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리더십 - KBS스페셜, 나를 행복하게 할 리더는 누구인가?
이재혁.KBS 스페셜 제작팀 지음, 서승범 정리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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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행복하게 할 리더는 누구인가?"

 

 

이 책을 읽고 리더에 대한 목마름이 더욱 커졌습니다. 행복 리더십이 구현되는 세계의 사례를 통해 우리를 비춰보니, 우리 사회의 수준이 생각보다 훨씬 "후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2012년은 전세계 주요국가들의 리더가 바뀌는 해입니다. 대선이 당장 석 달 앞으로 다가온 우리나라도 이번 선거가 나라의 운명을 가를 큰 갈림길이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2012년 대선 후보들의 윤곽이 드러난 지금, 누구에게 나의 한 표를 던져주어야 하는지 대선 후보들만큼이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행복의 리더십>은 바로 이러한 때에 "나를 행복하게 할 리더는 누구인가?"를 묻는 책입니다. 신년특집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내놓으며, "21세기 리더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야 한다"(10)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문을 열어줄 다섯 가지 키워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소통, 공감, 정의, 책임, 혁신"입니다. <행복의 리더십>은 이것이 리더가 아닌 팔로어, 선출될 대표가 아닌 유권자가 원하고 공감하는 리더십의 필수요소라고 말합니다.

 

 

 

"일반 국민이 1%의 그들보다 유리한 것은 99라는 숫자다"(147).

 

 

전 세계는 지금 마치 분노로 끓어넘치는 가마솥 같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1%의 탐욕이 세계를 공황에 빠뜨리고도 뻔뻔한 행태를 이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의 탐욕은 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동안 정치, 경제 리더들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시스템과 제도 안에서 합법적으로 용인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정의감이 붙타도 이 현실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합법이기 때문"에 말입니다(144).

 

그러나 뻔한 말이지만, 뻔해서 힘이 되는 한 줄 문장이 있습니다.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과 경제의 시스템을 바꿔가는 것은 둘 다 중요하다. 물론 이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과정에 장애물이 많다는 이유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209). <행복의 리더십>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서 있는 '1인 리더'의 리더십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99%의 팔로어 리더십, 집단 리더십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그러니 경제의 정의를 원한다면 정치 리더십을 바꾸고, 정치 리더십을 바꾸기 원한다면 나의 한 표를 신중하게 행사하라고 일러줍니다. "99%의 정의가 모이면 1%의 정의를 좌우한다. 거꾸로 개인의 정의가 쌓이지 않으면 사회의 정의도 없다"(219)는 따끔한 가르침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생존의 단계를 넘어서면 길은 둘로 나뉜다. 더 많은 소득을 취하는 길과 행복을 찾는 길이다"(319).

 

 

<행복의 리더십>은 말합니다. 지금 세상은, 화려한 정책보다 "나의 고민을 듣고 같이 노력해주는 리더"를 필요로 한다고. "소통, 공감, 정의, 책임, 혁신"이라는 다섯 가지 행복 키워드 중에, 행복의 시작은 "소통"에서 출발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집트의 민주화 시위나 방글라데시의 경제혁명을 가능케 했던 소통(통신)의 위력을 보며, "소셜미디어에 기반을 둔 네크워킹의 힘이 첨단무기보다 강력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단절의 시대가 가고 연결의 시대가 왔다"(59)고 외치는 데도, 여전히 "소통의 도구를 소통이 아닌 전달과 홍보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336)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행복의 리더십>을 읽고 대선 후보들을 다시 보게 됩니다. "사회적 연결을 추구하는 리더"는 누구인가, 변화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변화를 원하는 리더는 누구인가 하고 말입니다.

 

<행복의 리더십>은 우리가 갈림길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생존의 단계를 넘어서면, 즉 "오늘과 내일의 끼니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면 선택의 순간이 찾아"(229)오는데, 지금 우리가 그 선택의 순간에 서 있다고 말입니다. 계속 곳간을 채우는 쪽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곳간을 더 채우지 않고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인가.

 

1%의 탐욕에 들러붙어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든든한 기반은 우매한 백성이고,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힘 없는 백성의 연결이 아닐까싶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매한 백성을 이끌어줄 '하늘이 내린 리더'만 목빠지게 기다려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백성이 스스로 깨쳐 일어나지 않는 한 수치와 모욕의 억압의 역사(삶)는 계속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행복의 리더십>은 하늘이 내려준 진짜 힘은 힘 없는 백성들이 가진 작은 이야기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단지 남보다 더 배부른 인생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에 대한 보람을 찾고 옳음을 따라가려는 힘 없는 사람들 속에서 희망을 다시 찾아보고 싶습니다. "일반 국민이 1%의 그들보다 유리한 것은 99라는 숫자다"(147)라는 말을 우리 스스로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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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
존 도커 지음, 신예경 옮김 / 알마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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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genocide), 특정 집단을 완전히 없앨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집단 학살하는 행위(8).

 

인간 이성이 밝아져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고, 과학이 주도하는 현련한 문명을 자랑하는 인간 사회에 왜 아직도 이처럼 잔혹한 폭력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동물의 세계"를 TV로 시청하는 것보다 더 놀랍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인간의 폭력이 역사이며,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폭력성의 단면들이다. <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의 저자 존 도커는 이러한 폭력이 인간사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라고 말한다. 인간이 역사는 폭력으로 물든 역사이며,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앞으로도 잔혹한 폭력의 역사는 계속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은 이렇게 인간사에 자행되고 있는 폭력 현상을 규명해보고자 하는데, 개인 간의 사적인 폭력이 아니라, 집단 간의 폭력을 연구 주제로 삼고 있다. 존 도커의 이러한 연구 성향은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미국의 법학자이자 역사가인 라파엘 렘킨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렘킨은 '제노사이드'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학자로 제노사이드 연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존 도커의 연구가 가진 차별점은 인간사에 드러나는 인간사의 집단 폭력 현상을 "역사를 충분히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 보았다는 것이다(9). 저자는 폭력사를 연구하는 흐름이 "지나간 역사를 충분히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계몽주의의 본질적 특성으로 추정되는 요소들이나 유럽 제국들이 재패한 19세기의 시대상에서" 찾으려는 연구 성향을 비판한다. 집단 폭력이 발생하는 이유와 발생하는 형태를 마치 그 시대만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규정지으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먼 과거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 대량학살의 역사 '홀로코스트'를 "정부가 주도한 대량 살인"으로만 보는 것은 "그 의미를 축소하여 정의"하는 경우이다. 인간사의 폭력성은 어떤 특정 집단의 두드러진 특징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인간 행동의 고유 특성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류에게 제노사이드가 끊이지 않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연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인간이 "폭력"을 경험하게 되면 윤리 의식이 저하된다는 주장이다. "투키디데스는 제국주의 통치가 시작되면, 특히 제국의 권위에 반항하는 세력을 제압하면 속국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자국 사회 내에서도 윤리의식이 저하한다고 암시한다. 고대의 투키디데스와 현대의 아렌트가 상기시켜준 윤리적 타락이 바로 이 책의 주제라 하겠다"(31). 저자는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한 예로 이를 설명하는데, 새로운 속국을 쟁취하고 나면 승리를 거둔 국민들에게는 특정한 가치관이 형선된다. "여기서 말하는 가치관이란 탐욕, 욕심, 오만 그리고 자신의 본모습마저 기꺼이 저버릴 수 있는 마음이다(79). 새로운 속국을 쟁취한 승리 국가의 국민들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급격히 하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폭력을 통해 얻게 되는 명성, 이익 등이 잔혹한 폭력의 결과를 "기쁘게"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전으로 읽는 폭력의 기원>은 침팬지 사회에서 제노사이드를 발견한 제인 구달의 텍스트에서부터 그리스 로마 시대의 도덕철학 및 정치철학 저작물, 그리고 성서의 출애굽기, 여호수아, 사사기까지 두루 살핀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는, 출애굽기의 서사는 "신의 명령에 따라 정복되고 찬탈될 약속의 땅에 이미 거주하는 가나안족을 타도하거나 심지어 몰살하겠다는 전제로 한 민족에게 자유를 불어넣는 비전을 제시한다"(176)는 해석이 문제가 없어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폭력의 관점에서 성서라는 텍스트가 어떻게 역사적으로 해석되는지를 읽는 시간은 유의미했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해도 '수준'이 맞지 않는 책이 있다. 아무리 눈으로 글자를 읽어도 그 의미가 명쾌하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책을 "어렵다"고 말한다면, 이 책이 내게는 그렇게 어려웠다. 눈으로 글자는 따라가는데, 저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직선으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할까. 그 의미를 머릿속에서 재해석하는 과정이 내게는 어렵고 지루했다. 이것은 책의 수준이 아니라, 독자의 수준이 미천한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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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도, 죽어야 다시 사는 길
그렉 로리 지음, 김진선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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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사람들을 안락한 신앙의 자리로 부르시는 게 아니었다. 절대적이고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셨다. '제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셨다"(95).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는 안전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제자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참 대답하기 힘든 질문입니다. 자신 있게 대답하고 싶은데 말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도'에 관한 책이 많이 출판되고,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성의 목소리가 높다는 뜻이기도 할 겁니다. 누구의 비판이 있기 전에, "본래적 의미가 제거된 십자가"(99)를 목에 걸고 추구해온 안락한 신앙의 자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의 영적 감각이 먼저 감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할 때라는 외침이 들려온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증거로 삼고 싶습니다.

 

공부를 할 때, 기초가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특히 수학이나 영어처럼 하루아침에 정복할 수 없는 과목일수록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제자도, 죽어야 다시 사는 길>은 신앙생활의 기초(기본)를 다져주는 책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성경적 토양에 신앙의 뿌리를 단단하게 박아줍니다. '제자도'라는 특정한 길을 내주는 것이 아니라, 신앙은 생활이고, 제자도의 길은 바로 그 생활 전반 속에 있음을 다시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말씀생활, 기도생활, 교회생활, 전도까지 신앙생활의 기초부터 폭넓게 다루는 자상하고 친절한 안내서입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제자도'는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같이 걷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된 '따르다'는 '같은 길을 걷다'라는 뜻의 헬라어에서 파생한 단어다"(54). 그런데 그 길을 가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길은 안락한 길, 편안한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렉 로리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제자가 되고 싶다면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자신을 따르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게 하고자 형벌과 버림받음의 경멸스러운 상징을 선택하셨다. 십자가가 상징하는 건 한 가지다. 바로 죽음이다"(99).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끄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른다는 뜻입니다(100). 그렉 로리 목사님은 매서운 충고를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가르침은 오늘날 교회에까지 만연한 자기 사랑의 거대한 물결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101). 이 한마디가 제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모든 몸부림이 '자기 사랑'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깨달음이 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지배 당하지 않고 새 삶을 살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데, "그 능력은 모방이 아니라 참여에서 온다"(299)고 말씀합니다. 처음 신앙을 가지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결심했을 때,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린다는 고백을 참 많이 했습니다.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이었지만, 그때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몰랐던 것 같습니다.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지 못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제가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이끌고가겠다는 의지를 내려놓고,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마음에 부딪혀 옵니다. 내가 쥐고 있는 내 인생의 방향키를 이제야 온전히 내려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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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연어낚시
폴 토데이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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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하니까 믿는다"(크레도, 크비아 임포시빌레 에스트, 404)

 

 

불가능한 꿈! 그런 꿈을 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대통령이 되겠다, 과학자가 되겠다 하는 그런 꿈말고, 투명인간이 되겠다든지, 공간이동을 하겠다든지, 무지개를 타보겠다든지, 아니면 이 책의 주인공처럼 사막에 연어낚시터를 만들겠다든지 하는 꿈말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이런 꿈을 꾸는 친구를 '돈기혼테'라고 부르는 낭만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불가능하다면 아예 꿈을 꾸어볼 시도조차 하지 않는 듯합니다.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이 지독히(!) 현실적인 계획을 세워놓고 그게 꿈이라고 말할 때마다,'그런 걸 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씁쓸해지곤 합니다. 불가능하더라도 우리 마음을 뜨겁게 달궈놓을 수 있는 그런 꿈 하나 품고 살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불가능하니까 꿈이죠! 안 그렇습니까?

 

여기 불가능한 꿈을 꾸는 거부가 한 분 있습니다. 예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석유로 재산을 모은 게 분명한 '모하메드' 족장은 그의 고국에, 그러니까 사막 한 가운데에 연어가 뛰노는 강을 만들겠다는 '엉뚱한' 꿈을 꿉니다. "족장은 자신이 돈을 충분히 쓰면 예멘 우기 때 연어가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에게는 큰일을 해낼 수 있는 의지와 돈이 있었"습니다(134). "내 국민 모든 계층, 모든 종류의 사람이 강둑에 나란히 서서 연어를 잡는"(74) 모습이 그의 마음속에서는 선명한 확신으로 들어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멘 수로에 스코틀랜드의 살아 있는 연어를 갖져다줄 영국 어류학자에게 큰돈을 쓰고 싶어했습니다. <사막에서 연어낚시>는 이 엉뚱한 꿈을 꾸는 모하메드 족장과 그의 일을 돕는 부동산 컨설턴트 회사의 해리엇, 그리고 영국 국립해양원의 어류학자 존스 박사가 '터무니없고 위험한 연어 프로젝트'를 완성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사막에 연어낚시터를 만들겠다는 프로젝트를 위해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많은 과학적 연구를 해야 하는지, 어떤 생태 모형을 구축해야 하는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예멘 수로의 용존 산소량을 어떻게 측정해야 하는지, 세균 표본은 어떻게 조사해야 하는지" 최고의 과학 지식과 기술이 총동원되고, 천문학적인 돈이 쏳아부어집니다. 거기에 이 엉뚱한 프로젝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이 연어 프로젝트가 이슬람의 종교와 문화를 침범한다는 이유로 모하메드 족장을 암살하려는 계획이 세워지고, 스코틀랜드 물고기가 사막에서 뜨거운 열기에 말라 죽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저항이 생겨나고, 각종 언론은  이에 대해 저마다의 논평을 쏳아냅니다. 한마디로 '진지한' 촌극이 벌어집니다.

 

불가능한 꿈이 한 축이라면 대립각을 세우는 축의 꿈은 이성적인 꿈, 실현가능한 꿈, 정상적인 꿈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책을 읽어갈수록, 오로지 승진과 성공을 위해 빈틈없는 계획을 세워놓고 전력질주하는 메리의 꿈(존스 박사의 아내), 존스 박사가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공을 자기의 것으로 가로채려는 서그든의 꿈(국립해양원 소장), 성공한 정치가라 자부하며 연어 프로젝트를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꼼수를 피는 맥스웰의 꿈(수상관저 홍보실장)이 더 비정상적이고, 더 비뚫어지고, 더 한심하게 보이는 건 왜일까요.

 

<사막에서 연어낚시>의 결말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예상을 빗나가는 결말이라는 듯입니다. 인간 사회의 한 단면을 비꼬듯 꼬집는 풍자가 일품이지만, 이야기의 메시지는 훨씬 따뜻하고 생생합니다. 지구촌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짜 비극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꾸어야 진짜 꿈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존스 박사와 해리엇이 연어를 풀어놓을 건곡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전자를 이고 손에도 무언가를 들고" 있는 소녀가 다가옵니다. 수줍게 웃으며 짧막한 인사를 건넨 소녀는 그들에게 시원한 물과 빵 한 조각을 대접합니다. "소녀는 낯선 두 사람이 뜨거운 햇살 아래서 걷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것이 그곳의 전통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믿음 때문"(286)입니다. 존스 박사와 해리엇은 "성서에 나오는 장면" 같은 그 단순한 상황에서 경이로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런일이 가능할까요?"

 

그들은 둘 다 머리를 흔듭니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모르는 사람이 목 마른 사람에게 물을 준다면 의심을 받거나 사악한 동기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우리나라에서 누군가가 그 소녀처럼 다가온다면 머리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거나 구절하는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딱딱하고 불친절하게 대하거나 무시할 테고, 심하면 무례하게 굴 것"(286-287)이기 때문입니다.

 

모하메드 족장처럼, 그리고 이 장면의 소녀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믿음"대로 사람이 우리 주변에, 이 사회에 과연 몇이나 될까요? 잘못된 길인줄 알면서도 가고, 이 길이 아닌 것 같은 의심이 생겨도 가고, 방향을 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도 모두에게 떠밀려 그 길을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가 가진 과학적 지식과 상식으로 연어 프로젝트가 "터무니 없고 위험한 프로젝트"라고 평가했던 존스 박사가 모하메드 족장의 믿음에 동화되고, 소녀가 대접해준 그 시원한 물에서 희망(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처럼, 어쩌면 우리가 불가능하다 낙인 찍어버린 꿈 속에 진정한 삶의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막에서 연어낚시>를 읽으며, 불가능한 꿈을 한 번 다시 꾸어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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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
이케가미 아키라 지음, 오세웅 옮김, 김공회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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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 신자유주의가 닥치면서 경제를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명목 때문에 그런 울타리(노동자의권리를 지켜주는 여러 가지 법과 회사에 대한 규제)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깨닫게 되었지요. 마르크스가 19세기에 말한 것과 똑같은 일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289).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며 알째배기 공기업들을 민영화하려는 정부가 정권을 잡고 있고, 또 잡으려고 혈안이 된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아니 '이제라도' 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듯합니다. 그나마 이런 책을 들고 다니며 지하철 같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버젖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입니다.

 

사회주의가 망했다고 축배를 드는 동안 세계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에 먹히며 말로만 듣던 '공항'의 공포를 다시 마주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금의 사회를 들여다보며 분석하고 비판한 것처럼, 마르크스가 145년 전에 분석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스스로 마르크스의 망령을 다시 불러내고 말았습니다. 복지와 지식인의 역할을 간과했다고 비웃으며 실패로 간주했던 마르크스의 사상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자본주의 스스로 증명한 셈입니다. <자본론>을 다시 꺼내든 이 책의 저자 이케가미 아카라는 "자본주의가 이긴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내세운 나라들이 스스로 쓰러진 것뿐"(26)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문제는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한 러시아는 당시 자본주의가 거의 발달하지 않은 가난한 봉건국가였고,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이 노동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사상을 추종하는 일부 지식인이었다는 것입니다(43).

 

<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은 한 학기 강의노트처럼 정리되어 있습니다. 총 16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본론>의 문장을 직접 인용하여 주석하는 방식으로 자본론에서 말하는 주요 쟁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합니다. 화폐가 어떻게 자본으로 바뀌는지, 끊임없이 불어나고 싶어하는 자본의 욕망과 인간의 탈을 쓴 '돈'이 어떻게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지, 왜 자본가는 자연스럽게 잔인한 경향을 갖게 되는지 등 마르크스가 밝힌 자본주의의 시스템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해석해줍니다.

 

"돈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잔인하면서도 서글픈 삶의 한 단면을 다시 보았습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도, 사회에 해가 되는 것들도 얼마나 만들 수 있고, 어떤 불법적인 행위도 서슴치 않으며, 당장 이득이 된다면 이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쓰지 않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뒷일은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사고 방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또 그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통장 잔고를 보며 인생 계획을 세우는 저도 여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노동자의 입장이 아니라 자본가의 입장이었다면 반응이 달랐을까요.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모순, 미국의 월마트처럼 글로벌한 거대 자본 아래서 세계인이 빠르게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 앞에 무기력감을 느낍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에 의해 세계가 움직였고 새로운 역사가 잉태된 것처럼, 세계는 또 한 번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게 될까요. 아니면 자본가가 쥐어주는 사탕에 만족하며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계속 될까요. 마르크스는 우리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고 하였지만, 금사슬에 길들여진 우리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조금 더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착취 당하는 자들에게 꼭 필요한 '적극적 연대'에 회의가 생기기도 합니다.

 

<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은 혁명을 선동하는 책은 아닙니다. 세상을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냉정하게 들여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마르크스의 뜨거운(?) 성정에 비해 동화책(?)을 읽어주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 때문에 이 책이 조금 싱겁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본론을 읽다 포기한 독자라면, 자본론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독자라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요점이 귀에 쏙쑥 들어오게 설명되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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