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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먼 여행 ㅣ 아시아 문학선 2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7월
평점 :
"우리는 다만 아시아의 수많은 언어가 제각기 품어 온 기억의 서사들을 존중하려 할 뿐이다"(아시아 문학선 기획위원회, 566).
지금은 우리 곁을 떠난 장영희 교수님이 청춘들에게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문학은 나와 남이 결국은 같다는 것, 인간적인 보편성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나와 남은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통로가 바로 문학인 셈이지요"(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中에서). 인도 작가의 <그토록 먼 여행>을 읽으며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이 이것이었다. '내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나와 남은 결국 같구나' 하는 것 말이다. <그토록 먼 여행>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와는 시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먼' 곳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토록 먼 여행>에 잠겨 있는 내내, 인생이라는 먼 여행을 하는 동안 부딪히게 되는 그들의 기쁨, 아픔, 슬픔, 갈등 들이 내 것처럼, 내 것으로 젖어 들었다. 지금 한창 열기가 뜨거운 올림픽 화면 속에서 인도인이라도 보게 되면 어쩐지 따뜻한 인사라도 건네며 응원의 말 한마디라도 전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장영의 교수님은 우리가 읽어야 하는 문학의 힘에 대해 이런 말씀도 하셨다. "저마다 서로 경쟁하고 자리싸움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들여다보면 사는 모습이 거기서 거기이니 인간적인 보편성을 찾아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화합하고 서로 기대로 사랑하며 살아가라고 가르치는 것, 바로 그것이 문학입니다." <그토록 먼 여행>을 읽으며 참으로 오랫만에 내가 문학을 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먼 여행>은 (내 동생처럼) 순전히 재미로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기 어려운 책이다. <그토록 먼 여행>의 이야기는 극적 긴장감도 없다. 흥미진진한 재미도 없다. 스펙터클하지도 않다. 전개는 더디고, 내용은 일상적이고, 화면은 잔잔하다. 그런데 이 잔잔한 이야기가 자꾸만 마음을 잡아끈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 힘이 더 세진다. 차분하게 번지는 소리 없는 파문이 마음을 울렁이게 한다.
"잠은 그에게 행복이기보다 근심이 증폭되고 초점 없는 야릇한 분노가 끓어오르며 무기력해지는 시간일 뿐이었다. 탈진상태로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그는 또다시 밝아 오는 하루를 저주하곤 했다"(25).
언젠가 나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잠들기 싫었고, 잠들면 다시 깨고 싶지 않았던 날들. <그토록 먼 여행>의 주인공 구스타드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큰 서점을 운영하셨던 아버지의 몰락으로 함께 몰락해버린 그의 청춘과 꿈. 그러나 그는 이제 그때 그 시절의 자신만큼 푸르른 열아홉 살의 아들(소랍), 자신의 근육질 체형을 닮은 열다섯 살의 아들(다리우스), 그리고 귀여운 아홉 살의 꼬마 딸(로샨),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내(딜나바즈)의 행복을 책임지고 있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그토록 먼 여행>은 인도 붐베이에 사는 인도 파르시(페리스아 계통의 조로아스터교도)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1971년 즈음의 이야기이다. 1971년 인도에서는 "동 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둘러싸고 제3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던 때이다. 구스타드 가족의 지극히 일상적인 삶은 그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우리는 <그토록 먼 여행>을 읽으며, 역사라는 큰 줄기 어느 한 틈새를 메우고 있는 한 가족의 일상을 촘촘하게 들여다보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 그들과 연결된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소랍이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마도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그도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지금 아버지에 대해서 그런 것처럼 말이다. 기억은 항상 모든 것을 잃어버린 후에야 시작된다"(343).
한 세대가 가고 그 세대가 남겨준 가난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구스타드는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지신의 자녀에게만은 그 짐을 물려주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언제나 기쁨과 자부심이 되어 주었던 큰 아들 소랍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꿈을 좇으려 한다. 둘째 아들 다리우스는 하필이면 가장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의 딸을 좇아다니고, 귀여운 꼬마 로샨은 자꾸 아파 아버지를 걱정시킨다.
아이들의 자신의 가장 큰 행복일 때마다, 가장 큰 아픔일 때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어머니를, 또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구스타드의 기억 속에 재생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그러한 삶을 살다간 그 사람'이 구스타드의 아버지요, 어머니요, 할아버지였다. 구스타드는 궁금했을까. 자신의 인생이 자녀의 삶에 어떤 기억으로,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가.
"태양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고, 비로소 태양의 하루 여행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러한 달콤하고도 씁쓸한 기쁨 때문에 구스타드는 살면서 중요했던 것들이 생각났다"(376).
구스타드는 하루 시간을 내어 딸의 건강과 암 때문에 생명이 꺼져가는 친구의 통증이 줄어들기를, 그리고 소랍의 분별력이 돌아오기를 기원하기 위해 성모산에 오른다. 그리고 돌아오기 전, 홀로 바닷가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다 알 수 없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뭘까? 기쁨? 아니면 슬픔?" 그리고 그곳에서 살면서 중요했던 것들을 하나씩 기억해 내기 시작한다. "가구 공장의 경쾌한 공구 소리와 하루 일과가 끝난 후의 침묵. (...)" 그리고 아버지의 파티에 있었던 훌륭한 음식과 음악, 옷, 사람들, 장난감들. 그 옛 기억들과 함께 "눈물이 그의 두 눈을 뜨겁게 적셨다"(376-377).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신을 부여잡고 아뢰는 간절한 바람과 평온한 자연의 경계에 서서, 잃어버린 후에야 알게 된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며 홀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구스타드. 한순간 그를 사로잡았던 그 "알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도 나도 그를 따라 울었다.
"이토록 긴 여행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 어떤 여행이라도 고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423)
구스타드는 친구 '딘쇼지'를 떠나보내며 생각한다. "딘쇼지도 얼마나 먼 여행을 했던가." <그토록 먼 여행>은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먼 여행을 했던가, 그리고 나는 지금 얼마나 먼 여행을 하고 있나 묻고 있는 듯하다. 사고로 바보가 된 '테물'을 보며 "그에게 인간의 모든 권리와 가치를 되돌려 주고 싶"어 했던 구스타드처럼(494), <그토록 먼 여행> 이야기를 하는 작가는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 그중에서도 소중했으나 소중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사람에게 그의 권리와 가치를 되돌려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길가의 화장실이 사원이 되고 사당이 되며, 사원과 사당이 먼지와 폐허가 되는 세상에서 어디로 가느냐가 중요하겠습니까?"(550)
"어디로 가느냐" 묻는 구스타드에게 거리의 화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삶은 여행이고, 얼마를 살았든 삶의 여행은 물리적인 시간과는 관계 없이 그토록 먼 여행이고, 그 아득한 여행길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럼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느닷없이 날아온 벽돌 하나가 나의 삶을 완전히 박살내버릴지도 모르는 세상 속에서도, 때로는 충격과 수치심이 우리를 덮치고, 신뢰와 우정이 우리를 배반하고, 소중한 것들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어도, 구스타드처럼 우리도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늙은 카바스지처럼 하늘을 꾸짖으며 항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묵묵히 갈 길을 갔다"(512).
<그토록 먼 여행>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테물을 위해 흘리는 구스타드의 뜨거운 눈물에서, 두려움과 존경심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는 소랍에게서, 구스타드가 중국과 전쟁이 벌어졌던 9년 전에 창문과 환기창에 붙여 놓았던 검은색 등화관제용 종이를 걷어내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정치적, 사회적 소용돌이 한복판에 이름 없이 살아가는 한 가족의 소소한 이야기가 나에게 선사한 해준 것은 '삶의 경건성'이다. 삶의 경건성은 역사의 위대함 속이 아니라, 그 역사의 틈새를 촘촘히 메우고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일상성 속에 있었다. '그토록 먼 여행'은 오고 오는 세대로 이어지며, 우리는 각자 뜨거운 투쟁을 하다 소리 없이 사라지겠지만,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우리의 존재와 삶이 한없이 쓸쓸하고, 그 뜨거운 투쟁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어서 더 괴롭겠지만, 그 속에서 비록 한순간이나마 진실했던 우리의 사랑과 서로를 위한 눈물이 계속 그 길을 가게 해줄 것이다. <그토록 먼 여행>은 그 진실한 사랑과 서로를 위한 눈물의 가치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땅에 비루한 인생이란 없으며, 진실한 사랑과 서로를 위한 눈물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떤 인생 앞에서도 겸손히 고개를 숙이며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