금도 간간이 상상하는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다. 예수님이 중심이시다. 중심축은 십자가이다. 우주 전체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십자가를 중심축으로 삼는다면 더 이상 우리를 위해 살지 않고 그분을 위해 살게 된다. 그리고 그분을 위해 살면 그분처럼 나보다 남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다(빌 2:3-5). 이것이 <피에타>가 그리는 예수님의 형상이다(125).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의 의미,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의 의미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한 문장은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우리는 그 형상을 잃어버렸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그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 할 형상은 '나'를 중심으로 살지 않고, '너'를 중심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정반대의 원리로 세상을 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논리를 따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원리에 지배를 받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부터 빗나가 있는지 통렬하게 고발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는 그분의 형상을 보라. 건강과 부의 능력이 자기 손 안에 있다고 자부하는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모습.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문화의 골리앗에 맞서 정치적인 근육에 힘을 주어 반대표를 던질 자세를 취하는 다비드와 같은 모습. 아니면 십계명 석판을 껴안듯 성경을 가슴에 꼭 품고 무서운 얼굴로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는 모세와 같은 모습(127).

"돌은 스스로 돌이 되길 고집한다. 예술가는 그 돌이 예술이 되길 바란다"(170).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은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켄 가이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온 땅에 실현하는 싸움은 언어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싸움이다(57).
켄 가이어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예수의 제자들이 닮아가야 할 그리스도의 형상, 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고 계신 일들을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이미지로 혼란스러운 문화와 교회에게 우리가 품어야 할 "이미지"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에서 본 예수님의 형상은 아름다운 충격이었습니다. 그 선명한 충격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