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역 논어
허성준 지음 / 스카이출판사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2500년 전의 처세술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에, 더구나 현대 조직사회에서도 여전히 그것이 통한다는 사실에, 새삼 <논어>에 경의를 표한다. <논어>는 어떻게 2500년 동안 계속 읽힐 수 있었는가? 저자는 한마디로 이렇게 대답한다. "사회생활에 대한 의문점에 이처럼 완벽한 해답을 제공하는 책은 수많은 고전 중에서도 드물다. 이것이 <논어>가 2500년 동안 계속 읽히는 이유이다"(8).

 

한 번은 동료들과 식사를 하며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보다 직장 동료들과 보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보다 직장 동료들과 먹는 밥의 양이 훨씬 더 많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관계의 고리 속에서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도 많고, 성공적인 조직생활, 성공적인 인간관계의 비결을 알려주는 책들도 난립한다. 인간관계, 특히 조직(직장)생활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는 반증일 것이다.

 

무난한 학창시절을 보내며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꽤 자신이 있었는데, 일로 만나는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온다. 누군가와 함께 있어서 행복한 시간들보다, 도망치고 싶어지는 순간이 훨씬 더 많다. 문제는 내가 이제 어중간한 '상사'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그저 뒤에서 적당히 흉이나 보며 내가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는 것으로 나의 책임이 끝나지 않는다. 다양한 관계들 속에서 시너지를 만들어내야 하는 역할은 '그저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다. 관계(의 기술)도 배워야 한다는 것, 그 배움의 필요성을 새삼 절절하게 느끼는 중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논어>를 권하고, 그런 사람들을 위해 <초역 논어>를 구성했다. 저자는 왜 <논어>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논어>가 어떤 책인지 그 핵심적인 특징을 잘 포착하여 보여준다. 공자가 활약했던 춘추 시대는 "중국 대륙에 흩어져 있던 수많은 집락이 '국가'로 발전하는 격변기였다. 국가와 조직의 규모가 예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지고 다스려야 할 백성도 늘었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효율적인 통치 이론이 필요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춘추 시대에는 다양한 사상가들이 등장했다. 많은 사상가가 권력자에게 등용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은 공자가 세운 '유가'뿐이다"(8). 또한 "국가에는 집권 체제 아래에서 서로 잘 협력하며 국가를 운명할 수 있는 관료들이 필요했다. <논어>는 이처럼 조직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저술되었다. 그러므로 <논어>에는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조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언급도 많다"(80). "공자가 살던 시대는 많은 국가가 난립했기 때문에 통솔력이 부족한 군주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동란의 시대였다. <논어>는 이러한 군주들을 위한 책이었기에 리더십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공자의 사상이 당시 성립된 200개에 가까운 통치 이론 중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던 이유는 그의 사상이 제일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132). 그의 가르침은 당대뿐 아니라, 2500년이라는 세월을 관통하여 지금까지도 널리 연구되고 읽히고 있으니, 2500년 세월 동안 검증된 셈이다.

 

<초역 논어>는 "<논어>에서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부분을 발췌하여 알기 쉽게 '초역'하고, 오늘날 비즈니스 현장에서의 실례를 들어 해설했다"(8-9). <초역 논어>는 협력, 관계, 무욕, 화합, 부하의 자세, 상사의 자세, 리더의 조건, 배움의 의미, 배움의 방법, 성공의 요소를 주제로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설은 쉽고 간결하다.  아버지에게 "공자 왈", "맹자 왈" 하며 들었던 <논어>는 내게 '옛 이야기' 같은 책이었는데, <초역 논어>로 읽으니 <논어>가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된다. 몇 가지 메모를 해둔 가르침이 있는데,

 

자유가 말하기를, "군주를 섬길 때 말이 잦으면 반드시 욕을 보며, 친구를 사귈 때 말이 잦으면 사이가 멀어진다." <제4편 이인>

"너무 많은 관심, 조언, 충고 등은 때로는 인간관계에 있어 독이 된다"는 것이다(53).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의 의(義)를 깨달았고 소인은 이(利)를 깨달았다." <제4편 이인>

저자는 제너럴모터스의 사례를 들어 이렇게 풀이한다. '미국의 자존심'이라고까지 불렸던 제러럴모터스의 도산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 제너럴모터스의 부활을 이끈 사람은 밥 루츠 부회장인데, 그는 제러럴모터스의 주가가 폭락한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숫자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최고의 차를 만드는 전문가를 조직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위기가 찾아왔어요.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로 고객에게 봉사해야 할 기업이 가격 절감과 영업 이익을 높이는 데에만 몰두했습니다"(61). 책으로 읽을 때는 모두 이러한 가르침을 긍정하겠지만,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이러한 어리석음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풍조가 안타까울 뿐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하지 말고 자기의 능력 없음을 근심하라." <제14편 헌문>

저자는 발명한 에디슨의 말로 이 구절을 풀이한다. "바쁘게 움직인다고 해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의 목적은 결과를 창출하고 실제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 조사, 계획을 통해 고안한 방법, 정보, 명확한 목표,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그저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하는 것이 아니다"(105).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후배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조언 중 하나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가르치지 않은 백성을 싸우게 하면 그것을 버리고자 함이다" <제13편 자로>

"교육과 학습은 공자가 언제나 통치의 기본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127). 사실 많은 곳에서 인재 양성의 중용성과 필요성을 이야기하지만, 실생활에서는 '준비된 사람'을 원하지 사람을 키우려고 하는 조직이 드물다.

 

 

인의 정신을 갖춘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능력을 키워준 뒤에 자신의 능력을 키운다. 이처럼 자신의 처지에서 남의 처지를 유추하고 이해하는 것이 인의 올바른 방향이라 하겠다.

 

(대체로 인자는 자기가 나서고 싶으면 남을 내세우고, 자기가 발전하고 싶으면 남을 발전시킨다. 가까이 있는 것에서 남을 이해한다. 이것이 인이 가야 할 방향이라 하겠다.) <제6편 옹야>

저자는 "자기 생각에 망설임이 없고(충) 타인에게 공감하는(서) 것, 이 두 가지가 공자의 핵심적인 가르침"(41)이라고 한다. 지당하신 말씀이고, 옳은 말씀이지만, 실제 생활에 적용해보면 참 쉽지 않은 가르침이다. 다시 읽어보자. "인의 정신을 갖춘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을 돋보이게 해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키워준 뒤에 자신의 능력을 키운다"고 하는데, 이런 자세로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기는 해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물으면 솔직히 자신이 없다. 머리로는 들어가는데 실천으로는 글쎄, 모르겠다.

 

<초역 논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고전이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책이다. 그만큼 쉽게 읽힌다. 그러나 그 간결하고 단순해 보이는 가르침을 가만히 음미해보면, 우리가 머리로 끄덕이는 것과 실제 삶(태도)과의 거리가 얼마나 아득하게 먼지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조직생활이 힘든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맥스 루케이도 지음, 윤종석 옮김 / 아드폰테스 / 201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교회는 지금 "예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사순절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고난에 동참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중에서도 최고의 절정은 바로 '십자가'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증인들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었다고! 하나님이 보여주실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최고의 증표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라고! 예수 십자가 외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잘 보여줄 증거는 더 이상 없다고! 바로 그것이 우리를 위한, 아니 나를 위한 사랑의 세레나데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어려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사랑 고백을 하신 것일까요? 좀 더 간단하고, 좀 더 멋진 한 방, 좀 더 빨리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을 보여주셨다면 인류의 역사는 '훨씬', 그리고 '벌써' 행복해지지 않았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 오랜 시간을 들여 예수에 관한 예언을 하고, 세계사에 길이 남을 제국 하나 세우지 못한 초라한 땅에,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예수를 보내, 힘 없는 죄인이 모습으로 그렇게 고통스럽고 처참하게 죽는 '이벤트'를 하셔야 했을까요?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는 바로 이러한 의문에 답을 주는 책입니다!

 

 

  

 

"십자가는 세계 어디를 가나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엉뚱한 선택 아닌가? 고문의 도구가 희망의 물결을 주도하게 되다니. 다른 종교들의 상징물은 한결 밝다. 유대교의 다윗의 별, 회교의 초승달 문양, 불교의 연꽃. 하지만 기독교의 십자가? 처형의 도구를?"(164).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는 그 끔찍한 처형의 도구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십자가 선물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십자가의 선물은 포장지 대신 수난에 싸여 찾아왔다"(20).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는 그를 매단 '십자가' 자체만이 아닙니다. 군병들이 예수의 얼굴에 뱉은 침, 가시 면류관, 군병들이 취한 예수의 옷, 십자가 위해서 예수가 흘린 물과 피, 장례를 위해 드려진 수의 등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였습니다.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은 특유의 절절한 감성, 따뜻한 유머, 탁월한 비유, 정확하게 타깃을 명중시키는 문장으로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물의 의미를 풀어주십니다.

 

"너의 어두운 면을 담당하겠다"는 하나님의 침묵(군병들의 침), "너처럼 될 만큼 너를 사랑했다"는 하나님의 절규(가시 면류관), "너의 잘못을 용서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십자가에 박은 못), "너의 언어로 말하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죄패), "너에게 선택권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결단(두 십자가), "너를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갈보리 길), "나의 옷을 너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희생(순결한 옷을 내게 주시고 내 추한 옷을 입으셨다, 죄의 옷), "나의 임재로 너를 부른다"는 하나님의 초대(찢긴 몸), "너의 아픔을 다 이해한다"는 하나님의 눈물(포도주 적신 해면), "너를 구원한 내가 너를 지키겠다"는 하나님의 다짐(물과 피), "영원히 너를 사랑하리라"는 하나님의 맹세(십자가), "너의 비극을 승리로 바꿔주마"라는 하나님의 싸움(수의), "나는 승리했노라"는 하나님의 선언(빈 무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바로 "너를 위해 한 일"이라는 절절한 사랑 고백이 내 영혼을 감싸 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하나의 죄패가 달렸습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 죄패는 빌라도의 아이디어였습니다(69). 빌라도는 이 "죄패를 통해 유대인들을 위협하고 조롱"하고 싶었습니다. 빌라도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의 결말이 이것이다. 로마인들은 그를 이렇게 처치한다. 이 나라의 왕은 노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이다. 왕이 이렇다면 그런 왕은 둔 나라는 어떻겠는가?"(70)

 

그리고 이 죄패는 세 개의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모든 지나가는 사람은 당대의 3대 주요 언어인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를 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언어 히브리어는 종교의 언어였다. 로마의 언어 라틴어는 법률과 정치의 언어였다. 그리스의 언어 헬라어는 문화의 언어였다. 그리스도는 이 모든 언어로 왕으로 선포되었다"(71). 하나님은 오늘도 이것을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선포하고 계십니다. 바로 이 책,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도 그 언어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 영혼 깊은 곳에서 전율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싶은 그것, 그 한마디 사랑의 말이 내 영혼에 새겨지는 듯해서 말입니다.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는 일방적인 사랑 고백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를 존중하사 영원을 보낼 곳을 선택할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84).

 

한 번이라도 예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전에는 교회를 다녔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제는 교회를 다니지 않기로 결정하신 분이라면, 교회를 다니기는 다니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깊이 느껴지지 않는 분이라면, 신앙을 가지고 싶은데 망설여지는 분이라면, 그 모든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간곡히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를 읽으며 오래 풀지 못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을 하나 얻었습니다! 구약성경을 공부하고, 신구약 중간사를 공부할 때마다 계속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이스라엘)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은 그 하나님의 나라 프로젝트가 실패했음을 보여줍니다. 바벨론 땅에서 구별하여 낸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실패로 이스라엘의 가시적인 국사는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나라도 없는 상태에서 제국들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그 명백을 이어온 유대인들은 정작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책망만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단숨에 메시아 역사를 전개하시지 않고, 그렇게 지리하고 복잡한 구약역사, 신구약중간사를 만들어오신 걸까요?

 

오래 풀리지 않았던 이 해답이 드디어 풀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평생 332개의 서로 다른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이 모든 예언이 한 사람의 평생에 성취될 수 있는 수학적 확률은 얼마나 될까?"(142). 예수 제자들의 죽음(순교)가 예수 부활의 강력한 증거가 되듯이, 구약의 역사는,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강력한 증거라는 것! 그 예수를 믿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토록 오랫동안 수고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이끌어오셨구나 생각하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은 얼마나 세밀하며, 정확하며, 또 얼마나 깊은 것인지 그 깨달음의 감격을 이루다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오래 전, 친구에게 전화가 왔었습니다. 열 일곱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친구, 스무 살에 만난 연인과의 이별, 불안의 청춘의 열기,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허기가 너무 크고 깊었던 친구의 신음소리를 듣고 당장 달려나가 이 책을 샀습니다. 예쁘게 포장하여 보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 내가 큰 위로가 이 책에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감격, 그 소리 없는 사랑 고백의 절절함이 친구에게 전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2013년 '아드폰테스'를 통해 다시 출간된 이 책을 보니 그 날의 간절했던 기도가 다시 생각납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이 읽혀지기를, 그리고 나와 같은 감동과 전율이 전해지기를!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고 자부하는 제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3대 명저로 꼽는 책이 있습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예수님처럼>, 그리고 바로 이 책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비웃는 분들도 많고, 비판하는 분들도 많고, 신화라 치부하는 분들도 많지만,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 그것이 제게는 얼마나 생생한 현실인지 모릅니다. <예수가 선택한 십자가>는 모든 사람의 영원(생명)을 결정 짓는 단 하나의 '길'이며, 영원한 '갈림길'입니다. 이 위대하고 엄청난 선언에 '지금' 귀 기울이시기를, 한 번쯤 진지하게 마주해보시기를, 이 중요한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자가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선희 옮김 / 예담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유서에 이름이 등장한 네 명은 후지슌의 마음을 일방적으로 등에 짊어진 채, 그 이후의 인생을 걸아가게 되었다"(12).

 

 

처음엔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왕따"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학교를 다녀 다행이다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갈수록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따끔거리는 기억 하나가 나를 불편하게 했다. 중학교에서 왕따 당했던 자신의 흑역사가 공개되면 고등학교에서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그래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한 아이의 유서를 읽으며 안타까워했던 날의 기억.

 

<십자가>는 왕따로 괴롭힘을 당했던 한 중학생의 자살 이야기로 시작된다. 작가가 "스스로를 가두고 2주 만에 써내려갔다"는 <십자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한 소년의 죽음을 뒤늦게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의, 그 누구보다 절박했던 작가의 슬픔이 그대로 활자가 된 듯하다. 왕따 문제, 학교 폭력, 청소년 자살, 이런 뉴스가 터져나올 때마다 우리가 해왔던 일은 단지 '경박한' 분노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이런 문제들을 심각한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며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 생지옥 같은 학교를 매일 '의무적' 다녀야 하는 아이들의 고통, 자녀의 고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던 부모의 고통, 아이들만큼이나 설벌한 학교가 힘든 선생님들의 고통을 내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문제"였고, "그들의 고통"이었고, 그래서 나는 "문제야, 문제!" 한탄하고 "쯔쯔쯔" 혀를 차면서도 한 편으로는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다행이다" 안도하며 옆으로 비켜 서 있었을 뿐이다.

 

<십자가>는 한 소년의 자살, "그 이후"를 이야기한다. 느닷없는 현실에 고통을 가누지 못하는 부모, 책임과 변명 사이에선 학교, 무엇보다 그런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모를 친구들(청소년들)의 삶을 보여준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없는 그들의 입장에 감정이 이입되면서, 그것은 다시 자살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한 소년의 안타까운 삶에 대해, 지금도 같은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을 아이들에 대해, 손 내밀어주지 못하는 우리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십자가>의 주인공(화자)은 "그 이후" 친구의 자살을 등에 짊어지고 인생을 걸어야 했던 같은 반 학생 "유 짱"이다. "후지슌"의 사건은 "제물 자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의 유서에 "나는 모든 아이들의 제물이 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후지슌은 특별한 계기나 이유 없이 괴롭힘의 대상으로 "선택"되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다만 선택되었을 뿐이다. 같은 반 친구들은 후지슌을 제물 삼지 않으면 그 괴롭힘이 자신들에게 미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모른 척 했다.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제물된 후지슌의 유서에는 네 명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사나다 유, 나의 절친이 되어주어서 고마워. 유 짱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할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후지슌을 왕따시킨 그룹의 중심 인물이었다. "미시마 다케히로, 네모토 신야. 영원히 용서 못 해. 끝까지 저주할 거야. 지옥으로 가라!" 네 번째는 여학생. 나카가와 사유리. "나카가와 사유리, 귀찮게 해서 미안해. 생일 축하해. 늘 행복하기를 바릴게.">

 

"후지슌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우리의 기나긴 여행의 시작이 되는 것이었다"(73). 유 짱은 후지슌을 한 번도 절친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후지슌의 유서는 일방적이었다. 죽어버렸으니 왜 그랬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후지슌의 "유서에 이름이 등장한 네 명은 후지슌의 마음을 일방적으로 등에 짊어진 채, 그 이후의 인생을 걸어가게 되었다"(12).

 

이의 제목이 '십자가'인 이유는 이 책의 명대사로 꼽힐 만한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혼다의 입을 빌어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을 비난하는 말에 두 가지가 있다고 가르쳐준 사람은 혼다 씨였다. 나이프의 말. 십자가의 말.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 나이프의 말은 가슴에 박히지. 당연히 굉장히 아파. 쉽게 일어나지 못하거나 그대로 치명상이 되는 일도 있어. 하지만 나이프의 말에서 가장 아플 때는 찔린 순간이야"(74). 십자가의 말은 다르다고 했다. 십자가의 말은 평생 등에 져야 하는 말이지. 그 말을 등에 진 채 계속 걸어가야 해. 아무리 무거워도 내려놓을 수 없고 발길을 멈출 수도 없다. 걷고 있는 한, 즉 살아 있는 한 계속 그 말을 등에 지고 있어야 하는 거야"(75).

 

후지슌의 유서는 유 짱에게 십자가의 말이 되었다. 유 짱은 그것을 등에 지고 살았다. 괴롭힘을 당하는 후지슌을 지켜보며 유 짱은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녀석들을 싫어한다면 직접 행동을 취하리라. 부모님께 말할 수도 있고, 선생님께 의논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속마음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유 짱의 속마음은 이랬다. "후지슌이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우리는 무사히 있을 수 있다. 우리는 후지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후지슌은 분명히 우리의 제물이었다. 우리는 후지슌을 제물로 삼아, 우리 자신의 의지로 그 두 사람에게 내밀었다"(18).

 

유 짱이 짊어진 십자가는 아마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이었으리라. 유 짱은 후일 자신이 아버지가 된 후에 후지슌이 왜 자신을 절친으로 불렀는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런 친구의 괴로움을 알면서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것, 그런 그를 원망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후지슌의 가족, 매섭게 몰아세우는 매스컴, 후지슌이 꾸었던 꿈의 흔적,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뭉쳐져 유 짱의 등 위에 얹혀졌다. 평생 지고 가아야 할 십자가가 되어.

 

어쩌면 이 책을 읽은 독자는 작가가 선택한 "유 짱"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일방적으로 독자의 등 위에 이 십자가를 올려 놓는다. 바로 우리가 자살을 하는 청소년들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절친이라고, 바로 우리가 그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있는 장본인이라고 경고의 사이렌을 울린다. "이미" 떠난 그들의 죽음을 등에 지라고 말이다. 그 십자가가 내리누를 때마다, "아직" 손을 내밀 기회가 있을 때, 누군가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우리가 함께 져야 할 십자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지음, 이재형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아이들을 볼 때, 그런 속도로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상상을 하면 오싹해진다. 오랫만에 TV에 나오는 옛 청춘 스타들을 보면 무상한 세월이 쓸쓸해진다. 새치라고 우길 수 없는 흰 머리카락을 발견할 때, 언젠가 부모님과도 이별을 해야 할 때가 오리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때,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는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있다. 해질녘 텅 빈 학교 운동장에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 흘러가는 현재에 대한 초조함이 나를 겁먹게 한다. 여기저기 고장이 났다며 몸이 신호를 보내올 때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들은 더 이상 푸르지 않다는 생각에 기가 꺽인다.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의 치열한 싸움, 이것이 요즘 내가 매달려 있는 과제이다.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우리를 옥죄어 오는 그 '시간'에 대한 고찰이다. 미친 속도로 달려가는 시간의 열차에 타고 있지만 그곳에서 나올 수도 없고 늦출 수도 없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신과 의사 엑또르와 함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게 더 나은가, 아니면 당장 내일, 혹은 머지않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게 더 나은가?"(58) 이런 의문을 품고 말이다.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잃어버린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찾아 헤매는 현대인들을 위한 심리 치유 소설"이라고 소개된다. 얼핏 보면 아름다운 동화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그러나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결코 가볍지 않은 여행이다. 일방적으로 지혜의 말들을 들려주지도 않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단편적인 조치를 취하지도 않는다. 엑또르 씨와 함께 떠나는 시간 여행은 깊은 철학적 성찰이며, 인생과 마주하는 진지한 대화이다.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이 주는 깨우침의 하나는 누구에게나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손목시계의 초침은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지만, 세계 사람들에게 시간은 모두 똑같이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84). 시간에 대한 감각은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느냐 혹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절대적인 체감 온도도 있지만, 상대적인 체감 온도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교(공부)가 지겨운 소년에게 시간은 더디기만 하고, 만일 흥미로운 일을 하고 있다면 시간은 더욱 빨리 지나간다. 이런 경우에는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는 것보다 빨리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이 시간(인생)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을 것이다. "열심히 살다보면 시간은 짧게, 기억은 길게 느껴진다"(74).

 

 

  

현재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철학적 물음 앞에 선다. 어떤 철학자는 존재하는 것은 오직 과거와 미래뿐이라고 한다. 현재에 대해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그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존재하지 않는다(75). 어떤 철학자는 오직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미래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즉시 과거에 속해버리기 때문이다"(108).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독자에게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엑또르 씨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알아챌 수 있다. 엑또르 씨는 매 순간이 과거이자 현재이자 미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니 현재를 살라고 말이다. 인생은 음악과 같다는 이야기가 잔잔한 운율이 되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인생은 채워야 할 무슨 병 같은 게 아닐세. 그보다는 차라리 음악에 가깝지. 어느 순간에는 따분하게 느껴지지만 또 어느 순간에는 아주 강렬하게 느껴지는 음악 말일세. (...) 어떤 음이 자네를 감동시키는 건 자네가 그 이전의 음을 기억하고 그다음의 음을 기다리기 때문이지... 각각의 음은 어느 정도의 과거와 미래에 둘러싸여 있을 때만 그 의미를 가진다네"(223). 이렇게 생각하니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시간도, 또 때로는 휘몰아치듯 흘러가는 시간도 모두 아름다운 하모니로 들려온다.

 

동물들은 미래 속에서도, 과거 속에서도 살지 않기 때문에 자기의 수명을 생각하는 것 같은 여러 가지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129). 엑또르 씨는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려 노력하고, 바뀔 수 없는 것은 그냥 받아들여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분하라"(156)고 조언하며, 시간의 흐름에 대해 너무 자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엑또르는 생각했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게 딱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의 흐름이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 너무 자주 생각하지 않는 게 좋겠어!"(159)

 

어느 날, 문득 "내 삶 전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삶을 마감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 그 삶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고 싶다는 바람이 나를 격한 긴장 속으로 몰아넣을 때도 있을 것이다. 시간을 꽉 채우려고 노력해보지만, 아무리 꽉꽉 채워도 시간은 끊임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곧장 허공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197) 것 같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을 쉬운 말로 바꾼 성경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내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멋지게 잘사는 것은 하늘 아래서 수고한 보람으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비록 짧아도 하나님께 허락받은 것이니, 그렇게 살 일이다. 이것이 인생이 누릴 몫이다"(전도서 5:18). 이 말씀은 다시 이렇게도 번역이 된다. "자기 일을 즐겨라. 내가 관찰해 보니,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생애 동안 먹고, 마시며, 자신이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 행복이요, 적절한 일이다. 그것이 인생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어진 시간의 끝을 알고 있고, 그것을 피할 수 없고, 그 끝을 준비하며 살아야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사는 것보다, '현재'에 충실한 삶, 그것이 엑또르 씨와 시간 여행을 함께 하며 내가 찾은 결론이다. 이러한 깨달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이 주는 교훈은 내면 깊이 아로새겨진다. 요즘 여행 상품들을 보면, '고품격', '실속', '알뜰' 등으로 분류해놓는 경우가 있다. <엑또르 씨의 시간 여행>은 동화 같이 아름다우면서도 진지한 철학적 성찰이 있는 '고품격' 여행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여행에 대한 만족도가 <엑또르 씨의 행복 여행>, <엑또르 씨의 사랑 여행>에 기대감을 높인다. 이 책들도 꼭 챙겨서 읽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주받은 책들의 상인
마르첼로 시모니 지음, 윤병언 옮김 / 작은씨앗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것은 단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413).

 

 

세상에는 모순의 고리를 가진 수많은 이율배반이 존재합니다. 누군가 이율배반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는 광고를 하면서 사원 모집시 평가에 외모 점수를 넣는 기업', '환경은 미래라 주장하면서 도시의 미래를 위해 철새 도래지 위에 공단을 세우는 시장과 기업' 등. 그런데 유럽의 중세시대가 그런 이율배반으로 뒤덮인 시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주받은 책들의 상인>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중세시대의 이율배반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 권력의 암투가 벌어지는 수도원(종교 세력), 신념(선) 때문에 광기(악)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그 배경으로 합니다.

 

<저주받은 책들의 상인>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견주어집니다. '한 권의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지적 스릴러'라는 점 외에도 이 책이 '방카렐라 상' 수상작이라는 것도 그러한 평가를 거들어줍니다. "노벨상을 타려면 먼저 방카렐라 상을 타야 한다"(545)는 말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방카렐라 상' 수상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상의 1회 수상작인 어니스트 훼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그 이듬해에 노벨상을 타게 되면서 생겨난 말이라고 하는데, 움베르토 에코, 존 그리샴, 켄 폴리트, 이탈리의 국민작가 안드레아 카밀레리도 이 상을 받았다고 하니 상의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저주받은 책들의 상인>은 <우테르 벤토룸>이라는 한 희귀도서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우테르 벤토룸>은 천사들을 불러내어 그들의 지혜를 사용할 수 있는 주문이 적혀 있는 책입니다. "비한 힘을 이용하여 절대 권력을 누리려는 자와 이 책을 찾기 위해 유골상인인 이냐시오 다 톨레도를 끌어들인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을 뒤쫒는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책이 숨겨진 장소에 대한 수수께끼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이 책의 주문을 사용하면 정말로 천사들을 불러모아 그들의 지혜를 얻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긴박하게 펼쳐지는 지적 스릴러의 분위기를 고조시켜며,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책의 재미만큼 이 글을 재미있게 쓰지 못하는 제 실력이 아쉽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미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있기 때문인지 그와 같이 묵직한 문학적인 전율과 신선함은 조금 덜 한 편입니다. 긴박한 순간을 풀어가는 반전이나 장치가 미리 미리 준비되어 있어 맥이 좀 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강렬함은 덜할지 몰라도 뒷맛이 개운한 착한 스릴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주받은 책들의 상인>에 등장하는 수도원과 지역은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마치 산티아고 순례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습니다. 추적하는 방향이라든지, 수도원(성당)의 구조나 예술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읽었다면 그 재미가 배가 되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